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사유의 부재가 불러온 K-방역의 재앙
무엇보다도 먼저 코로나19라는 전에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세계적 전염병 대유행의 상황 속에서 국민을 보호하고 치료하기 위하여 일선에서 땀과 수고의 노력을 아끼지 않는 모든 분에게 감사를 드린다. 코로나19가 시작할 때만 해도, 이렇게 우리를 끈질기게 괴롭힐 줄은 몰랐다. 시간이 가면 해결되겠지 하고 막연하게 생각했지만, 코로나19는 벌써 1년째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국민의 삶은 여기저기서 무너져버렸다. 코로나19를 막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방역 당국과 전염병과 싸우는 분들이 없었더라면, 우리의 삶은 더 큰 피해를 당했을 것이다. 이전의 그 어떤 방역 당국보다 더 열심히 더 잘 방역을 위해 수고해 주었다. 그래서 그분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또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이분들은 마땅히 박수를 받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K-방역이 대응하는 방식은 사람들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엄청난 재앙을 가져왔다. 이러한 재앙은 우리 사회를 무너뜨리고 있으며, 전염병 이상으로 우리에게 해로운 결과를 가져왔다. 이 문제는 우리 사회가 다함께 고민해보아야 할 문제이다. 앞으로 이런 팬데믹의 상황이 수없이 반복될 것인데,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한단계 업그레이드 된 K-방역이 되기를 희망하는 마음이다.
내가 느끼는 K-방역의 가장 큰 문제점은 철학적 사유의 부재이다. 과학의 영역에 생뚱맞게 무슨 철학적 사유를 논하느냐고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사실 고대에는 철학자가 곧 과학자였고, 수학자였고, 신학자였다. 과학이 철학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 철학이란 다른 게 아니라 조금만 더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습관이다.
예를 들어, 우리의 방역은 전염이 발생한 업종을 규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어 왔다. 몇몇 교회에서 집단 확진이 생기게 되면, 모든 교회의 회집을 금지시키는 방식으로 대응하였다. 몇몇 카페에서 확진자가 생기게 되면, 모든 카페 안에서 음료를 마실 수 없고 오로지 테이크 아웃만 가능하도록 규제하였다. 몇몇 체육시설에서 확진자가 생기면, 모든 체육시설에 대하여 영업을 제한하는 방식으로 규제하였다. 이러한 규제를 시행할 때, 감염이 줄어든다. 당연하다. 영업을 하지 못하게 하니 당연히 사람들간의 접촉이 줄어들 수밖에 없고, 사람들의 접촉이 줄어드니, 감염 확산이 줄어드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식으로 어느 정도 K-방역은 성과를 이루어냈다.
하지만 K-방역이 박수를 받고 정치인들이 그 열매를 따먹는 상황에서, 영업제한을 당한 업주들은 생존권이 위협받게 되었다. 재난지원금이라는 것으로 약간의 보상을 해보지만, 지원금이라는 것 자체가 영업수익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간에 기별이 가기 힘든 금액인 만큼 K-방역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업주들의 고통은 이루말할 수 없을 것이다. 업주만 고통을 받는 게 아니라, 그로 인하여 일반인들의 취업의 기회도 사라지게 될 것이고, 결국 소비할 수 있는 파워가 약해져 전체적인 국가 경제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K-방역이 업종을 중심으로 규제하는 방식을 채택할 때, 업종 간의 공평의 문제가 당장 제기될 수밖에 없다. 방송국에서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방송을 만들어내도 아무런 문제가 없고, 공무원들은 아무런 제지 없이 같이 모여서 일하고, 병원에서는 확진자가 발생해도 여전히 일을 하는데, 확진자가 다녀갔다는 이유만으로 교회는 폐쇄를 2주간 당해야 하고, 그 넓은 장소에서 1시간 정도 멀찌감치 떨어져 예배를 드리는 것도 불가능하다면, 누가 방역 지침을 공평하다고 생각할 것인가? 카페에서는 앉아서 커피를 마실 수 없는데, 일반 음식점에서는 정상적으로 영업을 할 수 있다면 그 누가 방역당국의 지침을 공평하다고 생각하겠는가? 태권도 도장은 영업이 가능한데, 헬쓰 클럽은 안 된다고 하면 누가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K-방역이 복잡하게 꼬인 것은 업종을 중심으로 규제하는 방식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아무 근거 없이 필수적인 업종과 필수적인 업종을 나누었다. 그래서 필수적인 업종은 확진자가 발생해도 영업이 가능하게 허용하는 반면, 그렇지 않은 업종은 불허했다. 그래서 고등학교 3학년은 학교에 가도 되는데, 1학년과 2학년은 갈 수 없다. 종교생활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기에 금지되는 반면, 백화점은 계속 영업중이다.
