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옛날 조선 초기 문신이 하나 있었는데요. 아주 유명한 명재상으로 알려져 있는 황희 정승이라고 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혹시 알고 계십니까? 그런데 그 황희 정승 앞에 어느 날 노비 둘이 서로 싸우다가 한 종이 와서 다른 종에 대해서 비난을 하면서 황희 정승 앞에 하소연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황희 정승이 뭐라고 이야기를 하냐면, **”그래, 네 말이 맞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다른 종이 와가지고 또 황희 정승 앞에 나가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아닙니다. 그게 아니고 이 일은 그렇고 저건 저렇게 해서 정말 억울합니다” 하면서 말을 하니까, 황희 정승이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네 말이 맞다”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부인이 황희 정승에게 이야기를 한 것이죠. “아니, 정승 어르신. 이 말이 옳으면 저 말이 틀리고, 저 말이 옳으면 이 말이 틀린 것인데, 어떻게 두 사람 다 맞다고 하는 것입니까?” 그랬더니 황희 정승이 뭐라고 대답했나요? “부인의 말이 옳소.”
그런 아주 유명한 일화가 있는 것을 들어보셨죠? 어쩌면 이게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보게 되는 그런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잠언서 18장 17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송사에서는 먼저 온 사람의 말이 바른 것 같으나 그의 상대자가 와서 밝히느니라.” 한 사람이 와서 이야기를 하면 그 사람의 이야기가 다 맞는 것 같아요. 그런데 또 다른 사람이 와서 또 다른 이야기를 하면 그 사람의 말이 맞는 것처럼 보이는 게 어쩌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많은 경험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왜 그러는 것일까요? 왜 이 사람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저 사람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 사람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저 사람의 말이 맞는 것 같은 그런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두 사람의 말이 다 맞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완전히 틀린 것이 아니라 진리가 있다고 한다면 그 진리에 일부분들을 다 보고 있는 것이죠.
이 사람은 진리의 이쪽 측면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고, 저 사람은 진리의 저쪽 측면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진리를 전부는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 진리의 일부분을 사실의 일부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진리의 일부분들을 다 이야기한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일리가 있고 나름대로 맞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원통(圓筒, 원기둥)**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 원통을 위에서 보는 사람은 그 원통이 동그랗게 생겼다고 보고, **”이 원통은 동그랗다”**고 이야기를 할 겁니다. 하지만 그 원통을 옆에서 보는 사람은 그 원통이 네모나게 생겼습니다. 직사각형처럼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 옆에서 본 사람은 말하기를 **”이 원통은 네모나다고, 직사각형처럼 생겼다”**고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이죠.
동그랗다고 보는 사람이나 직사각형처럼 생겼다고 보는 사람이나 다 틀린 것 같지만 다 틀린 것이 아니라, 진리라고 하는 전체의 일부의 진리를 보고 있기 때문에, 이 사람은 이만큼의 진리가 있고 저 사람은 저만큼의 진리가 있어서, 그래서 이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사람이 맞는 것 같고 저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저 사람의 이야기가 맞는 것 같은 그런 상황을 우리가 많이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나요? 그런 상황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당연한 것이죠. 한쪽 편의 이야기만 들을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이야기만 듣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야기도 들어봐야 되는 겁니다.
“이것이 옳은 것 같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불편할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좋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좋은 것일 수 있고, 그래서 모든 결정을 내리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라, 판단을 내리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라 다 이런 측면도 있고 저런 측면도 있고, 그래서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하는 교만함을 내려놓고, **”내가 진리를 다 알고 있다”**라고 생각하는 이상 그 사람은 발전이 없고 더 이상 배워나갈 수고가 없고 진리에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옳다고 생각하지 못한 다른 사람의 입장에 대해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면 더 이상 진리에 대해서 배워 나갈 수가 없는 것이죠.
아무리 내가 확신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아무리 내가 옳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은 정반대에서, 다른 사람은 정 다른 이야기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고 하는 그 가능성을 인정하고, 항상 겸손하게 내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고,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내가 다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미처 고려하지 못한 것이 무엇일까? 나는 모든 것이 다 좋다고 생각했지만, 이것이 좋지 않게 느껴지는 사람의 입장은 어떤 입장일까?” 항상 겸손하게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한쪽의 이야기만 들으면 안 되는 것이죠.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사람이 다 맞는 것 같아요.
