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8년 전 어느 신문에 났던 기사입니다. 충남 논산경찰서는 할머니 댁에 놀러 온 조카에게 망을 보게 하고, 도둑질을 한 혐의로 41세 조 모 씨를 붙잡았다고 하는 신문 기사가 나왔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수많은 도둑질 일이 있는데요. 특별히 이렇게 도둑질하는 것이 기사화된 것은 그 내용이 특이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사람이 조카를 데리고 자신이 예전에 근무하던 지역으로 가서 거기서 도둑질을 했는데요. 유리창을 깨고 그 안에 들어가, 50만 원을 훔쳐 달아났는데, 나중에 그 망을 보았던 조카가 친구들을 데리고 똑같은 곳에 가서, 거기서 친구들에게 망을 보게 하고 50만 원을 훔쳐 달아났다가, cctv에 찍혀 결국 잡히게 되었기 때문에 기사화된 겁니다.
삼촌이 동생에게 도둑질을 가르친 것이죠. 조카의 인생을 망쳐버린 그런 안타까운 사건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가르치지 말아야 될 것을 가르쳐 버린 것인데요. 오늘 읽은 잠언서 22장 6절 말씀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될 것인가? 마땅히 행할 것을 가르쳐야만 한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어린이 주일이기 때문에, 특별히 “우리 어린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라고 하는 내용으로 함께 잠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 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왜 우리는 아이들에게 마땅히 행할 일을 가르쳐야만 합니까? 왜 가르쳐야 하는 것이죠? 그 이유들을 먼저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이유 가운데 첫 번째 이유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인간은 천성적으로 악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어떤 존재인가? 착하게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중립적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악하게 태어난다고 하는 것이 성경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철학자들은 인간이 태어날 때 선한 마음을 가지고 태어나는지, 그런데 살다 보면 그렇게 악을 접하게 돼서 악하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사람이 처음에 태어날 때 악하게 태어나지만, 가르쳐서 나중에 선하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사람이 중립적으로 태어나는지에 대해서 철학자들은 많은 논의를 해왔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무엇이냐 하면, 성경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악하게 태어난다고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은 가만히 놔두면 무엇이 나오게 되어 있을까요? 악이 나오게 돼 있어요. 가르쳐주지 않아도, 욕하는 것부터 배우고, 가르쳐주지 않아도 탐욕을 부리게 되는 것이고, 가르쳐주지 않아도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을 먼저 배우는 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천성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죄의 모습을 가지고 태어나는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교훈해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한 다음에 들어간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 민족들은 행복하게 산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해서 타락해 버렸고,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심판을 받았다고 하는 이야기가 사사기의 말씀 가운데 기록돼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 민족들은 그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이렇게 타락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마땅히 행할 일을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던 조상들, 하나님을 생생하게 만났던 그 사람들이 자기 자녀들에게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 우리가 어떻게 행해야 되는가에 대해서 알려주어야 되는데, 마땅히 행할 길을 알려줘야 되는데, 그렇게 알려주지 않아서 하나님을 모르는 세대가 태어나게 되었고, 그들은 자연스럽게 악한 길로 가다가 망해버린 것이라고, 사사기서에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사기에서 기록된 그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현재 대한민국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의 상황을 진단해 보면, 믿음의 세대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악한 세대가 나타나고 있어요. 믿음을 잃어버린 세대가 존재하고 있어요. 부모님의 세대 가운데 신앙을 가지고 잘, 그 신앙의 전수가 되어서 우리 자녀들이 믿음으로 살아가지 않고, 악을 행하며, 하나님에게서부터 떠나버린 세대가 지금 우리들의 미래 세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겁니다.
