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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은 한 번으로 충분하지 않다

1. 종교개혁 504주년

마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가톨릭교회의 면죄부 판매에 반대하여 95개 조의 토론주제를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붙인 것을 종교개혁의 도화선이었다. 그 토론주제는 오늘날의 대자보와 같은 성격의 선동을 목표로 하는 격문이 아니었다. 그저 항상 있었던 토론회를 위해 논제를 붙인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그 이전부터 교회가 성경적 가르침에서부터 멀어져 있었다는 각성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나고 있었고, 마틴 루터의 논제는 수많은 사람에게 더 이상 교회가 과거의 잘못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시작한 종교개혁이 벌써 504년 전 일이다. 과연 종교개혁의 후예인 우리는 충분히 성경적 가르침에 가까이 와 있는가?

안타깝게도 우리는 또다시 성경의 가르침에서부터 멀어져 버렸다. 한번 개혁하면, 그것으로 완벽하게 완성된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이 아니다. 개혁을 하고 또 해도 여전히 개혁해야 할 점은 또 보인다. 그것은 첫 번째 개혁이 완벽하지 않았다는 점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개혁을 한 후에는 다시 원래의 잘못된 상태로 돌아가 버리는 우리의 습성에도 큰 원인이 있다. 사사기는 그러한 우리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겼던 이스라엘 민족은 그야말로 타락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하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온다. 일종의 종교개혁인 셈이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 타락의 길로 떠났다. 다시 우상숭배를 했다. 종교의 타락인 셈이다. 그래서 다시 종교개혁이 이루어져야 했다. 그것을 무한 반복하는 게 사람이다.

우리는 언제나 다시 천주교로 돌아간다. 개혁자의 후예들인 우리는 어느새 천주교적 모습으로 돌아간다. 심지어 천주교를 흠모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천주교에서는 신부들의 권위가 대단하고 그들을 아버지처럼 여긴다는 사실에 개혁자들의 후예인 목사들이 부러워하기도 한다. 그게 인간의 본성이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개혁이 또 필요하다.

종교개혁자들은 종교개혁이 한번으로 끝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 secundum verbum dei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고 외쳤다. 항상(semper) 개혁하지 않는 교회는 개혁교회일 수가 없다. 그것은 다시 천주교회로 돌아간 것이다.

2.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종교개혁자들은 성경만이 유일한 기준이라고 보았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당연한 원리이다. 성경이 아닌 모든 것들은 사람의 해석일 뿐이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의 회의를 통해서 결정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결정은 성경의 권위를 넘어설 수도 없고, 성경의 권위와 같은 정도의 권위를 가질 수 없다고 보았다. 물론 교회의 결정이 성경의 가르침을 제대로 잘 반영한 결정이라면 따를 수 있겠지만, 성경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결정을 한 것이라면 그것은 따를 수 없었다. 그래서 면죄부를 판매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옳은 결정이 아니기에 종교개혁자들은 반기를 들었다. 교황의 명령이라고 해서 따를 수 없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서슬퍼런 예루살렘의 당국자들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고 하였던 것과 같다.

모든 것은 성경에 비추어보아야 한다. 그래서 성경의 가르침에서 어긋난 것이라면 고쳐나가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은 당시의 로마 천주교회가 행해왔던 모든 전통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그래서 성경적으로 바르지 못한 제도들은 하나씩 고쳐나갔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개혁교회이다. 개혁교회의 신앙과 신조들은 그러한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 탄생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종교개혁자들이 하나도 오류가 없이 완벽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들도 역시 실수와 오류가 있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었다. 사실 칼뱅은 정말 대단한 신학자임에 틀림없다. 그렇게 젊은 나이에 <기독교 강요>와 같은 대작을 썼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기독교 강요>의 깊이와 수준에 경탄해마지 않는다. 하지만 칼뱅이 하나님은 아니었다. 칼뱅은 우리와 똑같이 실수와 오류를 저지를 수 있는 인간이었다. 따라서 칼뱅이 쓴 것이 우리들에게 아주 유용하고 대부분 우리가 그대로 받아들여도 될만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의 저작들은 다시 한 번 성경이라는 최고의 심판자에 의해서 판단받아야 한다. 그게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라는 원칙이다.

