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이야기를 함께 살펴보면서 묵상해 보려고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해 나갈 때 제일 첫 번째 정복해야 했던 성이 바로 여리고성이라고 하는 성입니다. 첫 번째 단추를 잘 풀어야 그다음이 술술 잘 풀릴 수 있듯이,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해 나갈 때 이 여리고성을 잘 정복하는 것이 필요했을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이 여리고성을 어떻게 정복할 수 있었습니까? 사실 이스라엘 민족이 이 여리고성을 정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공격하는 게 쉬운가요? 수비하는 게 쉬운가요? 무엇이 더 훨씬 더 쉽죠? 상황에 따라 다 다르겠지만 축구 같은 경우에는 ‘공격이 최선의 수비’라고 하잖아요. 오늘날의 현대전은 공격하는 게 더 쉬울 수 있겠지만, 고대 시대에는 수비하는 것이 훨씬 더 유리했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수비하는 사람들은 성벽과 요새를 잘 갖추고 있고 지형적으로 유리한 조건에서 싸우기 때문에, 낯선 곳에 와서 공격하는 사람들보다는 수비하는 쪽이 훨씬 더 유리하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적은 병력으로도 많은 사람들을 대처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뿐만 아니라 보급 면에 있어서도 계속해서 물자를 공급할 수 있는 수비 측이, 멀리서 와 보급 물자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으면 공격하기가 어려운 공격군보다 훨씬 유리했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전쟁 가운데서도 이순신 장군이 12척의 배를 가지고, 적은 숫자의 배로도 일본군을 쉽게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순신 장군이 바다의 특성을 잘 알고 유리한 조건 속에서 싸울 수 있었기 때문에, 좋은 작전을 짜서 이길 수 있었던 것처럼 아마 여리고성이 이스라엘 민족을 물리치는 것이 훨씬 더 쉬웠을 것이고, 이스라엘 민족이 여리고성을 정복하는 것이 훨씬 더 까다로웠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인 생각일 거라고 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은 여리고성을 아주 쉽게 물리쳐 이겼습니다. 어떻게 이겼죠? 아주 간단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따랐는데요. 그 여리고성을 하루에 한 번씩 돌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어요. 하루에 한 번씩 돌고 돌아와서 쉬고, 그다음 날 또 한 번 돌고 이렇게 6일 동안 하루에 한 번씩 돌았고, 마지막 일곱 번째 되던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돈 다음에 나팔을 불고 소리를 쳤더니 그 여리고성이 무너져 내린 겁니다.
그래서 아주 단단하고 든든한 요새였던 여리고성이 무너짐으로 말미암아 결국 이스라엘 민족은 손쉽게 여리고성 안으로 진군할 수 있었고 그 여리고성을 쉽게 차지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이 여호수아서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이 이야기를 우리가 연구해 볼 필요가 있을 텐데요. 왜냐하면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도 이런 여리고성처럼 정복해야 될 일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죠.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습니다. 건너야 할 강이 있고, 정복해야 할 산들이 우리들의 삶 가운데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겨낼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승리할 수 있을까요? 우리들의 삶 가운데 참 힘들고 어려운 문제들이 많이 놓여 있습니다.
대학 입시라고 하는 커다란 문제도 있을 것이고, 또한 질병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도 있을 것이고, 어떻게 하면 비즈니스를 잘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사업을 잘해서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가정의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인가—여러 가지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난제들이 우리들의 삶 가운데 많이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정복해야 될 것이 너무나도 많은 것이죠. 어떻게 하면 그런 문제들을 우리가 정복해 나갈 수 있을까?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어떠한 교훈을 줄 수 있을지 살펴보며 묵상해 보면 좋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 있다면, 이스라엘 민족이 여리고성을 빙빙 도는 행위 자체가 해답은 아니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얻고 싶은 것이 있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그곳에 가서 빙빙 돌면 될까요? 어느 대학을 가고 싶어요. 그러면 그 대학을 계속 돌면 합격할 수 있을까요? 어떤 사업을 잘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일까요? 교회당을 짓기 위해서 땅을 구입하고 싶은데, 건물을 구입하고 싶은데 능력이 없어요. 그러면 그 건물 주위를 돌면 건물이 우리 것이 되는 것일까요? 그건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그것이 비결이라면 그다음 전쟁도 똑같은 방법을 썼어야 했을 텐데, 성경을 보면 똑같은 방법을 다시 한 번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여리고성 때는 그렇게 돌면서 여리고성을 무너뜨렸는데, 그다음 성을 정복할 때도 “지난번에 우리가 빙빙 돌아서 이겼으니 이번에도 똑같이 하자” 하며 돌지 않았다는 것을 성경에서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린 이 방법 자체에 효능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 것이죠.