우리 대한민국에서 지금 현재 젊은이들이 우리 청소년들에게 있어서 신앙이 많이 잃어버렸고, 그래서 우리 자녀들의 미래가 밝지 않다고 하는 것이 우리가 보고 있는 현상입니다. 최근에 우리 n번방 사건이라고 하는 것이 터졌는데요. 아직 그 실체가 온전히 다 드러나지 않아서 뭐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까지 조사된 바에 의하면, 주로 그 방에 들어와 있던 그 범죄에 동참했던 사람들이 주로 누구죠?> 청소년들이 많아요. 10대 청소년들이 악을 행하고 있는 모습들이 그냥 드러나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 것이죠. 왜 우리는 우리 자녀들에게 마땅히 행할 일을 가르쳐야 되는가? 그것은 우리들이 태어날 때부터 악하게 태어나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왜 가르쳐야 합니까? 그것은 이 이 세상은 우리 자녀들을 향해서 악한 것을 계속해서 주입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알지 못하는 상황 가운데서, 이 세상은 우리 자녀들을 향해서 계속해서 교육하고 있습니다. 악을 행할 것에 대해서, 하나님을 버릴 것에 대해서, 온갖 많은 그 정보들이 우리 자녀들에게 쏟아지고 있는데, 우리 자녀들이 인터넷을 하면 그 인터넷을 통해서 불신앙적인 내용들이 자녀들에게 영향을 끼치기 시작합니다. 친구들과의 그 관계 속에서 친구들이 우리 자녀들에게 영향을 끼치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자녀들이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녀들을 향해서 끊임없이 악한 생각과 잘못된 생각들을 주입해 주고 있는 그런 환경 가운데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경각심을 가지고 깨달아야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일주일 내내 우리 자녀들에게 전혀 손을 대지 않습니다. 그냥 내버려 뒀다가 그러다가 주일날 아침만 되면, “얘야, 교회 가야지?” 그래요. 그런데 우리 자녀들은 일주일 내내 무엇을 교육받고 있냐면, 인터넷을 통해서, 학교를 통해서, 친구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이 세상은 우연히 생긴 거라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온갖 악한 정보들을 다 듣고 교육을 받으면서, 일주일 내내 그 교육에 노출되고 세뇌되어 있다가, 그러다가 주일날 아침에 교회에 가자고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 “이게 무슨 소리지?” 하면서, 반응을 하지 않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악한 세상은 우리 자녀들을 향해서, 아 우리 자녀들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악을 교육하고 있다고 하는, 이 사실을 우리가 경각심을 가지고 인식해야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담배 광고를 어떻게 하는지 아세요? 담배 광고 우리나라에서는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요.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보니까, 담배 광고를 어떻게 하냐면, 담배 광고 문안을 가게에다가 다 붙여놓는 겁니다. 다 붙여놓는데, 어디에 붙여놓냐면, 그 편의점 들어가면, 편의점 들락날락할 때마다 바라볼 수 있도록, 그 담배 광고를 붙여놓는데요. 어디다 붙여놓냐면, 사람의 눈높이에 붙여놓은 것이 아니라, 밑에 붙여놨어요. 밑에! 밑에 왜 밑에 붙여놨을까요? 어렸을 때 꼬마 아이들이 엄마 아빠 손 붙들고 편의점 안에 들어갈 때, 그 꼬마 아이들의 눈높이에 정확하게 각인이 되도록, 말보로라고 하는 그 담배 광고를 빨갛고 노랗고 한 그 광고를 해서, 그 이름이 딱 박힌 것을 아이들이 쉽게 잘 인식할 수 있도록, 그 문 앞에 우리 아이들이 그 편의점에 들어가면서 그 브랜드를 보고, 매일매일 보면서 익숙하게 여기면서, “아, 저런 게 있구나. 저게 좋은가 보다.” 그게 익숙하게 여겨지도록, 날마다 날마다 세뇌를 시켜서, 결국에 성년이 되면 자연스럽게 손이 갈 수 있도록 만드는, 그 전략을 쓰고 있는 것이죠.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신앙을 가르치고,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기 위해서 전혀 노력하지 않고 방치하고 있다가, 주일날 아침이 되면 허겁지겁 교회 가야지 하고, 혼을 내고, 화를 내면서 우리 아이들이 더 기분 나쁘게만 만들고 하면서, 우리 아이들의 신앙을 방치해 두고 있는데, 이 세상은 우리 아이들을 사탄의 자녀로 만들기 위해서 온갖 새의 공작으로 하루 24시간 내내, 매 순간순간마다 우리 아이들에게 악한 것을 주입하면서, 살기 때문에, 이 세상은 우리 자녀들을 망가뜨리기 위한 세뇌 교육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마땅히 행할 길을 경계심을 가지고, 가르치지 아니하면 안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신명기 6장 6절부터 9절의 말씀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내 손목에 메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 오늘날 유대인들은 이 말씀대로 철저하게 지키면서 삽니다. 