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요즘 자주 듣는 말 중에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한 번쯤 들어보신 분 다 들어보셨죠?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그런데요, 우리가 자주 듣는 말들이 사실은 원래 오리지널 출처에서는 다르게 표시돼 있는 게 상당히 많습니다. 이게 정확하게 전해지지 않은 거죠. 원래 이 말은요, “신은 디테일에 있다”, “The devil is in the details”가 아니고 “God is in the details”, 원래 그런 말입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독일의 유명한 건축가 루드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라는 사람인데요. 이 사람이 “God is in the details” 그랬습니다. 신은 디테일에 있다, 그러니까 건축가적인 안목이 담긴 표현이겠죠. 그냥 우리가 적당히 보면 비슷한 것 같고 별 차이 없는 것 같아도, 그러나 자세히 디테일 하나하나를 따져보면 나중에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낸다는 그런 이야기일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디테일이 중요한 건요, 건축가에게만 중요한 게 아닙니다.
무슨 뭐 우리가 사람을 훑어볼 때만 디테일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언제 또 디테일이 중요하냐? 성경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정확하게 읽으셔야 되는데, 우리가 대충 주워들은 것, 대충 알고 있던 것을 가지고 “아, 저거 비슷한 얘기구나” 하고 두리뭉술 미리 판단하고 넘어갈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목사의 설교를 들을 때도 “이 얘기 이 본문, 뭐 오늘 이런 얘기하겠지”, 심지어는 우리가 직접 성경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읽으면서도 그 페이지가 담고 있는 내용들을 우리가 그 문장과 맥락 속에서 제대로 캐치하지 못하고, 그냥 우리가 알고 있는 결론대로, 우리가 생각하던 대로 그냥 그렇게 쉽게 판단하는 경우가 너무너무 많다는 겁니다. 자, 여러분 “비슷한 이야기구나” 하고 미리 비슷한 내용이라고 판단하시면 안 되는 겁니다. 디테일을 들여다보고 그 이야기가 우리에게 진짜 들려주는 의미와 함의, 의미는 뭐고 함의는 뭡니까?
의미는 Meaning, 그 문장 속에서 맥락 속에서 우리가 캐치해낼 수 있는 1차적인 해석이 의미고, 그다음에 함의는 뭡니까? Implication, 그러니까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말을 하고자 하는 건가에 대해서 읽는 자의 텍스트 해석자의 삶의 이 정황 속에서 그 의미를 적용하는 것을 Implication, 함의라고 말합니다. 일단은 정확하게 읽어야 그 Meaning과 Implication을 우리가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거죠. 여러분 굉장히 지금 중요한 얘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이 바로 그렇게 우리가 대충 그냥 알고 있는 이야기로 취급해서 그 이야기의 중요한 메시지, 그 Meaning과 그 Implication을 우리가 잊어버리기 쉬운, 놓쳐버리기 쉬운 본문이 바로 누가복음 7장 후반부에 나오는 오늘 읽은 내용입니다. 자, 일단 보세요. 여러분 한 여인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그 발에 향유를 붓고 그 머리털로 닦았다더라, 이 얘기 어디서 많이 읽으셨죠?
이게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얘기가 아니고 마태복음에도 나오고 마가복음에도 나오고, 특히 이 사건으로 유명한 본문은 요한복음 12장이 굉장히 우리에게 강렬한 이미지를 주는데, 그러다 보니까 우리는 이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이야기도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얘기하고 비슷한 메시지겠지” 하고 퉁치려는 경향들이 우리에게 있다는 거죠. 그런데 문제는 이 이야기가 분명하게 서로 다른 이야기라는 겁니다. 특히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이야기하고 누가복음 7장에 오늘 나오는 이야기는 완전히 다릅니다. 디테일이 다릅니다. 어떤 디테일이 다르냐? 우선 이 이야기의 시기와 배경과, 그리고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인공 자체도 다릅니다. 이게 완전히 다른 얘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오늘 그 디테일이라는 이야기를 우리가 좀 살펴보죠. 요한복음 12장 1절부터 3절까지를 먼저 한번 보십시오. 이렇게 돼 있어요.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시기와 장소가 다 나오죠.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언제 이 사건이 벌어졌어요? 유월절 엿새 전에. 어떤 유월절이에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던 바로 그 유월절에. 그러니까 이 사건이 일어난 요한복음 12장의 사건의 시기는 예수님의 사역이 거의 끝날 후반부에 적용되는 얘기예요. 자, 그때 어디서? 예루살렘 근처에 있었던 베다니에서. 그 베다니에 살던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 이 세 남매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이 왜 그 집에 가셨냐? 예수님이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고, 예수님은 그러지 않아도 예루살렘에 가실 때마다 베다니에 있는 이 마리아, 마르다, 나사로의 집에 즐겨 묵으실 정도로 그들과 아주 친밀한 관계셨다는 거죠.
그 가운데 베다니의 마리아가, 이 세 남매 중에 베다니에 살던 세 남매 중에 마리아가 예수님 앞에 나와서 향유를 붓고 그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더라 하는 얘기예요. 그런데 우리가 이 찬송가를 너무 열심히 불러서 그런가요? 여러분 찬송가가 우리를 헷갈리게 합니다. 찬송가에 보면 뭐가 있냐면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여기까지 괜찮아요. 그다음에 뭐가 나와요? “마리아 본받아서” 맞아요.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드렸어요? 아니요. 예수님께 향유를 드린 마리아는 막달라 마리아가 아니고 베다니의 나사로와 마르다의 형제 마리아라니까요. 이 막달라 마리아는 달라요. 누가복음 8장에 나오는 귀신 들렸던 여자, 이 다른 여자라니까요. 예, 이 찬송가공회가 잘못했어요. 여러분 우리가 아는 것 같은데, 맞는 것 같은데 틀린 게 많아요. 모르고 있는 게 많아요. 잘못 알고 있는 게 많아요.
