로마서의 말씀은 바울 사도가 로마에 있는 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쓴 편지인데요. 바울 사도하고 로마 교회 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바울 사도가 세운 교회도 아니었고요. 바울 사도가 한 번이라도 방문했던 교회가 아니라 전혀 모르는 교회입니다. 한 번도 연관성을 가져보지 않았던 교회가 로마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는 이 로마 교회에 대해서 많이 들었을 것 같아요. 특별히 바울의 동역자 중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라고 하는 사람들은 로마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다가 로마 황제가 유대인들을 쫓아내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그 로마에서부터 빠져나와야만 했었고, 그래서 바울 사도를 만나게 되어서 함께 사역을 한 그런 부부였는데요. 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통해서 로마 교회에 대한 소식들을 많이 들었지만, 그러나 정작 로마 교회, 로마 교회 성도들하고 바울 사도하고 어떤 직접적인 연관이 전혀 없는 겁니다. 바울 사도가 세운 교회도 아니고 바울 사도를 후원하는 교회도 아니고, 바울 사도가 한 번이라도 방문했던 교회가 아닌 거죠.
하지만 놀랍게도 바울 사도는 로마서라고 하는 이 편지를 써서 로마 교회에게 보내고 있는데요. 그렇게 보낸 편지가 바로 로마서입니다.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도 왜 이렇게 편지를 보내는 걸까요? 이렇게 보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한 번도 연관이 없었지만, 다 같은 형제자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피를 흘려주시고, 그래서 우리를 영원한 죽음 가운데서 살림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다 하나님의 가족이 된 거죠.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한 번도 직접적인 관련을 가져본 적이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믿음의 식구라고 하는 그 근거 때문에, 이렇게 편지를 보낼 수가 있는 것이죠. 우리들은 어느 곳에 가면 믿음의 성도들을 만나면 마음이 참 그렇게 좋아요. 한 번도 전에 교제해보지 않았어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어도, 같은 믿음을 가지고 같은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그런 사람들을 만날 때, 마음이 편해지고, 마치 오래 만난 사람들인 것 같고, 그래서 마음이 편한 느낌을 봤습니다. 그런가요? 그렇습니다.
최근에 당근을 통해서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요. 당근을 거래하기 위해서 갔더니, 어떤 분이냐면, 어느 교회 권사님이세요. 말씀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나 보니까 권사님이에요. 그래서 이야기를 하는데, 한 번도 전에는 만나본 적이 없고, 한 번도 전에는 교제한 적이 없었지만,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서로 이야기하고, 어느 교회 다니냐고 이야기하면서 그렇게 마음이 확 열리는 것 같아요. 우리 교회 예배에 참여하는 분들이 계신데, 그분들이 한 번도 우리 교회에 나와 본 적이 없었고, 지나가다가 여행 중에 우리 교회를 들어온다고 할지라도, 마음이 열리고 함께 예배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라고 하는 그 사실 때문에, 그래서 마음이 열리게 되는 것이고, 마치 오래된 식구처럼 오래된 성도처럼 같이 마음을 열고 교제할 수가 있는 것이죠.