성경의 가르침에서 떠나게 되는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이다. 첫째, 우리의 판단과 이해의 부족으로 인하여 성경의 가르침을 처음부터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때이다. 우리는 공정하고 객관적인 관점에서 성경의 가르침을 온전하게 해석할 수 있지 못하다. 우리는 역사적 흐름 속에서 존재하고, 문화적 관점을 가진 채 성경을 바라보고, 우리가 처한 특수한 상황 속에서 성경을 읽고 해석한다. 그러다보니 성경의 가르침을 객관적으로 밝힐 수 있지 못하고 주관적인 입장에서 해석하게 된다. 예를 들어, 노예가 당연시 되던 시절에 태어나 그런 문화에서 자란 사람들은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노예제도란 당연한 제도이며 이는 하나님께서 용인하신 것이라는 관점을 가지고 읽게 된다. 하지만 그런 문화적 관점에서 벗어나기 시작할 때, 비로소 노예제도가 성경적인 제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우리 한국의 성도들은 유교적 문화에 깊이 경도되어 있다. 그래서 유교적 관점을 확증하는 방향으로 성경을 읽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처한 문화적 상황이 우리가 읽는 성경의 해석을 결정해버렸기 때문에 성경의 가르침을 온전히 반영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빨간색 색안경을 끼고 성경을 읽을 때 모든 것이 빨개 보인다.

둘째, 처음에는 성경을 바르게 해석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러한 해석이 더 이상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지 않게 되는 경우이다. 어떤 시대에 해석했던 그 해석이 영원불변의 해석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해석을 시도했던 그 당시에는 맞는 이야기이고 바른 해석일 수 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환경 속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가 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예를 들어, 어떤 가정에서는 생선을 손질할 때 머리를 잘라서 내어버렸다. 그것이 전통이었다. 그래서 그 집에서는 항상 생선을 손질할 때 머리를 잘라 내버리는 것이 하나의 법칙이 되었다. 그런데 새로 그 가정에 결혼하여 들어온 새 식구는 그러한 관례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두육미라고 생선의 머리도 맛있다는데, 왜 잘라 내버릴까? 그래서 어머니에게 물었는데, 어머니는 단순하게 대답했다. “몰라. 시어머니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어.” 그래서 시할머니에게 물었다. 그 시할머니도 똑같은 대답이었다. 그래서 양노원에 계신 증조 할머니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놀라운 대답이 돌아왔다. “그때는 요리하는 후라이팬이 작아서, 다 들어갈 수 없어 머리를 잘라버리고 몸통만 요리한거야.” 시대가 변화되어 큰 후라이팬을 사용하는데도, 과거의 전통을 그냥 무의미하게 반복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것을 다시 성경의 빛에 비추어 살펴보아야 한다. 성경만이 최고의 권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만든 그 어떤 것도 성경과 같은 권위를 가지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살펴보고 또 살펴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마 15:3)고 책망하셨던 주님의 책망을 들을 수밖에 없다. 사실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당대의 구전율법은 처음부터 성경을 왜곡하려고 만든 것은 아니었다. 구전율법이 만들어진 것은 “어떻게 하면 성경의 가르침을 실생활 속에 잘 적용할 수 있을까”라고 하는 고민에서부터였다. 성경은 일반적인 원칙을 천명하고 있는데, 각각의 사람들의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그 원칙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했고, 그러한 고민에 대한 대답이 랍비들의 해설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해설은 어떤 면에서는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고, 나름대로 성경을 잘 지키려는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게 하나의 법칙이 되고, 그 법칙이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하나의 워칙으로 자리잡게 되는 순간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긍휼과 사랑의 마음으로 이웃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정죄하고 비난하는 도구가 되어버렸다. 사탄은 아무리 좋은 것도 악한 것으로 바꾸어버리는 재주가 있는데, 그런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버린 셈이다. 그래서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의 원칙은 중요하다.