따라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얻고자 할 때, 이기고자 할 때, 아무 의미 없이 그 지역을 빙빙 도는 것은 별로 의미 있는 일이 아니라고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종종 교회에서 예배당 건물을 지으려 할 때, 혹은 땅을 얻으려 할 때 그 땅에 가서 빙빙 돌며 기도하기도 하는데요. 그것이 물론 아예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닐 거예요. 그런 행위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고,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단합하게 하는 효과가 충분히 있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혀 의미 없는 행동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그것 자체의 효력으로 그 땅을 얻거나 건물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방법들,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도구들은 그때 그 순간에 잠시 사용하신 것이지 그 자체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는 점을 분명히 구분해야 합니다. 홍해 바다를 건널 때 모세가 지팡이를 내밀어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지팡이에 어떤 대단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해 “그 지팡이만 찾으면 무엇이든지 해낼 수 있다”라고 여길 수 있겠지만, 설령 그 지팡이를 발견한다 해도 그 지팡이가 똑같이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 하나님이 그때 사용하셨을 뿐, 지팡이 자체에 능력이 있었던 것이 아니죠.
이스라엘 민족이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을 건널 때 강이 갈라졌지만, 언약궤 자체에 능력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민족은 착각하여 블레셋과의 전쟁 때 언약궤를 전장으로 가져오면 승리할 수 있으리라 여겼습니다. 요단강을 갈랐던, 여리고를 돌 때 앞세웠던 그 언약궤를 들고 나가면 이긴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착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한때 사용하신 것일 뿐, 그것들 자체에는 아무 능력도 없습니다.
또 이스라엘 민족이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게 하시고 바라보라 하셨습니다. 그로 인해 살아났다고 해서 그 놋뱀을 늘 들고 다니며 “아플 때마다 이걸 보면 된다”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놋뱀은 그때 한 번 사용된 표징이었을 뿐, 그 자체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손을 들어 기도할 때 전쟁에서 이겼습니다. 그렇다고 손만 들면 무조건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구분해야 합니다. 어떤 방식이 효력을 보였다고 해서 그 자체에 능력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보아야 합니다. 오늘 여리고성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여리고성을 6일 동안 하루에 한 바퀴씩 돌고, 마지막 날 일곱 바퀴를 돈 뒤 소리 지르자 성이 무너졌습니다. 이 방법이 심리전으로서 대단했다거나, 성 안 사람들을 심리적으로 무너뜨렸기 때문이라고 볼 필요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어떻게 여리고성에서 이겼습니까?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셨기 때문에 이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이 땅을 주겠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가게 하겠다”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성취하시기 위해 여리고성을 이스라엘에게 넘겨 주셨기 때문에 승리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읽었던 여호수아 6장 17–19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성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되, 기생 라합과 그 집에 동거하는 자는 모두 살려 주라. 이는 우리가 보낸 사자들을 그가 숨겨 주었음이니라. 너희는 온전히 바치고, 그 바친 것 중에서 어떤 것이든지 취하여 너희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바치는 것이 되게 하여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오직 너희는 그 바친 물건에 손대지 말라. 은금과 동철 기구들은 다 여호와께 구별될 것이니 그것을 여호와의 곳간에 드릴지니라.”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전했습니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공격하여 승리하더라도, 여리고성에 있는 어떤 물건도 재물도 가축도 취하지 말고 다 하나님께 바치라고 명령했습니다. 왜 아무것도 취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원래 전쟁에서 승리한 군인들이 전리품을 나누어 갖는 것이 법칙입니다. 그런데 여리고성 전쟁에서는 전리품을 하나도 챙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나중에 아간이 이 명령을 어겨 전리품을 숨겼다가 큰 화를 당하지요. 왜입니까? 우리가 싸워서 이긴 전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리고성 전쟁은 하나님이 싸우셔서, 하나님이 승리하신 전쟁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하나님께 돌려야 한다는 뜻에서 이런 명령을 주신 것이죠. 이 전쟁은 하나님께서 이기게 해 주신 전쟁이었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시편 127편 1절에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 지킨 것 같아도 하나님이 지켜 주셨기에 안전했던 것이고, 우리가 잘 지은 것 같아도 하나님이 완성시켜 주셨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립니까? 사실 다 드려야 정상이지만, 일부만을 구별해 드리는 이유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곧 하나님의 전리품임을 고백하기 위함입니다.