바울 사도도 역시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바울 사도는 저 아시아에서 그리고 유럽에서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 로마 교회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었고, 그리고 그 로마 교회를 향해서 이렇게 편지를 써주고 있는 것이죠. 로마서의 많은 내용들을 지금까지 우리가 쭉 살펴보아왔는데요. 오늘 읽은 말씀은 로마서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말씀입니다. 이제 로마서를 끝낼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로마서의 마지막 부분에 오늘 읽은 말씀은 어떤 내용을 쓰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 읽은 내용 아마 읽으면서 어떤 내용인지 대략적으로 이해하셨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마는, 오늘 읽은 말씀은 오늘 읽은 부분은 바울 사도의 앞으로의 일정이 어떤지에 대해서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할 예정이다. “나의 선교 여행 계획이 어떻게 된다”라고 하는 자신의 일정을 설명해주고 있는 내용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15장 22절에서부터 29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제가 그 내용을 간단하게 한번 요약해 보았습니다.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가운데, 첫 번째 메시지는 무엇이냐 하면, 나는 로마를 방문하고 싶었으나, 번번이 그렇게 하지 못했고, 늘 실패했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로마서 15장 22절에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 교회를 방문하고 싶었어요. 한번 가보고 싶다. “로마 교회를 방문하고 싶다”라고 하는 그런 마음이 있었는데, 그 일이 계속 번번이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그 성사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왜 바울 사도는 가면 될 텐데 왜 못 갔을까요? 지난 시간에 읽은 말씀 가운데 힌트가 들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바울 사도가 가지고 있었던 하나의 원칙 때문이었습니다. 그 원칙이 지난 시간에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로마서 15장 20절에 기록되어 있는데요. 로마서 15장 20절에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바울 사도의 원칙이 있었어요.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내가 어디 가서 사역할 것인가? 내가 어디에서 복음을 전할 것인가?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지역에 먼저 가겠다는 겁니다. 이미 복음이 들어간 곳보다는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곳에, 먼저 가서, “거기서 먼저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라고 하는 하나의 원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든 이 원칙이 오늘날의 모든 사람들에게 다 적용되는 원칙은 아닐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적어도 바울 사도는 그런 원칙을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해야 되는데, 이쪽을 갈 것인가? 저쪽을 갈 것인가? 비교해 보았을 때, 여기에는 성도들이 몇 명 있고, 여기에는 아무도 없다고 한다면, 바울 사도는 어디로 가요?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바울 사도의 마음 가운데, 로마 교회를 방문하고 싶었지만, 바로 앞에 전혀 복음을 듣지 못한 마을이 있으면 거기를 먼저 간 거예요. “다음 주에는 로마를 가야지” 생각했다가도, 다음 주에 보니까, 여기에 전혀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 있으면, 거기로 가서 복음을 전한 겁니다. 그러니까 바울 사도가 로마를 가고 싶었지만, 로마 교회에 가서 거기서 성도들과 교제하면서, 거기서 사역을 나누고, 거기서 예수님께서 나를 통해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 함께 은혜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바울 사도의 마음속에 세워놓는 자신만의 원칙, 내 원칙이 무엇이냐면, “아직 복음을 듣지 아니한 곳에 먼저 가겠다”라고 하는 그 원칙 때문에, 자꾸만 우선순위에서 로마 교회로 가는 것이 자꾸만 밀려버리게 된 것이죠.
오늘 읽은 본문 말씀에서 하고 있는 두 번째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그런데 이제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스페인(서바나)으로 가는 길에 너희를 방문하려고 한다”라고 하는 것이 로마서 15장 23절의 말씀입니다. 이제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이제는 스페인이라고 하는 곳에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고 싶은데, 스페인으로 가는 길에, 로마를 거쳐서 스페인을 가기를 원한다고, 로마서 15장 23절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서, 정말 그런가 아닌가 확인하면서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제 스페인으로 갈 기회가 생겼으니까, 이쪽에서는 이 그리스 지방에서는, 마게도냐 아가야 이런 곳에서는 이제 복음을 거의 다 전했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는 내가 복음을 전한 지역이 하나도 없이 다 전했기 때문에, 이제는 스페인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고 싶은데, 스페인으로 가는 길에 거기 중간에 무엇이 있습니까? 이탈리아가 있잖아요? 로마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가는 길에 로마를 들른 다음에, 그리고 스페인으로 가고 싶다고 23절에서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세 번째는 무슨 이야기를 합니까? 그런데 지금 당장은 예루살렘에 가야 한다는 겁니다. 예루살렘에 가는 일정이 있다. 