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의 서원(삼상 1:11)

한나의 서원(삼상 1:11)

11 서원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한나는 하나님께 서원을 하면서 기도했습니다. 서원이란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신다면 내가 어떻게 할 것인지를 하나님께 약속하면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서원기도는 야곱의 서원기도일 것입니다. 야곱은 에서를 피하여 밧단아람으로 도망하는 길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야곱은 하나님께 서원하며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창 28:20-22).

가장 비극적인 서원기도는 입다의 서원일 것입니다. 그는 암몬 민족과 전쟁을 하러 가면서 하나님께 서원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 주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삿 11:30-31).

이러한 서원 기도의 전통을 따라서 한나는 만일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신다면 그를 평생 나실인(cf. 민 6:1-21)으로 바치겠다고 서원하였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1:11). 한나의 간절함은 기도를 할 때, 서원하는 모습으로 타나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서원하며 기도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고, 어쩌면 우리의 기도 가운데 빠지지 않아야 할 내용이 서원일 것입니다. 하지만 서원기도에 대해서 우리가 종종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서원기도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는 하나님과 흥정하거나 거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구미가 당기는 무엇인가를 내가 제시하고, 그것을 조건으로 내걸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더욱 잘 응답하실 것이라는 생각은 철저하게 비성경적인 생각입니다. 우리는 종종 십일조 혹은 더 나아가 십의이조를 바치는 것을 서원의 내용으로 하여 물질의 복을 간구하기도 합니다. 또한 병을 낫게 해주시면 주의 일을 하겠다는 서원을 하기도 하고,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의 종으로 바치겠다는 서원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서원의 기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더 많이 더 빨리 얻어내겠다는 속셈이라면 처음부터 잘못된 서원입니다.

거래와 흥정은 서로의 필요가 맞아떨어지는 두 당사자 사이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장사하는 사람은 돈이 필요한 것이고, 물건을 구매하는 사람은 그 물건이 필요하기 때문에 거래가 성사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필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러한 점을 바울 사도는 아주 명확하게 표현하였습니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행 17:24-25). 그래서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흥정하려고 시도한다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이 아쉬운 것이 없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서원하는 것은 거래와 흥정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돌리려는 목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가 서원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 때문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도 감사하기에 그 은혜 안에서 살겠다는 다짐의 의미가 서원입니다.

예전에 내가 사랑하는 어떤 후배 목사님으로부터 추천서를 써 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제 담임목사 청빙에 지원하려고 하는데 추천서를 써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나는 내가 사랑하고 아끼고 신뢰하는 후배이기 때문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추천서를 써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후배 목사님이 내게 이렇게 답을 해왔습니다. “목사님 이름에 먹칠하지 않도록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 후배 목사님이 내게 한 말은 추천을 해주는 것에 대한 조건으로 내세운 것이라기보다는 나의 응답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었고 자기 자신에 대한 다짐이었습니다. 서원이란 그런 것입니다.

한나가 기도할 때 과연 하나님께 흥정하는 마음으로 조건을 내달았는지, 아니면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짐을 하는 것인지는 본문만 가지고는 명확하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진실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와 자비를 깨닫게 될 것이고, 그래서 흥정의 자세로 나아가기보다는 감사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한나도 흥정하면서 하나님과 거래를 시도한 것이라기보다는 감사의 표현으로 다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부터 놀라운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죄인인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단 말입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기에 가능한 것이고, 그러기에 감사와 감격 없이는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을 하시는가 하시지 않는가를 떠나, 이미 감사할 조건은 충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시다는 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전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우리의 기도를 그대로 들어주시며 응답하실 때도 있지만, 때로는 내가 기도한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를 인도하실 때도 있습니다. 내가 가장 좋다고 생각한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말입니다. 심지어 가장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응답하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응답하시든, 부인할 수 없이 가장 확실한 사실은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주시는 응답이라는 사실이며, 더 나아가 그것이 가장 좋은 응답이라는 점입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사 55:8). 그러기에 우리는 기도하면서 이미 응답 받기 이전에 감사할 수 있고, 감사한 마음이 들기에 하나님 앞에 서원할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에 보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것도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 준만큼 용서를 해달라는 하나님과의 흥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려 드리는 마음의 다짐입니다. “이제는 용서하며 살겠습니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한나의 기도는 그런 점에서 하나님과의 흥정의 시도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었습니다.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한나가 말했는데, 사실 아들을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아도 감사할 수 있는 능력을 한나는 기도하면서 얻었을지도 모릅니다. 성경에는 그러한 내용은 물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엿볼 수는 있습니다. 엘리 제자장이 한나에게 “평안히 가라”고 했을 때, 한나는 돌아가 다시는 얼굴에 근심의 빛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18). 아직 아들이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한나는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 엘리 제사장의 말이 위로가 될 수 있었을까요? 아무리 제사장의 말이라 할지라도 그 말 한마디에 사람은 마음에 완전한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집에 같이 살던 한나의 대적 브닌나가 그 이후로부터 조용하고 잠잠해졌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한나는 돌아가 얼굴에 근심의 빛이 없어지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기도하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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