여리고성 전쟁을 생각해 본다면, 이스라엘이 이긴 이유는 돌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승리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시는 것이라면, 왜 돌게 하셨을까요? 정말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신다는 것을 생생히 느끼게 하시려면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무너뜨리는 것을 보라” 하시며 곧장 무너뜨리실 수도 있었을 텐데, 왜 6일 동안 돌고 마지막 날 일곱 바퀴를 돌게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순종을 보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순종이란, 이해가 되지 않아도 말씀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신뢰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순종 훈련 기간이었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 “말씀대로 하면 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내일 것은 미리 거두지 말고 오늘 먹을 것만 거두라” 하셨을 때, 처음엔 불안해서 내일 것까지 거두어 두었지만, 그 다음 날 남긴 것은 썩어 버렸습니다. 반대로 안식일을 앞둔 금요일에는 이틀 분을 준비하라 하셨지요. 이렇게 훈련하며 “말씀대로 해야 사는 길”임을 체득했습니다.
여리고성을 돌라는 말이 이해됐겠습니까? “왜 돌라고 하십니까? 저들이 화살을 쏘면 어떻게 합니까?” 군대 배치를 보면 앞뒤로 군인이 있고, 중간에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있습니다. 성 안에서 기습하면 속수무책일 수 있는 대형입니다.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 “말씀대로 따르니 되더라”를 배웠기에, 의심될 만한 상황에서도 순종하며 돌았습니다.
하루 돌았는데도 여리고성이 무너집니까? 안 무너지지요. 둘째 날도, 셋째 날도 아무 변화가 없습니다. 의심이 들 법하지만 계속 돕니다. 성 안 사람들 입장에서는 처음엔 두려웠다가, 이스라엘이 돌기만 하니 비웃음이 나왔을 겁니다. “너희들 뭐 하냐? 왜 돌기만 하냐?” 조롱이 들려오는 그 상황에서도 순종해야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실패해 보고 배우겠습니까? 아닙니다. 이미 성경에 이스라엘의 실패와 순종이 기록되어 있으니, 말씀을 통해 미리 배워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6절: “이러한 일들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10–11절: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사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여리고성을 도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매주 예배드리는데 무슨 소용인가 싶고, 사업은 여전히 어렵고, 아이들 성적은 그대로이고, 가정의 아픔도 그대로입니다. 매일 성경을 읽으라 하니 알림은 오지만, 10분 읽는 것도 무의미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새벽에, 직장 도착해서, 식사 전에, 자녀와 문제를 두고 기도하지만 아무 변화가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복음을 전해도 반응이 없고, 목표는 이루어지지 않고, 하나님이 내 기도는 안 들어주시는 것만 같습니다. 밖에서는 “저 사람들 또 도네?” 하는 비아냥이 들려오는 듯한 가운데서도 우리는 말씀대로 순종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서 순종했습니다. 노아는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산 위에서 방주를 지었습니다. 미친 짓 같고 소용없어 보였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겸손히 낮아 섬기라, 원수를 용서하고 축복하라”는 말씀은 이 세상 방식과 반대여서 손해 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말씀하신 분을 신뢰하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순종하는 백성에게 놀라운 은혜를 베푸십니다.
세계적인 축구 선수 손흥민 선수의 사례도 떠오릅니다. 그의 아버지는 화려한 경기보다 지루해 보이는 기본기 훈련을 끈질기게 시켰고, 손흥민은 묵묵히 따랐습니다. 그 기본기가 그를 위대한 선수로 만들었습니다.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우리보다 더 잘 아시고, 가장 좋은 것을 주십니다. 때로 실패처럼 보이고 길이 막힌 듯해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선한 길을 주십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의 과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정복하려면 너희가 알아서 하라” 하셨다면 우리가 정복할 수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여리고성 사람들에게 몰살당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물리쳐 주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피 흘리셨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우리의 능력으로는 이룰 수 없기에 주님이 모든 것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까지 주시면서 사랑하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항상 제일 좋은 것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외아들까지 주신 그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면서, 오늘 또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순종의 길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