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 한 사람이 던진 질문에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 질문이요,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선생님, 우리가 저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쳐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그런데 이게 상당히 위험한 질문입니다.
왜 위험하냐? 세금을 바쳐야 된다 그러면 누구에게 미움을 받아요?
유대인 백성들에게. “아, 저 선생은 훌륭하고 의로운 사람인 줄 알았더니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라고 하는구나. 똑같은 사람이야. 로마의 앞잡이야.”
세금을 바치지 말라 하면 어떻게 될까요? 당장 로마 당국에 고발해서 잡혀갈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의 의도가 있었죠. 정말 몰라서 물은 게 아니고 예수님을 얽어매서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서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의도를 아셨을까요, 모르셨을까요?
예, 그럼요. 예수님이 그 의도를 아시고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이렇게 말씀하실까요, 저렇게 말씀하실까요?
자, 여기서 예수님의 기가 막힌 대답이 나옵니다. 주머니 아무리 뒤져봐도 동전이 안 나와요.
요즘 동전 안 들고 다니시죠? 예. 당시의 동전에는 당시 통치자의 얼굴이 새겨져 있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던 시대니까 로마의 동전 데나리온, 거기서 예수님께 질문을 던진 그들도 로마의 동전을 가지고 있었어요.
“너희가 가진 동전을 꺼내봐라.” 꺼냈습니다. “거기에 있는 얼굴이 누구의 것이냐?”
“가이사의 것입니다.”
“그러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라.”
예수님의 이 말씀의 뜻이 뭡니까? 이거 알 듯 말 듯 아리송아리송하잖아요.
이러라는 거예요, 저러라는 거예요? 한마디로 예수님은 그들이 던진 질문을 그들에게 던져주고 있는 겁니다.
“너희가 가이사의 것을 가지고 있느냐? 그러면 가이사에게 바쳐라. 그러나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이냐? 그러면 마땅히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옳다.”
여러분,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가이사의 통치를 받고 있다면, 그렇다면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당연하겠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는 누구냐?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냐? 너희가 정말 너희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한다면, 너희는 마땅히 그 하나님께 드려야 할 그것을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신 거죠.
중요한 건 뭡니까? 우리가 누구의 백성인가, 우리가 누구의 통치를 받고 살아가는 사람인가 하는 거죠.
우리가 누구에게 속한 사람인가 하는 질문을 예수님은 거꾸로 그들에게 던지고 계신 겁니다.
그들 스스로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에게 속한 사람인가, 나는 누구의 통치를 받고 있는가’를 통해서 스스로 답을 찾도록 하고 계신 거죠.
여러분,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세금을 바치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가 누구에게 속한 사람인가 하는 문제와 연결이 된다는 거죠.
우리는 여기서 십일조의 문제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맥추감사절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는 날인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봄철의 첫 소산을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는 것인데, 도대체 왜 그래야 되는가, 그렇게 살 필요가 있는가 하는 거죠.
많은 분들이 십일조는 율법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에 매여 살지 않는다고 말을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굴레에서 벗어난 사람들이고, 우리는 더 이상 율법에 매여 살지 않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질문, “십일조는 과연 율법의 규정인가?”
중요한 건 십일조가 그저 율법의 규정만이 아니라는 겁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하나님의 백성들, 언약 백성의 정체성이고, 그리고 그 정체성을 고백하며 인정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원리여야 한다는 거죠.
중요한 건, 그러면 십일조가 율법이 아니라고 그러면 여러분 이걸 확인해 봐야 되겠죠. 율법이 먼저 있었을까요, 십일조가 먼저 있었을까요?
율법이 먼저예요, 십일조가 먼저예요? 예, 여기저기서 서로 다른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확인해 보면 되죠. 중요한 건 창세기 14장 17절을 보십시오.
어디요? 창세기, 창세기. 창세기 14장에는 아브라함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러분, 율법은 모세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졌어요. 그렇죠? 출애굽 때에 시내산에서 모세가 받은 거예요.
그러면 모세가 먼저예요, 아브라함이 먼저예요?
우리 청소년들이 너무 잘하네요. 이쪽에서 제일 큰 소리가 났어요.
아브라함이 당연히 먼저입니다. 아브라함이 모세보다 무려 4백 수십 년 먼저 있었던 사람이에요.
그 아브라함에게서 어떻게 십일조가 유래하는지 봅시다.
창세기 14장 17절입니다.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에 소돔 왕이 샤웨 골짜기 곧 왕의 골짜기로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살렘 왕 멜기세덱이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대요.
하나님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이 어떻게 했느냐, 19절부터 “그가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제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라함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아브라함이 얼마를 바쳤어요?
10분의 1. 요즘 말로 하면 뭘 바쳤어요?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십일조는 출애굽기에 나오는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아니다! 십일조는 율법이 우리에게 있기도 전부터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세운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바쳤더라.
사실은 당시 십일조를 바친 사람은 아브라함뿐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고대 중근동에서 10분의 1을 바친다는 것은 일종의 주군과 봉신 사이에 소속과 충성의 표시였어요.
당시에는 주군이 있었고 봉신이 있었어요.
힘센 군주가 그 일정한 영역 안에 있는 자기의 신하들이나 백성들을 지켜주고 보호해 주는 거죠.
신하와 백성 된 자들은 그 주군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그 맹세의 고백의 표시로 뭘 바쳤을까요?
자기들 소산의 10분의 1을 바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라는 것은 주군과 봉신, 주인과 신하 사이에 맺어진 언약 관계, 그 충성 관계에 대한 표시였다는 거죠.
그래서 아브라함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던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다는 것은, 결국 멜기세덱에게 충성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가 찬송하고 그가 축복을 요청드린 하나님에 대해서, 그 하나님에 대한 소속과 충성, 언약 관계에 대한 그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표시였고 믿음의 고백이었다는 겁니다.
자, 여러분 따라 해봅시다. “나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아멘! 자, 그렇습니다.
