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우리는 이스라엘 나라가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로 나뉘게 된 이야기를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르호보암이 백성들에게 참 섬기는 마음으로 섬기는 왕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 아니라 독재자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게 된 것이죠. 그래서 백성들의 마음들이 다 르호보암 왕에게서부터 떠나가게 되었고, 그래서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서 열 지파, 북쪽의 열 지파가 르호보암 왕을 배반하고 여로보암을 따라서 새로운 나라, 이스라엘 나라라고 하는 북쪽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지난 시간에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혹시 기억이 나십니까? 다행입니다. 지난 시간에 거기까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일이기는 했지만 르호보암 왕으로서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아, 이거 정말 당혹스러운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나라인데, 다윗과 솔로몬을 거쳐서 그리고 내게 주어진, 내가 다스리라고 주어진 그 나라인데 그 가운데 열 개 지파가 반역해서 돌아가는 그 일을 경험하게 될 때 이 르호보암 왕의 마음 가운데는 당혹스러웠을 것이고, 이 순간에 르호보암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빨리 이 반란을 진압해서—내란이 일어난 거나 마찬가지지 않습니까?—그러니까 빨리 이 반란을 진압해서 이 나라를 통일하고 한 나라로 만들어야 되겠다고 하는 그런 마음 가운데서 군대를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이제 남아 있는 두 지파인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에게 명령을 내려서 우리 모두가 다 군사들을 모아 보자, 그래서 저 북쪽 이스라엘 군대와 싸우자 해서 모았더니 18만 명이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군대가 모아지게 됐습니다. 이제 그 18만의 군사를 데리고 북쪽 이스라엘과 싸워서 그래서 북쪽 이스라엘을 제압해서 통일 이스라엘 나라를 만들어야 되겠다고 하는 마음으로 전쟁을 하러 나가게 된 것이죠.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번에는 스마야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셨는데, 그 말씀해 주신 이야기가 열왕기상 12장 24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24절의 말씀을 한번 볼까요?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는 올라가지 말라. 너희 형제 이스라엘 자손과 싸우지 말고 각기 집으로 돌아가라. 이 일이 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하셨다 하라” 하신지라 그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돌아갔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해 준 것이죠. 스마야 선지자가 르호보암 왕에게 이 메시지를 전한 겁니다. 이렇게 나라가 나뉘게 된 것은 누구로부터 말미암은 것인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 나라가 나뉘게 된 것이라고 하는 그 이야기를 해 주신 것이고, 그러니까 너희가 전쟁하지 말고 싸우지 말고 돌아가라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르호보암이 그 선지자의 말을 듣고 멈추었을까요? 그래도 싸웠을까요? 멈추었습니다. 이것이 아주 놀라운 일이고, 멈추었다고 하는 것이 아주 지혜로운 일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안타깝게도 하나님께서 멈추라 말씀하셨는데 멈추지 않고 싸우러 간 경우가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여러 번 등장합니다. 그런 경우가 언제 있었죠? 한번 기억을 되살려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싸우지 마라, 전쟁하러 가지 말라” 그랬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전쟁을 해 버린 경우가 몇 번 있습니다. 첫 번째가 언제냐 하면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생활을 하다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고 했던 그 순간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가시는 가운데 모세는 12명의 정탐꾼들을 가나안 땅에 보내서 가나안 땅에 대해서 정탐하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랬더니 10명의 정탐꾼들은 그 땅에 대해서 악평을 했고, 오로지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우리가 가서 이길 수 있다고 얘기를 한 것이지요. 그러자 이스라엘 민족들이 그 10명 정탐꾼의 이야기를 듣고 울부짖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러면 이스라엘 민족들은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마라. 40년 동안 광야에서 생활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셨을 때, 그때 이스라엘 민족이 깜짝 놀라 가지고 “그럼 우리가 가서 전쟁하겠습니다. 나가겠습니다. 싸우겠습니다” 그랬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시기를 “가지 마라. 내가 너희와 함께하지 않겠다. 너희가 가나안 땅과 싸우지 말라”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민족들이 싸우러 나갔다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패하고 만 것이죠. 하나님께서 가지 말라 그랬는데 전쟁하러 갔다가 패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민수기 14장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의 예가 있습니다. 어떤 예가 있을까요? 열왕기상 22장의 말씀에도 있습니다. 여호사밧 왕과 북이스라엘 아합 왕이 연합을 해서 아람 나라와 함께 전쟁을 해야 되는 그런 상황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때 수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가짜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않아 놓고 자꾸만 이야기를 해 주는 겁니다. “왕이시여, 전쟁하러 나가면 이기실 겁니다. 이기실 겁니다.” 