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가일이 나서다(삼상 25:14-31)

14 하인들 가운데 하나가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에게 말하여 이르되 다윗이 우리 주인에게 문안하러 광야에서 전령들을 보냈거늘 주인이 그들을 모욕하였나이다 15 우리가 들에 있어 그들과 상종할 동안에 그 사람들이 우리를 매우 선대하였으므로 우리가 다치거나 잃은 것이 없었으니 16 우리가 양을 지키는 동안에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어 밤낮 우리에게 담이 되었음이라 17 그런즉 이제 당신은 어떻게 할지를 알아 생각하실지니 이는 다윗이 우리 주인과 주인의 온 집을 해하기로 결정하였음이니이다 주인은 불량한 사람이라 더불어 말할 수 없나이다 하는지라 18 아비가일이 급히 떡 이백 덩이와 포도주 두 가죽 부대와 잡아서 요리한 양 다섯 마리와 볶은 곡식 다섯 세아와 건포도 백 송이와 무화과 뭉치 이백 개를 가져다가 나귀들에게 싣고 19 소년들에게 이르되 나를 앞서 가라 나는 너희 뒤에 가리라 하고 그의 남편 나발에게는 말하지 아니하니라 20 아비가일이 나귀를 타고 산 호젓한 곳을 따라 내려가더니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자기에게로 마주 내려오는 것을 만나니라 21 다윗이 이미 말하기를 내가 이 자의 소유물을 광야에서 지켜 그 모든 것을 하나도 손실이 없게 한 것이 진실로 허사라 그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는도다 22 내가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침까지 남겨 두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23 아비가일이 다윗을 보고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 앞에 엎드려 그의 얼굴을 땅에 대니라 24 그가 다윗의 발에 엎드려 이르되 내 주여 원하건대 이 죄악을 나 곧 내게로 돌리시고 여종에게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이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25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의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의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여종은 내 주께서 보내신 소년들을 보지 못하였나이다 26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도 살아 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복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27 여종이 내 주께 가져온 이 예물을 내 주를 따르는 이 소년들에게 주게 하시고 28 주의 여종의 허물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 29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 30 여호와께서 내 주에 대하여 하신 말씀대로 모든 선을 내 주에게 행하사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실 때에 31 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보복하셨다든지 함으로 말미암아 슬퍼하실 것도 없고 내 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시리니 다만 여호와께서 내 주를 후대하실 때에 원하건대 내 주의 여종을 생각하소서 하니라

나발을 죽이러 다윗이 온다는 소식은 곧 나발의 진영에 들리게 되었습니다. 나발의 하인은 이 상황을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에게 알렸습니다. 그러자 이 긴박한 상황에서 아비가일이 직접 나섰습니다. 아비가일은 이 문제를 놓고 남편과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아주 긴박한 상황이라서 내부적으로 논의하고 대응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우선 선조치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또는 나발이 말이 통하지 않는 완고한 사람이었기 때문이거나, 또는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나중에 아비가일이 한 일을 나발이 포도주에서 깨어난 후에 들었다는 표현(삼상 25:37)으로 보아 그런 상황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또한 종은 주인에 대하여 불량한 사람으로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켰습니다(삼상 25:17).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나아가 자비를 구하였습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음식을 준비하고 다윗을 맞이하러 나가서 다윗의 마음을 누그러뜨렸습니다. 나발은 감사를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아비가일은 고마움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발은 자신의 손으로 모든 것을 이룬 것이라 생각했지만, 아비가일은 다윗의 고마움을 인정하고 그 용사들에게 음식을 대접할 수 있었습니다. 지혜로운 누구일까요? 겸손한 자가 지혜로운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만 살 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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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대부분의 우리들은 나발처럼 생각하면서 삽니다. 내가 수고하고 내가 땀을 흘려 모든 것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돕지 않았다면, 우리들의 수고가 헛될 수밖에 없음을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시 127:1). 그렇다면, 우리가 이렇게 숨을 쉬고 살고 여러 가지를 누리며 살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볼 줄 알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반면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이 모든 것을 이룬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입니다.