그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우리의 정체성을 하나님 앞에서 확인하고, 우리의 그 하나님의 백성 된 삶의 원리를 따라가는 것이 바로 십일조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삶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율법주의자들의 위선과 형식주의는 비판하셨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져야 할 정체성으로서의 십일조를 폐기해야 된다고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거죠.
오히려 예수님은 율법의 본질에 해당하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실천하는 삶을 강조하시면서도, 그와 함께 십일조를 드리는 삶도 버리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너희가 정의와 긍휼과 믿음만 행하면 된다. 그것만 행하면 굳이 교회에 십일조 드리지 않아도 되고 너희의 물질을 너희가 원하는 대로 정의를 위해서, 긍휼을 위해서 다르게 사용하면 되는 거야. 똑바로 쓰면 되는 거지 꼭 그런 거 안 드려도 돼.”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예수님 뭐라고 하셨어요?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 그 믿음의 고백을 따른 삶의 원리가 여전히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따라 행하는 우리들의 삶에 여전히 함께 이루어져야 할 중요한 삶의 원리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 23절에 이런 내용이 나와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바리새인들은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저버리고 십일조만 드리는 것으로 자기들의 의를 삼고, “나는 율법을 지켰고 저들은 율법이 없는 자들이니 나는 훌륭한 사람이고 저들은 내쫓아야 된다”라고 그들의 차별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하는 철저한 율법주의자들이었는데, 예수님은 “그들이 그렇게 했으니까 너희는 십일조 같은 거 안 드려도 되고 정의와 긍휼과 믿음의 삶만 살면 율법의 본질을 지키는 거다” 그러지 않으셨어요. 분명하게 말씀하셨어요.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요. 그러면 성경을 보니까요,
복음서에는 십일조라는 말이 나오는 것 같은데, 초대교회 사도행전이나 사도들의 서신서에 보면 십일조라는 말이 한마디도 안 나온다는데요?
그러면 초대교회에서는 십일조 안 드린 거 아니에요?
“구약시대에만 십일조가 있었고 예수님이 계시던 때까지만 있었고, 오순절 이후에 교회가 세워진 뒤에는 십일조 같은 거 아예 없었던 거 아니에요?” 그런 거 한번 봅시다.
어디 진짜 그런가 한번 봅시다. 신약시대에는요,
십일조라는 표현은 나오지 않지만 연보라는 말로 성도의 헌금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드린 헌금 연보가, 그러면 10분의 1이 너무 많으니까 십일조 같은 거 신경 쓰지 말고 줄여서 해도 돼라고 말해서 십일조라는 말을 안 쓴 건가, 그런가 한번 볼까요?
여러분 고린도전서 16장 1절과 2절에 보면 성도를 위하는 연보의 원리에 대해서 나옵니다.
한번 읽어봅시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헌금에 대해서 말하는 거예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그러니까 지금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도 연보에 대해서 교훈했고,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도 연보에 대해서 교훈하고 있는 거예요.
그 연보를 어떻게 해야 되느냐? 2절에 보니까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우선 헌금은 언제 드리라고요? 매주 첫날! 왜 첫날일까요?
이날이 바로 주일이에요. 일곱 날, 주일부터 시작해서 일곱 날. 그러니까 안식 후 첫날, 초대교회는 안식 후 첫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일날 모여서 예배드리기를 시작했어요.
그 주일에 예배드릴 때 모여서 연보를 하라는 거죠.
어떻게 헌금을 해요? “각 사람의 수입에 따라서.” 예배당에 들어올 때 저 앞에서 입장료 정해놓고 “5천 원씩 만 원씩 똑같이 내라”? 아니요, 아니요.
각 사람의 수입에 따라, 많이 버는 사람은 많이, 적게 버는 사람은 적게. 그게 무슨 원리예요?
그게 십일조의 원리예요. 자신의 소득의 분량에 따라 적으면 적은 대로, 많으면 많은 대로 일정한 금액을 정해놓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말은 무슨 말이에요? 헌금을 드릴 때 기분 내키는 대로 드리지 말라는 거예요.
어떤 사람 헌금 드리려고 하는데 옆에 아내하고 의논합니다.
“얼마 드릴까? 헌금 얼마 낼까?” 아내가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목사님 설교 들어보고 은혜가 되면 좀 많이 내고 은혜가 안 되면 조금만 내.” 네, 조금만? 맞아요? 아니요, 아니요. 그런 게 아닙니다. 성도로서 드리는 연보는 하나님 앞에 내 수입이 일정함에 따라 그 수입에 따라 정해놓고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는 겁니다.
그것도 교회가 어떻게 그 헌금을 관리해야 되는가? “모아두어서 내가 너희를 방문할 때 따로 연보하지 않도록 해라” 그랬어요.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목회하는 목회자가 아니었어요.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가 맞지만 바울은 지역마다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편지를 썼죠. 그렇게 자신이 고린도 교회를 방문할 때 바울은 그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자신의 복음 전도 사역을 물질적으로 돕기를 원했어요.
바울만이 아닙니다. 당시는 이렇게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순회 전도자들이 아주 많이 있었고, 교회들은 그 전도자들의 삶과 사역을 후원할 책임이 있었어요.
오늘날 우리가 목회자들에게 생활비를 공급해 드리고, 오늘날 교회가 여러 선교사들의 사역에 후원하고 파송하고 협력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원리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몰라요. 그러니까 교회 공동체가 해야 할 중요한 책무는 뭐냐 하면 이와 같은 복음의 사역을 위해서 연보를 모아두는 거예요.
준비해 두는 거예요. 그때그때 누가 찾아오면 “야, 또 누구 찾아왔어. 우리 좀 가진 대로 꺼내봐” 이렇게 하지 말라는 거죠.
