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한국에서의 결혼식은 정말 간단합니다. 예식을 한 몇 분 정도 하죠? 한 15분 정도. 짧은 예식에, 그리고 예식이 끝나면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고, 혹은 저녁을 먹고, 헤어져 버리는 너무나도 간단한 예식이죠. 어떤 사람은 부조금만 내고, 식장은 안 들어가고, 밥만 먹고 가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서의 결혼식은 굉장히 길었어요. 대부분의 하객들이 1박 2일 동안 참여를 해서, 결혼식을 마치고, 같이 피로연도 하고 파티도 하고, 밤새도록 즐기고 하다가, 그날 밤 잠도 같은 호텔에서 자고, 그다음 날 헤어지는, 그래서 이 결혼식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미리미리 예약을 해야만 하고, 모든 것들이 참 우리 한국에 비해서는 굉장히 긴 순서가 진행이 되는데요. 어 결혼 예식은 정말 감동적이고 정말 엄숙한 그런 결혼식을 진행을 하고, 그리고 끝난 후에는 피로연을 하면서 음료도 마시고, 또 여러 가지 음식을 나누면서 이야기하다가, 이제 연회장에 들어가서 거기서 본격적인 파티를 했는데요. 그 파티를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축복을 빌어주는 축복의 이야기도 여러 사람들이 나와서 이야기를 하고, 또 언니가 나와서 예전에 있었던 추억거리도 이야기도 하고, 그렇게 하면서 많은 축복의 이야기도 해줬고, 그 뒤에는 춤을 추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신랑과 신부가 함께 춤을 추는 그 모습을 보면서 축복해 주고, 그리고 또 무슨 순서가 있었냐면, 신부와 신부의 아버지가 함께 춤을 추었어요. 신부 아버지가 누구죠? 접니다. 같이 춤추고 또 신랑과 신랑의 어머니가 같이 춤을 추고, 또 나 나중에는 하객들이 다 같이 나와서 같이 춤을 췄는데, 되게 궁금하시죠?
한번 영상으로 잠깐만 보겠습니다. 제가 지금 제 딸의 손을 잡고 청중들 앞에 나가서 같이 춤을 추었어요. 춤을 추면서 이 아이에게 축복의 말도 해주고, 사랑의 말도 해주고 격려하면서 행복한 삶을 살라고 이야기해 준 거죠. 한 번 잘 춰보지도 못하는 춤을, 우리 딸과 처음이자 마지막 춤을 췄습니다. 이제 꺼도 될 것 같아요. 좋아 보이나요? 그래서 정말 미국의 결혼식을 보면 굉장히 긴 결혼식 1박 2일 동안 진행이 되는 그런 긴 결혼식을 했는데요.
그런데 이것은 고대 이스라엘 민족의 결혼식에 비하면 약과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결혼식을 어떻게 했는가? 일주일 동안 했어요. 일주일 동안 와서 밥을 먹고 음료수를 마시고 포도주를 마시고 춤을 추고, 그러면서 온 동네의 잔치가 일주일 내내 벌어지는, 그야말로 1년 가운데서 가장 행복한 일주일의 시간을 보내면서, 그렇게 결혼식을 진행하는 것이 고대 이스라엘의 결혼식이었습니다.