왜냐하면 마게도냐와 아가야 성도들이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해서 구제 헌금을 했는데, 그 구제 헌금을 전달하는 그 목적을 가지고, 지금 당장은 예루살렘을 가야 한다고, 로마서 15장 25절에서부터 27절까지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 하고 있는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그래서 이 일을 마친 후에는, 이방인들에게서 얻은 그 열매를 예루살렘에게 확실하게 전달하고 난 뒤에는, 이제는 반드시 로마를 방문할 것이다. “내가 너희들을 방문할 것이다”라고 이야기하면서, 그 후에 스페인으로 갈 것이라고 로마서 15장 28절의 말씀 가운데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십니까? 이렇게 해서 바울 사도는 자신의 계획을 간단하게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오늘 본문의 내용을 요약한다면 내가 스페인으로 가는 길에 너희들을 꼭 방문하고 싶다고 하는 방문 의사를 전달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 가운데서 아주 특이한 표현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그것은 바로 로마서 15장 29절에서 표현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로마서 15장 29절에서 뭐라고 표현하고 있냐면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 아노라.” 무슨 이야기입니까? 내가 방문하게 된다고 한다면 빈손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가겠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 말씀을 한번 오늘 우리가 집중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하고 있는데요. 바울 사도가 이 말을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이 있다. 주님께로부터 받은 복이 있는데, 그 복을 내가 가는 곳마다 나누어 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바울 사도가 하고 있는 말은, “여러분, 내가 누군 줄 아세요?” “나는 하나님의 일꾼이에요. 나는 그리스도의 일꾼이에요. 그리고 그 주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영적인 복이 있어요.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이 내게 있는데, 그 복을 내가 이곳에서도 나누어 줬고, 저곳에서도 나누어 주었고, 내가 가는 곳마다, 주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그 복을 나누어 주었었는데, 이번에 내가 로마에 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 그 복을 여러분들에게도 나누어 주기 위해서 가는 것입니다. 나는 그런 영적인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요? 성직자이기 때문에, 성직자가 찾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복을 나누어 주는 것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라고 이해할 수 있을까요?
물론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럴 수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영적인 복이니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고, 그래서 말씀의 사역자가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가르쳐준다고 한다면, 그건 복된 것이오, 그것은 정말 좋은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한국교회 성도들 사이에서는 종종 잘못된 축복관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목회자가 어떤 영적인 권세가 있어서, 일반 성도들과는 다른 영적인 권세가 있어서, 그 목회자가 찾아와서 기도해 주고, 목회자가 찾아와서 축복을 빌어주면, 그러면 그 목회자를 통해서, 성직자를 통해서 내가 복을 받을 수도 있겠다고 하는 그런 생각들을 많이 가지고들 계십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른 성경적인 관점이 아닙니다. 그런 생각들이 언제 있었냐면 중세 천주교가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었어요. 중세 천주교회에서는 신부들이 하나님의 대리자 역할을 해서, 일반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는가? 신부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거죠. 내가 직접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 직접 기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대리자를 통해서 내가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신부를 통해서 내가 축복을 얻고, 성직자를 통해서 내가 복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종교개혁자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그게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게 아니다. 하나님의 복은, 성직자라고 하는, 목회자라고 하는 그 어떤 중간 그룹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간접적으로 전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만인 제사장이라! 모두가 다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다 직접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직접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그렇게 발견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을 일으키게 된 것이죠. 성직자만이 하나님의 특권에, 하나님의 복에 접촉할 수 있는, 접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성직자를 통해서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복을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를 다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셨기 때문에, 자녀라면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마음대로 가서, 그래서 하나님께 간구하고 기도할 수 있기 때문에, 누구든지 직접적으로 하나님 앞에 가서 은혜를 구할 수 있고, 누구든지 하나님께 직접 나가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이지, 그 중간에 목회자나 성직자와 같은 그런 중간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이고 그 성경의 가르침을 종교개혁자들이 깨닫게 된 것이죠.
