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눅 23:39-43)

제1언: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눅 23:32-38) +++ 제3언: 보라 네 어머니라 (요 19:23-27)

사악한 파렴치범이 죽기 전에 예수님을 믿기만 해도 구원을 받는단 말인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다른 두 명의 죄수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고 당연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형을 집행할 때 다른 죄수들도 함께 처형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죠. 하지만 이 장면을 우리가 보면서 묵상하면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이 장면이 바로 이렇게 될 것이라고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해 놓았었다고 하는 점입니다.

이사야서 53장 12절의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목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뉘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라고 되어 있는데요. 잘 알다시피 이사야서 53장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대신하여 대속의 죽음을 죽으실 것을 예언해 놓은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약 700년 전에 예언했던 그 말씀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을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서 죽임을 당하셨는데요. 그 예언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아무 죄도 없으신 우리 주님께서 죄인들처럼 범죄자들과 함께 범죄자들 중에 하나로 간주되어 죽임을 당할 거라고 하는 예언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그 예언대로 예수님께서는 범죄자들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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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한다면 이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가슴 아파할 수 있고 애통해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장면을 통해서 동시에 소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어쩌다 보니까 일어난 일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까 고통스러운 일을 만나게 된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안에서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해 주신 그 모양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할 때, “아, 이것으로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가운데 부활이 있을 것이며,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놀라운 은혜의 역사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소망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큰 그림을 보아야 할 텐데요. 작은 부분만 보면 작은 부분만 떼어놓고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정말 억울한 일도 많고, 고통스러운 일도 많고, 정말 슬픈 일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만 떼어놓고 보면 절망적이고, 그것만 떼어놓으면 정말 답답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큰 그림 속에서 살펴보게 되면, 그 모습이 절망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 그림 가운데 있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면서, 우리가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고 정말 참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그러나 이것이 우연이 된 것도 아니고, 그리고 이것이 끝이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가운데, 하나님의 예정하심 가운데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면서, 우리 모두가 소망을 얻을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삶도 이런 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도 이렇게 힘들게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 가운데 있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위로와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에 달렸던 두 행악자가 있었는데요. 그 두 행악자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지만, 그 두 사람의 반응은 정반대의 반응을 보인다고 보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은 예수님을 비방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그렇다고 한다면 너 자신과 우리를 구원하라고 하면서 조롱하고 비방하였습니다. 이 행악자는 왜 예수님을 비방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 이 행악자는 예수님에 대해서 날을 세우면서, 분노하면서, 자신의 분노를 쏟아내면서 예수님을 향해서 욕하고 비방하고 조롱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도대체 무슨 잘못을 한 것일까요? 이 사람에게 무슨 손해를 입힌 것이 있을까요? 이 사람의 돈을 빌려갔다가 갚지 않은 것이 있었을까요? 그 사람에게 도대체 무슨 악을 행했기에 이 사람은 예수님을 향해서 날카로운 비난을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전혀 그러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향해서 비난의 말을 멈추지 않는 이 모습을 보면서 정말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는데요. 

그런데 사실 이 행악자의 모습이 어쩌면 우리들의 모습과 너무나도 크게 닮아 있습니다. 정말 우리들은 죄성으로 가득한 사람들이어서, 아무 잘못도 하지 않은 사람을 미워하고, 나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은 사람들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그런 못된 습성이 우리들 가운데 있습니다. 정말 사악한 사람들을 향해서는 한마디 항변도 하지 못하면서, 억울하게 피해를 당하고 있는 그 불쌍한 사람들을 향해서는 돌맹이를 함께 던지는 일들이 우리 가운데 너무나도 자주 일어납니다. 

인터넷에 어떤 기사들이 뜨게 되면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들이 악플을 달기 시작하면서 하이에나처럼 물어뜯으려고 하는 모습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어떤 탤런트들을 향해서, 어떤 정치인들을 향해서, 어떤 사람들을 향해서 그들의 모습을 물어뜯는 그런 모습들이 안타깝게도 우리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죠. 선한 일을 하자고 하면 다들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는 사람들이 욕을 하고 악을 행하고 나쁜 짓을 할 때에는 벌떼같이 일어나게 되는 그런 너무나도 모순된 모습이 우리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을 하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비난할 때, 그래야만 나는 그러한 비난의 대열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거짓 심리가 들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욕하다 보면,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칼을 들이밀다 보면, 나 자신은 정의로운 것이고, 나는 깨끗할 것이라고 하는 착각에 빠지게 되는 현상을 느끼게 됩니다. 이것은 어쩌면 영적인 마약 효과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비난하고 정죄하면, 나는 자동적으로 깨끗한 사람인 것양, 나는 자동적으로 선하고 의로운 사람인 양 착각하게 되는 착시 효과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예수님 옆에서 비난하고 있는 이 사람은 누구냐? 바로 엄청난 죄를 지어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해야만 하는 엄청난 죄를 지은 죄인이 그 십자가 위에서 한다는 소리가, 비난하고 욕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죠.