나발의 경우 당장 심판에 직면합니다. 다윗이 군사들을 이끌고 와서 공격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경우에는 당장 심판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일관적으로 우리에게는 심판이 있을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멀리 타국에 갔던 주인이 돌아와 종들과 회계할 때가 있는 것처럼, 신랑이 와서 신부를 데리고 갈 때가 있는 것처럼, 추수할 때가 있는 것처럼, 반드시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윗의 일행을 막아선 사람이 아비가일입니다. 잘못은 나발이 했는데, 아비가일이 엎드려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반드시 나발에게 속한 모든 남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침까지 남겨 두지 않겠다고 하면서 달려 온 다윗을 멈추게 한 사람이 아비가일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에서부터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잘못은 나발이 했는데 대신에 엎드린 아비가일처럼, 아무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은혜 때문에 우리가 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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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발과 다윗(삼상 25:1-13)

1 사무엘이 죽으매 온 이스라엘 무리가 모여 그를 두고 슬피 울며 라마 그의 집에서 그를 장사한지라 다윗이 일어나 바란 광야로 내려가니라 2 마온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의 생업이 갈멜에 있고 심히 부하여 양이 삼천 마리요 염소가 천 마리이므로 그가 갈멜에서 그의 양 털을 깎고 있었으니 3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남자는 완고하고 행실이 악하며 그는 갈렙 족속이었더라 4 다윗이 나발이 자기 양 털을 깎는다 함을 광야에서 들은지라 5 다윗이 이에 소년 열 명을 보내며 그 소년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갈멜로 올라가 나발에게 이르러 내 이름으로 그에게 문안하고 6 그 부하게 사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평강하라 네 집도 평강하라 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하라 7 네게 양 털 깎는 자들이 있다 함을 이제 내가 들었노라 네 목자들이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우리가 그들을 해하지 아니하였고 그들이 갈멜에 있는 동안에 그들의 것을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나니 8 네 소년들에게 물으면 그들이 네게 말하리라 그런즉 내 소년들이 네게 은혜를 얻게 하라 우리가 좋은 날에 왔은즉 네 손에 있는 대로 네 종들과 네 아들 다윗에게 주기를 원하노라 하더라 하라 9 다윗의 소년들이 가서 다윗의 이름으로 이 모든 말을 나발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10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11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 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 12 이에 다윗의 소년들이 돌아서 자기 길로 행하여 돌아와 이 모든 말을 그에게 전하매 13 다윗이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칼을 차라 하니 각기 칼을 차매 다윗도 자기 칼을 차고 사백 명 가량은 데리고 올라가고 이백 명은 소유물 곁에 있게 하니라

나발은 마온이라는 마을에 사는 유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갈멜이라는 곳에서 목축업을 하였는데, 양이 3,000마리, 염소가 1,000마리가 될 정도로 거부였습니다. 양을 기르는 이들에게 있어서 양털은 엄청난 수입원입니다. 농부들이 봄에 씨를 뿌리고 수고한 후에 가을에 추수를 하는 것처럼, 양털을 깎는 것은 목자들에게는 아주 큰 기쁨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동안의 수고와 고생이 보상을 받는 날입니다. 추수 때에는 너무나도 기뻐서 그 추수한 것을 가지고 잔치를 벌이게 되는 것처럼, 양털을 깎을 때에도 잔치가 벌어집니다.

다윗은 나발이란 사람이 양털을 깎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윗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사람들을 나발에게 보냈습니다. 곳간에서 인심이 난다는 말처럼, 목축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자비로운 마음이 생기는 때가 이때일 것입니다. 다윗은 기쁨으로 충만해 있을 나발에게 양식을 나누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거지처럼 손을 벌린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나발의 목자들이 양을 칠 때 다윗의 일행은 울타리가 되어주었고 보호해주는 역할을 수행했었습니다. 당시는 전쟁과 노략질이 일상화되어 있던 시기였기에 다윗과 같은 일행이 곁에 있었다는 것은 아주 큰 행운이었을 것입니다. 노략질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발에게는 은인인 셈입니다. 따라서 다윗이 요청하지 않았더라도, 나발은 양털을 깎을 때 음식을 다윗의 일행과 나누는 것이 당연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상 25장의 이야기는 이상하게 흘러갑니다.