예, 그러니까 여러분 베다니의 마리아를 막달라 마리아로 혼동하면 안 되고, 근데 이게 왜 우리가 자꾸 혼동하게 되느냐?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 향유를 드린 여인이 죄 많은 여인이다, 아마도 이 여인이 지은 죄가 성적인 범죄,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하는, 그러니까 이 여인은 아마도 창녀였을 것이다라고 성경학자들이 추측하는데, 이 두 가지 이미지가 짬뽕이 되니까 ‘죄 많은 여인 마리아 = 막달라 마리아인가 보다.’ 이제 요렇게 요렇게 죄 많은 여인과 마리아가 섞이고, 베다니의 마리아가 막달라 마리아와 섞이고, 예, 그래서 성경적인 근거도 없는 “막달라 마리아가 창녀였다” 뭐 이런 얘기까지 나오고, 예, 이거 우리가 성경을 막 혼동해서 잘못 이해하는 겁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요, 요한복음 12장과 이 누가복음 7장의 이야기는 이야기의 주제 자체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이야기, 들려주시는 목적 자체가 다른 거죠.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이야기는 이제 곧 돌아가실 예수님의 죽음을 준비하는 모습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베다니의 마리아는 이제 곧 십자가 지실 예수님, 죽으실 예수님의 장사를 기념하는 그의 죽음을 준비하는 그 믿음의 모습이었던 거죠. 그러나 누가복음 7장의 이야기의 초점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지금 이 시기는 예수님의 사역 초기예요. 제자들에게도 아직 예수님이 “내가 죽을 거다, 십자가에 달릴 거다”라는 얘기를 아직 전혀 시작하지 않으셨어요. 다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그 은혜를 선포하시면서 그 은혜에 합당한 자가 누구인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누구인가 하는 것들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계셨던 거죠. 죄인에 대한 은혜와, 그리고 누가 그 은혜 받을 자인가, 그러니까 누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인가를 물으시고, 거기에 대해서 당시 당당하게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 접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는 나라입니다” 생각했던 사람들, 바리새인들, 율법교사들, 그 종교적 지도자들, 이스라엘의 혈통과 전통을 강조하던 그들, 주님은 그들에게 지금 도전하시는 메시지를 주고 계신 겁니다.
진짜 예수님 메시지의 초점이 어디 있는가? 우리가 그 디테일을 하나하나 좀 확인해 봅시다. 봅시다. 36절부터 이야기를 쭉 따라가 보겠습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대했어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과 관계가 좋았어요? 아니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손가락질하면서 “먹기를 탐하는 자, 마시기를 즐기는 자,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 아이고 저 질이 안 좋은 사람, 불량한 사람, 비루한 자들과 몰려다니는 사람” 그렇게 의심하고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초대에 응하셨을까요, 응하지 않으셨을까요? “저 바리새인들 맨날 나를 의심하면서 맨날 따지기만 좋아하는 친구들, 쟤들하고는 안 어울릴래”라고 하셨을까요? 아니요, 아니요.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이셨을 뿐만 아니라, 그러나 그를 의심하고 그를 비판하는 바리새인들에게라도 누구도 차별하거나 누구도 배제하지 않으시고 편애하지 않으시고, 예수님은 기꺼이 그들의 초대에 응하시고 그들과 함께하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자, 그런데 문제는 그 잔칫자리에서 곤란한 일이 생깁니다. 37절 계속 보시죠.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앞으로 나올 만한 배짱은 못 되고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자, 여러분 그러지 않아도 껄끄러운 사람들이 초대한 자리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꽤 권세 있는 유지가 나를 초대했는데, 그런데 이 사람이 결코 편안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점잖은 자리, 어려운 자리, 불편한 자리, 그런 자리인데 거기서 곤란한 일이 생긴 거죠. 생각해 보세요. 진짜 곤란하지 않겠어요? 이 당황스러운 장면입니다. 이 여자가 내 앞에 나와서 나를 최고로 대우해주니까 이게 고맙지 않은 건 아닌데, 이게 왠지 힘들고 어렵고 당황스럽고 반길 수만은 없는 그런 일입니다. 도대체 그 여인에게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요? 그 여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중에 뒤에 보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추측해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어찌 되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고, 어떤 사연이 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고, 이 여자의 행동은 거기 그 자리에서 예수님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 다른 여러 꽤 괜찮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그들을 종교적으로 부정하게 만들고,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바리새인이 베푼 잔칫자리를 완전히 망쳐놓을 그럴 가능성이 아주 충분한 위험한 행위였다는 거죠.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계속 보시죠.
39절부터,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죠. 그렇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이 사람이 누구예요? 예수님이, 예수님. 지금 이 여자가 하는 행동과 거기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을 보고 이 사람은 지금 예수님을 의심하는 거예요.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이 여자가 죄인이라는 거 이 바리새인이 이미 다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이 역시 이 바리새인은 이 여자의 행동을 통해서 누구를 판단하고 있어요? 예수님을 판단하고 있어요. 예, 이 여자가 어떤 죄인인지는 여기 굳이 누가가 기록하지 않았어도 이 자리에 있는 온 동네 사람들이 이미 다 알고 있는 것 같아요. “아이고 저 여자, 아이고 그 여자잖아 그 여자.” 그리고 아마 예수님도 그 사람들이 하고 있는 생각을 다 알고 계셨을 겁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을까요?