교회의 연보를 일정하게 예배 시간마다 수입에 따라 정해놓고 책임 있게 연보를 드리며, 그 재정을 잘 관리하며 사역자들을 위해서, 선교사들을 위해서, 복음 전도자들을 위해서 언제든지 그 필요한 사역들을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교회의 올바른 사역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이러한 연보의 원리는 어디서 나온 거냐? 그건 다름 아니라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부터, 그 사랑이 우리에게 보여준 모습을 본받는 모습이라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8장 9절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유하신 이로서” 예수님이 얼마나 부자예요! 하나님 아버지가 그의 아버지시고, 그의 독생자가 되시고, 온 우주와 만물의 주인이시잖아요.
그러니 세상에 예수님보다 더 부유하신 분이 있어요?
“부유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유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 부유하신 분이 그 모든 부요를 누리기를 원하지 아니하시고, 이 땅 가운데 가장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가난의 고통을 다 체휼하실 뿐만 아니라,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그의 속옷까지 남김없이 벗어주시고 빼앗기시고, 그리고 자기 자신의 몸까지 내어주신 분이 바로 우리 예수님이신 거죠.
우리가 그 은혜로, 우리가 그 사랑으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그분의 그 사랑을 본받는 삶을 살아야 된다는 거죠.
그렇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성취된 이 은혜의 원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받은 사람의 삶의 원리, 존재의 원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 14장 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아멘입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소유가 되었으므로 우리의 주인이신 주님 앞에 우리의 그 정체성, “우리가 주님의 것입니다”라고 하는 정체성을 고백하고 그 정체성에 합당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뭐냐? 그것이 우리 수입의 일정한 부분을 하나님 앞에 내어드리고, 그것을 모아서 필요한 성도들과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위하여 사용하는 거죠.
복음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 모든 그리스도 안에서 언약 백성의 삶이 무엇을 통해서 이루어지느냐? 바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공동체,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부어주시고 이 땅 가운데 그리스도의 몸으로 쓰임 받도록 세우신 교회 공동체를 통하여 그 모든 삶의 원리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어떤 분들 그런 이야기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래, 뭐 다 좋아. 10분의 1을 드리는 것도 좋고 다 좋은데, 아니 그게 왜 꼭 교회를 통해서만 돼야 돼?
나는 10분의 1 아니라 10분의 2를 내가 가난한 사람을 위해 구제도 하고, 자선단체에 나누기도 하고, 선교단체에 기부도 하는데 왜 꼭 교회만 드려야 돼?” 그러나 여러분, 보십시오.
언약 백성의 삶이 가장 아름답게 이루어질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공동체를 통하여 그 교회가 세워지고 그 교회가 사명을 감당하는 겁니다.
언약 백성들이 그 몸된 교회를 바로 세우는 책임을 감당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성령의 공동체를 통해 준비하신 역사들을 이루어 가시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되실 겁니다.
물론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이루어 가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택하신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 뭐냐?
저와 여러분에게 성령 부어주셔서 저와 여러분의 몸을 교회의 지체로 세우셔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통해 세상을 충만하게 하시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이 계획하신 섭리요, 경륜이고 방법이라는 사실을 여러분 아셔야 됩니다.
그래서 그 성령 받은 교회 공동체가 어떻게 드리며 나누며 베풀며 살았는지 우리는 사도행전 4장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4장 32절에 보니까 성령 받은 교회 공동체의 모습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아니, 내 거를 내 거로 안 챙기고 이렇게 내어놓으면 사람들이 다 그걸 내 것처럼 사용하면 우리 다 같이 가난해지는 거 아니에요? 아니, 이 쥐꼬리만한 걸 가지고 이렇게 너도나도 나누면 우리 다 같이 가난해지는 거 아니에요?”
그럴까요, 여러분? 여러분 오병이어의 이야기를 아시죠?
광야에서 5천 명의 사람들이, 아니 사실은 어린아이들과 여자들까지 하면 2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셨는데 제자들에게도 돈도 없고 먹을 것도 없어서 제자들은 “아니 주님, 우리가 어떻게 줍니까? 저들에게 각자 돌아가서 알아서 사 먹으라고 하세요.”
그때 한 아이가, 소년이 자기 도시락을 들고 나왔어요.
그 도시락이 얼마나 됐을까요? 5천 명, 2만 명 택도 없죠.
예,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5개. 겨우 그거, 꼴랑 그거. 어떻게 생각하면 정말 아니 저 사람들에게 그걸 다 나눠주려고 하면 자기도 배를 못 채우게 되는 그런 상황.
그러니까 계산이 빠른 사람 같았으면 ‘아유, 이거 다른 사람 보기 전에 나 혼자 조용히 먹어야지. 이걸 갖고 나누긴 누구에게 나누어줘’ 그랬을 텐데, 그랬을까요?
예수님의 손에 그 작은 도시락이 주어졌을 때 거기 있는 모든 사람들, 5천 명, 2만 명의 사람들이 먹고 12바구니나 남았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그 놀라운 역사가 초대교회에 그대로 일어났습니다.
그 가난한 성도들이 모여서 자기가 가진 것들을 가난한 사람들과 나누는데, 아 그러니까 우리가 다 같이 가난해졌더라, 그게 아니고 사도행전 4장 34절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그중에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이 다 같이 그 풍요와 은혜와 사랑을 나누면서 살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 나라의 역사입니다. 이 놀라운 역사를 우리 하나님은 사실은 신약에서뿐만 아니라 구약에서부터 이미 우리에게 말씀하셨어요.
신명기 15장 4절부터 보면 율법의 말씀 가운데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그 명령대로 지켜 행하며 살면—그 명령이 뭡니까?
“너희 땅에 있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아라. 그들을 먹이고 입혀라.
너희 밭의 소출이 거두어질 때에 추수할 때에 이삭이 떨어지면 줍지 말아라.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의 몫이다. 너희 밭의 구석구석까지 다 베지 말아라. 땅이 없는 자들,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그것을 나누어 주어라.”