나발은 다윗의 요청을 일언지하게 거절해버렸습니다. 요즘 주인을 배반하고 떠난 종이 많은데, 다윗이 사울 왕을 배반하고 떠난 몹쓸 인간이라는 모욕까지 해가면서 거부하였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다윗은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래서 칼을 차고, 나발을 치러 떠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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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를 읽다 보면, 다윗이 마치 조직폭력배 같다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치 조폭들이 시장 안을 돌아다니면서, 우리가 이 시장을 잘 돌보아 주었으니 돈을 내라고 하면서 뜯어내는 것과 같아 보입니다. 조직폭력배들은 상인들이 장사를 잘할 수 있도록 돌보아 준 대가를 내라고 돈을 뜯어내고, 만일 듣지 않으면 장사를 방해합니다. 상인들은 불만이 있어도 힘이 없어서 저항하지도 못하고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돈을 바쳐야 합니다. 하지만 다윗이 그런 조직폭력배처럼 행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의 관습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양털을 깎는 것은 목축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아주 큰 경사였습니다. 농부들이 수확을 하는 추수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이때에는 목초지에 있을 때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박사 학위를 마치면서 학위논문에 그동안 도움을 준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서 고마움에 대한 감사를 표시하는 것처럼, 임기를 마치는 어떤 기관장이 그동안 자신을 도와준 분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처럼, 양털을 깎을 때에는 그동안 여러모로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고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추수할 때 농부는 모든 것을 다 수확하지 않습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이 이삭을 주울 수 있도록 남겨놓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추수한 후에는 이웃들과 잔치를 벌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것과 같습니다. 양털을 깎는다면 그 기쁜 날에 이웃들과 함께 나눔을 하고 잔치를 벌이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있는 곳에서 왕처럼 일했습니다. 그는 도망자였지만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위험에 처하면 목숨을 걸고 달려가 도와주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다윗 일행이 밤낮 자신들의 담이 되어주었다고 고백하는 나발의 하인들의 증언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삼상 25:16). 왕복을 입고 왕좌에 앉은 것은 아니었지만, 왕이 해야 할 일을 했던 것입니다. 당연히 나발의 목자들을 위험에서부터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나발에게 다윗은 이렇게 말을 전했습니다. “너는 평강하라. 네 집도 평강하라. 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하라. 네게 양 털 깎는 자들이 있다 함을 이제 내가 들었노라. 네 목자들이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우리가 그들을 해하지 아니하였고 그들이 갈멜에 있는 동안에 그들의 것을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다.” 다윗 일행이 그들을 보호해주어서 그들이 지금까지 양을 잘 기를 수 있었음을 상기시킨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도와주셔서 고맙다고 감사를 표하면서 사례를 하는 것이 당연한 반응일 것입니다. 사무엘서를 읽는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런 반응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발의 반응은 정말 뜻밖이었습니다. 다윗을 가리켜 도대체 어디서부터 왔는지도 모르는 자라고 폄하하였습니다. 혼인잔치에 초대를 받은 이들이 하찮은 이유를 대면서 왕의 혼인잔치에 갈 수 없다고 대답하는 말처럼 황당한 대답입니다. 밤중에 이웃집 문을 두드리면서 손님을 대접할 떡이 없으니 좀 몇 덩이만 달라고 요청했을 때, 아이들을 깨울까 염려되어 줄 수 없다고 대답하는 말처럼 황당한 대답입니다. 나발의 대답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황당한 대답이었습니다. 양식을 못 주겠다고 해도 황당한 대답일 텐데, 다윗을 모욕하면서까지 거절했습니다.