40절부터 보시죠.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시몬은 누구예요? 잔칫자리를 열고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내가 좀 할 말이 있어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우리말 성경이 재미있는 게요, 원래 헬라어에는 존댓말과 낮춤말이 없거든요. 근데 우리말 성경은요 자기들 마음대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낮춤말로 쓰고 예수님께 하는 바리새인의 말은 존댓말로 써놨어요. 그런데 원래 그랬을까요? 아니, 헬라 말에는 그런 표현이 없다니까요. 그러니까 제 생각에는 예수님이 시몬에게 존댓말 하셨을 것 같아요. 시몬에게 “주인장, 내가 좀 할 말이 있소.” 주인장 시몬은 아마 빼딱하게 벌써 이게 마음이 꼬여가지고요, 예수님을 의심하고 있기 때문에 “뭐 할 말이요? 한번 해보시구려” 그러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빚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는데 둘 다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그를, 탕감해준 주인을 “더 사랑하겠느냐?” 여러분 답을 아시죠?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받은 자니이다” 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대답이죠. 당연한 대답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맞습니다. 당연히 그렇겠죠. 자, 여기서 예수님이 하시려고 하는 말씀이 뭡니까? 예수님이 시몬에게 던지신 질문, “누가 더 사랑하겠느냐?” 둘 중에 적은 빚을 탕감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더 많은 빚을 탕감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에 누가 더 그 빚을 갚아준, 은혜를 베풀어준 주인을 더 사랑하겠느냐? 예수님의 비유를 간단하게 한번 설명하죠. 데나리온 그랬는데 데나리온이 얼마입니까? 여러분 많이 들어보셨겠지만 당시 한 데나리온은 한 사람의 노동자, 일꾼이 하루 일하면 받는 품삯 정도였습니다.
오늘날 물가로 한 사람의 노동자가 얼마나 받을까요? 기술이 있느냐 숙련공이냐 아니냐, 무슨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 그런 거에 따라 엄청 다르겠죠. 그러나 우리 사회의 통념, 그냥 아무 기술도 없는 알바생이 최저임금 받는다고 생각할 때 요즘 최저임금이 1만 원 조금 넘습니다. 그러니까 하루 8시간 일하면 한 8~9만 원 정도 되고요, 하루 10시간 일했다고 하면 10만 원이 조금 넘을 겁니다. 그러니까 당시 한 사람의 일꾼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 하루에. 그러면 그 한 데나리온이 오늘날의 물가 개념으로 한 10만 원 정도 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 그러면 500 데나리온은 얼마나 돼요? 5천만 원, 그렇죠? 예, 한 5천만 원 되겠습니다. 50 데나리온은 한 500만 원 되겠네요.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5천만 원 탕감받은 사람하고 500만 원 탕감받은 사람, 물론 둘 다 은혜를 받았죠. 둘 다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누가 더 감사하게 여기고 누가 더 그 빚을 탕감해 준 그 채주를 더 깊이 사랑하겠습니까? 바리새인도 상식적으로 대답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당연히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죠. 주님 말씀하십니다. “그래요, 맞습니다. 당신이 올바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자, 여기까지는 누구나 아는 상식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기가 막힌 반전이 일어납니다. 44절부터 또 계속해서 보시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제까지 시몬과 주고받던 얘기하시다가 그 여자, 그 모두를 곤란하게 만들었던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이 여자를 보느냐?” 이 여자가 네 눈에 들어오느냐? 이 여자가 네 마음을 불편하게 하느냐? 그런데 이 여자가 한 행동을 잘 봐라. 그다음부터 들어보십시오.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여러분 시몬은 잔치를 벌였습니다. 예수님을 주빈으로 초대했겠죠. 그런데 이 시몬은 예수님을 사실은 환대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잔치를 청할 때 가장 기본적인 환대의 예법이 있는데요, 그중에 중요한 것 하나가 그 집에 들어갈 때 입구에서 발 씻을 물을 준비해놓고 그 발 씻기는 하인을 세워놓고 손님들의 발을 깨끗하게 씻고 들어갈 수 있게 해주는 겁니다. 왜 중요해요? 여러분 유대 땅은 이 건조한 사막지대예요. 그리고 유대 사람들 뭐 신고 다닙니까?
