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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비유 (마 18:23-35)

우리 인간들은 늘 실수를 하면서 삽니다. 늘 잘못을 저지르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하는 그 실수와 우리가 하는 그 잘못으로 인해서, 우리 주변에 사람들에게 마음에 상처를 주면서 살아갑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이웃들에게 마음의 상처를 줄 뿐만 아니라, 우리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피해를 당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결국 참 좋았던 관계들이 깨어져 버리고, 그리고 마음 아픈 상황을 맞이하게 되는 그런 일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가운데 엄청 많이 경험하게 되는 것이죠.

오늘 우리는 용서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를 함께 읽었는데요. 용서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용서라고 하는 것은 내가 피해를 당했을 때, 가져야 할 성도의 마음, 내가 억울한 일을 당하고, 내가 손해를 당하고, 피해를 당했을 때, 나에게 그렇게 해를 가했던 우리 주변 사람들을 향해서 가져야 될 태도가 바로 용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크리스천들이 용서를 잘하느냐 하면, 용서를 잘하지 못해요. 왜 용서를 못할까요? 왜 우리는 용서하는 것이 힘들까요? 왜 그렇죠? 그것은 우리가 아주 못돼 처먹었기 때문일까요? 못 돼 처먹어서, 용서를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기가 쉽겠지만, 사실은 정반대입니다. 우리가 용서를 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의 심성이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공유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성품을 공유하고 있는 그 속성 때문에, 용서가 어려운 것이죠. 어떤 속성이 있냐면, 바로 공의(justice)의 속성입니다. 정의의 속성인 것이죠. 무엇인가 잘못됐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겁니까? 바로잡아야죠. 무엇인가 문제가 생겼다고 한다면, 정의를 만들어야죠. 누군가 손해를 끼쳤다고 한다면, 그 손해를 보상해줘야 마땅한 것이고, 피해를 입혔다고 한다면, 그 피해를 보상해주는 게, 정의인 것이고,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았기 때문에, 정의가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는 겁니다.

내가 피해를 당하고 내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그냥 이것이 그냥 유야무야 되어 버리고,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해결함도 받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게 우리들의 마음을 괴롭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정의를 갈망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못 돼 처먹은 인간이어서 용서가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에게 정의의 개념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용서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죠. 이러한 정의의 갈망 때문에, 정의가 바로 이루어져야 되고 세워져야 한다고 하는 갈망 때문에, 용서가 어려운 것인데요.

그런데 성경에서는 우리들에게 어떻게 가르쳐 주시냐면, 그런데 그 정의를 우리가 이루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겨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정의를 이루려고 하지 말고, 우리가 그것을 바로잡으려고 하지 말고, 그 바로잡는 것을 정의로우신 하나님,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맡기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17절에서부터 21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내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하므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우리 인간은 공의를 이룰 수 있는 존재가 아니고, 우리는 정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정의에 대한 갈망이 우리들에게 있지만, 정의를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우리들에게는 없는 것이죠. 정의의 법칙이 있다고 하면 무엇입니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보응하는 것이 정의의 개념일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눈에는 눈으로 감는 것이 아니고, 이에는 이로 갚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수십 배로 갚아줘도 분이 풀리지 않는 거죠. 저 사람이 나를 향해서 한 대 치면, 나는 수십 대 때려도 그 불편함이 사라지지 않는, 우리들의 정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온전하게 닮은 것이 아니라, 죄로 인해서 망가져 있어요. 우리의 공의의 감정, 정의의 감정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완벽하게 닮은 것이 아니라, 죄성으로 인해서 망가져버려서, 그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 우리가 생각하는 공의가 정말 정의답고 공의다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는 잘못된 방식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눈에는 눈으로 갚는 것이 아니라, 눈에 목숨으로 갚아버리고, 이에 목숨으로 갚아버리려고 하는, 잘못된 속성이 우리들에게 있는 것이고, 결국 그것은 정의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더 깊은 불의를 만들어내고, 정말 악순환을 일으키게 만드는 일이 될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따라서 성경의 가르침이 무엇이냐면, 그렇게 정의를 갚을 만한, 정의를 이룰 만한 능력이 없는 우리가 우리의 손으로 공의를 이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라고 하는데요. 한 치의 오차도 없으신, 정확하신 하나님께서 선과 악을 바르게 판단하셔서, 바르게 심판하실 그 하나님께 맡기고, 그 원수를 갚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용서하는 마음으로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는 것이, 그게 우리 모든 성도를 향해서 주시는 권면의 말씀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용서를 하게 되면, 그 결과는 어떤 결과가 빚어지게 되는 것일까요? 우리가 악을 행한 사람, 우리들에게 해를 입힌 사람을 향해서 용서를 해주게 되면, 어떤 결과가 빚어지는가? 그 사람이 회개하게 될까요? 그 사람이 변하게 될까요? 어떤 모습을 보여주게 될까요? 우리는 생각하기를, 우리가 용서하면, 상대방이 뉘우치고 돌아오고, 그래서 좋은 결과가 빚어질 거라고 하는 그런 기대감을 갖습니다. “그래, 내가 힘들지만, 용서해 보자. 용서해 본다고 한다면, 그러면 좀 뭔가 달라지지 않겠는가? 내가 진정으로 사랑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한다면, 저 나쁜 사람이 그래도 개과천선하지 않겠는가?”라고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용서를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결과가 빚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오히려 더 뻔뻔하게 나올 가능성이 많은 것이죠. 용서를 하게 되면, 그 사람도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면, 용서가 쉬울 것 같아요. 내가 용서해 줄 때, 그 사람이 정말 변하는 모습을 본다고 한다면, 용서한 게 보람이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우리에게 용서가 어려운 이유가 무엇이냐면, 용서해주면, 그 용서가 무시당하는 거예요. 짓밟혀버리는 것이죠. 악용당하는 것이죠. 나는 정말 너무나도 힘들게 용서해 줬는데, 그놈의 작자는 더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들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이 말입니다.