이때 다윗의 분노가 극에 달했습니다. 아니, 다윗의 부하들이 먼저 분노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대로 다윗에게 알렸고, 다윗은 참지 못하고 분노가 폭발해서, 모두 칼을 차고 나발을 죽이러 가기로 했습니다. 400명의 용사들을 이끌고 나발을 죽이려고 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고개가 갸우뚱해집니다. 사무엘상 24장에서 사울 왕을 용서하고 죽이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 다윗이 왜 나발을 향해서는 분노하면서 죽이려고 달려드는 것일까요? 사울은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인 반면에, 나발은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일까요? 그런 이분법이 그에게 있었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뜻은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든 아니든, 선하게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어떤 사람이든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며, 선인에게뿐만 아니라 악인에게까지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다면, 왜 다윗은 이 순간에 폭발해버렸을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다윗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윗은 사울을 향해 칼을 들지 않을 수 있는 뛰어난 영성의 소유자였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다윗은 순식간에 분노에 휩싸일 수 있는 연약한 존재였습니다. 다윗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괴물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는 연약한 존재가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항상 “주여, 우리의 마음을 다스려 주옵소서. 육체의 소리를 듣지 말게 하시고, 성령의 소욕을 따르게 하옵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나발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윗의 말에 대한 대답을 하면서, “내 떡” “내 물” “내 양털 깎는 자”라는 표현을 씁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해주신 어리석은 부자의 말을 닮았습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내 곳간을 헐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내 영혼에게”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런 어리석은 부자에게 하나님은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기 것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자기의 것이 아닌 것입니다. 나발은 감사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었고, 하나님께서 왜 자신에게 많은 것을 주셨는지를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다 주님의 것입니다. 내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주님의 청지기로서 관리를 하는 자일 뿐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벧전 4:10-11).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주셨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관리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게 청지기적 관점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께서 제사장 나라로 세우신 것도 마찬가지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제사장 나라가 되어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다른 민족을 위한 봉사의 사명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들이 선택받은 족속이라 생각하고 이방인들을 무시하는 것으로 교만함을 나타냈습니다. 사명을 특권으로 착각하고 사명을 저버린 것입니다. 나발의 행위가 바로 그런 행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수많은 수확을 허락해주었다면, 그것은 자신의 배를 배불리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어주고 표현했어야 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교만의 재료가 되거나, 탐욕의 기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항상 감사의 재료가 되어야 합니다.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이고, 더 나아가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나눔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로 나발이 우리들의 모습과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풍성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발처럼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누구냐?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사람이 와서 구하느냐?”라고 하면서 물리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하셨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하나님은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십니다(롬 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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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의 회개(삼상 24:16-22)

16 다윗이 사울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마치매 사울이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하고 소리를 높여 울며 17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18 네가 나 선대한 것을 오늘 나타냈나니 여호와께서 나를 네 손에 넘기셨으나 네가 나를 죽이지 아니하였도다 19 사람이 그의 원수를 만나면 그를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네가 오늘 내게 행한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20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21 그런즉 너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내 아버지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을 이제 여호와의 이름으로 내게 맹세하라 하니라 22 다윗이 사울에게 맹세하매 사울은 집으로 돌아가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요새로 올라가니라

사울은 다윗의 말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신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데, 자신을 향해서 전혀 해를 가하지 않은 다윗의 모습에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사울은 울면서 다윗을 불렀습니다.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이 장면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우리를 향해서 속삭입니다, ”네 힘을 보여줘“ ”네 본때를 보여줘“ ”네가 힘이 있고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으면, 너는 무시를 당하게 될 거야. 너를 깔보게 될 거야.“ 이러한 세상의 속삭임에 너무 많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큰소리부터 치기 시작합니다. 목소리가 큰 사람이 이긴다는 속설이 우리를 조종하기 때문입니다. 조금이라도 얕잡아 보였다간 죽을 수 있다는 위기감에, 잔뜩 허세를 부리면서 이 세상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칼을 빼 듭니다. 예수님께서 잡혀가실 때 칼을 빼 들었던 베드로처럼, 위협이 있을 때마다 무력으로 대응하려고 합니다. 우리의 무기를 빼 들고 공격 자세를 취합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싸움을 해서 이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상대방이 제압되는 것이 아닙니다. 피차 멸망하기만 할 뿐입니다. 내가 칼을 빼 들면, 상대방이 순순히 항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같이 칼을 빼 들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주 놀라운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저항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마 5:38-39). 다윗이 행한 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효과가 있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에게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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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칼이 강하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칼보다 강한 것은 펜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펜보다 더 강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품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손양원 목사님을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부릅니다.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범인을 손양원 목사님은 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악했던 사람이 사랑의 원자탄 앞에서 굴복한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항복하는 이유는 우리가 한 손에 성경을 들고 또 한 손에 칼을 들고 있으면서,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해서가 아닙니다. 종종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결혼을 허락하지 못한다고 위협하고, 취직을 할 수 없다고 위협하고(오직 신자만이 취업 가능한 방식을 통해서), 거래를 끊겠다고 위협하고, 진급에 지장이 있을 것이라고 은근히 압력을 가하곤 합니다. 이러한 방법이 최고의 전도 방법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칼이나 무력으로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이 굴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굴복하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지만 말입니다. 오히려 사랑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무력을 사용하고 완력을 사용해서 우리를 굴복시키려면 굴복시킬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우리들의 마음의 문 앞에서 문을 두드리시며 기다리셨습니다. 사랑을 간청하셨습니다.