오늘 우리들 계산이 빠르고 경영에 확실한 사람이라면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아니, 그 말씀대로 살면 가난뱅이를 못 면해. 그렇게 사니까 가난하지.” 그럴까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가난할까요? “자기 것도 없으면서 뭘 나누고 베풀고 섬기며 살아. 그러니까 평생 그 모양 그 꼴로 살지.” 여러분 혹시 그런 이야기 못 들으셨습니까?
그러나 분명히 주님 말씀하십니다. “내 명령대로 살면, 그와 같이 살면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을 것이라.”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를 따라 나누고 베풀고 드리며 살면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을 것이라!
우리의 공동체가 복을 받고 우리의 삶이 복된 삶이 되고, 우리가 주님이 주시는 그 풍요를 모든 이들과 나누며 함께 누리는 복된 하나님 나라의 삶이 되는 것을 여러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그것이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삶의 약속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은 왜 이렇게 십일조에 대해서 오해하게 됐을까요?
왜 이렇게 부정적인 생각을 많이 가지게 됐을까요?
우리가 십일조 하면 먼저 떠올리는 성경이 말라기 성경입니다.
많은 분들이 말라기 3장 10절에 나오는 말씀을 가지고 “내가 너희를 축복하나 안 하나 봐라. 십일조 하면 하나님께서 창고가 모자라도록 하늘에서 부어주신다고 약속했다. 그러니까 십일조 많이 해라. 그러면 큰 축복받는다. 많이 바치면 더 많이 주신다.” 돈 놓고 돈 먹기, “십일조 하면 대박의 비결!” 우리는 그런 종류의 이야기들을 흔하게 많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거꾸로 십일조에 대해서 그 기복적이고 율법적인 신앙에 대해서 거부감을 갖는 성도들도 많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말라기 선지자가 이렇게 십일조를 강조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보시려면 말라기 3장 8절을 보십시오.
3장 8절에서 말라기 선지자는 당시 백성들에게 이렇게 호소합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이 말을 읽어보니까 여러분, 당시 사람들이 십일조와 봉헌을 제대로 드렸던 것 같아요, 안 드렸던 것 같아요? 안 드렸던 거죠. 당시 사람들은 십일조를 온전히 드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똑바로 봉헌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십일조를 도둑질하고 하나님의 봉헌물을 도둑질하는 사람은 십일조를 드리는 백성들만이 아니고,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것을 하나님의 목적대로 쓰지 않고 자기들 멋대로 자기들의 배를 불리는 데 사용하는 것도 역시 도둑질에 해당되는 거죠.
어쨌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지 않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성전을 뭘로 돌봅니까? 성전이 어떻게 운영됩니까?
하나님 앞에 온전히 예배드릴 수 있습니까? 율법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집니까?
안 되는 거죠. 아무것도 안 되는 거죠. 그 아무것도 안 되고 엉망진창인 세상 가운데서 말라기 선지자는 그들에게 외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보라! 당시 백성들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던 것은 그들이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에서 포로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사람들입니다.
예루살렘은 황폐해져 있고 그들은 자기 집도 변변히 마련을 못 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는 거, 그거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하는 말이 “아니, 먹고죽을 애(돈)도 없는데 무슨 십일조를 드려요. 입에 풀칠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말라기 선지자는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래, 그렇게 너희가 가난하고 어려워?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다운 정체성을 확인해 봐라. 하나님이 살라고 하신 방식대로 살아봐라. 하나님께서 너희를 먹이시나 굶기시나, 너희에게 축복하지 않으시나 봐라.”
하나님이 너희를 책임져 주시는 것을 경험해 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중세 교회가 이 말라기 선지자의 말씀을 자기들의 권세를 위해서,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기복적으로 미신적으로 이용했습니다.
특히 중세 교회에 팽배했던 것은 공로주의(Meritism), “우리가 이러한 공로를 세우면 하나님께서 어떠어떠한 보상을 주실 거야” 하는 공로주의.
그 공로주의는 사실 모든 인간에게 다 있는 건데, 중세 교회는 그런 공로주의를 이용해서 자기들의 이익과 권세를 취하는 데 이용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게 면죄부죠. 여러분, 면죄부 학교에서 배웠습니까?
세계사 배우신 분? 우리 청소년들 세계 역사 배웠어요? 면죄부 들어봤어요?
끄덕끄덕하는 친구들도 있고. 중세 교회가 돈을 거두기 위해서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무슨 말이냐? “이 헌금함에 돈이 딸그랑 떨어지는 순간에 지옥에 가 있는 여러분의 조상이 어디로 가요? 천국으로 옮겨진다.” 이게 면죄부예요. 공로주의(Meritism)라고 하죠.
공로주의, 우리의 공로를 통해서 어떤 영적인 보상이 주어진다고 하는 공로주의. 아주 비성경적이고 그것 때문에 중세 교회가 타락했습니다.
중세 교회의 이런 영적 타락에 맞서서 성경적 신앙을 들고 일어난 개혁자들, 종교개혁자들이 그 면죄부와 공로주의를 거부하고, 이제 그러한 한 방식으로 교회의 돈에 의한 물질적 타락을 막기 위해서 독일 교회나 영국 국교회가 어떤 방식을 택했느냐? 종교세를 교회에 헌금으로 내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다 냅니다.
지금도 독일에는 국가에 내는 종교세가 있어요. 물론 자발적으로 내는 겁니다.
“내가 종교인입니다. 내가 기독교인입니다. 내가 교회에 나가요.”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안 내는 세금을, 종교세를 국가에다가 납부를 해야 되는 거죠.
그러면 국가가 그 종교세를 거둬서 뭘 하느냐? 교회의 사역을 위해서 예산을 지원하고, 그리고 교역자들의 사례비, 생활비도 국가가 냅니다.
국가가 줍니다. 그러니까 독일 교회 목사님들은—물론 다는 아니에요, 독일 루터교회 목사님들은—교회에서 사례비를 받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서 생활비가 나와요.