사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서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것은 거의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용서를 하게 되었을 때, 얻게 되는 아주 중요한 긍정적인 결과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우리가 자유함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하고, 원수를 갖고 싶은 마음 가운데 사로잡혀 있게 된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마음이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은 감옥에 갇힌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저 나쁜 사람을 향해서, 이를 갈고 복수해야 되겠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 상대방을 향해서 복수를 하게 되고, 정의를 이루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가 더 깊은 수렁 속에 빠지게 되고, 깊은 정서적인 감옥에 갇히게 되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죠.

오늘 우리는 마태복음 18장의 말씀, 예수님의 비유를 하나 읽었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있었는데, 그 일만 달란트 빚진 것에 대하여 임금님이 모두 다 면제해줬습니다. 불쌍히 여겨서, 그 사람이 갚을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일만 달란트라고 하는 그 돈을 다 면제해주고 탕감해 주어 버린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너무나도 기뻐서 밖으로 나왔는데, 누구를 만났냐면, 자기에게서 100 데나리온을 꾸어간 사람을 만나게 된 겁니다. 100 데나리온이라고 하면 얼마의 값어치가 있을까요? 100 데나리온을 오늘날의 돈으로 환산하면, 어느 정도로 환산할 수 있겠습니까? 데나리온이라고 하는 것은 하루치 일당이라고 계산하면 돼요. 하루치 일당이면, 요즘 얼마 정도 계산해야 돼요? 시급이 한 1만 원 계산하면, 하루 8시간 일했다고 하면, 8만 원 정도로 계산할까요? 그렇다고 한다면 100일 치 노동에 대한 가치니까, 오늘날로 치면 약 800만 원 정도 빌려갔는데, 갚지 않은 사람을 만나게 된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붙잡고, 내 돈 내놓으라고 윽박지르기 시작한 거예요. 그 사람이 갚을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 사람을 감옥에 집어넣어 버렸습니다. 돈을 갚으라고 압력을 넣는 것이죠. 그런데 그 이야기를 누가 들었냐면, 그 주변 사람들이 들었어요. 저 사람이 누군가? 임금님으로부터 일만 달란트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돈을 면제받은 사람인데, 끝까지 백 데나리온을 안 갚는다고 동료를 감옥 속에 집어넣었다고 하는 것에 너무나도 화가 난 동료들이 그 임금님에게 이 사람을 고발하게 되었고,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오늘 비유의 말씀을 보면 그 임금님이 다시 그 사람을 감옥 속에 쳐 넣어서, 일만 달란트를 갚을 때까지 나올 수 없다고, 그렇게 감옥에 쳐 넣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무슨 이야기일까요? 이 100 데나리온 빚진 사람에게서 그 사람을 용서해 주지 않고, 탕감해 주지 않고, 내 돈 갚으라고 그렇게 윽박지르게 될 때, 가져온 결과가 무엇이냐면, 그 사람으로부터 돈을 받아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결과가 무엇이냐 하면, 자기 자신이 감옥에 갇혀버린, 이게 우리들에게 어마어마한 교훈을 주는 것이죠.