교회 안에 분쟁이 일어나고 있으면, 그 분쟁이 일어나는 이쪽 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쪽이 다 맞는 것 같고, 저쪽 편의 이야기를 들으면 저쪽이 다 맞는 것 같아서, 그래서 서로 맞는 사람들끼리,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끼리 싸우게 되면 답이 없어요. **”나도 옳고 저 사람은 틀렸고, 나는 옳지만 저 사람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나의 입장과, 정반대로 **”내가 옳고 저 사람이 틀렸다”**고 생각하는 정반대의 입장이 서로 싸우게 되면, 결국은 평화는 깨어지게 되는 것이고, 교회는 박살 나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사탄이 기뻐할 일들만을 하게 되는 거예요. **”나는 정의를 위해서 싸운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내가 사탄의 도구가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내가 옳다”**고 해서 다 옳은 것이 아니라, “내가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있는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내가 이것이 전부 옳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있는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겸손하게 **”내가 잘못 생각하고 내가 판단을 잘못했을 수도 있다”**고 하는 그런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접근하지 아니하면, 결국에는 피차 싸우다가 망하게 되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원하고 빌기는 우리 교우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진리 앞에서 겸손해지는, 정말 하나님 앞에 겸손해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모든 일들을 판단할 때 한쪽의 이야기만 들을 것이 아니라 정반대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정반대의 이야기를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우리 편들의 이야기만 듣고, 우리들과 함께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만 듣고, 그래서 성급하게 결론을 내린다고 한다면, 결국은 다 망하게 되어 있는 것이죠.
성경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잠언서 18장 13절 말씀에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 전체 진리를 다 파악하기 위해서 이 사람의 사연도 듣고, 저 사람의 사연도 듣고, 이 사람의 말도 듣고 저 사람의 말도 듣고, 모든 사람들의 말을 다 골고루 들으면서 진리가 무엇인지 발견하려고 하는 그런 진지한 노력이 없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미련한 사람이라고 잠언서 18장 13절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고, 그렇게 미련한 사람은 결국 욕을 당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이 점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너무나도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이야기만을 듣고 우리 편의 이야기만을 듣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것이 아니라, 정반대의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열고 사람들의 마음을 다 듣고, 어떻게 하면 진리에 더 접근해 나갈 수 있는지 겸손하게 접근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다 듣지 못하고 한쪽의 이야기만 듣게 되는 것일까요? 이 사람의 이야기도 듣고 저 사람의 이야기도 들어서 그래서 진리에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그런데 실제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는 어떤 현상들이 발생합니까? 그렇게 겸손하게 나와는 정반대의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 서로 싸우면서 다른 사람의 입장에 대해서는 무시해버리는 그런 일들이 너무나도 많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런 일들이 발생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들의 마음이 우상에게 넘어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서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우상이 자리 잡고 있을 때에는 다른 사람들의 말이 귀에 들리지 않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115편 4절에서부터 8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 우상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무엇과 같으리로다? 그와 같으리로다.” 우상을 만들고 우상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우상처럼 된다는 거예요. 우상을 섬기고 우상을 의지하고 우상 앞에 절하는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그 사람의 그 사람 자체가 우상처럼 되는데, 우상의 특징이 뭐예요?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감각이 마비되는 게 그게 바로 우상의 모습인데,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들을 수 없다는 거예요.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은 볼 수가 없다는 겁니다. 진리가 이 앞에 놓여져 있는데 그 진리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귀를 막아버리는 것이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옳을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겸손하게 진리에 더 가까이 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알고 있는 그 알량한 지식이 지식의 포로가 되어서, 내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생각들에만 사로잡히고 감옥에 들어가게 되어서, 더 이상의 발전이 없는 진리로 나아가지 못하게 되는 그런 어리석은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가 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는가? 그것은 우상처럼 우리의 귀가 닫히고 우리의 눈이 닫혀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감각이 무디어져 버렸기 때문인 것이죠. 예를 들자면 어떤 예를 들 수 있을까요?
보이스피싱의 예를 들 수가 있을 것입니다. 보이스피싱 혹시 전화를 받아보셨습니까? 예, 받으신 분도 있고 안 받아보신 분들 있을 텐데, 어느 날 전화가 옵니다. 전화가 와서 우리들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 “돈을 빌려줄게요. 은행인데 돈을 빌려줄 수 있습니다” 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 내가 돈을 얻을 수 있구나”**라고 하는 갈망이 생깁니다. 돈이 우상이 됩니다. “내가 돈을 많이 빌려서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겠고 그래서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고 싶은” 그런 열망들이 있을 때, 돈이 우상이 되고 돈을 빌리는 것이 우상이 되어버리면 더 이상 진리에 대해서 귀를 닫아버리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 돈을 빌려주려고 하는데 “송금을 좀 하시면 돈을 많이 빌려주겠습니다” 해서 돈을 많이 빌려주게 되는 거죠.