큰 교회나 작은 교회나 일정한 생활비가 똑같이 국가에서 생활을 책임져줍니다.
그런데 왜 우리 교회는 그렇게 안 합니까? 왜 우리나라는 그렇게 안 하죠? 그렇게 하니까 뭐가 문제가 되느냐? 이제는 가톨릭교회, 중세 교회의 금권에 의한 타락은 막을 수 있지만 문제는 국가 권력이 교회에 간섭을 하게 돼요.
그렇죠? 국가가 우리의 신앙을 이래라저래라 통제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 칼뱅주의 신앙을 가진, 성경적 신앙을 가진 우리 개혁교회, 특별히 우리 장로교회의 선조들은 “우리는 그런 교회의 방식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국가 권력과 교회가 분리되어야 된다고 믿는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스코틀랜드의 존 녹스(John Knox) 같은 사람들, 이 개혁자들이 국교회, 국가 교회로부터 독립된 교회를 세웠어요.
그게 바로 장로교회입니다. 그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국가로부터 독립된 신앙 양심의 자유를 주장하는 그 장로교회가 스코틀랜드에서 미국으로 심어져서 미국 장로교회가 됐고, 미국 장로교회가 우리 한국의 구한말 대한제국 시절에 전도해서, 선교해서 우리 한국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그 한국 교회가 조선예수교장로회로부터 오늘날 대한예수교장로회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개혁주의 장로교회의 신앙적 전통을 따르게 됐습니다.
이 장로교회 신앙의 가장 중요한 전통 중에 하나가 신앙 양심의 자유! “누구나 자신의 신앙 양심의 자유를 침해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이게 웨스트민스터 우리 장로교 헌법의 제일 앞부분에 나오는 조항입니다.
그리고 이 조항이 어떻게 역사했느냐? 여러분, 한국의 장로교회가 세워진 직후에 한국교회는 선교 불과 10여 년 이후에 나라를 잃었어요.
일본의 통치 시기를 맞이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정교분리의 원칙을 선포하지 않았으면 한국 교회는 일제의 간섭을 피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죠.
그래서 일제 치하의 한국 교회가 특별히 더 결의한 게 있습니다.
그게 뭐냐? “우리 교회는 정부로부터 재정의 지원을 받지 아니하고, 우리 교회의 모든 사역과 운영은 교인의 십일조를 통해서 그것을 감당하겠다”라는 거죠.
그래서 조선예수교장로회가 일제 치하에 십일조를 교인의 의무로 결의했어요.
뭐를요? 십일조를 교인의 의무로 결의했어요. 그렇게 십일조를 통해서 교회의 재정이 자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한국 교회는 끝까지 신사참배에 맞서 싸우는 교회들도 있었고, 물론 무너진 교회들도 있었지만 신앙 양심의 자유를 지키고 오늘날까지 이렇게 조국의 독립에 기여하면서 이렇게 정말 주의 복음을 증거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교회로 세워져 올 수 있었다는 겁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만약 일제시대의 한국 교회가 국가로부터 독립되지 못하고 재정적으로 국가의 세금에 의존하여 운영하는 교회였다면, 그러면 어떻게, 어떤 결과가 됐을까요?
그렇죠. 예, 우리의 신앙 양심의 자유를 지키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온전히 선포하는 데 있어서 성도가 마땅히 드려야 할 10분의 1과 그 모든 헌금들은 너무나 소중하게 사용되는 겁니다.
그것은 율법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언약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이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라 은혜받은 것을 은혜로 갚는, 거저 받은 것을 거저 나누는 우리의 삶의 원리, 믿음의 삶의 방식이고 축복의 원리라는 것을 여러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오늘날 여러 가지 염려하는 목소리들이 있습니다.
저도 그 문제들을 잘 압니다. 어떤 분들이 제가 목회, 저의 목회적 가치에 ‘선교적 교회, 개혁적 교회’ 이렇게 내걸으니까 저한테 가끔 물어보시는 분들이 있어요.
“목사님, 목사님은 십일조를 교회에 드려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렇게 물어보셔요.
그 의도가 뻔하죠. 예수님을 시험했던 말하고 똑같은 거예요.
제가 “십일조를 드려야 됩니다” 그러면 이분들의 반응은 뭐냐 하면, “아이고, 개혁적 목사라 그러더니 똑같구만, 똑같아. 똑같이 율법적인 목사야.”
그런데 반대로 제가 “십일조 안 드리셔도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목사가 십일조 안 드려도 된다 그랬어. 난 십일조 안 낼 거야. 저 목사 책임이야.” 굉장히 곤란하게 하는 질문이죠.
그러나 여러분, 다시 말씀드리지만 십일조는 율법이 아닙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형식적으로 의무적으로 십일조를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십일조가 문제가 아니라 십일조에 대한 율법적 인식, 그리고 기복주의적 인식이 문제인 겁니다.
그거 극복하셔야 됩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율법 때문에 십일조 하지 않습니다.
내가 무슨 대박 나기 위해서, 더 큰 물질 축복받기 위해서 십일조 하는 거 아닙니다.
제가 분명히 말씀드리지만요, 제가 아는 분들 중에 평생을 정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철저하게 십일조 드리고, 아니 10분의 1 아니라 10분의 2, 3을 드리는 삶을 살면서도 노년에 정말 가난하고 어렵게 사시는 장로님들, 권사님들, 믿음의 사람들, 목사님들 너무너무 많습니다.
그분들은 왜 그렇게 가난합니까? 그분들이 하나님께 축복 못 받아서 그런 겁니까?
여러분, 그저 단순히 물질적인 욕망을 채우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하는 어리석은 생각, 초보적인 생각에서 이제는 벗어나셔야 합니다.
십일조는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이고 우리가 사는 삶의 원리가 되어야 합니다.