샌들 신고 다니잖아요. 여러분 건조한 사막지대 먼지, 모래 먼지 푸석푸석 날리는 동네에 샌들 신고 맨날 돌아다니다가 남의 집에 들어가 보세요. 그거 어떻게 되겠어요? 그 발이 흙이 덕지덕지 더글더글하고 시커먼 때 묻은 채로 덥석덥석 남의 집에 들어가면 됩니까? 안 되는 거죠. 그래서 유대인의 예법 중에 중요한 예법이 발 씻을 물을 준비하고 그들의 발을 씻겨주는 거죠. 예수님은 그 환대를 온전히 다 하시기 위해서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잔치하실 때에 그 발 씻는 종의 일을 누가 하셨어요? 예수님 자신이 그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 시몬은 선지자이신 예수님을 청하며 그 어떤 환대의 예법도 그에게 다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만나면 입맞춤으로 문안합니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이 시몬에게 “너는 내게 입맞추지도 않고” 그랬다고 우리 예수님이 성적 정체성이 이상하신 분인가, 그러지 않으시고요. 여러분, 여러분 사도 바울이 교회에게 말씀하실 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가 만날 때마다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문안하라.” 예, 당시에 입맞춤은 문안의 예법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환대하는 모습인 거죠. 시몬은 예수님의 발 씻을 물도 드리지 않았고 입맞춤으로 그를 환영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의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않았습니다. 자 여러분, 여인과 시몬의 차이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500 데나리온 빚진 자와 50 데나리온 빚진 자, 시몬은 도대체 뭘 잘못했습니까? 시몬이 구체적으로 뭘 잘못한 건 아니죠. 그러나 중요한 건 시몬은 주님을 청했지만 주님을 환대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았고 주님께 대한 그 마음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나름 뭔가 하는 척했지만 그에게 있어서 예수라는 선생님은 그저 관찰과 판단의 대상이었을 뿐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예수님이 아니라면 이 여인은 이 사람들이 모여 있는 이 잔칫자리에 차마 나아갈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나가라고 누가 끄집어내도 그 자리에 안 나갈 여자입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 나갈 때에 그들의 시선이, 그들의 조롱이, 그들의 혐오가 누구를 향할지 이 여인은 너무나 잘 알고 있거든요. 그런데 도대체 왜 여인은 예수님께 나갔습니까? 예수님께 좀 끼워달라고, 나도 인정해 달라고 떼쓰기 위해 나간 겁니다. 아니요, 아니요. 이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 앞이 아니면 자신에게 소망이 없음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소문을 들었을 겁니다. 여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그 하나님 나라의 그 은혜의 복음을 그의 귀로 들었을 겁니다. 그 복음이 가난한 자에게 선포된 복음이고, 그 복음이 자격 없는 자를 위한 은혜의 말씀이고, 그 복음이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의 나라를 선포하시는 것을 그 여인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한마디로 말하면 목숨 걸고 주님께 나간 겁니다. 왜요?
주님이야말로 유일한 소망이시고 주님이야말로 그 은혜로 그를 품어주시고 그가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첫걸음이 되시리라고 분명하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그저 담대하게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서 그 여인이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주님 앞에 나아간 그 여인은 앞으로도 나아가지 못하고 뒤로 나아가서 그저 눈물을 쏟는 겁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준비했습니다. 어쩌면 그 향유는 그 여인이 평생을 모아놓은 가장 소중한 보물일지도 모릅니다. 그 모든 것을 다 쏟아놓으면서도 이 여인은 “주님, 내가 이렇게 귀한 것을 드리니까 나를 좀 알아주십시오” 말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그저 그 앞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울면서 자신이 쏟아놓은 그 귀한 향유를, 그보다 더 귀한 여인의 면류관과도 같은 그 긴 머리털로, 그 향유와 그 흙 묻은 때 묻은 발이, 그 속에 흐르는 향유가 흐르는 때국물을 그녀의 머리털로 스스로 닦아내며 그저 주님 앞에 하염없이 울고 있었던 겁니다.
이 여인에 대해서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7절부터 보시죠.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너는 바리새인 시몬입니다.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 여인은 지금 많은 사랑을 주님 앞에 쏟아놓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이 여인은 주님 앞에 자신이 자격 없는 죄인인 것을 알기에 그녀는 주님 앞에서 하염없이 울면서 주님의 그 큰 사랑 앞에 무너져 내리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주님을 환대하는 데 인색했던 이 바리새인,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주님을 초대하고 뭔가 대접을 하겠다고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여전히 그 마음은 인색하고 그의 사랑의 표현은 인색한 이 사람, 그가 왜 그렇게 그 사랑에 인색한가? 왜 그렇게 적게 사랑하는가? 결국은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은 죄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내가 지은 죄가 저 여인보다는 적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그 사랑하는 일에 적게, 인색하게 표현해도 괜찮다라고 생각하는 것이겠죠. 여러분 주님의 이 말씀을 오해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지금 어떤 조건적인 행위 구원을 말씀하시는 게 아닙니다. “이 여자가 이런 대단한 일을 했으니까 그 대가로 그의 죄 사함을 받았다” 이런 말씀이 아닙니다. 여러분 주님이 던지신 이 비유의 포인트를 제가 아까부터 자꾸 강조하죠.
그 포인트가 뭡니까? 바리새인 시몬과 이 여인 중에 누가 진짜 은혜를 받을 만한 자인가 하는 겁니다. 누가 하나님의 은혜에 합당한 대상인가 하는 거예요. 여기에 대한 대답은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요거 오늘 오후에 성경 골든벨 시험 범위에 있는 구절이니까 이거 받아 적으세요. 예, 로마서 5장. 오후의 시험 범위가 어디예요? 로마서 5장부터 8장까지 범위도 모르고 계시면 안 돼요. 로마서 5장 20절에 나오는 말씀 같이 읽어보죠. 시작,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가해진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죄가 더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그러므로 스스로 죄가 더 많다고 생각하는 이 여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더 넘치게 받았고, 은혜를 더 넘치게 받았으므로 그 여인은 주님의 은혜 앞에 사랑 앞에 더 큰 사랑으로 더 큰 감격으로 감사로 그 앞에 드릴 수밖에 없었다라는 말씀을 주님께서 하고 계신 겁니다.