왜 멀쩡한 사람들이 보이스피싱에 당하게 되는가? 그 마음 가운데 어떠한 것을 갈망하게 만들고 두렵게 만들고, 그래서 귀를 닫아버리고 눈을 멀게 만들어서, 결국 아무런 판단도 하지 못한 채 그냥 속아 넘어가게 되는 것이죠. 또 예가 있다고 한다면 어떤 예가 있겠습니까? 정치가 우상의 한 종류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정치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고 반드시 없어서는 안 될 것이 정치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정치는 종종 사람들을 우상화시키는 단계로 넘어가 버립니다.
그래서 진영 논리에 빠지게 만들어서, 우리 편의 이야기만 듣고 우리들이 하는 말만 들어서, 상대방을 악마화하고 상대방이 무슨 이야기를 해도 믿지 않고, 정상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도록 음모론에 빠져버리고, 그래서 아무리 진리를 이야기해 줘도 귀를 막아버리고 눈을 닫아버려서, 더 이상 진리에게로 가까이 가지 못하게 되는 거예요. 사실 정치인들이 우리 수많은 사람들을 이렇게 정치라고 하는 우상에 빠지게 만들어서, 그래서 더 이상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노예화시켜버리는 그런 일들을 많이 하는데, **”내가 그렇게 정치인들의 노예가 되었다”**고 하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채, 그런 정치인들의 노예로 앞장서게 되는 그런 사람들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이죠. 나와 정반대의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그 사람들이 어떤 진리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판단하지 못하며, 결국 한쪽 이야기만을 듣고 있다가 결국 망하는 길로 가게 되는 모습을 보여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어떻게 해야 되는가? 우리 성도들은 진리를 사랑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할 것이고 진리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게로 인도하게 될 텐데, 그런데 그 진리에 대해서 눈을 감아버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전부인 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의 말을 듣고 저 사람의 말을 듣고 골고루 골고루 전체를 보면서 진리에 더 가까이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잠언서의 말씀은 재판관들이 새겨 들어야 할 말씀만은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재판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들도 다 재판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우리도 다 판단을 하면서 삽니다. 모든 일들에 대해서 옳고 그름을 나름대로 판단하고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서 평가를 하고 늘 우리는 판단하면서 평가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죠.
예수님께서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지만, 그 **”비판하지 말라”**고 하는 말씀은, 그러니까 우리가 아무런 판단 없이 살아도 괜찮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닙니다. 마태복음 7장 1절에서부터 2절 말씀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말씀하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이 비판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판단이라고 하는 말과 똑같은 말입니다. “비판한다. 판단한다.” 이게 다 같은 의미의 말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아무런 판단을 하지 않고 살아가야 하느냐 하면,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우리는 끊임없이 판단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좋은가 저것이 좋은가” 물건을 구입할 때도 **”이것이 좋은가 저것이 좋은가”**를 판단하면서 살게 되어 있고, 사람과의 관계를 가질 때에도 “이 사람을 내가 믿을 것인가 믿지 말 것인가, 이 사람과 거래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 사람과 함께 할 것인가 함께 하지 아니할 것인가” 등등 우리들의 모든 삶이 다 일종의 모든 판단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는데요. 그런데 그런 판단을 우리가 아예 하지 말아야 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어떤 판단을 해야 됩니까? 바른 판단을 해야 되는 거, 옳은 판단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쪽 이야기만 듣고 그래서 어설픈 잘못된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말을 하고 하면 그 사람의 말이 다 맞는 것 같고, 저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사람이 다 맞는 것 같지만, 그런 어느 한 편에만 우리가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고려해서 종합적으로 바른 판단을 내리는, 진리에 가까이 가는 그런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요한복음 8장 15절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 이 구절을 계속 보여줬으면 좋겠는데요. 예수님께서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은 판단 자체를 아예 안 하시겠다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나는 너희들처럼 육체를 따라 판단하지 않겠다”**고 하는 그런 말씀입니다.