3. 성경 전체로(tota scriptura)

문제는 과연 무엇이 성경적인 가르침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성경이 최고의 권위이지만, 그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다. 성경에 있는 여러 가지 가르침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는 우리에게 과제로 남아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과거보다는 좀 더 성경의 의미를 더 잘 깨달을 수 있다는 점이다. 과학의 발전에 따라, 고고학적 발견에 따라, 원어 연구의 결과에 따라, 사본학적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그리고 다양한 해석학적 방법론들이 제시됨에 따라 성경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들이 열리고 있다. 예를 들어, 한때 우리는 지구 주위를 태양이 도는 것으로 생각했었다. 서쪽으로 갔던 해가 어떻게 다시 동쪽에서 뜨는지는 잘 모른 채, 그저 해는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으로 알고 있던 때가 있었다. 평평한 지구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지동설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성경을 과학적 진리의 빛에 비추어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던 구절들을 시적이고 문학적인 방법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진리에 가깝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게 되었다. 적어도 우리는 오래 전의 사람들보다 성경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더 성경을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문자주의의 위험을 경계해야 한다. 문자주의란 성경의 정신, 즉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을 외면한 채 문자의 표현이라는 함정에 빠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문자주의는 다양하게 나타난 바 있다. 예를 들어,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제사를 드리라고 규정하셨기 때문에 율법대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하지만 그렇게 율법에 따라 철저하게 제사를 드린 이스라엘 민족을 기뻐하지 않으셨다. 이사야 1장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누가 희생제사를 가져오라고 했느냐?” “나는 수송아지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다시는 희생제사를 가져오지 말라.” 말씀하셨다. 제사를 드리라고 규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하지만 놀랍게도 바로 그 하나님께서 제사를 싫어하신다고 하셨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민족이 제사의 근본 목적을 망각했기 때문이었다. 피가 제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는데, 이스라엘 민족이 드린 피가 하나님의 마음에 와닿지 않았던 것이다. 희생제사의 목적은 회개에 있었다.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고 삶의 방향을 돌이켜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으로 변화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회개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저 제사만 드렸을 뿐이었고, 다시 나가서 죄를 반복하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문자주의에 빠진 이스라엘 민족의 뻔뻔한 제사를 싫어하셨던 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정확하게 알았다. 시편 51편에서 다윗은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신다고 선언하였다(16절). 하나님께서는 제사의 제도를 만드신 분인데, 놀랍게도 다윗은 이런 선언을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고백하였다(17절). 다윗은 하나님께서 단순히 물질적인 제사나 외적인 행동만을 원하시지 않고 사람 전체(the whole man)를 요구하신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진실로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였을 때, 하나님은 다윗을 회복시켜 주셨다. 다윗은 문자주의의 위험에 빠지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단순히 문자의 규정만을 볼 게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를 읽어야 한다. 행간을 읽어야 한다. 아내가 남편에게 아이를 좀 보고 있으라고 부탁하고 외출을 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눈으로 보고 있으라는 뜻이 아니다.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면 조치를 해서 아이에게 위험이 생기지 않도록 보호해달라는 의미이며, 아이에게 필요한 것이 있으면 돌보아주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눈으로 아이를 쳐다보고만 있으면 어리석은 남편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어리석은 남편처럼 성경을 읽는다. 문자만을 읽는다.

신약시대에 문자주의의 위험에 빠졌던 것은 바리새인들이었다. 그들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다. 문자 그대로 지켰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인정하지 않으셨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기 위해서만 위선적인 태도로 율법을 지켰다. 심각한 것은 정말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외면해버렸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책망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그들은 문자적으로 아주 세미한 부분까지 다 철저하게 지켰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망각했고, 왜 이런 율법을 주셨는지 무감각했다. 그들은 문자적으로 비교적 아주 작은 것들에 대해서는 민감했는데, 정말 중요한 것은 무시했다.

한번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 날 밀이삭을 잘라먹었다. 이것은 분명히 안식일 법을 어긴 것이었다. 그랬더니, 즉각적으로 바리새인들이 이들을 정죄했다. 그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마 12:7) 성경은 안식일을 규정하고 있고, 제자들은 그것을 위반했는데, 예수님께서는 괜찮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자비로운 마음이라고 하셨다. 문자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아야 하며,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야 할 과제가 우리에게 있다. 하나님의 저울로 본다면, 의식적인 규정들을 형식적으로 잘 지키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비를 베푸는 것이 더 중요하다.