목회자가 축도를 하기도 하고, 또 축복을 위해서 기도하기도 하지만, 목회자가 어떤 특별한 권능이 있고, 일반 성도들과는 다른 어떠한 영적인 특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목회자가 다니면서 그 축복을 나누어 주거나, 목회자가, 목회자를 통해서, 어떤 신비한 신령한 능력을 가진 목회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이 통해서 전달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종종 목회자들 가운데는, 자신이 일반 성도들과는 달리, 어떤 영적인 축복 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행세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자신이 기도하면 복을 얻을 것이고, 자신이 기도하면 사업이 성공할 것이고, 자신이 기도해 주고 안수하면, 병이 나을 것이고, 그런 일들이 많이 있었다고 하는 것을 떠벌리면서, 그래서 내가 하나님과 아주 친밀한 관계에 있으니까, 하나님을, 내가 하나님께 직통 게시도 받을 수 있고, 내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얘기해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으니까, 하나님은 나를 통해서 일하는 것이니까, “나한테 함부로 까불지 마”라고 이야기하면서, 그렇게 자신이 하나님의 특별한 특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종종 우리 한국기독교회 안에 많이 있습니다. 다 가짜라고 보시면 됩니다. 순엉터리 사이비라고 보시면 됩니다.
성경적인 가르침은 무엇인가? 누구나 다 하나님에게 나아가 기도할 수 있어요. 누구나 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어요. 하나님의 축복은 사람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은 어떠한 특별한 사람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통해서 전달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것의 능력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려야 되는 것이지, 그 사람을 통해서 무엇인가 기적이 나타나고, 그 사람을 통해서 어떠한 축복이 이루어졌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을 높이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 성경 전체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성전으로 기도하러 가는 가운데, 성전 미문 앞에 앉아서 구걸하던 어떤 걷지 못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이 나면서부터 태어날 때부터 걸어본 적이 없는 그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명령했을 때, 놀랍게도 그 사람이 일어나고, 그 사람이 걷게 되는 엄청난 기적이 나타나게 되었을 때, 그 순간에 베드로는 사람들 앞에서 뻐기지 않았습니다. “내가 누군 줄 알아? 내가 이 걷지 못하던 사람을 걷게 만든 그런 능력의 종이야! 내가 불의 사자야! 나한테 잘해. 나한테 까불면 죽어.”라고 이야기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겁박하고, 자신들 앞에 머리를 숙이게 만든 것이 아니라, 사도행전 3장 12절의 말씀에 보면 이렇게 고백합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하고, 내가 기도를 하고, 그래서 무엇인가 변화된 것 같고, 기적이 일어난 것 같다고 할지라도, 나를 바라볼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들렸던 지팡이일 뿐이고, 하나님께서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그런 마른 막대기와 같은 것인데, 하나님께서 역사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려야 되는 것이지, 사람을 주목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라고 하겠습니다.
만일 어떤 목회자가 마치 자신은 어떤 신비한 영적인 능력이 있고, 내가 기도하면 잘 이루어지고, 내가 기도하면 응답이 잘 되고 하면서, 떠벌리는 목회자가 있다고 한다면, 여러 가지 증거들을 대면서 그렇게 한다고 하면, 가짜라고 생각하시고 멀리하는 것이 당연할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바울 사도가 하는 말이 이상한 겁니다. 바울 사도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로마서 15장 19절에 29절의 말씀에,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 아노라.” “내가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가겠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제가 원문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 한번 들여다봤어요. 그랬더니 원문에 이렇게 되어 있더라고요. “가지고”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 안에서, ”엔,“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 안에서, 내가 너희에게 갈 것을 내가 안다.” 내가 간다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 “안에서” 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 ‘안에서’ 내가 너희에게 갈 것을 안다”라고 되어 있었어요. 그러니까 이 말씀은, 바울 사도가 한 말씀은, 하나님께서 내게 충만한 복을 주셨는데, 그 복을 가지고 가서, 내가 너희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말한 것이 아닌 겁니다. 이 표현의 의미는 무엇이냐 하면, 바울 사도가 로마 교회를 방문하게 될 때, 그 만남이 복된 만남이 될 거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로마 교회 성도들과 함께 만나서, 거기서 영적인 교제를 나누게 될 텐데, 그 교제를 나누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충만한 복 안에서 만나는, 그 만남이 될 거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한 것이죠.