그래서 옷 같은 데 성경 말씀을 달아두기도 하고, 예배할 때 보면 머리에 띠를 띠고, 미간에다가 성경 말씀을 붙이기도 하고 유대인이 사는 집 앞에 가보면, 집 문설주에 성경 말씀을 붙여놓은 조그마한 박스를 달아놓는 것을 많이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그렇게 우리들 또 그렇게 성경 구절을 달고 다니라고 하는 그런 말씀이 아니라, 문자적인 적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해 주시는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자녀들에게 잘 가르치려고 하는데 방점이 찍혀 있는, 여기다가 성경 말씀을 달고 다니라고 하는데 방점이 찍혀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 우리 자녀들을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서, 매 순간순간마다 지혜를 가지고 우리의 자녀들에게 마땅히 행할 일을 가르치는 그 일을 해야 된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가르쳐야 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가르친다고 한다면, 놀라운 결과를 보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아이들을 가르치면, 마땅히 행할 일을 가르치면, 그것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생각이 됩니다. 아이들은 우리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 같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귀찮게 생각하는 것 같고, 전혀 우리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 같지만, 그러나 가르침은 엄청난 효과가 있는 것이고, 그 결과가 분명하게 나타나 있는 것이 그게 바로 교육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듣지 않는 것 같지만, 변화가 없는 것 같지 않지만, 사실은 부모님들에게 주어진 이 가르침의 권세가 정말 크다고 하는 사실을 먼저 기억해야 될 줄로 아는데요. 라이프지니라고 하는 그 학자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교육을 달라. 그러면 내가 반 세기만에 유럽인들의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겠다”라고 하는 말을 했습니다. 물론 과장된 표현이죠. 하지만 교육을 하고 아무리 가르쳐도 변화가 없는 경우도 굉장히 많습니다. 하지만 정말 우리가 가르친다고 하면, 말을 하게 된다고 하면, 그것이 잘못 전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효과가 있고 우리 아이들의 삶을 바꿀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하고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는 우리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저희 어머니는 무슨 얘기를 많이 하셨냐면, 이런 얘기를 많이 하셨어요. “얘야, 나중에 너 결혼하려고 하면, 안경 쓴 여자는 만나지 마라.” 그래요. “눈 나쁜 시력이 안 좋은 여자는 만나지 마라.” 그런 얘기를 가끔씩 한 번씩 해 주셨어요. 그 이야기를 한 이유가 무엇이냐면, 창세기의 말씀 가운데 레아가 안력이 부족하다고 하는 거기에서 아마 착안을 하신 것 같은데, 별로 중요한 가르침은 아닌 것 같아요. 안경을 쓰면 어떻습니까? 사람 눈 나쁜 게 나쁠 수도 있고 좋을 수도 있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죠. 그런데 제가 어렸을 때 그 이야기를 몇 번 듣고 자랐는데요. 이성의 눈이 뜨여지기 시작하고, 그래서 이성을 만나게 될 때, 그게 제 행동을 어느 정도 좌우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대학 갔을 때 누구를 만나냐면, 안경 쓴 여자가 있었어요. 여학생이 있었는데, 참 마음도 곱고 성품도 좋고 정말 좋은 자매가 하나 있었어요. 그런데 안경을 썼어요. 그러니까 마음이 안 끌리는 거예요. 마음이 안 끌려요. 우리 어머니가 했던 그 말 한마디가 제 마음속 어느 곳 깊은 곳에 있는 거예요.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것이고, 내가 했던 그 말 한마디 행동 하나, 아니 우리가 말했던 것보다도 내가 행동했던 것들이 우리 자녀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죠.