그 여인 앞에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8절에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나님 나라의 은혜를 선포하시는 예수님, 죄 사함의 은혜를 선포하고 계신 예수님, 그 은혜의 대상이, 그 은혜 받기에 합당한 사람이 과연 어떤 사람인지 오늘 우리 앞에 다시 보여주시는, 확인해 주시는 그런 내용이라는 거죠. 여러분 오늘 말씀의 주제는 이겁니다. 누가 그 은혜의 대상인가? 누가 그 은혜의 대상인가? 하나님은 누구에게 그 은혜를 베풀기를 원하시는가? 오늘 이 이야기를 저는 여러분과 선지자 에스겔의 예언을 통해서 그를 통해 보여주는 환상, 우리 주님의 환상을 통해서 확인해보려고 합니다. 왜 에스겔이냐? 여러분 우리가 요새 에스겔을 읽고 있잖아요. 그렇죠? 주보 다시 한번 펼쳐보세요. 주보 안에 공동체 성경 읽기, 새벽 기도 성경 본문이 요새 어디예요? 에스겔서 이번 주에 어디가 끝나요?
48장, 이제 에스겔서가 마지막 끝납니다. 우리 다음 주부터는 다니엘서로 넘어가요. 다 따라 읽고 계시죠? 대답이 없으세요? 새벽 기도 못 나오셔도 매일매일 읽고 계시죠? 토요일 날 제가 정리해 드리는 거 다 카톡으로 듣고 계시죠? 예, 중요해요. 여러분 공동체 성경 읽기, 그 에스겔 선지자가 본 여러 비전과 환상 가운데 9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9장 4절에 여호와께서 에스겔에게 이르시되 “너는 예루살렘 성읍 중에 순행하여 그 가운데에서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의 이마에 표를 그리라” 누구의 이마예요? 탄식하며 우는 자들의 이마에. 그들이 왜 탄식하며 웁니까? 예루살렘이 멸망하게 생겼거든요. 누가 멸망시켜요? 주님께서, 주 여호와께서 멸망시킨다는 거예요. 바벨론을 통해서, 느부갓네살을 통해서 멸망시키시는데 왜요? 그들이 주님 앞에 가증한 일을 행하고 범죄하고 망할 짓을 했거든요.
그래서 멸망시키는데 그 가운데서 그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우는 자들의 이마에, 그 이마에 표를 그려라. 왜 그려둘까요? 나중에 그들을 살려주시는 거예요. 그런데 오해하지 마세요. 이마에 표를 그린 자들이 어떤 자들이냐? 그럼 그들은 죄를 짓지 않은 자라서 이마에 표를 그리는 게 아니에요. 그들도 범죄하였고 그들도 같이 망하지만, 그러나 자기들의 죄를 안타까워하며 탄식하며 우는 자들의 이마에 너는 표를 그려라. 그리고 주님이 그들을 살려두시는 겁니다. 계속해서 에스겔 11장에 보면요, 11장 16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즉 너는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아내어 여러 나라에 흩었으나 그들이 도달한 나라들에서 내가 잠깐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 그들을 쫓아내시는 분이 주님이시라는 거예요. 이방인의 나라로 붙잡혀가게 하시는 것도 주님이 하시는 일이에요.
그러나 그들이 쫓겨간, 그들이 잡혀간 그 이방인들의 나라에서라도 주님께서 그들에게 성소가 되신다. 주님이 그들 가운데 자신의 임재를 두시고 그들과 함께하시고 그 쫓겨간 하나님의 나라, 그 쫓겨간 이방인들의 나라에서 주님이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하신다는 겁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약속입니까? 계속해서 에스겔 11장 17절부터 더 놀라운 약속의 말씀을 우리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너는 또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만민 가운데에서 모으며 너희를 흩은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모아내고 이스라엘 땅을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다 하라 그들이 그리로 가서 그 가운데의 모든 미운 물건과 모든 가증한 것을 제거하여 버릴지라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그들이 누구예요?
붙잡혀 간 이스라엘 백성, 그렇죠? 이방 땅에 포로 된 그 탄식하며 울고 있는 그 하나님의 백성들,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할렐루야! 자, 여러분 여기가 결론입니다. 주님은 누구의 하나님이 되십니까? 누가 주님의 백성이고 주님은 누구의 하나님이 되신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보여주신 그 구원의 비전을 보십시오. 탄식하며 우는 자들, 쫓겨났던 자들, 흩어졌던 자들, 버림받고 정죄받았던 그들, 하나님은 그들을 그 은혜의 품으로 불러 모아서 우리 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여러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에스겔 선지자에게 보여주신 주 여호와의 구원의 비전입니다. 그들은 비록 망했습니다. 자기들의 죄 때문에 망한 거예요.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에 망한 게 아니에요. 이 사람들은 죄를 짓지 않아서 이들만 구원받은 게 아니라니까요. 그들도 다 죄짓고 다 망한 자들입니다.
500 데나리온 빚진 자나 50 데나리온 빚진 자나 똑같습니다. 그러나 어떤 자는 죄를 깨닫고 탄식하며 울며 주님의 은혜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비록 그들을 포로로 잡혀가게 하셨을지라도, 그들을 치신 것이 하나님이실지라도, 결국 그렇게 울며 탄식하며 무릎 꿇고 그 은혜 앞에 나아오는 자들은 우리 하나님께서 그 은혜로 받아주시고 다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서게 하신다는 겁니다. 주님은 바로 그런 자들의 하나님이십니다. 주님이 선포하신 그 은혜의 나라는 그렇게 그 은혜 앞에서 탄식하며 우는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뭐라고 그러셨어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자,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이야기에 초점을 여러분 이제는 좀 볼 줄 아시겠습니까? 영어 성경을 읽어보면요, NIV 성경, NLT 성경 등 현대 언어로 번역된 영어 성경들은 단락단락마다 소제목이 나와 있어요. 이 부분에 누가복음 7장 이 뒷부분에 소제목 달린 걸 보면 이렇게 써 있어요. 한번 영어로 보시죠. “Jesus Anointed by a Sinful Woman” 주어가 Jesus로 돼 있고 수동태 문장으로 돼 있어요. “Jesus Anointed”, 예수께서 기름 부으심을 받으셨다. 누구에게? 한 죄 많은 여인에게. 자, 이거요, 우리가 그냥 쉽게 번역하면 “그저 죄 많은 여인이 예수께 기름을 부었다”라고 읽을 수도 있지만, 근데 사실 이 문장이 그렇게 돼 있지 않고 거꾸로 주어를 예수님으로 앞으로 빼고, Anointing이라고 하는 이 단어를 수동태로 요거 강조했다는 거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기름 부으심, Anointing을 받으셨다라는 거예요.