바울 사도가 로마 교회에 가서 한 이야기가, 만나서 이야기를 한다고 한다면, 무슨 얘기를 했을까요? 아! 어제 황희찬이 골을 못 넣었더라고! 아! 이강인이 첫 골을 넣었더라고! 그런 얘기를 했겠어요? 오늘 날씨가 덥더라고! 왜 이렇게 더운지 몰라! 날씨 이야기를 했겠어요? 물론 그런 얘기도 할 수 있지만,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은혜를 베풀어 주셨느냐? 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 로마 교회 성도들을 인도해 주셨고,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하는 길에,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은혜를 베풀어주셨는가? 그동안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들을 서로 이야기하면서, 성도의 교제를 하고, 그 성도의 교제를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누리는 귀한 만남이 될 거라고 하는, 그런 의미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같은 믿음을 가진 믿음의 동지들을 만나는 것은 아주 큰 위로와 소망을 얻게 되는 것이죠. 특별히 박해받는 상황 가운데서, 정말 같은 믿음을 가진 성도들이 참고 견디고 인내하면서 믿음의 길을 신실하게 가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큰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것이죠. 같은 질병을 앓아서, 그래서 너무나도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사람들이 만나면,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것이죠. 어려운 일을 당했던 사람들이 서로 만나서,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함께 만나면서, 서로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것인데요. 교회가 무엇인가? 교회는 바로 그러한 영적인 교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누리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어떤 곳인가? 교회는 상처받은 사람들이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부족한 사람들이,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도 나와서 서로가 감싸주고 안아주고, 힘들었지? 아프지? 너무나도 외로웠지? 너무나도 고통스러웠지? 정말 잘 견뎌내고 있다고 서로 위로해 주고 격려하면서, 거기서 함께 힘과 용기를 누리는 공동체가 바로 예배 공동체이고, 교회 공동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교회가 어떤 모습의 교회가 되어 버렸는가?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생각하면서, 교회를 이런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함께 누리는 공동체로 이해하지 아니하고, 마치 교회를 동창회 정도로 이해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아요. 동창회는 누가 옵니까? 성공한 사람들이 와요.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은 못 와요. 동창회 모임을 갔더니, 거기에 사람들이 얘기를 해요. 제 대학 동창들은 전부 다 대부분 목사님들인데, 목사님들이 되지 아니한 분들도 동창이 있어서 얘기를 나누는데, 그분이 하는 말이 그래요. 자기는 연극영화과를 나오고, 그리고 총신에서 또 공부를 하고 그랬는데, 연극영화과 동문회에 가면 특징이 하나가 있다고 그래요. 무슨 특징이 있냐고 그랬더니, 지금 잘 나가고 있는, 연예계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동창회를 오지, 연예계에서 잊혀진 사람들은 못 온다는 거예요. 같이 연극 활동을 했지만, 그냥 그 뒤로 잘 일이 풀리지 않아서, 그냥 가게 하는 사람들, 그냥 풀려서 다른 일 하고 있는 사람들은, 연극영화과 동창회에 올 수가 없대요. 왜냐하면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못 온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총신 동창회의 특징이 있대요. 뭡니까? 그랬더니, 목사가 아니면 못 온대요.