나중에 우리 자녀들이 크고 나면, 이 아이들이 정말 어쩜 그렇게 아빠를 똑 닮고, 어쩜 그렇게 엄마를 똑 닮았는지, 참 놀랄 때가 많이 있잖아요? 20년 30년간 그렇게 그렇게 성장한 사람이 나중에 결혼하게 되면 아내하고 남편하고 서로 성격이 안 맞아서, 막 서로 막 고치려고 하는데, 그때 이제 결혼한 여성은 이렇게 생각하죠? 이 남자가 나를 사랑하면, 행동을 고칠 수 있을 텐데 하는데, 고쳐집니까? 안 고쳐져요. 왜요? 우리 부모님에게 받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던 그 교육의 효과가 너무나도 커서, 도무지 바꿀 수 없는 것을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파워가 있기 때문에, 마땅히 행할 일을 어렸을 때 가르쳐야 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로 그럼 우리는 이것을 누구에게 가르쳐야 합니까? 마땅히 할 일을 행할 길을 가르치라고 했는데, 이것을 누구에게 가르쳐야 되는가? 오늘 말씀에 보면 아이들에게 가르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왜 아이에게 가르치라고 말합니까? 그것은 아이였을 때 가르치는 것이 아주 효과가 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세 살 버릇이 언제까지 간다고 그러죠? 여든까지 간다고 그랬어요.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요? 여든 지나면 효과가 떨어진다는 얘기인가요? 그게 아니죠. 이 속담이 만들어진 것은 60세 살면 많이 살았다고 축하해주고 환갑잔치하던, 그 시절에 만든 속담이에요. 인생이라고 하는 게 60 살면 정말 많이 살았다고 생각되는 그 시절에 만든 속담이 뭐냐 하면,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 하는 그 말을 하는 거예요. 우리 아이들이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치면, 그 아이들이 그것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아이들에게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쳐야 될 줄로 믿습니다.
세 번째로 그럼 누가 가르쳐야 됩니까? 우리 부모님들이 우리가 가르쳐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보면서 우리 자신이 별로 자격이 없다고 하는 것을 많이 느끼게 됩니다. 특별히 우리가 다른 것에 대해서는 잘 가르치긴 하는데, 마땅히 행할 길에 대해서는 잘 가르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마땅히 행할 길을 나도 잘 행하지 못하고 있는데, 나도 행하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우리 자녀들에게 말할 수 있을까? 내가 말하면 우리 자녀들이 나를 보면서 “아빠나 잘하세요. 엄마나 잘하세요.” 그런 말을 할 것만 같아서, 우리는 너무나도 내 자신이 자격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 자녀들에게 잘 말을 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성경 말씀은 무엇을 가르치고 있냐면, 그런데 마땅히 행할 길을 너희가 가르치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가르쳐야 될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완벽하기 때문에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완벽한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심지어 이 자리에 서 있는 저도 완벽하지가 못해요. 설교를 할 때 제가 설교의 말씀대로 완벽하게 잘 살아서, 그래서 그것을 내가 살아보니 이렇게 사는 것이 좋겠다고 여러분들에게 말씀해 주면 얼마나 좋겠어요? 우리가 신학교에서 배우는 설교학에 의하면, 설교학 교수님이 이런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여러분, 설교하려면, 여러분들이 먼저 그 설교의 말씀대로 살고, 그리고 설교해야 된다”라고 그렇게 우리들에게 도전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먼저 잘 살려고 하는데, 설교자가 그 설교 말씀대로 살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잘 살지 못해요. 완벽하지가 못한 거죠. 그래서 늘 고민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도 못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완벽하지 못한 제가 어떻게 이 말씀을 하나님 앞에 말씀이라고 전할 수 있을까? 두려워서 수기가 정말 힘든 거죠.