비난하고 욕하는 순간만큼은 나는 정당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사실은 정당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할 만큼

심각한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먼저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을 속이지 말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리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이 아침에 저와 여러분들이 함께 기도해야 될 기도의 제목이 있다고 한다면, “주여, 저희들을 주님의 선한 도구로 삼게 하여 주옵소서.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욕하고 비방하고 분노하는 모습이 아니라, 사람들을 세워주고 격려하고 위로하고 연약한 자들에게는 손을 내밀고, 불쌍한 자들은 도와주고, 연약하고 힘들어하는 자들에게는 사랑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해 주옵소서. 누군가 잘못을 하면 비난하기보다는, 감싸주고 품어주어서 올바른 길로 돌아올 수 있게 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저와 여러분들이 기도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옆에 있었던 또 다른 한 행악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여주었는데요. 이 사람은 예수님의 왼편에 있는 행악자였겠습니까? 오른편에 있는 행악자였겠습니까? 어느 쪽에 있었죠? 그건 모릅니다.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닙니다. 어디에 매어 달려 있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보여주었던 태도가 중요합니다. 놀랍게도 이 사람은 마지막 그 짧은 순간에 아직 자신의 목숨이 떨어지기 전 짧게 남아 있는 바로 그 몇 분 그 사이에,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했고, 하나님을 두려워했으며, 예수님 앞에 나아가 자비를 간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읽은 누가복음 23장 42절의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지금 예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있는 똑같은 처지에 있는 예수님이 보이는데, 나와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그 죄수가 내 옆에 있는데, 이 사람은 예수님이 죄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에 가져올 만왕의 왕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예수님 앞에 보이는 것은 죄수지만 그러나 죄수가 아니라 만왕의 왕이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 주님 앞에 나아가서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해 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첫 번째 행악자는 예수님에게 당당하게 요구했습니다. 내가 만일 그리스도라고 한다면, 너 자신을 구원하고 우리도 구원해내라고 요구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 행악자를 구원해 주셔야만 하는 겁니까? 왜 이 사람을 구원해줘야만 하는 당위성이 어디에 있습니까? 아무런 당위성이 없어요. 이 사람에게 꾸어간 돈도 없고, 이 사람에게 갚아야 될 그 어떤 빛도 없는 상태인데, 왜 이 사람은 당당하게 예수님에게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까? 아무런 요구할 권리도 없는 이 사람이 예수님 앞에 구원해내라고 요구하고 있는 엉뚱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두 번째 행악자는 정반대의 반응으로 예수님에게 나아온 겁니다. 예수님 앞에 나올 때 예수님에게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자기 자신에게는 없다고 하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물건을 사기 위해서는 돈을 내고 그 돈에 대한 값어치를 달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지만, 어떤 서비스를 받을 때는 돈을 내고 그래서 그 서비스 받을 권리가 받아지게 되는 것이지만, 구원을 요구할 만한 아무런 것도 근거가 없는, 아무런 자격이 되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이 두 번째 행악자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주님의 자비로우심에 기대는 것밖에 없는 겁니다. “주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주셔서, 나를 구원해 달라”고 “나를 기억해 달라”고 주님께 간청하였는데, 놀랍게도 주님께서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종종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요. 그것은 우리가 마치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종종 성도님들이 저에게 물어봅니다. “내가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왜 하나님이 내 기도 안 들어주시는 거예요?” 묻습니다. “왜 하나님은 내 기도에 들어주지 않느냐”고 그런 질문을 받게 될 때 제 마음속에서는, “하나님이 왜 들어줘야 하는데요?” 묻고 싶은 마음이 조금 있어요. 왜 들어야 줘야 되는데요? 왜 우리들의 기도에 응답해 줘야 되는 그 이유가 무엇이에요? 

예수님께서 두로와 시돈 지방에 가셨을 때 한 여인이 예수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그 여인은 가나안 출신의, 수로보니게 출신의 여인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께서 놀라운 기적을 많이 행했다고 하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 앞에 한 걸음에 달려 나아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린 겁니다. “선생님, 내 딸이 죽어가는데, 내 딸을 좀 고쳐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아주 매몰차게 응대하였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에 잃어버린 양에게로만 보냄을 받았지, 이방인들에게는 보냄을 받지 않았다고 매몰차게 끊어버린 겁니다. 그래도 이 여인은 포기하지 아니하고 내 딸을 좀 살려달라고, 내 딸을 좀 고쳐달라고 이야기하니까, 그 소리를 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나와서 자꾸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 저 여인이 저렇게 울부짖는데, 좀 어떻게 좀 해보세요. 예수님께서 그 여인을 향해서 더 매몰찬 말씀을 해주세요. 무슨 말씀을 하시냐면,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주는 법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그러니까 이 여인을 향해서 “너는 개와 같은 존재다.” “너는 인간의 가치도 없다”고 이야기해 주는 겁니다. 