K-방역이 내놓은 가장 어리석은 지침은 식당에 같은 일행으로 5명이 함께 가면 안 된다는 지침이다. 도대체 누가 이런 정책을 제안했을까? 그 제안을 받아든 책임자는 무슨 생각일까? 식당에는 어차피 수십 명이 들어 앉아서 식사를 한다. 모르는 사람들끼리 한 공간에서 식사를 하면 전염이 안 되어도, 아는 사람들 5명이 들어가면 전염이 더 잘 된다는 뜻일까? 매일 청사의 구내식당에서는 사람들이 점심식사를 하는데, 그런 식사는 안전한 반면, 일주일에 단 한번 교회당에서 식사를 하면 전염에 더 걸리는 것일까? 교회에서 점심 제공을 하지 않아서, 인근 식당에 가서 먹으면 안전하다는 말일까? 도대체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교회에서 확진자가 나오고, 학원에서 확진자가 나오고, 콜센터에서 확진자가 나오고, 어느 카페에서 확진자가 나왔다면, 그것은 그런 업종이나 공간이 다른 곳보다 훨씬 더 전염의 위험성이 있어서가 아니다. 전염은 확진자의 비말이 다른 사람에게 전파될 수 있는 거리에서 전염방지 대책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있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어느 교회나 학원이나 콜센터에서 집단 감염이 있었다면, 그렇게 전염에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교회나 학원이나 콜센터에서는 확진자가 나오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확진자가 오지 않았거나, 확진자가 왔더라도 거리를 유지하거나 마스크를 썼기 때문이다. 방역 대책은 전염이 발생한 “업종”을 금지할 것이 아니라, 전염의 “상황”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공평하게 적용해야 한다. 교회에서 식사를 제공하지 못하게 할 게 아니라, 식사를 하려면 그 어느 곳이든지 반드시 칸막이를 만들라는 행정명령을 내려야 한다. 그런데 식당에서는 마음대로 식사하고, 회사 구내식당에서는 매일 먹으면서, 교회에서만 일주일에 한 번 먹는 그 식사를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접근법이다.
예전에 한국계 조승희라는 사람이 총기를 난사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일이 있었다. 그가 한국 사람이었다는 것과 범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누구든지 총을 가질 수 있고, 누구든지 총을 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이상의 불행에 대한 대책은 한국 사람들을 미국에서 추방하는 것이 아니었다. 총기를 규제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그게 과학적이고 철학적 접근이다. 그런데 K-방역은 총기사고가 생겼을 때, 한국인들을 추방하는 것과 비슷한 대응이다. 흑인들의 범죄가 많다고 모두 추방하려는 것과 비슷한 생각이다.
안타깝게도 방역당국은 전염이 발생하는 상황보다 전염이 발생한 업종을 규제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세웠다. 물론 이러한 방식은 콘트롤하기 쉽다. 행정명령 내리고 벌금을 때리면 되니까 말이다. 공무원들은 코로나 상황 속에서도 하나도 경제적인 타격을 입지 않는다. 오히려 일부는 휴일수당 야근수당 등으로 더 많은 이득을 얻기도 한다. 그래서 국민들이 경제적 타격으로 흘리는 눈물과 고통을 전혀 모른다. 일제 시대의 순사들이 하는 방법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 그대로 남아 있다. 국민을 콘트롤하면 되는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안일한 생각이다.
언론은 더 가관이다. 언론은 사회의 공기로서 정부의 정책에 대한 바른 비판을 통해 정책을 바르게 세우도록 해주어야 한다. 하지만 언론은 방역 당국의 정책이 치명적인 잘못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그리고 방역당국의 지침을 어긴 사람들을 고발하는 것에만 몰두한다. 같은 일행 5명이 함께 식당에 들어가면 안된다는 정책을 비판하기보다는, 5명이 넘는 사람이 나누어 식당에 들어가서 먹는 것을 고발한다. 3,000명이 들어가는 교회당에 20명만 허용하는 것에 대한 불합리를 말하기보다는 그것을 위반한 교회를 비난거리로 삼는다.