하지만 참된 선지자였던 미가야 선지자가 이야기를 합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전쟁을 하러 나가게 된다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경고를 내보내게 된 것이죠. 하지만 여호사밧 왕과 북이스라엘 아합 왕은 전쟁을 하러 나가게 되었고, 결국 적군의 화살에 맞아 아합 왕이 죽게 되었다고 하는 안타까운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가지 말라, 멈춰라” 말씀하시는데 그 멈추라고 하는 이야기를 듣지 않고 계속해서 밀어붙였다가 망하게 된 케이스가 성경에 많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그런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데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고 했을 때 우리들에게 어려운 난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 난점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 옛날에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고 명확하게 들려주셨다는 거예요. “하나님, 전쟁하러 갈까요?” 혹은 전쟁하러 가려고 하는 그 순간에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명확하게 전달해 준 겁니다. 스마야 선지자를 통해서 명확하게 전달해 주기를 “전쟁하러 가지 말라”라고 분명한 말씀을 전해 주었고, 그 분명한 말씀을 들었을 때 르호보암 왕이 전쟁하러 가지 않고 멈추어 서고 돌아올 수가 있었던 것이죠.
하지만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명확하게 말씀을 해 주십니까? 잘 안 해 주시는 것 같아요. 안 해 주는 것 같은 답답한 마음이 있는 거죠. “하나님, 내가 이 남자랑 결혼해야 됩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해라” 하면 하고, “하지 마라” 그러면 안 할 텐데 하나님이 대답을 안 해 주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낭패를 봤습니까? “내가 이 비즈니스를 하고 싶은데, 이 가게를 오픈하고 싶은데 하나님께서 ‘해라’ 하면 하고 ‘하지 마라’ 그러면 안 했으면 좋겠는데 하나님께서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는 것 같아요.” 내가 이 직장을 다니면서 이 직장을 그만둘까 말까 그러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만두라” 하면 그만두고 싶은데 하나님께서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이죠. 오늘날에는 왜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해 주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이미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 성경 66권이 완성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옛날에는 성경이 완성되지 않았던 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간혹가다 몇몇 선지자들을 통해서 특별하게 전달해 주시는 경우가 있었지만, 지금은 이미 성경 66권의 말씀이—구약 39권, 신약 27권—우리의 신앙과 행위에 완벽한 기준이 되고 최고의 기준이 되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분별하고 그 말씀대로 살면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옛날처럼 그렇게 직접적으로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지 않으신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면 오늘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알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께서 이것을 허락하시는지 허락하지 않는지, 언제 멈추어야 될지 언제 가야 될지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판단해야 되는가.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그리고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점점점점 더 깊이 알아가면서 하나님께서 과연 내게 무엇을 원하시는가, 하나님께서 내가 어떻게 행하기를 원하시는가를 우리가 미루어 짐작하고 묵상해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 나가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가고, 하나님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가고 하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더 많이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우리가 아는 것이 더 분명하게 알아갈 수가 있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말씀을 안 하시면 우리가 전혀—그 구약 시대 때처럼—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잘 모를 수밖에 없나요? 그래도 알 수가 있나요? 알 수가 있어요. 예를 들어서 저하고 제 아내하고 식당에 가는데요. 식당에 가면 가자마자 저는 어디로 제일 먼저 갈까요? 화장실을 갑니다. 주문하라고 하고 화장실을 가는 거죠. 손을 씻고 오면 제 아내가 음식을 시켜 놔요. 시켜 놨는데 제가 뭘 시켜 달라고 얘기 안 했는데 제가 원하는 걸 시켜 놨을까요? 엉뚱한 걸 시켜 놨을까요? 예, 원하는 걸 시켜 놨어요. 왜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즐겨 하는지 알아왔기 때문에 이야기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거, 보지 않아도 알 수 있고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고, 우리가 더 깊이 알면 알수록 상대방에 대해서 더 잘 알면 알수록 표현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 우리들이잖아요.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더 깊이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지금 나와 같은 이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어떻게 행하기를 원하시는가, 예수님이라고 한다면 내가 이런 상황 가운데서 어떻게 행동하기를 원하시는가, 어떻게 반응하기를 원하시는가를 우리가 묵상하면서, 우리가 주님을 점점 더 깊이 알아가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 무엇인가를 우리가 알아갈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해 주지 않아도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많이 알아갈 수가 있는 것이죠. 