내가 미워하고 용서하지 아니하고, 그래서 악한 심정 가지고, 억한 심정을 가지고 그 사람을 바라보게 되면, 그러면 내가 그 사람을 향해서 원수를 갚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나 스스로를 감옥 속에 집어넣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용서를 하게 된다고 한다면, 우리의 과거의 씁쓸한 기억으로부터, 과거의 분노로부터, 그리고 여러 가지 참 씁쓸한 기억들로부터 우리가 자유스럽게 해방이 될 겁니다. 하지만 그 이웃을 향해서 용서하지 않고, 끊임없이 분노하고, 그리고 원수를 갚겠다고 하는 생각에 휩싸이게 되면, 나 자신이 과거의 감옥 속에 갇혀서, 한 발자국도 밖에 나오지 못하는, 그런 오히려 더 힘든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죠. 이 따라서 용서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에게 빚진 자를 보내어 주는 것,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그냥 내어 보내주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결과는 내게 잘못한 사람을 풀어주는 것만이 아니라, 내 자신을 나의 과거의 감옥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용서는 다른 사람을 향한 시혜라기보다는, 나 자신을 풀어주는 그런 해방의 행동이 될 것입니다.

용서하지 않고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불행한 것이고, 용서하지 않고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나 자신이 정신적인 감옥 과거의 감옥에 갇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용서하며 사는 것이 상대방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는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나 자신을 위해서 가장 좋은 선택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용서라고 하는 것은 용서의 동기가 나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동기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 용서해 버리자, “그래, 나를 위해서 용서하자.”라고 생각한다고 하면, 그것은 진정한 용서라고 하기가 어렵습니다. 종종 우리 가운데 용서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는데요. 대부분의 경우는 왜 용서가 이루어지냐면, “내가 너보다는 나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용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너같이 나쁜 놈이 아니라, 나는 그래도 너보다 낫다고 하는 것을 드러내 주기 위해서, 그래서 용서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요. 그런 경우는 진정한 용서라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예전에 제가 목회하던 교회에서, 우리 이 교회 아닙니다. 옛날 아주 아주 옛날에 제가 목회하던 교회 내에서 두 성도 사이에 아주 좋지 않은 감정으로 인해서, 교회 내에서 여러 가지 힘들고 어려운 관계 가운데 있었던 가정이 있었습니다. 같은 구역에 속했고, 같이 구역 활동을 하는데도, 서로 얼굴을 마주 보지 않고, 서로 냉담하면서 그렇게 아주 불편한 관계를 꽤 오랫동안 지속해왔던 그런 두 가정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구역 모임을 하고 있는데, 그중에 한 성도님이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너무나도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나쁜 마음을 가지고 살아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이제는 용서하며 살기로 했습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다 용서해주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좋은 건가요? 어떤 건가요? 그 뒤에 화해가 이루어졌을까요? 이루어지지 않았을까요?

놀랍게도 더 관계가 꼬여버리고 말았어요. 은혜받은 것 같았지만, 은혜받은 게 아니었어요.

내가 용서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거죠. 그래 내가 너보다는 아량이 넓은 사람이오. 나는 용서할 수 있는 자리에 가겠다고 말함으로써, 오히려 그 대척점에 있었던 다른 사람을 오히려 더 매장시켜버리고, 통쾌하게 기독교적인 방식으로 원수를 갚아버린 것이었습니다. 용서라고 하는 표현을 썼지만, 사실은 복수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죠.