그런데 성경 말씀은 무엇이냐면, 그러니까 “네가 자격이 없으면, 입 다물고 있어라. 자격이 없으면 가르치지 마라.”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땅히 행할 길은 가르치라고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완벽해야만 가르칠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 누구도 가르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경우는 이런 말들을 많이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 16절 말씀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그 고린도전서 11장 1절 말씀에서도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딸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빌립보서 3장 17절의 말씀에서도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바울 사도는 완벽한 사람 같아요. 그렇게 생각이 드십니까? 바울 사도는 완벽하니까, 이런 얘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이지, “나를 본받아라” “나를 따라 와라” “나와 같이 해라”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바울 사도가 완벽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래도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도 얼마나 연약한 사람이었는지 몰라요.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 사도가 선교 여행을 하러 가는 도중에 선교사들하고 같이 팀을 이루어서, 마음을 같이 해서 복음을 전해야 되는데, 선교사들 사이에 분란이 일어났어요. 그래서 마가와 헤어질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사도행전의 말씀이에요. 품고 포용하고 인내하고 같이 맞추면서 선교 사역을 한 것이 아니라, 서로 마음이 불란이 되어서 헤어질 수밖에 없는 그런 연약한 존재가 누구였냐면, 바로 사도 바울의 모습이었어요.
뿐만 아니라 로마서 7장에 보면, 이건 학자들마다 의견이 좀 다르기는 합니다마는 로마서 7장의 고백을 저는 그게 사도 바울의 고백이라고 보는데요. 거기서 뭐라고 얘기하냐면, 내 마음 한 구석에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데, 그렇게 살지 못하는 나 자신의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괴로워하는 모습이 로마서 7장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죠. 나는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나 자신을 보면서, “오호라. 나는 권고한 사람이라.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낼 것인가?”라고 하는 그런 정말 안타까운 고백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우리 인생들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있기 때문에 가르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바울 사도는 교회를 향해서 말하기를 “여러분, 나를 좀 본받으세요.” 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여러분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했는데, 그렇게 말한 이유가 무엇이냐면, 그것은 바울 사도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사랑의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사랑의 마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정말 바르게 바른 길로 가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한번 해봐”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죠.
마치 조그마한 꼬마 아이 앞에서, 갓난아기 앞에서, 부모님이 그 아이를 보면서 “얘야, 이렇게 한번 해봐. 이렇게 한번 해봐”라고 말하는 건가 봐요. “잼잼 한번 해봐” “곤지곤지 한번 해봐” 너무나도 사랑스럽기 때문에, 이 아이가 조금이라도 변화될 것을 바라는 마음으로, “이렇게 한번 해봐. 저렇게 한번 해봐”라고 하는 그런 부모의 마음을 가지고, 우리 이 바울 사도가 교회를 향해서 말하는 겁니다.
바울 사도가 완벽하기 때문이 아니라, 정말 이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나를 좀 내가 했던 것 좀 한번 따라서 한번 해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고, 우리 부모들도 완벽하다면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완벽하지 못해도 우리 자녀들을 향해서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쳐야 되는 것이죠.
학창 시절에 공부하시던 생각을 해보면,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것보다, 오히려 친구가 가르쳐 주는 것이 머리에 쏙쏙 더 잘 들어온 경험이 있으실 겁니다. 그런 경험을 해보셨습니까? 선생님이 앞에서 수학 문제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하고, 이 문제는 이렇게 해서 이렇게 풀라고 가르쳐줘도 이해를 못 하는데, 친구한테, 옆자리에 앉은 친구한테, “도대체 저거 어떻게 푸는 거야? 왜 저렇게 되는 거야?” 하고 물어보면, 그 친구가 “이건 이렇게 해서, 이렇게 되는 거야”라고 설명해 주면, 그 친구가 설명해 주는 것이 훨씬 더 이해가 잘 될 때가 있어요. 왜 그렇죠? 왜냐하면 선생님은 모든 모든 것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그 학생이 고민하는 것을 잘 몰라요. 이미 학생이 고민하는 문제는 초월한 지 오래됐어요. 선생님은 더 중요한 게 더 많아요. 그래서 선생님의 시각에서 가르치다 보니까, 이 아이는 도무지 이해를 하지 못하는 거죠.