우리가 죄악을 범하여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당장 심판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를 죽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옷깃조차 자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6-8)

사울은 충격 가운데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17절)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그런즉 너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내 아버지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을 이제 여호와의 이름으로 내게 맹세하라“(20-21절). 아주 놀라운 고백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으로 모든 게 해결된 것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사울의 충격과 회개는 아주 극적인 것이었지만, 이것이 오래가지는 않았습니다. 나중에 보면, 사울은 다시 다윗을 죽이기 위해 나섭니다. 그렇다고 하면, 이렇게 눈물을 흘리면서 다윗 앞에서 참회했던 것은 순 거짓말이었던 것일까요? 전혀 진정성이 없이 거짓으로 뉘우치는 척 연기했던 것일까요?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만으로는 지금 이때 했던 회개와 참회, 그리고 약속이 진정성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진정성이 없었던 쇼였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반대로 이 순간만큼은 진정으로 회개했었을 것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사울은 다윗의 행동에 크게 충격을 받았고, 그래서 크게 뉘우치면서 울었을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한번 회개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풀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탄은 자신이 포로로 잡고 있던 사울을 그냥 순순히 놓아주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사울의 마음을 충동질해서 다시 원상태로 돌려놓습니다. 이러한 예가 참 많습니다.

애굽 왕 바로의 경우가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재앙을 내릴 때마다, 이스라엘 민족을 보내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다가 얼마 뒤에 번복해버립니다. 그때 애굽 왕이 거짓으로 보내겠다고 약속한 것이었을까요? 그럴 수도 있지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진정성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마음이 바뀌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이런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부흥회를 통해서 또는 수양회를 통해서 큰 은혜를 체험합니다. 정말 주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각오를 다짐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닌 겁니다. 흔히들 말하는 대로, 성령 충만의 체험을 하기만 하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단번에 끝내는 경기가 아니라 기나긴 마라톤과 같습니다. 마치 아기가 태어나면 그 순간부터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대소변도 가릴 수 있는 게 아니라,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성장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울의 경우 다윗을 통해 충격을 받고 회개했다면,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믿음의 길을 가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면서 성결한 삶을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는 훈련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 과정이 생략되면,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 버립니다. 마치 더러운 귀신이 어떤 사람에게서 떠나갔지만 결국 다시 돌아와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눅 11:24-26). 그러면 처음 형편보다 나중이 더 심하게 됩니다.

전과자들이 어느 날 은혜를 체험했다고 해서 함부로 성직자로 세워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한때 좋은 의미이든 나쁜 의미이든, 유명했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을 믿고 목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코미디언, 살인자, 도둑이 변화되어 목사가 됩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이 복음을 우습게 만들고 주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성경의 교훈을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감독의 자격을 언급하면서 새로 입교한 자를 세우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딤후 3:6). 신앙은 한 방이 아닙니다. 믿음의 길은 오랫동안 성숙해져야 하는 길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2-14)

선 줄로 생각하면 망합니다. 한번 은혜받은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끊임없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보혈의 은혜를 기억하며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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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은 악인에게서 난다(삼상 24:8-15)