이러한 결혼식에서 제일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있다고 한다면 무엇일까요? 음식을 충분히 준비하는 것입니다. 일주일 내내 온 동네에 잔치가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먼 데서 오는 친척들뿐만 아니라, 동네 전체에 잔치가 벌어지는, 그 잔치를 정작 마련해 놓았는데, 만일 거기에 음식이 부족하다면,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한다면, 그것처럼 난처한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어제 우리는 경로당에 있는 어르신들을 여러 초청을 해서, 그래서 삼계탕을 대접하면서 복음을 나누는, 그런 귀하고 복된 너무나도 좋은, 그런 행사를 하게 되었는데요. 어르신들이 12시에 시작한다고 이야기했는데, 11시부터 와서 대기하면서, 기대감을 가지고 많은 분들이 오셨어요. 새 숫자를 세워 보니까, 근 50명이 다 되는 분들이 오셔서, 참여해 주신 것인데, 처음에 오신 분들에게 삼계탕을 대접을 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늦게 오신 분이 한 분 계시더라고요. 또 그 뒤에 세 분이 더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늦게 오신 분들에게 삼계탕을 대접해야 되는데, 주방에 보니까 삼계탕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는 거예요. 우리 일하고 있는 우리 전도 회원들도 먹을 수 있는 삼계탕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는 상태에서, 너무나도 당황스러웠습니다. 정작 오라고 해놓고 삼계탕이 없으면 안 됐는데 어떡하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30분 정도 더 기다려야 된다고 하는데 정말 난감했습니다. 다행히 아주 재빠른 우리 주방팀에서 빨리 준비해서, 아마 10분도 채 되기 전에 삼계탕을 또 마련해서 주어서, 무사히 그리고 재미있게 또 의미 있게 이런 행사를 마치게 된 것이죠.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2천년 전 예수님께서 참여하셨던 이 혼인 잔치에는 그야말로 아주 놀라운, 난감한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잔치를 위해서 준비해 놓았던 포도주가 다 떨어진 거예요. 잔칫집에 먹을 것이 떨어지고 포도주가 떨어지는 이 난감한 상황 가운데서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도대체 문제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요? 손님이 얼마나 올 줄 몰라서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주인의 책임일까요? 아니면 충분히 준비했지만, 갑자기 손님들이 예상치 못한 손님들이 더 많이 왔거나, 아니면 더 많이 먹어 대서 엄청나게 먹어대서 그렇게 모자라게 된 것일까요? 아니면 주문을 했는데 그 주문이 제대로 되지 못해서 배달이 늦어져서 그런 것일까요? 아무튼 이 상황 가운데서 혼인집 주인은 수치를 당할 수 있는 너무나도 난처한 난감한 상황 가운데, 그리고 결혼 잔치의 흥이 깨어져버릴 그런 위험한 상황 가운데 처하게 되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때 예수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물을 떠다가 연회장에다 갖다 주라고 말씀하셨는데, 놀랍게도 그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었고, 보통 포도주가 아니라, 원래 준비했던 포도주보다도 훨씬 더 좋은, 최고급 포도주로 변해서, 놀랍게도 그 혼인 잔치가 정말 기쁨의 잔치로 더 기쁘고 즐거운 잔치로 변하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한 가지 일화가 있는데요. 예전에 옥스퍼드 대학에서 종교학 수업을 듣고 있던 학생들에게 시험 문제를 낸 적이 있습니다. 한 학기 동안에 공부를 하고 나서 마지막 시험을 볼 때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이런 문제를 냈어요.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바꾼 이 기적에 대해서 논하라”라고 하는 문제가 주어졌습니다. 학생들은 지금까지 배운 여러 가지 지식들을 사용해서 답안을 정리를 하고 열심히 적고 있었어요. 그런데 한 사람, 한 사람이 창문 곁에 앉아서 있는데, 시험 답안지를 쓰는 게 아니라, 먼 창문만 바라보고, 먼 곳만 바라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교수님이 경고를 했어요. 뭐라도 써놓고 나가라고 이야기를 한 것이죠. 그랬더니 거의 다 끝날 즈음에 그 청년이 한 문장을 써놓고 제출하고 나갔는데요. 그 청년이 썼던 문장 하나가 아주 유명한 문장입니다. 뭐라고 썼을까요? “물이 주인을 만나매, 얼굴이 붉어지더라.” 멋있나요? 네. 이 사람이 바로 영국의 3대 낭만주의 시인이라고 하던 바이런(Byron)의 글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일화가 있는데, 아무튼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신가? 예수님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그런 놀라운 기적을 베푸시는 분이라고 하는 사실을 사람들이 깨닫게 된 것이죠. 그런데 가만히 이 이야기를 살펴보다 보면, 조금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아들이자 만유의 주님이신 우리 주님께서 등장하시면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를 선포하고, 내가 만유의 주며 구세주라고 하는 것을 선포하실 때, 어떻게 선포하는 것이 더 멋있고 더 화려하고 더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마치 트럼프처럼 하면 좋을 것 같아요. 군대들을 동원하면서, 장엄한 그 열병식을 해가면서, “내가 이 나라의 주인이다”라고 하는 것을 전 세계에 과시하려고 하는, 그런 트럼프처럼, 예수님께서도 온 세상의 주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드러내시고자 했다고 한다면, 이러한 한 동네에서 조그마한 일을 벌이시는 것이 아니라, 정말 온 세상 천지가 깜짝 놀랄 만한 엄청난 일을 했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생각이 들어요. 번개가 치면서 천둥 소리가 들리고 그리고 온 세상이 경천동지할 만한 그런 일들이 벌어지면서,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나타나서 내가 이 세상의 왕이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었다라고 한다면 얼마나 더 멋있겠습니까? 얼마나 더 화려하겠습니까?