단지 중요한 것은 그 십일조를 가지고 우리가 어떻게 사용하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는 지나친 개교회주의 가운데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개교회에 주어진 헌금을 마치 자기 교회 마음대로 사용해도 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큰 교회 목사님들은 “목회자가 저렇게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살아도 되나” 남들의 이목이 두렵고 부끄러울 정도의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고 있고, 반대로 그런 사람들은 정말 1%, 0.5%밖에 안 되고 사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최저 생계비 이하로 살면서 “은퇴 이후에는 도대체 어떻게 생계를 유지해야 하나”, 일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보장받는 국민연금조차도 보장받지 못하고 살고 있는 목회자들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중요한 건 하나님께 드려진 헌금과 교회 재정이 어떻게 사용되는가 하는 겁니다.
여러분, 헌금을 낼까 말까, 내야 되나 말아야 되나를 고민하시는 게 아니라, 성숙한 성도라면 우리가 드리는 헌금이 어떻게 쓰여지는가 하는 것들을 고민하셔야 됩니다.
그것에 관심 가지셔야 됩니다. 그것을 위해서 여러분들이 참여하셔야 됩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교회의 재정을 다루는 수많은 봉사의 직분 내에 여러분들이, 특히 제직 여러분들이 거기 봉사의 직에 참여하셔야 돼요.
그리고 그 봉사의 직에 직접 참여하지 못하시는 분이라도 제직회에 참여하시고, 또 여기 있는 모든 성도들이 공동의회에 참석하셔서 교회의 살림살이가 어떻게 쓰여지고, 어떻게 계획되고, 어떤 과정으로 쓰여지는지를 그걸 보셔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 공동체가 투명한 거버넌스를 가지고 교회의 재정이 정말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위해서 바로 사용될 수 있도록 여러분들이 만들어 나가셔야 되는 겁니다.
그런 교회가 돼야 되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교회의 재정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마다 교역자의 납세 문제가 등장합니다.
“종교인이, 성직자가 세금을 내야 돼, 말아야 돼?” 어떤 분들은 정부가 “교역자도 세금을 내야죠” 하면 “아니, 교회를 탄압한다고, 성직자들을 탄압한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원칙을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종교기관, 선교를 위해서 복음의 공공적 사역을 위해서 일하는 종교기관은 면세 혜택을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나라도 그렇고 미국도 그렇고 대부분의 선진국들이 종교기관의 재정과 그 사용처에 대해서는 면세 혜택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종교기관에서 일하는 교역자 개개인이 받는 개인의 소득에 대해서는 납세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마땅히 과세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궁금하시겠죠?
여기 앞에 있는 장덕상 목사는 세금을 내나 안 내나, 낼까요, 안 낼까요?
예, 그렇습니다. 저는 세금 보고를 정확하게 합니다.
그리고 저뿐만 아니라 저희 교회 모든 교역자들은 다 세금 보고 합니다.
그렇죠. 왜냐하면 그거는 개인의 소득이니까요. 우리는 이런 분명한 원리들을 잘 알아야 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3장 4항에서도 보면 이러한 납세와 이러한 국가의 법률적 통치에 대한 순종의 의무에서 “교회의 직원이라고 면제되지 않는다”라고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장로교회 선조들의 가르침이고 우리가 오늘날 교회의 원리로 믿고 따르는 원칙입니다.
여러분, 십일조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우리의 정체성, 우리가 누구인가를 보여주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을 우리의 주인으로 믿고 섬기는 그의 백성이라면 우리는 마땅히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며 살아야 됩니다.
그 사명이 뭐냐?
우리로 하여금 성령 부어주셔서 성령 받은 그리스도의 몸, 교회로 세워져서 이 땅에 그리스도가 이루기를 원하시는 그 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가난한 이웃들을 돕고 사랑하고 돌보고 치유하고, 그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땅끝까지 증거하는 그 모든 복음의 사역,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바로 성령 받은 주님의 몸, 저와 여러분을 통해서 이 땅 가운데서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세워지고 이루어지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그 일이 바로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교회는 여러분들의 헌금과 헌신을 통해서 그 모든 사역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십일조 하지 않고, 여러분들이 헌금하지 않고, 여러분들이 헌신하지 않고 교회가 그런 일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가장 올바른 방법, 가장 귀하고 소중한 방법. 여러분 한 분 한 분에게 성령 부어주셔서 여러분을 성령 받은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우셔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온 땅 가운데 충만해지는 그리스도의 몸의 충만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가 땅끝까지 세워지게 하시는 그 놀라운 역사가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나님의 언약 백성 된 나의 삶을 통해서 내 삶에 허락하신 그 모든 것들이 그저 나의 것이 아님을 믿고 고백하며 그것을 떼어 하나님 앞에 내어놓을 수 있는, 구별하여 하나님의 일에 내어드릴 수 있는 그러한 믿음의 삶이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하신 여기 있는 모든 어린아이들부터 청소년들, 청년들, 여러분들이 비록 내가 무슨 대단한 수입이 있다고—아니요, 어릴 때부터 작은 용돈 하나부터 10분의 1은 구별하여 하나님의 것으로 드리는 삶의 연습, 훈련이 되어질 때 여러분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운 삶을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와 같은 정체성의 고백과 믿음의 삶의 원리가 온전히 이루어지는 우리 성동교회 모든 성도들의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Whose Image Is on Your Heart? Giving and Living as Citizens of the Kingdom
Today’s story begins with a question posed to Jesus by a certain person. But this question was quite a dangerous one: “Is it lawful to pay taxes to Caesar or not? Teacher, should we pay taxes to the Roman Emperor or not?”
Why was this so dangerous? If Jesus said, “Yes, pay taxes,” whose hatred would He incur? The Jewish people. They would say, “Ah, we thought this teacher was a righteous and noble man, but he tells us to pay taxes to the Roman Emperor! He is just like the rest—a puppet of Rome.” But what if He said, “Do not pay taxes”? He could be immediately reported to the Roman authorities and arrested.
Their intention was clear. They did not ask because they genuinely did not know; they asked to trap Jesus and put Him in a dilemma. Did Jesus know their true intention? Yes, of course He did. Knowing their motive, what would Jesus say? Would He answer this way or that way?