죄 많은 여인이 예수님께 기름을 쏟아부었어가 아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한 죄 많은 여인에게 기름 부으심, Anointing을 받으셨어라고 이해하는 것이 정확하지 않나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왜요? 여러분 Anointing이 무슨 말입니까?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말이 뭡니까? 그건 그들의 왕, 그들의 제사장으로 세움을 받는다는 의미입니다. 다윗이 사무엘에게 기름 부으심을 받을 때처럼. 그러나 사무엘은 하나님의 거룩한 선지자니까 기름을 부었는데, 도대체 이 죄 많은 여인이 뭐라고 예수님께 기름을 붓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이 부분을 읽은 방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저는 예수님 자신이 확인해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두 구절을 보십시오.
49절에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거기 함께 앉아 있는 바리새인과 그 바리새인이 초대한 역시 그 급이 되는 그럴듯한 사람들이 거기에 앉아서 하는 말은 “이 사람 뭐지?” 여기서 이 사람은 예수님입니다. 이 사람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이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인가 알아보려고 거기에 나왔던 거죠. 그리고는 “역시나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인가? 이거 아닌 것 같아. 이 사람 뭐지? 지가 뭔데 죄를 사한다 그래?” 그렇죠. 예수님을 판단하고 의심하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이 여인이 한 행동, 기름 부은, 감히 지가 뭐라고 예수님께 기름 붓고 고백합니다. 입으로 소리 내어 말은 안 했지만 “주님, 당신은 나의 왕이시고, 주님 당신은 나의 제사장, 나의 구주이십니다. 나를 정결함으로 이끄실 유일한 소망이십니다.
당신이 나의 소망이시기에 나는 이 사람들의 모든 혐오하는 눈, 의심하는 눈초리, 이 사람들로부터 돌 맞아 죽을지도 모르는 이 모든 위험한 것들도 무릅쓰고 당신의 은혜 앞에 나왔습니다. 당신이 나와 함께하시면 나는 이제 당신과 함께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은 바로 그와 같은 고백 가운데 그와 같은 죄인 앞에서 그의 기름 부으심을 받으시고, 그의 Anointing을 받으시고, 그들의 왕으로 그들의 제사장으로 그들의 구원자로 그들 앞에 분명히 서신 것을 여러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여인의 판단이 잘못됐으면, 그 여인의 생각이 터무니없으면 예수님 아마 이렇게 말씀하셨을 거예요. “여인이여, 뭔가 잘못 생각하신 것 같은데 여기 이 점잖은 분들의 잔치를 망치지 마시고 내가 따로 조용히 한번 시간 낼 테니까 물러가시죠.” 그랬겠죠.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그래.
“그래, 맞아. 내가 너의 주인, 너의 왕이고 내가 너를 정결케 하기 위한 온전한 제사장으로 이 땅에 왔어. 너의 믿음이 구원하였으니 너의 믿음대로 될 것이니, 딸아 이제 너는 사람들이 의심하고 혐오하고 부정하는 그 어떤 더러운 죄인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 가장 소중한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의 자녀로, 백성으로 이제 평안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거야.” 여러분 오늘 우리는 우리 주님의 은혜 앞에 어떤 사람으로 서 있습니까? 그저 나의 관심과 필요를 따라 주님을 불러 앉혀놓고 이리저리 평가하고 판단하고 재고 있는 그런 사람은 아닙니까? 아니면 나의 죄를 슬퍼하고 탄식하면서 그 은혜의 크기를 깨달을수록 더욱더 사랑의 고백과 헌신이 커질 수밖에 없음을 드러내고 있습니까?
나는 정말 그 은혜에 합당한 사람의 모습으로 그분 곁에 서 있고, 그 은혜받은 자의 모습으로 오늘 나와 같이 연약하고 여전히 죄 많은 모습으로 상처받고 눈치 보고 그렇게 위축된 모습으로 어디에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그 어떤 사람들 앞에서, 그 은혜받은 자의 모습으로 그 은혜를 나누는 자의 모습으로 우리는 정말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우리 주님은 그럴듯한 사람들, 급이 맞는 사람들의 주님이 아니시고, 우리 주님은 죄 많은 한 여인의 기름 부음을 받으신 하나님, 바로 그 죄인들의 주님으로 이 땅 가운데 서 계신 것을 여러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주님이 바로 나의 주님이십니다. 우리 한번 같이 고백합시다. “그 주님이 나의 주님이십니다.”
God Is in the Details: The True Recipients of Grace
These days, we often hear the saying, “The devil is in the details.” Most of you have probably heard it at least once, right? “The devil is in the details.” However, many sayings we frequently hear actually originated differently from their source. They were not passed down accurately. Originally, this expression was not “The devil is in the details,” but “God is in the details.”
The person who said this was the famous German architect Ludwig Mies van der Rohe. He said, “God is in the details.” God is in the details—an expression containing an architect’s discerning eye. Even if things look similar or seem to have little difference at a casual glance, examining every single detail carefully produces vastly different results in the end.