하지만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는 것이 주관적이기 때문에 100% 확실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경우가 많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교만해서는 안 되는 거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야”라고 단정지어 버리고, “이게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넘겨짚어 버릴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께서 내게 이렇게 행동하시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좀 더 묵상하고 좀 더 연구하면서 하나님께서 내가 어떻게 행하기를 원하시는지를 좀 더 깊이 알아가는 그런 훈련들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게 신앙의 훈련인 것이죠. 르호보암은 하나님의 뜻을 전달받았습니다. “올라가지 마라” 했을 때 르호보암의 마음 가운데 당혹스러웠겠습니까? “알겠습니다” 하고 금방 하나님의 말씀에 따랐을까요? 아마 당혹스러웠을 겁니다. 왜냐하면 지금 싸워서 저들을 제압해 버리고 그래서 통일 이스라엘 민족을 만드는 것이 왕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하나님께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 내 생각이 반대되기 때문에 당혹스러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 내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나아갈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이 놀라운 것이죠. 그래서 오늘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진지한 고민을 해야 되는데요. 우리들이 무슨 일인가를 결정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면서 발견해 나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어쩌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되는 것일 수도 많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성이라고 하는 것이 천성적으로 악하기 때문에 이기적인 생각, 그리고 나 자신만을 생각하는 생각,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생각들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서 제일 먼저 솟아오를 가능성이 많은 거죠. 누군가 나에게 나쁜 일을 했을 때, 누가 나에게 좋지 않은 일을 했을 때 내 마음 가운데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원수를 갚아 버려야 되겠다. 어떻게 하면 복수할까, 어떻게 하면 코를 납작하게 해 줄까” 그런 생각들이 제일 먼저 떠오르게 될 겁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들이 떠오를 때 본성에 이끌려서 그냥 본성에 이끌려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것이죠. “하나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순간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 무엇입니까?” 질문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그런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될 줄로 믿습니다. 르호보암은 나라를 회복시키는 것이 당연한 것인 줄 알았어요.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히 왕으로서 해야 될 일이기 때문에 병사들을 모집해서 18만 군사들을 모집했고, 그래서 전쟁하러 나가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멈춰라” 하는 그 말씀을 하시게 되었을 때 그 자리에서 멈출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이 르호보암의 여러 실수와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잘한 결정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언제 많이 속는가. 언제 많이 속겠습니까? 우리가 ‘정당할 때’ 많이 속고 많이 실수합니다. 우리가 악을 행할 때가 언젠가—대부분 우리가 ‘정당할 때’ 악을 행해요.
내가 정당하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고, 내가 정당하기 때문에 갑질을 하는 것이고, 내가 정당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일들을 많이 하게 되는 것이죠. 르호보암도 역시 마찬가지예요. 르호보암은 정당했어요. “내가 저 이스라엘 민족, 북쪽 열 지파와 싸워서 그들을 이 나라로 다시 회복시키는 것은 정당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싸우기로 결정을 하게 된 것이죠. 하지만 우리가 항상 던져야 될 질문이 무엇이냐면, 과연 이 ‘정당한 것’이 옳은 것인가, 정당한 것이 유익한 것인가, 내가 정당하다고 보았던 것이 이것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도 좋은 것인가를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것이죠. 정당성을 확보했다고 하는 것이 OK 사인으로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23절, 24절의 말씀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정당성을 확보하고 내가 옳다고 하는 것에 의지해서 무조건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한 번 더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는 겁니다. “주님, 주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하나님께서 저희들이 어떤 삶을 살길 원하시는지, 이런 순간순간에 어떠한 삶을 살기 원하시는지 저희들의 마음을 지켜 보호해 주옵소서.” 놀라운 것은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 못 박히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며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고 십자가를 지시기까지 종의 위치에 떨어져 우리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해 주신 그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오늘도 매 순간순간마다 우리의 본성에 이끌려 끌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깊이 묵상하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따라 순종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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