그런데 고작 첫 번째 기적이라고 하는 것이 저 알지도 못하는 조그마한 시골 마을에, 엄마가 부탁한 그 부탁을 들어서, 혼인집에 포도주를 살짝 바꾸어 준 일, 그것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는 상황 가운데서, 하인들과 제자들만 겨우하는 그런 기적을 베풀었다고 하는 것이 약간 어색해 보입니다.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기적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요?
유명한 설교가인 브라이언 채플이라고 하는 목사님은 이 본문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예수님은 지금 명함을 건네주는 것과 같은 일을 하셨다고 비유했습니다. 명함을 건네는 것을 통해서, 내가 누구라고 하는 것을 아주 간단하지만 분명하게 소개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내 명함을 주면, 아, 이분이 무슨 사업을 하시는 분이시구나! 이분이 어떤 일을 할 수 있구나! 아무것도 보지 못했지만, 명함을 보면서 어느 정도 조금씩 알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에 대해서 지금 자기소개를 간단하게 해 주셨다고 하는 것이죠. 이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시구나.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에요? 예수님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시구나.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로 오셨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준 그 사건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것을 제일 먼저 예수님이 누군가에 대해서 제일 먼저 안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바로 마리아입니다.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가서 그 사실을 이야기했습니다. 왜 이야기했을까요? 예수님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래요 마리아는 어떻게 알았죠? 그렇잖아요? 천사가 나타나서 마리아에게 예언해 주시면서, 네가 배게 될 아이는, 네가 잉태하게 될 아이는 어떤 아이라? 온 세상의 구주가,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게 될 거라고 하는 것을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이 아이가 그냥 아이가 아니라, 어렸을 때는 그냥 내 수하에서 자란 아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사실을 마리아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뿐만 아니라 목자들이 와서 그 앞에 경배하면서, 저 하늘에 나타난 현상, 천사들이 노래하기를 “하늘에는 영광이오, 땅에는 평화로다”라고 하는 그 메시지를 전달해 주었을 때, 아 예수님이 누군가? 내 아들이 누군가? 내 아들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아들이오. 내 아들이지만 그냥 평범한 인생이 아니라, 온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줄 뿐, 온 세상에 고통이 있고, 어지러움이 있고 문제가 있는 그곳에, 주님께서는 평화를 주시고 해결책을 주시고, 주님께서 모든 것을 다 온전하게 하실 분이라고 하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이 마리아는 잘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이야기를 한 겁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이 마리아의 이야기를 듣고 이 어려운 상황에 빠진 난처한 상황에 빠진 이 가정을 도와주셨습니다. 물을 바꾸어서 포도주에 만듦으로 말미암아 어쩌면 우리 인생들이 저질렀던 실수들 이게 무슨 문제였겠습니까? 분명 사람들의 실수였을 것이지 계산 착오였을 겁니다. 미리 내다보지 못했을 겁니다. 아니면 사람들이 너무나도 탐욕적이어서 막 먹어버리고 막 마셔버린 그런 탓도 있을 것이고, 아무튼 문제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그 문제로 인하여 발생한 그 어려운 상황을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해결해 주셨다고 하는 게 오늘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가만히 천천히 읽어나가다 보면 조금 약간 껄끄럽게 느껴지는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바로 요한복음 2장 4절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엄마가 아들에게 이 문제를 이야기하고, 이 문제의 해결을 해달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그 상황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보여주신 즉각적인 반응이 무엇이냐 하면, 두 가지였어요. 하나는 예수님을 “여자여”라고 불렀다고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게 나랑 무슨 상관입니까?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하는 것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하면서, 예수님께서는 이 문제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처럼, 첫 번째 반응이 나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먼저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여자여”라고 하는 이 호칭이 사실은 예수님의 어머니를 하대하거나, 존중하지 않는 그런 무례한 태도로 부른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나라 말에는 존댓말도 있고 반말도 있고 하지만, 헬라어나 아랍어 같은 언어에는 그런 표현이 아예 없습니다. 영어도 마찬가지죠. 존댓말이나 하댓말이나 반말이나 그런 게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부를 때에도 우리들이 부르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부르는 것이죠. 이번에 결혼했던 결혼한 우리 둘째 딸아이는 어느 날 학교를 다녀오더니만 저한테 이렇게 부르는 거래요. “국진” 그래서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아니, 이 아이가 내 이름을? 이렇게 막 함부로 부르면서?” 깜짝 놀랐어요. 근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미국 애들이 그래요. 미국 애들이 자기 아버지가 “데이빗”이면 “데비빗” 할아버지한테, “쟌” 그러면서 이야기하거든요. 그러니까 미국에서 생활하던 그 아이들은 자기의 아버지의 이름을 그냥 마음대로 불러도 아무 문제가 없던 것처럼, 이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여자여”라고 하는 이 표현이 결코 하대하는 표현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먼저 기억할 필요는 있겠습니다.