However, details matter not only to architects or when we evaluate people. Details are equally vital when reading Scripture. We must read the Bible accurately. Yet, we often jump to conclusions based on hearsay or vague knowledge, assuming, “Oh, that sounds like a similar story.”
Even when listening to a pastor’s sermon, people think, “He’s probably going to say this about today’s passage.” Even while reading the Bible page by page ourselves, we frequently fail to grasp the exact meaning within its sentence and context, casually judging it according to our preconceived ideas or familiar conclusions.
You must not prematurely assume, “This is a similar story.” Look closely into the details to uncover the actual meaning and implication. What are meaning and implication? Meaning refers to the primary interpretation we capture within the context of the sentence. What about implication? Implication refers to applying that meaning within the reader’s real-life context—what the text is saying to us today. We must read accurately first to properly understand both its meaning and its implication.
Today’s text in the latter part of Luke 7 is precisely a passage where we risk missing its vital message, meaning, and implication by treating it as just another story we already know.
Look at the text. A woman came to Jesus, poured ointment on His feet, and wiped them with her hair. You have likely read this story many times. This account appears not only in Luke, but also in Matthew and Mark. In particular, John 12 leaves a powerful image in our minds regarding this event. Consequently, we tend to dismiss the account in Luke 7, assuming it carries the same message as John 12.
However, these are distinctly different stories. The story in John 12 and the story here in Luke 7 are completely different in their details. The timing, background, and key figures themselves differ entirely.
Let us examine these details. First, look at John 12:1–3:
“Six days before the Passover, Jesus therefore came to Bethany, where Lazarus was, whom Jesus had raised from the dead. So they gave a dinner for him there. Martha served, and Lazarus was one of those reclining with him at table. Mary therefore took a pound of expensive ointment made from pure nard, and anointed the feet of Jesus and wiped his feet with her hair. The house was filled with the fragrance of the perfume.”
When did this occur? Six days before the Passover—the very Passover during which Jesus was crucified. Thus, John 12 takes place near the end of Jesus’ earthly ministry. Where did it happen? In Bethany, near Jerusalem, at the home of the three siblings: Lazarus, Martha, and Mary. Why did Jesus visit them? Jesus had raised Lazarus from the dead, and He often stayed with them whenever He visited Jerusalem because of their close relationship. Among them, Mary of Bethany came to Jesus, poured ointment on Him, and wiped His feet with her hair.
Hymns can sometimes cause confusion. Consider the hymn line: “Like Mary who gave precious ointment to the Lord.” Was it Mary Magdalene who gave the ointment to Jesus? No. The Mary who offered the ointment was Mary of Bethany, sister of Lazarus and Martha. Mary Magdalene is a different person—the woman out of whom seven demons went out in Luke 8.
We must not confuse Mary of Bethany with Mary Magdalene. Why does this confusion happen so often? In Luke 7, the woman who brings the ointment is called a woman who was a sinner—scholars speculate her sin may have been sexual, leading people to brand her as a prostitute. Mixing these two images creates the misconception: “A woman who was a sinner = Mary Magdalene.” Thus, without any biblical basis, rumors spread that Mary Magdalene was a prostitute. That is a complete misunderstanding of Scripture.
Most importantly, the central themes of John 12 and Luke 7 are entirely different. Jesus’ purpose in sharing these words differs in each context.
John 12 focuses on preparing for Jesus’ impending death. Mary of Bethany acted in faith to prepare for Jesus’ burial and his coming cross. In Luke 7, however, the focus is not on His death. This occurred during the early stage of Jesus’ ministry. He had not yet begun telling His disciples that He would suffer and die on the cross. Instead, Jesus was proclaiming the gospel of the Kingdom of God, declaring His grace, and continuously emphasizing who truly belongs to the Kingdom of God.
He questioned who was worthy to receive grace and who belonged to God’s Kingdom. He challenged the Pharisees, scribes, religious leaders, and those proud of their Jewish lineage who confidently assumed, “The Kingdom of God belongs to us.”
Where is the true focus of Jesus’ message? Let us examine the details starting from verse 36:
“One of the Pharisees asked him to eat with him, and he went into the Pharisee’s house and reclined at table.”
A Pharisee invited Jesus. Did the Pharisees have a good relationship with Jesus? No. They pointed fingers at Him, calling Him a glutton, a drunkard, and a friend of tax collectors and sinners. Yet, did Jesus accept their invitation? He did not say, “Those Pharisees always suspect and criticize Me, so I won’t associate with them.” Jesus was a friend of tax collectors and sinners, but He did not discriminate against, exclude, or show partiality even toward the Pharisees who doubted Him. He willingly accepted their invitation.
However, an awkward situation arose during the banquet. Verses 37–38 state:
“And behold, a woman of the city, who was a sinner, when she learned that he was reclining at table in the Pharisee’s house, brought an alabaster flask of ointment, and standing behind him at his feet, weeping, she began to wet his feet with her tears and wiped them with the hair of her head and kissed his feet and anointed them with the ointment.”
This was already an uncomfortable gathering. A powerful, prominent local figure had invited Him, but the atmosphere was far from relaxed. In that formal and tense setting, an embarrassing incident occurred. A woman stepped forward and treated Jesus with the highest honor. While it was an act of devotion, it created an awkward, difficult, and unsettling scene.
What had happened to this woman? We can infer some details later from Jesus’ words. However, regardless of her background, her actions were bold enough to make everyone uncomfortable, render them ceremonially unclean, and completely disrupt the Pharisee’s banquet.