하지만 옆에 있는 동료는 무엇이냐면, 바로 자기가 고민했던 문제, 자기가 넘어졌던, 바로 그 부분에 있어서, 왜 여기서 실수가 나왔고, 왜 여기서 잘못됐었는지, 경험했던 그 경험을 가지고, 이건 말이야 이거 이렇게 분리하면은 이게 망가지는 건데, 그게 아니라 “이렇게 해야 되는 거야”라고 이야기하면, 그게 훨씬 더 더 잘 들어가고, 친구가 100점 만점짜리여서 잘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70점밖에 못 받는 친구지만, 똑같은 고민 똑같은 막혔던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해 줄 때, 쉽게 더 와닿는 것처럼 복음을 가르치고,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치는 것이 우리가 완벽해야만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 부모님들은 완벽하지 않아요. 늘 넘어져요. 우리의 생각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모순 덩어리,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더 많이 사랑했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면서 살았던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런 연약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내가 어떻게 우리 자녀들에게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칠 것인가? 그러면 우리 자녀들이 하는 말이 “아빠나 잘하세요”라고 “항의할 것인가?”라고 두려워서 떨 것이 아니라, 사실은 바로 그러한 연약한 모습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고, 그래서 주님께서는 나와 같은 죄인도 구원해 주셨듯이 너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 너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하는 그 메시지를 전달할 때에, 우리 자녀들이 복음의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종종 우리는 바리새인들처럼 행동하면서, 마치 내가 완벽한 것인 양, 위선적인 모습을 보이고, 자녀들을 비난하고 책망하면서, 그래서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친다고 생각하는 경향들이 많습니다. 그러면 우리 자녀들은 그 부모의 위선적인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에 반발할 때가 너무나도 많아요. 하지만 우리는 복음 앞에 서야 하는 것이고, 무릎을 꿇고 그리고 우리 자녀들에게 마땅히 행할 길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이 말은 그냥 선생님들처럼 이야기하라고 하는 말씀이 아니라, 그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우리가 무릎을 꿇고 그 아이들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이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에 괴로워하고 있는지, 이 아이의 관심이 무엇인지, 눈높이를, 안타깝게도 이 세상은 아이 하나를 잡기 위해서 담배 광고를 위에 붙이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눈높이에 맞게 그 광고를 밑으로 내리는데, 우리 크리스천들은 그 아이들의 눈높이에 눈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똑바로 서서 아이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듣지도 않고 외면하면서, 그래서 결국 우리 아이들을 잃어버릴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어린이 주일을 맞이해서, 아직도 우리 자녀들이 어리다고 한다면,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아이들을 사랑으로 품으면서 가르쳐주어야 할 것이고, 이미 장성한 자녀들이 되었다고 할지라도, 마땅히 행할 길이 무엇인지 소개하는 가운데, 이 수많은 사랑이 많은 사랑하는 우리 자녀들을 하나님의 게로 인도하는 주님께로 인도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떻게 대해주셨습니까? 우리 주님께서는 저 높고 높은 보좌 위에 앉으셔서, 그냥 그곳에서 팔짱 끼고 옆까지 올라와 보려면 올라와 보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저 높고 높은 보좌 위에서 우리들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서 인간의 몸으로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베들레헴으로 오셨고, 마구간으로 오셨고,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하여 십자가까지 지시면서, 우리에게 놀라운 사랑을 베풀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할 수 없기에, 주님 앞에 날마다 간구하면서, 우리 자녀를 주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그 말씀들을 잘 전달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놀라운 역사가 각 가정들마다 넘쳐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