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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다와 마리아 (눅 10:38-42)

우리가 살아가면서 건강한가 건강하지 못하고 문제가 생겼는가를 늘 체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정기검진을 받는다든가 해서 우리의 건강을 체크하게 되어 있는데요. 검진을 받지 않을 때에는 ‘아, 내가 괜찮은가, 나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가’ 이렇게 생각을 하면서 살았다가도 정기검진에서 뭐가 발견이 되고, 용종이 발견이 되고, 암이 발견이 되고 그래서 빨리 발견해서 치료를 받고 그래서 건강한 삶을 누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건강검진을 받지 않고 모르게 되어서 그냥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지도 모르고 살다가 나중에 말기가 되어서 발견하게 되면 그러면 오래 살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어쩌면 요즘에는 이런 건강검진 시스템이 잘 발달이 돼 있어서 그래서 수명이 굉장히 많이 길어졌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 여전도회가 75세까지인데, 제 생각에는 한 80세까지 올려도 되지 않겠나 될 정도로 다들 팔팔하고 다들 건강하고 다 이렇습니다. 이게 다 건강검진도 잘 받은 그런 결과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영적인 건강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괜찮은가 괜찮지 않은가 이러한 것들을 우리가 체크해 볼 필요가 있는데요. 영적인 문제가 있는데 영적인 문제가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가 그래서 우리가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우리가 영적으로 건강한가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한가를 잘 점검해서, 그래서 우리의 영적인 건강에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의 문제들을 바로잡고 또 고침을 받고 또 그래서 신앙생활을 잘하는 그런 모습으로 변화가 되어야 될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이야기,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의 영적인 건강을 진단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마리아, 마르다가 살고 있는 동네에 오셨을 때에 마르다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좋은 일이죠.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그 예수님이 오셨나 보다, 지나가나 보다 하면서 그냥 가만히 있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마르다는 ‘그냥 지나가는구나’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오시라고 했어요. 예수님을 모셨어요. 이것이 얼마나 귀하고 얼마나 복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을 모시게 되면 예수님을 소유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있어도 그 예수님을 본 척 만 척하면 예수님의 그 좋은 모든 것들이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죠. 예수님이 아무리 좋다 한들 그 무엇이 좋다고 한들 우리가 관심을 가지지 아니하고 우리가 아무런 마음을 두지 않고 그냥 외면해 버린다고 한다면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죠.

하지만 예수님의 그 예수님 됨이, 예수님의 복이 어떻게 나의 것이 될 것인가? 예수님의 축복이 어떻게 내 것이 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돼요? 예수님을 모시는 것이죠. 예수님을 모시게 될 때 예수님을 우리가 소유하게 되고 누리는 축복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김춘수 시인이라고 하는 사람이 <꽃>이라고 하는 시를 썼는데, 내가 그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나랑 아무 상관이 없는 거예요. 그냥 그것은 들에 피어 있는 꽃에 불과한 거예요. 하지만 내가 그 이름을 불러주고 내가 그 꽃을 꺾어서 꽃꽂이로 여기에 만들어 놓고 그 꽃을 아름답게 만들어서 선물도 하고 그래서 그것을 이용하면 그게 내 것이 되고 내가 충분히 누리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누가 누리는가?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을 내게 초대하는 자에게 예수님을 누리는 축복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사실 법적인 관계로 하면 누가 법적으로 제일 가까운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가족들이죠.

예수님의 아버지, 예수님의 어머니 그리고 예수님의 동생들, 예수님의 가족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가족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나요? “얘가 미친 거 아니야?” 그랬어요. 예수님이 무슨 황당한 이야기를 하는 거지, 예수님이 미쳤나 하면서 예수님을 그냥 무시해 버리고 만 거죠. 예수님을 좋게 보지 못한 겁니다. 그냥 거부해 버리고 만 거죠. 그래서 그 예수님과 어쩌면 가장 가까운 법적인 관계로 치면 예수님의 동생들이야말로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서 가장 그 예수님의 풍성함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그런 관계가 바로 예수님의 동생들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때로는 비아냥거리고 조롱하기도 하는 거죠. “큰일을 하려면 예루살렘으로 가서 당신을 드러내시오.” 내가 누구라 하는 걸 드러내라고 조롱하기도 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할 때에 예수님의 그 예수님 됨을 누릴 수가 없었던 것이죠.