Look at verse 39:
“Now when the Pharisee who had invited him saw it, he said to himself, ‘If this man were a prophet, he would have known who and what sort of woman this is who is touching him, for she is a sinner.'”
Seeing her actions and Jesus’ response, the Pharisee doubted Him: “If this man were really a prophet, He would know what kind of sinner she is.” The Pharisee already knew her reputation. Through her actions, he judged Jesus. Even if Luke did not record her specific sins, everyone in town knew who she was. Jesus also knew what they were thinking.
How did Jesus respond? Look at verses 40–43:
“And Jesus answering said to him, ‘Simon, I have something to say to you.’ And he answered, ‘Say it, Teacher.’ ‘A certain moneylender had two debtors. One owed five hundred denarii, and the other fifty. When they could not pay, he cancelled the debt of both. Now which of them will love him more?’ Simon answered, ‘The one, I suppose, for whom he cancelled the larger debt.’ And he said to him, ‘You have judged rightly.'”
In Jesus’ parable, a denarius was a day’s wage for a laborer. In modern terms, if a day’s wage is around 100,000 KRW, 500 denarii would be roughly 50 million KRW, and 50 denarii about 5 million KRW. Both debtors received grace and had reason to be thankful. But who would love the moneylender more? Naturally, the one forgiven the larger debt. Jesus confirmed, “You have judged rightly.”
Up to this point, it is common sense. But a dramatic turn follows in verses 44–46:
“Then turning toward the woman he said to Simon, ‘Do you see this woman? I entered your house; you gave me no water for my feet, but she has wet my feet with her tears and wiped them with her hair. You gave me no kiss, but from the time I came in she has not ceased to kiss my feet. You did not anoint my head with oil, but she has anointed my feet with ointment.'”
Simon hosted a banquet and invited Jesus as the guest of honor, yet he failed to show basic hospitality. In Jewish custom, providing water at the entrance for guests to wash their dry, dusty feet was a fundamental courtesy. When Jesus shared the last Passover meal with His disciples, He Himself performed the duty of a servant by washing their feet. Yet Simon offered no such courtesy to Jesus. Furthermore, greeting a guest with a kiss and anointing their head with oil were standard expressions of welcome. Simon provided none of these.
What was the difference between Simon and this woman? Simon invited Jesus, but he did not truly welcome or love Him; to Simon, Jesus was merely an object of observation and judgment. For this woman, however, Jesus was her only hope. She knew the ridicule and contempt she would face by entering that house. Yet she risked everything because she believed Jesus was her sole hope—the One whose gospel of grace forgave sinners and welcomed the unworthy.
She stood behind Him, unable to speak, weeping profusely. She poured out her most precious alabaster flask of ointment. Mixing her tears and ointment on His dusty feet, she wiped them with her hair—her crowning glory.
Jesus said in verse 47:
“‘Therefore I tell you, her sins, which are many, are forgiven—for she loved much. But he who is forgiven little, loves little.'”
This woman poured out great love because she recognized her unworthiness and collapsed before His immense grace. In contrast, Simon was stingy with his love because he did not consider himself a serious sinner. He believed his sins were minor compared to hers, making him feel entitled to show little devotion.
Do not misunderstand Jesus’ words. He was not teaching salvation by works—that her actions earned her forgiveness. The core of Jesus’ parable is: Who is truly prepared to receive God’s grace?
Paul answers this clearly in Romans 5:20:
“Now the law came in to increase the trespass, but where sin increased, grace abounded all the more,”
Where sin increased, grace abounded all the more. Recognizing her deep sinfulness, this woman received overflowing grace, which led her to respond with profound love, gratitude, and devotion.
Jesus said to her in verse 48:
“And he said to her, ‘Your sins are forgiven.'”
Who are the true recipients of grace? God reveals this through the prophet Ezekiel. In Ezekiel 9:4, the Lord says:
“And the LORD said to him, ‘Pass through the city, through Jerusalem, and put a mark on the foreheads of the men who sigh and groan over all the abominations that are committed in it.'”
God placed a mark on the foreheads of those who sighed and groaned over sin to spare them from judgment. These were not sinless people; they too were guilty, yet they grieved over their sins.
Furthermore, Ezekiel 11:19–20 promises:
“And I will give them one heart, and a new spirit I will put within them. I will remove the heart of stone from their flesh and give them a heart of flesh, that they may walk in my statutes and keep my rules and obey them. And they shall be my people, and I will be their God.”
God restores those who mourn over their sins, bringing them into His grace. Whether one owes 500 denarii or 50 denarii, all are sinners. But those who recognize their debt and fall before the Lord in repentance receive His mercy.
In modern English translations (such as the NIV or NLT), the section heading for Luke 7:36–50 often reads: “Jesus Anointed by a Sinful Woman.”
Notice the phrasing: “Jesus Anointed.” Anointing signifies consecration as King and Priest. Through her tears and ointment, this woman proclaimed without words: “Lord, You are my King, my Priest, and my Savior. You are my only hope.”
Despite the hostile stares of the Pharisees, she came to Him. Jesus accepted her anointing and affirmed her faith in verse 50:
“And he said to the woman, ‘Your faith has saved you; go in peace.'”
Jesus assured her that she was no longer a despised sinner, but a cherished child of God.
How do we stand before the Lord’s grace today? Do we treat Him as an object of evaluation based on our convenience, or do we mourn our sins and respond with expanding love and commitment?
Remember this: Our Lord is not merely the God of the self-righteous or respectable. He is the Lord who received the anointing of a sinful woman—the Savior of repentant sinners. He is our Lo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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