우리의 용서라고 하는 것은 늘 언제나 잘못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향해서 일만 달란트의 비유를 통해서, 참된 용서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마치 1만 달란트를 비친 사람이 용서를 받았다고 한다면, “그 용서받은 것이 얼마나 큰가?”라고 하는 사실을 정말 감사하면서, 그 감사한 마음 때문에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용서의 마음이 생겨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라고 하는 것은 얼마치의 값어치가 있을까요? 1 달란트는 얼마입니까? 대략 6천 데나리온이라고 해요. 6천 데나리온이면 얼마입니까? 1 달란트면 20년 치 연봉에 해당하는 거예요. 그런데 1 달란트가 그 정도인데, 일만 달란트면 몇 년치에요? 20만 년어치 연봉이에요. 그만큼 돈 갖고 계신 분 없죠? 당시 로마가 전 세계를 정복하고 각 세계로부터 세금을 거두어들였습니다. 세금을 거두어들였는데, 사마리아에서 1년 동안 거둔 세금이 얼마냐면 600 달란트를 거뒀대요. 베뢰아 갈릴리 지방에서 로마가 거두었던 세금이 200 달란트를 거두었대요. 다시 말하자면, 가나안 지방,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거둔 그 로마 정부가 1년 동안 거둔 세금이 천 달란트가 안 돼요. 그런데 일만 달란트, 생각할 수 있는 금액입니까? 도무지 엄청나게 큰 금액인 것인데, 그렇게 엄청난 큰 금액을 우리가 용서받았다고 한다면 100 데나리온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가 엄청난 큰 용서를 받았다고 한다면, 나에게 행했던 그 악한 일들 나쁜 일들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그 마음 때문에 용서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죠.

사랑하는 우리 성도 여러분,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에게서부터 엄청난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서 죄를 지었고, 우리 죄의 대가는 영원한 심판을 받을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심판을 받을 만한 우리를, 우리 주님께서는 어떻게 용서해 주셨습니까? 로마서 5장 10절 말씀에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 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우리가 원래 지옥에 영원한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인데, 그래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였다는, 하나밖에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들을 살려주셨다고 한다면,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고, 그렇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쓴 뿌리를 가지고 살아갈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해 주셨으니까, 그 용서를 받은 자로서, 우리 주변에 나에게 행한 여러 악한 사람들을 향해 용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마땅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오늘 비유를 보면, 주인과 하나님 사이에 유사점이 있고 차이점이 있습니다. 주인은 빚을 탕감해 줄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 종이 자신의 이웃의 빚을 탕감해 주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으로부터 죄의 용서를 받았다고 하는 것이 참된 믿음의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차이점들도 있습니다. 오늘 비유를 보면서, 차이점마저도 유사점이라고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는데요. 오늘 비유에 보면 주인이 용서해 주었다가 다시 감옥에 가두는 그런 모습이 보이고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도 용서를 받았다가 다시 용서받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실 것은 없습니다. 오늘 이 비유의 모든 것들이 영적인 진리를 닮은 것이 아니라, 여기서 전달하고자 하는 그 핵심적인 메시지가 우리들에게 교훈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용서라고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저도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억울한 일도 많이 당했고, 참 듣지 말아야 될 말들도 억울하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용서한다고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용서라고 하는 것은 강요할 게 아니에요. 종종 우리 교회 내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피해자에게 찾아가서 용서를 강요하는 일들이 벌어지기 때문에 그게 큰 문제가 됩니다. 그것이 옳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것은 하나님의 정의에 반하는 일이에요.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용서를 비는 것이 옳은 것이지, 가해자는 가만히 있는데, 피해자에게 찾아가서 가해자를 용서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그것은 아주 나쁜 일이 될 것이고, 그것은 바른 길이 아닌 겁니다. 종종 우리 교회 내에서는 주님의 말씀을 잘못 오해해서, 그래서 우리 성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들이 많아요. 돈을 빌려주지 않으면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고 비난하기도 하고,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경우도 있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악용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그것이 정당하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힘든 게 용서인 것이에요. 내가 누구와 강요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것이 아닌데, 아무튼 어처구니없이 그런 피해자를 향해서 무엇인가를 강요할 것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피해자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함께 그 분노를 공감해줄 필요가 있고, 그 아픔을 함께 생각할 필요가 있고, 함부로 용서를 강요할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먼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면, 계속해서 나 자신을 감옥 속에 집어넣는, 그 씁쓸함의 감옥, 과거의 감옥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얼마나 나를 사랑해 주셨는가를 다시 한번 기억하면서, 그리고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맡겨버리고, 용서의 손길을 진정으로, 그냥 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우리가 가져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게 어렵기 때문에 우리는 늘 십자가 앞에 나가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 나가서,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저의 완악한 마음, 고쳐 주옵소서. 늘 주님 앞에 엎드리는 가운데, 주께서 주시는 놀라운 구원의 은총, 그 구원의 은총이 우리가 용서할 때, 더욱더 크게 느껴질 것인데, 그 놀라운 구원의 은총을 우리 모두가 누릴 수 있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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