8 그 후에 다윗도 일어나 굴에서 나가 사울의 뒤에서 외쳐 이르되 내 주 왕이여 하매 사울이 돌아보는지라 다윗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9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 10 오늘 여호와께서 굴에서 왕을 내 손에 넘기신 것을 왕이 아셨을 것이니이다 어떤 사람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하지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 하였나이다 11 내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 자락만 베었은즉 내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오늘 아실지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12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13 옛 속담에 말하기를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하였으니 내 손이 왕을 해하지 아니하리이다 14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따라 나왔으며 누구의 뒤를 쫓나이까 죽은 개나 벼룩을 쫓음이니이다 15 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심판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사울이 굴에서 나갔을 때, 다윗도 뒤따라 나갔습니다. 그리고 멀리서 외쳤습니다. 사울의 양심을 향해서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한 말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저는 사울 왕의 대적이 아닙니다. 제가 왕을 죽일 수도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사울 왕 사이를 판단하시고, 공의를 이루어주실 것을 바랄 뿐, 제가 왕을 해하지는 않겠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대적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무찌른 이스라엘의 영웅이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귀중한 자원이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자리를 위협하는 인물이 아니라, 사울을 도와 이스라엘을 안정적으로 통치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는 자였습니다. 하지만 사울 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잠재적인 위협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주변의 사람들 때문이었을 수 있습니다. “보소서.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라고 다윗은 물었다. 즉 사울 주변의 사람들이 다윗에 대하여 모함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 사이를 이간질하고 모함하는 자는 사탄입니다. 문제는 사울 왕이 사탄의 속임수에 속아 넘어가서, 다윗을 조력자로 보지 않고 원수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간질은 사탄의 장기입니다. 사탄은 그 옛날 하와에게 접근하여 이간질한 적이 있습니다. 사탄은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불신하게 만들었고,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최선의 것을 주신다는 것을 의심하게 만들었습니다. 사탄은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무엇인가 좋은 것을 숨기고 계시다고 믿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이간질에 하와가 넘어갔습니다. 그게 불행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살아간다면, 그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무한한 축복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원수처럼 생각하고 마음을 닫게 만들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의 문을 닫아버리게 한 것입니다.

사울도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갔습니다. 다윗을 믿고 신뢰하고 다윗과 함께 나라를 세운다면, 사울 왕은 아주 훌륭한 업적을 남긴 왕으로 평가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을 적으로 간주하게 되었을 때, 사울 왕은 나쁜 왕이 되고 말았습니다. 블레셋 민족이 그릴라 백성들을 침공했을 때, 사울 왕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왕이 존재하는 이유는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인데,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었습니다. 다윗의 도움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다윗 한 사람을 잡기 위해서는 군대를 동원했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동지였다면, 쓰지 않아도 될 헛심을 쓴 것입니다. 실패한 왕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적으로 간주해서는 안 됩니다.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가 함께 협력해야 할 동반자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 양보하고, 서로 감싸주고, 함께 가정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종종 우리들은 사탄의 속삭임을 듣게 됩니다. 배우자를 원수로 대하라는 속삭임을 듣습니다. 그런 속삭임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보소서.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 이러한 호소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누군가를 우리의 대적으로 간주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반드시 우리의 대적이 되고 맙니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에서 노래하는 것처럼,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면 그가 내게로 와서 꽃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친구로 부르면, 친구가 됩니다. 다윗은 사울의 친구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울 왕은 다윗을 친구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적으로 부르게 되었을 때, 사울은 다윗으로부터 친구의 도움을 얻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은 사랑과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 도우면서 신앙생활을 같이 해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종종 사탄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탄의 이간질에 넘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와 장로가 서로 협력하는 동역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원수처럼 생각해서 싸우게 됩니다. 성도와 성도가 함께 돕는 조력자가 되어야 하는데, 원수처럼 대적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사탄의 이간질이라는 점을 알아채야 합니다.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는 함께 돕고 협력해야 할 운명의 공동체입니다. 서로 생각이 다를 수 있고, 관점이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원수로 간주하면서 죽일 듯이 덤벼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그 나라는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축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수들끼리 함께 협력하면서 어시스트를 해야 하는데, 자신의 경쟁자라고 생각하게 다른 선수가 골을 넣는 것을 시기하면서 어시스트를 하지 않으면, 그 팀은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주여, 믿음의 눈을 주옵소서. 사람을 원수로 보지 않고, 동역자로 볼 수 있는 눈을 주옵소서”라고 해야 합니다. 나와 다르다고 해서, 나와 다른 성향을 가졌다고 해서, 나보다 너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고 해서, 원수로 생각하거나 싸우려 든다면 결국 함께 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 5:15)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윗은 달랐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을 원수로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에게 사울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죽이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않은 이유는 다윗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갚는 것이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믿었고, 결국 하나님께서 공의로 판단해주실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않았지만, 다윗이 망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다윗도 사울처럼 사울을 원수로 생각하고 사울을 죽이려 달려들었다면, 함께 망했을 것입니다. 이 경우에 승자는 사탄뿐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사울을 향해서 칼을 들지 않았습니다. A. J. Muste라는 사람이 한 말 중에, “평화로 가는 길은 없다. 평화가 길이다(There is no way to peace. Peace is the way)라는 말이 있습니다. 평화를 얻기 위해서 전쟁의 방법은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오른편 뺨을 때리면, 같이 치고받고 싸울 게 아닙니다. 칼을 들이댄 사울이 이긴 것이 아니라, 칼을 들이밀지 않은 다윗이 승리하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이 누구입니까? 그것은 나를 힘들게 하고 나를 죽이려 달려드는 사울이 아닙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은 그런 사울을 죽여버리라고 충동질하고 미워하라고 충동질하는 사탄입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이 싸움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바른 싸움을 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다윗은 시편 109편에서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 그들이 악한 입과 거짓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속이는 혀로 내게 말하며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까닭 없이 나를 공격하였음이니이다.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시 109:1-4) 다윗은 하나님께 엎드렸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원수를 갚지 않을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재판관들에게 달려갈 것이 아니고, 권세자들에게 달려갈 것이 아니고, 물질을 의지할 것도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억울한 순간에도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답답한 순간에도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악은 악인에게서 납니다. 악을 행하는 것은 악인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선을 행해야 선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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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에게 찾아온 기회(삼상 24:1-7)

