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 있을진저

화 있을진저

부요한 자 웃는 자는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니, 가난하게 살아야 할까? 지금 불행한 게 궁극적으로는 좋은 것일까?

누가복음에서는 팔복 가운데 4개의 복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정반대로 화가 있을 사람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부요한 자, 지금 배부른 자, 지금 웃는 자, 모든 사람의 칭찬을 받는 자는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상당히 불편한 말씀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되고 싶어 하는 것에 대하여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정말 부요하게 되는 것이 나쁜 것일까? 웃는 것, 배부른 것,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는 것이 나쁜 것일까?

종종 정말 그렇다고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참된 크리스천이라면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지, 절대로 부요해져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식의 접근은 소위 금욕주의적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금욕주의는 영과 육의 이분법적 사고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래서 육적인 것, 물질적인 것은 악한 것으로 간주하고, 오직 정신적인 것, 영적인 것만이 참으로 가치있고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물질들을 다 버리고 가난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 전체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러한 금욕주의적 접근은 옳지 않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보시기에 좋다고 선언하셨고, 우리가 감사함으로 받는다면 아무것도 버릴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주님께서는 부요한 자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마치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이 위험하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보면, 어떤 농부가 농사를 지은 후 소출이 많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 곡식을 쟁여놓고 기뻐하였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부른다면 네가 쌓은 그 모든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이 어리석은 부자의 문제는 그가 물질을 수확하여 많은 것을 거두고 쟁였다는 데 있지 않다. 그의 문제는 그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비를 하지도 않았고, 그저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사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는 데 있었다. 마치 노아 시대의 사람들처럼 말이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를 가다가 홍수가 나서 멸망하였는데, 그들이 행한 것을 우리가 피해야 할 것은 아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일상이다. 사실 그건 노아와 그의 식구들도 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죽음 이후를 준비하지 않았고,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노아는 방주를 준비했다. 그게 차이점이었다.

만일 이 세상으로만 끝난다면 열심히 잘 사는 게 문제가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죽음 이후에 영원이 있다면, 이 세상에만 관심을 두고 살아갈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성공에만 목숨을 걸어서는 안 된다. 어떻게 부요해질까? 어떻게 박수를 받을 수 있을까? 이런 것에만 관심을 두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관심이 이 세상의 것에만 쏠린다면, 결국 우리는 절망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주님에게 소망을 두어야 한다. 주님에게 소망을 두는 자가 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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