이런 표현이 어디서도 나왔죠. 요한복음 19장 26절에서도 나왔습니다. 요한복음 19장 26절의 말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하대하거나 무시하기 위해서 이런 표현을 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를 제자에게 맡기기 위해서, 어머니에게 마지막 그 대우를 하기 위해서 하시는 그 과정에서 나온 표현도 “여자여”라고 하는 표현이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마음에 걸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 하신 말씀이에요. 포도주가 떨어진 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 그게 어쩌란 말이냐? 하면서, 예수님께서 아무것도 아닌 것인 양,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 같은 대화를 해 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말을 예전에 나중에 누가 했죠? 귀신도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마태복음 8장 29절 말씀에 보면 “이에 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귀신 들렸던 사람이 귀신이 귀신 들린 사람이 안에서 소리 지르는 거죠.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예수님을 만난 귀신이 마귀가 “너랑 나랑 무슨 상관이야? 왜 왔어? 건들지 마. 아무 상관없잖아.” 하면서 이야기했던, 그 표현과 같은 그 표현을 예수님께서 예수님에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했다고 하는 것이, 정말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는 좀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예수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에요? 사랑의 예수님의 모습인 것이죠. 사랑의 손길로 어루만지시며, 우리의 연약한 것을 돌보시는 그 예수님, 자상하게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기대하고 있는 것인데, 놀랍게도 오늘 첫 번째 보여준 예수님의 반응은 차갑기 그지없는 그런 대답을 해 주셨기 때문에,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약간 껄끄럽게 느껴지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차갑게 말씀하신 걸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목적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뭐예요? 그것은 우리를 죄에 빠진 우리를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기 위한 영적인 일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잘 먹고 잘 살게 만들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 세상에 돈의 문제, 성공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무엇인가? 죄에 빠져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구원해 내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주시는 영적인 그 사명, 하나님께서 주신 그 놀라운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무엇을 원하나요? 포도주 좀 만들어줬으면 좋겠다고 하는 게 사람들의 욕심이에요. 사람들이 예수님께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좀 빵 좀 많이 만들어 달라는 거예요. 배고파 죽겠는데 빵 좀 달라고 하는 게 우리들의 욕심이에요. 사람들의 욕심이 무엇입니까? 좀 제발 돈 좀 주시라고 하는 거, 복권이라도 좀 당첨되고 우리가 성공할 수 있게끔 이 세상에서 잘 되고 문제가 잘 잘 풀리고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대한 관심만 우리들에게 있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을 바라볼 때 무엇으로 바라보는가? 예수님을 포도주를 만들어 주어서 우리들의 육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 분으로 바라보는 게 사람들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역할을 기뻐하지 않으신 것이죠. 나중에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5천 명을 먹이셨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면서 열광하기 시작했습니다.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나타났다 하면서 예수님에게 모여들어서 예수님 우리들의 왕이 되어 주십시오. 예수님의 예수님이 우리들의 왕이 되어 준다고 한다면, 우리들에게서 세금만 거둬가고 있는 저 로마 황제 저 헤롯 대왕을 다 물리쳐버리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왕이 되어 주신다고 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걱정 근심 없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겠다 싶어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겠다고 하는 운동이 대대적으로 일어나게 된 것이죠. 하지만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의 반응을 보시고 숨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대통령으로,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자 하는 그 사람들의 요구를 피하여 혼자 산기슭 산 한적한 곳으로 숨으셔서 사람들의 눈길을 피하시게 된 것이죠.