하지만 놀랍게도 이 마르다라고 하는 이 여인은 어떤 여인이었는가? 예수님과 친인척 관계인가요?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고 잘 몰라요. 가능성이 아마 있을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러나 아무튼 몰라요. 성경에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몰라요. 하지만 이 법적으로 관계가 없다고 할지라도 놀랍게도 마르다는 예수님이 이 마을에 오셨다고 했을 때 “예수님 우리 집에 오세요. 우리가 음식을 대접해서 예수님을 **공궤(供饋)**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에게 맛있는 음식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집에 들어가게 되었고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이것이 놀라운 축복이라고 하는 점을 먼저 우리가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들도 이런 마음의 열정이 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성경 읽기를 하고 있어요. ‘성경 읽기를 또 하나 보다. 아이고, 작년에 읽었으면 됐지 왜 금년에 또 읽나’ 하면서 그냥 그렇게 생각하면 그 성경이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성경 읽으라고 하니까 그냥 숙제하듯이 ‘아이고, 이게 왜 이렇게 길어. 12분도 기네’ 하면서 그렇게 때우면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지. 하지만 이 성경 말씀을 내가 읽으면서 ‘오늘 나에게 주시는 이 말씀이 무엇일까?’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말씀처럼 생각이 들고 나의 인생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지금으로부터 수천 년 전의 어떤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나와는 전혀 딴 세상의 이야기처럼 보이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라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들려주실 말씀이 무엇이 있을까 말씀을 조용히 묵상하며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내게 무슨 말씀을 들려줄 것인가 기대하며 묵상하는 자에게 꿀과 같은 은혜의 역사가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또 오늘 헌신 예배를 하는데 ‘아이고, 또 헌신 예배 할 게 아니라’ 우리가 이 시간을 찬양을 사모하고 또 예배를 사모하며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자 하는 그런 마음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일까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정현종 시인이라고 하는 사람이 이렇게 시를 썼어요. “사람이 온다는 것은 실로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의 집으로 올 때 그냥 예수님의 육신만 온 게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져오실 은혜와 축복의 말씀으로 오게 되는 것이죠. 원하기는 우리 교회에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하나님을 누리고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는,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우리가 영접해서 우리가 엄청난 축복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그다음이 문제가 됐습니다. 마르다가 지금 열심히 예수님을 공궤하기 위해서 섬길 준비를 위해서 열심히 무엇인가를 했어요.

어쩌면 무슨 일을 했을까요? 음식을 만들었을 수도 있겠고, 대접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것을 정리할 필요도 있겠고 굉장히 바빴을 것 같아요. 굉장히 바빴는데 그런데 놀랍게도 마르다의 여자 동생일까요, 언니일까요? 누가 언니고 누가 동생인가요? 아, 그래요? 모릅니다. 누가 언니고 누가 동생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시스터(Sister)예요, 자매예요. 그런데 마리아가 예수님의 앞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이 마르다의 마음 가운데 불편함이 생기는 거죠. ‘왜 지금 예수님을 대접해야 되는 이 상황 가운데서 저렇게 아무 일도 도와주고 있지 않은가? 예수님을 왜 대접하지 않는가?’ 특별히 당시의 상황으로 본다고 한다면 더더욱 불편했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당시의 상황에서는 여성들은 공부를 안 했어요. 예수님께 배우지를 않았어요. 배우는 것은 누구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이었어요? 그 옛날 아주아주 먼 옛날 예수님 당시 시대의 사람들은 남자들만 배우고 여자들은 배우질 않았어요.

남자들도 다 배운 건 아니고 극히 일부분만 배우고 여자들은 무시를 당하는 그런 상황 가운데서 “일이나 해라, 밥이나 지어라” 그런 상황 가운데 있는 그 마리아가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는 그 모습을 보면서 굉장히 마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런데 이 상황 가운데서 마르다가 잘하고 있는 겁니까? 마리아가 잘하고 있는 겁니까? 누가 더 잘했고 누가 더 못했는가를 말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음식을 준비하고 섬기는 일도 귀하고 복된 일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우려고 하는 이 마리아의 모습도 정말 좋은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하지만 이 마르다는 그 상황 가운데서 마리아가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그 모습을 보면서, 더군다나 당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여성은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던 마르다로서는 마리아의 모습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예수님에게 한마디 한 거예요. “주님, 마리아 좀 뭐라고 좀 해주세요.”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기 아닌가요? 저도 종종 이런 얘기 듣습니다. “목사님 좀 얘기 좀 해주세요.” 그런 얘기 많이 듣는데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무슨 말씀을 해 주셨는가? 41절, 42절 말씀에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오해하지 말아야 되는데, 그러니까 마리아의 선택이 마르다의 선택보다 더 좋았다는 이야기일까요? 그런 건 아닙니다.