그런 충격적인 말씀을 해 주실 때, 이 여인이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상해서 그냥 돌아갈 수도 있는데 놀랍게도 이 여인은 그 순간에 깨달았습니다. “내가 예수님에게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아무것도 없구나.” “내가 예수님에게 무엇인가를 받아낼 수 있는 아무런 자격이 없구나.” 그 사실을 깨달은 이 여인이 할 수 있었던 단 하나의 그 모습이 있었는데요. 그것은 바로 주님의 자비하심에 기대는 것입니다. “주여 옳습니다. 저는 요청할 권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자녀가 아니기에 자녀의 떡을 달라고 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여,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거 안 먹습니까? 그거라도 좀 주세요. 그거라도 좀 주세요.” 울부짖으며 은총을 간구할 때, 이 예수님께서 놀라시며 이 여인의 믿음을 칭찬해 주시는 것이죠. 이스라엘 가운데 이렇게 큰 믿음을 보지 못했다고 하시면서 우리 주님께서는 그 여인의 딸을 고쳐주신 것이죠. 

우리가 종종 착각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가인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린 다음에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받지 않았을 때, 얼굴을 붉히면서 내가 드린 이 제사를 왜 하나님께서 받지 않느냐고 화를 냈던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고마워서 받아줄 줄 알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헌금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고맙다고 하면서 받아줄 줄 알고,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너무나도 좋아서 우리 그것을 받아줄 줄 알고, 권리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다 착각이에요.

놀랍게도 이 행악자는 자기 자신이 주님께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보응을 받는 것뿐이고, 우리는 죄인이며,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한 다음에, 예수님 앞에 나와 자비로움을 구하는 겁니다. “내가 주님께 받을 수 있는 자격은 없지만, 저를 기억해 주실 수만 있다고 한다면 좋겠다”고 하는 간청을 했는데요.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겸손하게 나오는 이 행악자를 받아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4장 23장 43절의 말씀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오늘 내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 하셨던 두 번째 말씀인데요. 아무런 자격도 되지 않는 자를 향해서 예수님께서는 천국에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실 이 행악자를 받아주신 것은 사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바로 그 이유입니다. 자격이 없기에, 자격이 없기에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고, 자격이 없기에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만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내려오셨고 십자가에 지신 것입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내가 거룩해서 내가 완벽해서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굳이 이 세상에 내려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완벽한 사람이 없기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지셨고 그리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죠. 이 사람의 모습은 평생 죄를 지으며 살았다가 마지막 몇 분 만에 예수님을 믿고 인정하고 구원을 받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일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종종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첫 번째 반응이 있다고 한다면 “말도 안 된다”고 하는 반응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구원받을 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는데, 자격이 없는데 구원 받은 거에요. 평생 악을 저질렀는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거에요. 여러분들은 이 모습을 보면서 용납이 되십니까? 이것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용납이 되나요? 안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신앙생활 오래 하셨으니까, 그냥 그런가 보다 하실 텐데, 하지만 수많은 오늘날 기독교의 복음을 조롱하는 자들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정말 착하게 산 것처럼 보이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고 하는 이유로 지옥에 간다고 하는데, 정말 악하게 살았던 사람들 성추행범이나 도둑놈들이나 온갖 나쁜 짓을 한 사람들은 죽기 전에 겨우 몇 분 만에 예수님을 믿고 내가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만 하기만 하면, 그런 사람들이 모두 다 천국에 간다고 하는 사실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복음을 조롱하면서 받아들이지 않는 겁니다.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그냥 그런가 보다 하지만, 극단적인 예를 들면 이런 예를 들 수가 있을 겁니다. 성폭력을 저질렀던, 어린아이에게 몹쓸 짓을 했던 조X순이라고 하는 그런 사람이 있는데요. 아주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온갖 나쁜 짓을 하면서 한 아이의 인생을 완전히 망쳐버린 그 파렴치한 범인이 있는데, 그 사람이 마지막 순간에 죽기 직전에 예수님 믿는다고 하고 주님을 받아들이고 영접해서 그래서 천국에 갔다고 한다면 괜찮겠습니까? 안 괜찮습니다. 모두가 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말 겁니다. 