이것을 어디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어디에 예수님의 이 마음을 어디에 비유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니까 최근 아주 유명했던 “폭싹 속았다”가 생각이 났습니다. “폭싹 속았다”에서 애순이는 학씨 아저씨랑 맞선을 봅니다. 그 학씨 아저씨가 애순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요? “나한테 시집 와.” 그러면 내가 유학도 보내, 대학 공부도 시켜줄 수 있고, 시집도 내줄 수 있고,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줄 테니까, 나에게 시집 와서, 밥하고 빨래하고 아이들 잘 키워달라고 요구하는 거예요. 학씨 아저씨가 요구한 건 뭐예요? 아내를 요구한 게 아니라, 식모를 얻고 싶은 거죠. 그러한 요구에 애순이 응했나요? 나는 당신과 결혼할 수 없다고 하면서 물러서, 누구랑 결혼해요? 관식이랑 결혼하는 거죠. 어쩌면 이게 예수님의 마음이에요.
우리는, 어쩌면 학씨 아저씨들처럼, 예수님을 보면서 예수님 좀 내 빨래 좀 해줘요. 내 밥 좀 해줘요. 내가 조금 내가 바칠 테니까, 내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거 줄 테니까, 나를 위해서 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그렇게 요구하면서, 예수님을 우리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아주 똑똑한 종으로 부려보고 싶은 것이 우리들의 마음. 예수님이 우리들의 지니(Genie)가 되어서, 로봇 청소기가 되어서, 우리들의 유능한 식기세척기가 되어서, 우리들의 가정 문제를 편안하게 해결해 주는 우리들의 문제들을 잘 해결해 주는 그런 분이 되어 줄 것을 원하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거절하신 것이죠.
이 이야기를 들은 마리아는 예수님을 향해서 항의하지 않았습니다.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너를 30년 동안 어떻게 키웠는데, 엄마한테 이럴 수 있어?” 하면서 분노하지 않았어요. 마리아는 그 순간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입을 닫았습니다. 그리고 하인들을 향해서 부탁하는 거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가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내 의지를 끝까지 관철시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결정을 예수님께 맡겨버리고, 예수님께서 허락해 주시든지 허락해 주시지 않든지, 그것은 예수님의 의사에 맡겨버리고, 예수님께 주도권을 넘겨줘 버리고, 그저 예수님께서 하시겠다고 하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순종하며 따르겠다고 하는 겸손한 믿음의 태도를 보이게 된 것이죠.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물을 변하여 포도주가 되게 만드셨습니다. 안 하실 것 같은데, 왜 하셨을까요? 또다시 예를 들자면 애순이가 관식한테 가서 빨래 안 했을까요? 밥 안 했을까요? 아니요. 더 많이 했을 것 같아요. 더 많이 자신의 몸이 부러지도록, 자신의 몸이 박살 나도록 최선을 다해서 남편을 사랑하고, 자녀들을 사랑하며,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아니하고, 자신의 몸을 갈아서 최선을 다해서 사랑해 주는 모습을 보여주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바로 그렇게 하신 거 우리들의 이 문제가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 주님께서 그걸 해결해 주시기를 원하셨어요. 그리고 물을 떠다주게 만듦으로 말미암아 연회장으로 하여금 기쁨이 다시 회복되게 만들고, 그래서 그 혼인잔치가 기쁨의 자리로 변하게 되는 그 놀라운 역사를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기도할 때, 그러니까 예수님에게 귀찮은 일들은 안 시켜야 되겠다. 귀찮은 기도는 하나님께서 이딴 것 같은 거 관심이나 가지실까 그렇게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주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해 주셨습니까? 빌립보서 4장 6절의 말씀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어떠한 일에?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에 관심이 있으셔요. 우리의 아픔도 우리가 실수해서 망가뜨리는 그것도 우리가 잘못해서 망쳐버린 그 모든 것들 그냥 외면해 버리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라, 우리를 회복시키시길 원하시고, 우리에게 은혜 베푸시기 원하시는 주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오늘도 주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인생 길 가운데 포도주가 늘 떨어집니다. 안 떨어졌으면 좋겠는데 떨어지는 일이 발생해요. 때로는 그게 우리들의 잘못 때문일 수도 있고, 나는 아무 잘못하지 않았지만 주변의 상황 때문에 모든 일이 흐트러질 수도 있고, 정말 내가 아무것도 잘못한 것 같지 않은데 망가지는 것들도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일어나게 되었다. 그때 혼자 절망하고 걱정하고 염려할 것도 아니고 누가 잘못했는가 왜 일이 일어났는가? 가장 사랑해야 될 사람을 향해서 비난하고 욕하고 책임 전가하는 그런 일을 할 게 아니고, 지금도 사랑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시는 주님 앞에 겸손하게 나아가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 주실지는 내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가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방식대로, 가장 선한 길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옵소서. 우리의 욕심을 내려놓고 주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