1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쫓다가 돌아오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더이다 하니 2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새 3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4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5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6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7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

블레셋과 전투를 하러 갔던 사울은 다시 돌아와 엔게디 광야에 있는 다윗을 잡으려고 하였습니다. 사울이 데리고 온 군사의 숫자는 3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급한 용무가 있어서 굴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뒤를 보러 갔다”는 표현의 원문은 “발을 가리러 갔다”입니다. 이 말은 용변을 본다는 것을 둘러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자 굴속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하필이면 그곳은 다윗의 일행이 숨어 있는 곳이었습니다. 사울이 들어온 것을 본 다윗의 사람들은 다윗에게 말했습니다.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삼상 24:4) 다시 말하면 원수를 갚을 절호의 기회가 왔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이니까 놓치지 말고 붙잡아야 한다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은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사울이 다윗의 굴에 들어가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겁니다.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의 허락하심 가운데 일어나는 일이니까 말입니다. 사울이 들어간 그곳이 다윗이 숨어 있던 곳이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일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다윗의 사람들이 지금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주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것은, 그렇게 말할 만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사울의 옷자락만 조금 베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래놓고도 다윗의 마음이 찔렸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얼마나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 하는가 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지금 당장 사울을 죽이고 이 지긋지긋한 도망자 신세를 끝장내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으로 기름을 부으셨기에, 이번 기회에 사울을 죽이고 왕이 되려면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순간에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삼상 24:6)

다윗의 마음이 찔린 것은 자신의 마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산상수훈의 말씀에 실제로 살인을 해야만 살인이 아니라, 형제를 미워하고 형제에게 노하기만 해도 살인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였습니다. 구약 시대의 다윗은 이미 산상수훈의 말씀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본 것입니다.

다윗의 이 말씀은 목사님에게 적용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보통 목사님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으신 종이니까, 목사님에게 함부로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한국 교회 안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생각이 정당하지 않은 것은 해석학적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목사님을 구약 시대의 제사장이나 왕이나 선지자와 같은 기름부음을 받은 직분으로 볼 수 없습니다. 목사님을 기름부음 받은 종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엄격하게 말하면 잘못된 표현이고, 좋게 봐주면 성직의 길을 간다는 점에서 비유적으로 하는 표현일 뿐입니다. 따라서 목사님들이 비리를 저지르고 성적으로 타락한 모습을 보일 경우에도 감싸고 돌면서 우리가 대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판단하시는 것에 맡겨야 한다는 생각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범죄가 있다면 징계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고전 5:12-13).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의 죄악에 대해서는 상관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거꾸로 합니다. 교회 밖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의 잘못을 비난하면서, 교회 안의 범죄에 대해서는 온정주의로 감싸고 돕니다. 이것은 성경적인 가르침에서 먼 행태일 뿐입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 모두가 다 제사장들입니다(벧전 2:9).