Here comes Jesus’ brilliant answer. Even if you search your pockets right now, you won’t find any coins, right? We rarely carry physical coins these days. In those times, however, it was customary for coins to bear the image of the ruling sovereign. Since they were living under Roman rule, they used the Roman denarius. Even those who posed the question to Jesus possessed Roman coins.
“Show me the coin,” Jesus said. They brought it out. “Whose image and inscription is this?” “Caesar’s,” they replied. “Therefore render to Caesar the things that are Caesar’s, and to God the things that are God’s.”
What is the true meaning of Jesus’ words? It sounds somewhat mysterious and subtle, doesn’t it? Is He telling them to do this or that? In short, Jesus turns their own question right back on them: “Do you possess what belongs to Caesar? Then give it to Caesar. But are you the people of God? Then it is right that you render to God what belongs to God.”
What is He telling them? If we live on this earth under Caesar’s temporal rule, then naturally, paying taxes to Caesar is expected. Yet nevertheless, who are you? Are you not God’s people? If you truly consider yourselves the people of God, then you ought to render to God what rightfully belongs to Him.
What is the core issue here? It is the question of whose people we are and whose reign we live under. Jesus turns the question around to ask them, “To whom do you belong?” He leads them to find the answer for themselves by asking: Who am I? To whom do I belong? Whose rule am I living under?
This is the vital point. The question of to whom we pay our taxes is connected to the question of to whom we belong.
With this in mind, let us consider the subject of tithing. Today is Thanksgiving Sunday, a day when we bring our offerings before God, setting apart and offering the firstfruits of the spring harvest that God has granted us. But why must we do this? Is it truly necessary to live this way?
Many people assert that tithing is merely a ceremonial law of the Old Covenant. They claim that in Jesus Christ, we are no longer bound by the Law. That statement is true in itself: in Jesus Christ, we have been set free from the yoke of the Law, and we no longer live bound by it.
However, we must ask a deeper question: Is tithing merely a legal requirement of the Mosaic Law?
The crucial truth is that tithing is not merely a regulation of the Mosaic Law. Tithing is the identity of covenant people who acknowledge God’s sovereignty. It must serve as our living principle of faith—a life that confesses and honors that divine identity.
If someone claims that tithing is merely part of the Mosaic Law, we ought to examine the biblical timeline: Which came first—the Law or the tithe? Did the Law come first, or did tithing come first? I hear differing answers being called out! We can easily confirm this from the Scriptures.
Turn to Genesis 14:17. Where? Genesis! Chapter 14 of Genesis tells the story of Abraham. The Mosaic Law was given through Moses at Mount Sinai during the Exodus, correct? So who came first—Moses or Abraham? Our youth know this so well; the loudest answer came from that side! Naturally, Abraham came first. Abraham lived more than four hundred years before Moses.
Let us see how tithing originates with Abraham in Genesis 14:17–20:
“After his return from the defeat of Chedorlaomer and the kings who were with him, the king of Sodom went out to meet him at the Valley of Shaveh (that is, the King’s Valley). And Melchizedek king of Salem brought out bread and wine. (He was priest of God Most High.) And he blessed him and said, ‘Blessed be Abram by God Most High, Possessor of heaven and earth; and blessed be God Most High, who has delivered your enemies into your hand!’ And Abram gave him a tenth of everything.” (Genesis 14:17–20, ESV)
Melchizedek, king of Salem, was a priest of God Most High. What did Melchizedek do? He blessed Abraham, praising God Most High. And what did Abraham do in response? He gave Melchizedek a tenth of everything he had obtained. In modern terms, he offered a tithe.
Therefore, does tithing originate strictly from the Mosaic Law in Exodus? No! Long before the Law was given, Abraham offered a tithe to Melchizedek, the priest appointed by God.
In fact, was Abraham the only one who offered a tenth in those ancient times? Probably not. In the Ancient Near East, presenting a tenth was a recognized practice between a sovereign lord and his vassal—a gesture signifying allegiance, belonging, and loyalty. In those days, a powerful ruler would protect the subjects within his domain, and the subjects would swear allegiance by offering a tenth of their produce. Tithing was a visible sign of a covenant relationship between master and servant.
Thus, when Abraham offered a tithe to Melchizedek, the priest of God Most High, it was not merely an act of personal devotion to Melchizedek himself. It was a tangible confession of faith, allegiance, and covenant belonging to God Most High—the God whom Melchizedek served and praised.
Repeat after me: “I am a child of God, living under God’s sovereign rule.” Amen!
That is right. Offering our tithes to God is an act of confirming our identity as His covenant people and walking according to the principles of that Kingdom life.
For this reason, while Jesus strongly criticized the hypocrisy and legalism of the religious leaders, He never commanded the abolition of tithing as an expression of covenant identity. Rather, while emphasizing the weightier matters of the Law—justice, mercy, and faithfulness—Jesus explicitly taught that tithing should not be neglected.
Jesus did not say, “As long as you practice justice, mercy, and faithfulness, you don’t need to offer tithes to God; just use your money however you see fit.” What did Jesus actually say? “These you ought to have done, without neglecting the others.”
Consider Matthew 23:23:
“Woe to you, scribes and Pharisees, hypocrites! For you tithe mint and dill and cumin, and have neglected the weightier matters of the law: justice and mercy and faithfulness. These you ought to have done, without neglecting the others.” (Matthew 23:23, ESV)
The Pharisees were thorough legalists who discarded justice, mercy, and faithfulness, relying solely on their outward tithes for self-righteousness. They used their legalism to justify self-exaltation and discrimination against others. Yet Jesus did not say, “Because they acted this way, you should stop tithing altogether.” Instead, He clearly stated: These you ought to have done, without neglecting the others.