그런데 교회도 동창이가 돼버리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내가 잘 나가는 것 같고, 내가 행복한 것 같고, 내가 문제가 없는 것 같으면 신앙생활 잘하고, 그런데 우리 가정에 좀 어려움이 있으면, 남편과 아내가 싸워서 고통스러우면, 사업에 실패해서 어려움을 겪게 되면, 그러면 교회에 나와 앉아 있기가 너무나도 힘들고, 사람들이 나를 실패자로 볼까, 나를 무시하지는 않을까, 나를 조롱의 눈으로 쳐다보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에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그건 잘못 생각한 거예요. 교회는 동창회가 아니라, 영적인 병원이기 때문에, 내 아픔을 가지고 나오는 겁니다. 싸우면 싸울수록 더 나와서, 하나님 앞에 위로를 기대해야 되고, 기도하며 엎드려야 될 줄로 믿어요.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그냥 혼자 골방으로 쳐들어가고, 숨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아픔을 내려놓고, 주님 앞에 나와서 성도들 사이에서 함께 눈물 흘리고, 함께 위로해 주고 격려하면서, 거기서 회복이 있고 치료가 있고, 함께 위로를 나누는, 그런 영적인 병원으로서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나누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게 바로 영적인 공동체가 되는 것이죠. 이 자리는 바로 이 예배의 자리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이 넘치는 자리입니다. 성도의 교제 자리는 바로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이 넘치는 자리인 것이죠.
바울 사도는 로마 교회를 방문을 통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 바울 사도가 로마 교회를 가서, 거기서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나의 선교 활동 가운데 어떻게 도와주셨는지, 그런 은혜를 함께 나누면서 많은 은혜와 축복을 누렸을 겁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로마 교회 성도들이 그 환란과 박해 가운데도, 거기서도 신앙생활 열심히 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믿음을 잃지 않고 끝까지 살아가는 그 성도들을 보면서, 바울 사도는 그 로마 교회 성도들로부터 많은 힘과 용기를 얻고, 새 힘을 얻게 되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은 무엇인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적인 것이죠. 목회자가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도 같이 나누고, 성도들도 같이 나누고 하면서, 서로가 믿음의 동지로서 함께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사역 가운데, 함께 그 쌍방의 축복을 누리는 영적인 공동체를 누리게 되는 것이 바로 교회 공동체, 믿음의 공동체 예배이고, 우리 교회 모임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우리 교회 성도님들과 함께하면서 얼마나 큰 복을 누리고 있는지, 너무나도 감사해요. 고난 가운데서도 참고 인내하면서, 믿음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성도님들을 보면서, 제가 위로를 받고 힘을 얻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신실하게 살면서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성도님들을 보면서, 많은 힘과 용기를 얻고 있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험난한 세상 가운데서, 신실하게 믿음으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성도님들을 보면서, 엄청나게 큰 축복을 누리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함께 모여 함께 은혜를 나누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함께 모여서 함께 예배하는 가운데, 함께 찬양하는 가운데 함께 누리는 그런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바울 사도가 선교 여행을 하다가, 이제는 로마 교회로 가서, 거기서 믿음을 함께 나누고, 그리고 그 로마 교회가 자기를 후원해 주어서, 스페인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될 거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내가 로마 교회를 통해서 받을 그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 또 내 믿음의 고백들을 통해서 로마 교회가 얻은 그런 축복들을 생각하면서 이 메시지를 썼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원하기는 우리 모두가 믿음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가운데 함께 기쁨의 능력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 축복, 우리 예수비전교회를 통해서 누리는 그런 엄청난 축복들이 우리 모두에게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벌써 우리 교회가 11주년이 다 돼간다고 하는 게 믿어지십니까? 바로 엊그제 같은데, 그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11년 동안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와 함께해 주신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우리가 기억하면서 우리의 기도 제목이 무엇이어야 합니까? 주님 우리가 하나 되어 서로 사랑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함께 누리는 영적인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게 해 주옵소서. 우리 주님께서 기도했던 기도의 제목들처럼 요한복음 17장 21절 말씀에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우리 남아 있는 성도들을 위해서 간절하게 기도했던, 하나 됨을 위한 그 기도, 하나 됨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누릴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도 아름다운 믿음의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