우리 이 원문의 의미가 예수님께서 아무런 판단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겠지만 나는 육체에 따라 판단하지는 아니하겠다”**는 그런 말씀인데요. 우리의 판단도 어떻게 돼야 되는가? 예수님의 판단을 따라가야 되는 것이죠. 사람들은 어떻게 판단합니까? 육체를 보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보고 판단하는 겁니다. 피상적인 것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전체를 보지 못하고 일부만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죠. 하지만 예수님은 어떻게 판단하는 것입니까? 그냥 겉으로 드러난 것만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심령을 꿰뚫어 보고 사람 전체를 보고 판단하시는 그 주님. 우리가 그 예수님과 같은 능력은 없지만,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하면 더 닮아갈 수 있습니까?
한 사람의 이야기만 듣는 것이 아니라, 이쪽에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쪽에서도 바라보고 또 다른 쪽에서도 바라보고,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래서 결국 진리를 찾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제대로 판단하지 못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지레짐작하고 우리 아이들에게 섣부른 판단을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아이들의 마음을 상하게 만들 때도 있고, 공동체 생활 속에서 우리가 함부로 판단하고 조그마한 것을 보고 전체를 판단하고 사람들의 그 어떤 행동 하나를 보고 전체를 판단하는, 진리를 전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조그마한 부분만을 보고 선입견으로 성급하게 판단함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때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원하기는 우리가 성급하게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아끼며 모두를 다 고려하는 가운데, “내가 잘못 판단했을 수도 있겠구나. 내 생각이 잘못될 수도 있었겠구나”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잠언서 18장 18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제비를 뽑는 것은 다툼을 그치게 하여 강한 자 사이에 해결하게 하느니라.” 자, 그러니까 이 사람이 옳은 것 같고 저 사람이 옳은 것 같으니까, 그럼 해결을 제비 뽑기로 하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일까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종종 우리는 성경을 오해해서 성경에 나오는 일부 표현을 보고 그것이 전부라고 착각해서 함부로 결론을 내리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요.
일부 크리스천들 가운데는 제비 뽑기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보면서, 제비 뽑기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성경 말씀, 특별히 오늘 잠언서 18장 18절 말씀에서 보는 것처럼, **”제비 뽑기가 다툼을 그치게 하고 강한 자 사이에서 해결하게 한다”**고 하는 이 긍정적인 말씀을 보면서, **”아, 그러니까 제비 뽑기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거룩한 방법이고, 교회 내에서는 사람의 뜻에 따라 움직일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제비 뽑기를 통해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종종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그렇게 단편적으로 보아서는 안 되는 것이죠. 제비 뽑기를 해서 좋을 경우도 있고, 제비 뽑기를 하지 않아야 될 경우도 있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누가 먼저 할 것인가, 누가 나중에 할 것인가, 우선순위를 결정할 때에는 아마 제비 뽑기를 하는 것이 가장 편리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어느 땅을 어느 사람들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 서로 주어야 될 것이 서로 비슷하고 어떤 것을 줘야 될지 서로 싸울 수 있는 그런 상황 가운데 제비 뽑기를 해서 나눠주는 것, 어쩌면 그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일 수도 있을 겁니다. 제비 뽑기가 유용한 경우도 많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다 제비 뽑기로 해결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A가 옳으냐, B가 옳으냐?” 무엇으로 결정해요? 제비 뽑기로 결정할 수 있을까요? 아니요.
그것은 제비 뽑기로 결정할 게 아니고, 옳은지 그른지 면밀하게 판단하고, 무엇이 더 좋은 것인지 무엇이 더 나쁜 것인지 면밀하게 판단해 봐야 되고, 우리가 직분자를 세우거나 아니면 리더십을 세우거나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그냥 제비 뽑기로 해결할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지혜와 판단에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겸손하게 그 모든 일들을 잘 결정해 나갈 수 있는 것이지, 모든 것을 다 제비 뽑기로 해결하려고 들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 가운데는 여러 가지 갈등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가운데 우리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또한 이 사회에서나 여러 가지 갈등들이 있을 텐데, 그러한 갈등들 가운데 우리가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야 할 것입니다.
서로 싸우다가 피차 멸망하는 그런 어리석은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 무엇일지, 어떻게 하면 갈등을 잘 해결할 수 있을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인지, 그냥 아무런 이야기도 듣지 아니하고 우리 편들끼리 해주는 그 이야기만을 듣고 섣불리 결단을 내리고 섣불리 판단을 해서 망쳐버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서면서 정말 바른 길을 선택할 수 있게 해 주옵소서,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는 가운데 모든 문제들이 주 안에서 잘 해결되고 복된 결과들이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교회 가운데서, 공동체 가운데서 넘쳐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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