Now, some might observe: “Tithing is mentioned in the Gospels, but in the Acts of the Apostles and the Epistles, the word tithe is nowhere to be found! Does that mean the early Church stopped giving tithes?” Let us examine if that is truly the case.
In the New Testament, although the specific term tithe is not used as a rigid legal requirement, the vital importance of financial giving (collection or offering) is repeatedly emphasized. Did the New Testament writers drop the term tithe because a tenth was deemed too burdening? Not at all.
Look at 1 Corinthians 16:1–2 regarding the principle of collecting offerings:
“Now concerning the collection for the saints: as I directed the churches of Galatia, so you also are to do. On the first day of every week, each of you is to put something aside and store it up, as he may prosper, so that there will be no collecting when I come.” (1 Corinthians 16:1–2, ESV)
Notice when the offering was to be brought: On the first day of every week. Why the first day? Because that is the Lord’s Day! The early Church gathered to worship on the first day of the week—the day Jesus rose from the dead.
And how were they to give? As each may prosper. It was not a fixed entry fee imposed equally on everyone regardless of means. Rather, each person was to give according to their income—those who earned more gave more, and those who earned less gave less. What principle is that? That is the foundational principle behind proportional giving, the very heart of the tithe! Giving a set proportion according to one’s income is an act of planned, intentional worship before God.
This means financial giving should not be driven by mere whim or fleeting emotion. Giving as a believer is a responsible, structured presentation of our firstfruits to God, proportionate to the income He has granted us.
Paul also instructed them to store it up beforehand so that collections would not have to be made hastily upon his arrival. Paul was an itinerant apostle dependent on the support of local churches to carry out his mission. The early Church had a responsibility to manage its finances faithfully to support the spread of the Gospel and care for those in need.
Where does this spirit of generous giving originate? It flows directly from the sacrificial love of Jesus Christ:
“For you know the grace of our Lord Jesus Christ, that though he was rich, yet for your sake he became poor, so that you by his poverty might become rich.” (2 Corinthians 8:9, ESV)
Jesus—the owner of the universe—emptied Himself, took on the form of a humble servant, and gave everything, even His very life on the cross, so that we might inherit eternal life. Having been redeemed by such boundless grace, we are called to reflect His love in how we steward our lives and resources.
As Romans 14:8 declares:
“For if we live, we live to the Lord, and if we die, we die to the Lord. So then, whether we live or whether we die, we are the Lord’s.” (Romans 14:8, ESV)
We belong to the Lord! Because we are His possession, offering a portion of our income back to Him is a concrete confession that He is the owner of all we have.
And how is this covenant life best expressed? Through the local church—the living body of Christ established on earth through the Holy Spirit.
Some may ask, “Why must financial offerings be channeled through the church? Why can’t I just distribute my tenth directly to charities or mission agencies on my own?”
While personal charity is commendable, the fullness of covenant life is designed to flourish within the local church community. If believers neglect their responsibility to build up and sustain the local body of Christ, the collective ministry of the Church is hindered. God’s primary design for expanding His Kingdom on earth is through His Spirit-filled body—the Church.
We see a powerful demonstration of this in Acts 4:32:
“Now the full number of those who believed were of one heart and soul, and no one said that any of the things that belonged to him was his own, but they had everything in common.” (Acts 4:32, ESV)
When people shared unselfishly in the early Church, did they all sink into poverty? No! Acts 4:34 records: “There was not a needy person among them.” Through shared grace and radical stewardship, the entire community experienced God’s abundance.
This mirrors the promise God gave in Deuteronomy 15:4–5:
“But there will be no poor among you; for the LORD will bless you in the land that the LORD your God is giving you for an inheritance to possess—if only you will strictly obey the voice of the LORD your God, being careful to do all this commandment that I command you today.” (Deuteronomy 15:4–5, ESV)
When a community lives according to God’s heart—caring for the vulnerable and honoring Him with their substance—God brings holistic blessing and flourishing.
Unfortunately, tithing has often been misunderstood in modern times due to health-and-wealth prosperity teachings. Many are familiar with Malachi 3:10, which speaks of God opening the windows of heaven to pour out blessings. Regrettably, some have twisted this into a transactional formula: “Give more to get more wealthy!” Such legalistic, prosperity-driven approaches have understandably created cynicism among believers.
However, Malachi’s original context was quite different. In Malachi 3:8–10, the prophet called out a people who had neglected their covenant obligations out of fear and economic hardship. Returning from exile, they struggled to rebuild their lives and withheld their tithes, claiming they didn’t have enough to survive. Malachi challenged them to trust God’s faithfulness and restore their covenant honor.
In the Middle Ages, the church abused biblical stewardship for institutional power and gain through meritocracy and the sale of indulgences. In response, the Protestant Reformers reclaimed salvation by grace alone through faith alone. To prevent financial corruption, state churches in parts of Europe adopted government-administered church taxes.
However, Reformed traditions—such as Presbyterianism rooted in John Knox’s movement in Scotland—emphasized the 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 to protect freedom of conscience. They insisted that the church must be supported through the voluntary, faithful tithes and offerings of its members, free from government control. This legacy of financial self-reliance and liberty of conscience spread to America and eventually to Korea, enabling the Korean Church to remain resilient and faithful even during times of severe oppression.
Tithing is not a burdensome legal constraint; it is a confession of our covenant identity. It is a joyful recognition that everything we have comes from God and belongs to Him.
As mature believers, we do not give out of legalistic obligation or a desire for financial gain. We give because we belong to Christ. Furthermore, as stewards, we ought to care deeply about how church funds are managed. I encourage everyone—especially church officers and members—to actively participate in governance, ensuring transparency so that resources are used faithfully for the Gospel, caring for the needy, and expanding God’s Kingdom.
In closing, whether young or old, let us cultivate a heart of faithful stewardship. Even from a young age, learning to set aside the first portion for God builds a lifelong habit of trusting His provision and honoring His lordship.
May our lives and our church community continually reflect this confession of faith, bringing glory to God and advancing His Kingdom in the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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