사실 방역 당국은 방역 실패에 대한 책임을 방역지침을 따르지 않는 일부에게로 돌리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국민들은 방역당국을 성토했을 것이다. 희생양이 나올 수밖에 없는 방역 지침을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지침을 어기게 되고, 어기다가 발각된 사람들에게 모든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게 만들었다. 정치인들이나 종교인들이 방역지침을 지키지 않을 경우 타격은 더 크게 입는다. 이런 식의 대응은 미국에서 흑인들은 범죄의 집단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어 모든 분노를 그쪽으로 쏟아붓게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이런 식의 대응은 몰랐다면 철학적 사유의 부재이고, 알면서도 일부러 그랬다면 정말 사악하다.
밤중에 길을 가다가 어떤 여성이 강간을 당했다면, 왜 밤중에 돌아다녔냐고 그 여성을 비난할 게 아니다. 강간을 행한 사람이 나쁜 것이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지 못한 것이 문제이다. 그런데 K-방역은 전염병에 걸린 사람을 죄인으로 증오하게 만든다. 해고시키고, 직무정지시키고, 구상권 청구하고, 온갖 사회적 비난을 받게 만든다. 국민들은 어떤 식으로는 자신들이 당하는 피해에 대한 분노의 배출구가 필요한다. 질이 낮은 언론과 K-방역은 아주 교묘하게 보호받아야 할 사람을 희생양으로 만들어버렸다. 독감 백신을 맞은 사람이 사망한 일이 발생했다고 해서, 독감 주사를 맞는 것을 중단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왜냐하면 독감백신과 사망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어느 업종에서 확진자가 자주 나온다 해도, 그것은 그 업종은 이 세상에서 없애버려야 할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방역을 철저하게 해서 확진자가 나오지 않은 같은 업종의 수많은 사람들에게까지 왜 비난을 감수하게 만들어야 할까?
사실 코로나19에 감염된 사람은 증오의 대상이 아니라 위로받아야 할 대상들이다. 기저질환자들은 죽을 수도 있는 아주 위험한 병이니, 병에 걸린 사람은 우리가 보듬어야 한다. 그런데 언론과 방역당국은 확진자를 공공의 적으로 만들어버렸다. 적으로 만들면 확진자를 찾아내고 치료하는 게 더 어려워진다. 안타깝게도 교회에서조차 확진자들을 혐오하였다. 그들이 이단이라는 이유로, 문란한 생활을 한다는 이유로 그들을 혐오하고 비난의 대열에 동참했다. 그런 분위기는 결국 우리들에게로 향하게 될 수 있다는 점을 망각한 채 말이다. 적군이라도 다치면 치료해주었던 나이팅게일의 마음은 사실 성경 속에도 있다. 사마리아 사람이 적대적인 유대인을 치료해주었으니까 말이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들이 아플 때에는 비난하기 보다는 도움을 주는 게 기독교적 사랑이다. 적어도 크리스천이라면 방역당국이 만들어놓은 희생양 프레임에 끌려다닐 것이 아니라, 신앙적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서 정치(政治)가 필요하다. 전쟁보다는 평화를 추구해야 하기에, 군인들에 의해서만 군대가 돌아갈 것이 아니라 문민통치가 필요한 것처럼, 방역당국의 일방적 독주에 방역을 다 맡기면 안 된다. 벼룩을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일들이 종종 어느 한 분야의 전문가에게서 나타난다. 그래서 전염병의 대응은 과학자들만의 몫이 아니라, 정치인들의 개입이 필요한 것이고, 경제학자도 참여해야 하고, 교육학자도 참여해야 하고, 인권위원장도 참여해야 하고, 법학자의 참여도 필요하고, 종교인들도 참여해야 한다. 삶이란 그렇게 전염병만 막으면 되는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K-방역에는 철학적 사유도 없고 정치(政治)도 없다. 철학적 사유의 부재로 인하여 코로나19 시대에 우리는 상당히 괴롭다. 서민들의 삶은 무너져가고 있고, 신앙의 생활은 과도하게 제지되고 있으며, 국민들 사이에 희생양을 향한 분노가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이게 무섭다. 유례없는 전염병의 확산보다 더 무서운 것은 우리들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집단 증오와 광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