문자주의의 위험에 빠지지 않으려면, 종교개혁의 원리인 성경 전체로(tota scriptura)의 원칙을 기억해야 한다. 성경의 어느 한 표현이나 구절에 의존할 게 아니고,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살펴야 한다. 이것이 칼뱅이 가졌던 해석학적 출발점이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이 성취되었다는 구속사적 관점을 고려하면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 그러기에, 성경에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규정이 있어도 우리는 그 율법에 종속되지 않는다. 자유롭게 먹을 수 있다. 할례를 시행하고 제사를 드리라는 규정이 분명하게 구약 성경에 있지만, 우리는 더 이상 이러한 규정을 문자적으로 지킬 필요가 없다. 더 나아가 안식일 법이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토요일을 지켜야 할 이유도 없다.

더 나아가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 혹시 당시의 문화적인 맥락에서 또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주어진 것인지 아니면 보편적이고 영구한 법칙으로 주어진 것인지를 구분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기도할 때 머리에 두건을 쓸 필요가 없다(cf. 고전 11:5). 성도가 서로 문안 인사를 할 때, 입을 맞추며 인사하라고 되어 있지만(고전 16:20; 살전 5:26; 벧전 5:14; 고후 13:11), 우리가 이 규정을 따라야 할 이유가 없다. 그건 당시에 평화를 표하는 인사법이었을 뿐이며, 다른 문화권에 있는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무엇이 더 중요한 가치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다윗이 배가 고파서 성전에 갔을 때였다. 제사장 아히멜렉은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다윗과 그 일행에게 제공하였다. 이것은 엄격하게 율법에서 금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이를 인정하셨다. 이러한 이야기는 문자주의 함정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이다. 웃사의 경우에는 율법의 규정대로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해야 했다. 웃사는 아마도 하나님의 궤를 보호한다는 선한 동기가 그 밑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동기에도 불구하고 율법에서 규정한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그는 아론 계열의 제사장도 아니었고, 따라서 법궤를 만져서도 안 되었다. 그 대가는 처참했다. 하지만 아히멜렉은 율법의 규정을 어겼는데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오히려 주님께서 인정하셨다. 이 사건을 보면서, 정말 중요한 것은 문자적 규정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말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읽어야 함을 알 수 있다. 문자주의의 함정을 뛰어넘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려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강도 만난 사람이 옆에 있어서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다(눅 10:30-37). 그들이 지나친 이유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아마도 율법의 규정이 그들로 하여금 선을 베푸는 것을 꺼리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문자주의의 함정에 빠지면, 고르반이라는 규정 때문에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막 7:9-13). 그런데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나병환자에 대셨고(마 8:2-3), 안식일 규정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마 12:1-7).

4. 이 시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무엇인가?

종교개혁 시대에 만들어진 신조들이나 교리들은 사실 그 당시의 질문에 대한 그 당시의 답변이었다. 천주교와의 싸움 속에서 무엇이 성경적인 진리인가 질문을 던졌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정리한 것들이다. 이러한 신조들이나 교리들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아주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아쉬운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이런 신조들이나 교리들은 그 당시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질문에 대한 답이 없다는 점이다. 어쩌면 오늘날에는 아무도 묻지 않는 질문들에 대한 대답일 수도 있다. 오늘날 신조와 교리를 다음 세대에게 가르치려고 하면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데, 그 이유는 그들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질문들과 대답들이기 때문이다. 일단 우리는 천주교와의 싸움을 하고 있는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세상의 문화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의 질문이 더 심각하다. 그런데 그런 질문들은 아예 던져지지도 않았고 대답되지도 않기 때문에, 우리의 다음 세대들은 관심이 적을 수밖에 없다.

현재 던져지고 있는 질문이 무엇인지 알아보려 하지도 않고, 그런 질문들에 대한 고민도 없이 16, 17세기의 답변만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은 아예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게으른 것일 수 있다. 성경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더 깊이 알아가려는 노력과 함께, 현재의 질문들이 무엇이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누군가 말을 했던 것처럼, 우린 한 손에는 성경을, 또 한손에는 신문을 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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