아니, 지금 우크라나이나에서는 지금 수많은 양민들이 정말 억울하게 죽어가고 있는데, 그래서 그 전쟁을 일으킨 푸틴이 온갖 나쁜 짓을 해대고 있는, 전쟁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데, 그 푸틴이 마지막 죽기 전에 “나 예수님 믿어” 하면서 고백하고, 천국에 갔다면 이해가 되겠습니까? 아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것이고, 아마 이것이 어쩌면 모든 대부분의 사람들의 반응일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탕자가 아버지의 집에 돌아왔을 때 보였던 첫 번째 아들의 반응이 그런 반응이었습니다. 첫 번째 아들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30절의 말씀입니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다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나는 아버지를 위해서 성실하게 일을 하고 아버지의 말을 잘 들었는데, 나를 위해서는 그 어떤 것도 보상한 것이 없는데, 악을 저지르고 창기와 함께 놀아나 버리고 아버지의 재산을 완전히  다 말아먹은 이 나쁜 놈이 돌아왔는데, 잔치를 벌이시고, 송아지를 잡다니, 이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첫째 아들의 그런 항변이죠.

뿐만 아니라 이런 말은 포도원에 들어왔던 그래서 열심히 하루 종일 수고했던 사람의 반응이기도 할 겁니다. 주인이 포도원 품꾼들에게 삯을 나눠주는데, 하루 종일 일한 사람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주고 한 시간만 겨우 와서 일한 마지막에 와서 잠깐 일하던 그 사람에게도 똑같이 하루 치 일당인 한 데나리온을 줬을 때, 그 포도원에 왔던 풍군이 무슨 이야기를 합니까? 마태복음 20장 12절의 말씀에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하였나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이죠. 

하지만 이런 반응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실 우리 자신들도 자격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망각해 버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고, 선하게 살았고, 착한 일을 했기 때문에, 자격이 있는 것이라고 종종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첫째 아들도 아버지를 순종하며 살았던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아버지가 집으로 들어가자고 하는데도 집 밖에 서서 집에 들어가기를 거부했던 불순종한 아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아침부터 와서 일찍부터 일했던 그 품군은 정말 그렇게 한 데나리온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었던 사람이 아니라, 그날 그 포도원 주인이 그 사람을 자기의 포도원에 들여보내지 않았더라고 한다면, 오늘 또 그냥 시장 앞에서 하루 종일 공치며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한 채 빈손으로 집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그런 형편에 있었던 사실을 망각했기 때문에 할 수 있던 항변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두 번째 반응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요. 그것은 무엇이냐면, 이런 행악자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들도 구원받을 수 있겠다고 하는 반응입니다. 지금 가장 구원이 불가능한 사람의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겁니다. 평생 악을 행했던 사람인데 그래도 마지막 순간에라도 회개하고 주님 앞에 나왔을 때 주님께서 그 사람도 받아주었다고 한다면, 우리들도 주님께서 받아주실 수 있다고 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복음인 것이죠.

만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완벽한 사람만 들어올 수 있다. 정말 신앙생활 잘한 사람만 들어올 수 정말 착하게 산 사람들만 천국에 들어올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우리 가운데 그 누가 천국에 갈 수가 있겠어요? 손흥민 선수처럼 세 번 슈팅을 해서 3번 다 골을 넣고 해트트릭을 할 수 있는 그런 엄청난 월드 클래스의 선수들만 그런 영적인 월드 클래스가 된 사람들만 천국에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 가운데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김연아 선수처럼 트리플 악세를 하고 쿼드러플 점프를 하고 그렇게 엄청난 실력을 보인 사람들만 금메달을 딸 수 있듯이 영적인 금메달을 딸 수 있는 사람은 완벽한 실력을 보여줘야만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 가운데 누가 하나님 앞에 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다 초청해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쪽 편에 있었던 강도든 저쪽 편에 있었던 강도든, 그 어떤 상황에 있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믿고 신뢰하고 주님 앞에 나올 수만 있다고 한다면, 그 모두가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고 하는 소망을 얻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찬예식을 진행하게 될 텐데요. 예수님께서 이 성찬 예식을 제정하시면서 초대하신 것은 완벽한 사람 죄 없는 사람들을 초대하신 것이 아니라, 수많은 죄 진 사람들을 초대하시면서 예수님의 몸을 내어주시고 피를 내어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참여할 수 있는 겁니다. 이 가운데 백만장자들만 오라고 하면 못 갔을 거예요. 이 가운데 완벽하게 의로운 사람들만 이 자리에 참여하라고 한다면 우리는 참여할 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고, 그 십자가의 은혜를 나누어 주기 위하여 성찬 예식을 재정하셨는데 이 성찬예식에 참여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체험하는 귀하고 복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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