다윗은 원수를 갚아야 하지 않을 이유를 찾았습니다. 사울을 보면서는 그가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원수를 갚지 않아야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시므이의 경우는 기름부음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원수를 갚아도 된다고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이 경우에는 다른 이유를 찾아서 원수를 갚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항상 원수를 갚지 않아야 할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어떤 특정 부류에게만 잘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선하게 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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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인 사람과 믿음의 사람(삼상 23:21-29)

21 사울이 이르되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22 어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그는 심히 지혜롭게 행동한다 하나니 너희는 가서 더 자세히 살펴서 그가 어디에 숨었으며 누가 거기서 그를 보았는지 알아보고 23 그가 숨어 있는 모든 곳을 정탐하고 실상을 내게 보고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가리니 그가 이 땅에 있으면 유다 몇 천 명 중에서라도 그를 찾아내리라 하더라 24 그들이 일어나 사울보다 먼저 십으로 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광야 남쪽 마온 광야 아라바에 있더니 25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찾으러 온 것을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아뢰매 이에 다윗이 바위로 내려가 마온 황무지에 있더니 사울이 듣고 마온 황무지로 다윗을 따라가서는 26 사울이 산 이쪽으로 가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산 저쪽으로 가며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급히 피하려 하였으니 이는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고 잡으려 함이었더라 27 전령이 사울에게 와서 이르되 급히 오소서 블레셋 사람들이 땅을 침노하나이다 28 이에 사울이 다윗 뒤쫓기를 그치고 돌아와 블레셋 사람들을 치러 갔으므로 그 곳을 셀라하마느곳이라 칭하니라 29 다윗이 거기서 올라가서 엔게디 요새에 머무니라

십 사람들이 다윗에 대해서 밀고하였을 때, 사울 왕은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삼상 23:21)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아주 종교적인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의 표현 속에는 늘 하나님이 들어가 있고, 종교적인 표현들이 툭툭 튀어나옵니다. 다윗이 그일라에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도,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붙이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번에도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삼상 23:21)고 말하였습니다. 이런 표현은 사울이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믿음의 사람인 것처럼 보이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신다는 고백이 들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었고, 하나님의 통치를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참된 믿음의 사람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다윗과 사울의 차이였습니다. 야고보서 2:19는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은 사탄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종종 사람들은 자신이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성경책을 들고 있기도 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예배의 자리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그 사람이 진실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주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정치인들은 크리스천들을 의식하여 자신이 참된 중생한 크리스천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지만, 그런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참된 크리스천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아는 것보다도 진정으로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터넷 시대이다 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많은 정보들을 알고 있습니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 어제 내가 무엇을 먹었고, 어디를 다녀왔는지도 저 멀리 타국에 사는 사람조차도 알 수 있게 개방됩니다. 하지만 나에 대해서 아무리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나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자녀들은 나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내가 어느 학교를 졸업했는지, 무엇을 전공했는지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은 나를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사랑합니다. 참된 믿음은 어린아이들이 아버지를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울의 표현 속에는 신앙적인 용어들이 자주 등장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그가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드러내지는 않습니다.

더 나아가 사울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사고에 빠져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삼상 23:21)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사울은 자기에게 우호적인 사람에게 하나님의 복을 빌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은 자기에게 우호적이면 하나님의 축복을 말하고, 자기에게 우호적이지 않으면 저주를 쏟아놓는 철저하게 자기중심적 사람입니다. 이 점이 다윗과 사울의 다른 점입니다. 다윗은 판단의 기준이 자신에게 우호적인가에 있지 않았습니다. 아말렉 사람이 와서 사울을 죽였다고 보고했을 때, 다윗은 그를 향하여 진노하였습니다(삼하 1:14). 판단의 기준이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울의 모습 속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도 우리에게 유리한 이야기만을 좋아하고, 진심어린 충고와 신앙적인 권면은 듣기 싫어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우리 중심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참된 신앙이 아닐뿐더러, 사울처럼 망하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내가 종교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울도 한 일입니다. 바리새인들도 한 일입니다. 제사장들도 한 일이고, 가룟 유다도 한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교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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