물론 배우는 것도 필요해요. 마르다도 배울 필요도 있고 그래요. 마리아가 이렇게 배운 거 잘한 거예요. 하지만 마리아만 잘한 게 아니라 사실은 마르다도 잘한 거예요. 예수님께서 마르다를 책망하고 계시는 걸까요? 아니요. 예수님께서 마르다를 부를 때 뭐라고 불렀어요? “마르다야 마르다야” 몇 번 불렀어요? 두 번 불렀어요. 두 번 부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다고 옛날 옛날에 제가 뭐라고 설명했을까요? 히브리 사람들은 최상급 표현이 없어서 무엇인가를 강조하고 애정을 표현하고 무엇인가 이렇게 중요하게 여겨서 표현할 때는 항상 두 번 반복해서 표현하는 그런 습관이 있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이름을 “마르다야 마르다야” 부르는 것은 애정을 담아서 부르는 거예요. 사랑의 눈으로 부르는 거예요. 우리도 좀 그렇게 좀 불러봅시다. 옆에 사람 보고 “권사님, 권사님.”

사납게 부르지 말고 “여보, 여보.” 사랑을 담아서 예수님께서 이 마르다를 보면서 사랑의 마음으로 마르다를 부르는 거예요. “마르다야 마르다야” 정말 마르다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애정이 담긴 마음으로 불러주시고 마르다도 인정해 주시고 계시는 거예요. 하지만 무엇을 말하는가? 자신이 선택한 그것이 좋은 일이다 생각하고 만족하고 감사하고 하면 되는 거예요. 마르다는 어쩌면 예수님을 모실 때 마음이 깊었을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자신의 집으로 온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을 누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기를 때 이 자녀들을 기르고 자녀들을 위해서 헌신하고 자녀들을 위해서 내 모든 걸 쏟아붓는 것이 고통스럽고 힘들고 억지로 마지못해서 하는 일이었던가요? 아니면 너무나도 행복한 일이었던가요? 그래요. 행복했어요. 행복했어요.

이 아이에게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줄 수 있다고 하는 것, 이것이 제일 행복한 거죠. 마르다도 역시 주님을 모시고 주님에게 대접하려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행복하게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거예요. 처음에 기쁘고 너무나도 행복했던 이 사람의, 마르다의 마음에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어느 순간 갑자기 불편한 마음이 들기 시작한 거예요. 어느 날 갑자기 힘든 거예요. 왜 힘들었습니까? 마리아를 보니까 힘든 거죠. 어쩌면 우리가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하게 되는 때는 언제인가?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바라볼 때입니다. 내가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을 생각하면 행복하고 기쁘고 즐거워요. 그런데 그 기쁨과 즐거움은 언제 사라지는가,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 사라지기가 쉽습니다. ‘나는 이렇게 수고하고 애쓰는데 왜 저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느냐, 왜 저 사람은 나를 도와주지 않을까?’ 그게 늘 내 마음을 힘들게 하고 아프게 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영적으로 건강한가 건강하지 못한가를 체크하는 비결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의 눈에 무엇이 보이는가를 검진해 봐야 합니다. 자, 눈을 가리고 한쪽 눈을 딱 하고 이쪽 눈을 뜨고 저 앞에 있는 게 뭐가 보입니까? 뭐가 보여요? 숫자가 보입니까? 사람이 보이면 내가 건강하지 못할 가능성이 많은 거예요.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할 가능성이 많은, 무엇이 보여야 돼요? 주님이 보여야 되는 것.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그 놀라운 사랑이 보여야 돼요.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셨는가 그 은혜가 보여야 돼. 그게 안 보이고 ‘내가 이만큼 하는데 내 옆에 사람은 얼마큼 하는가, 나는 전도한다고 이렇게 열정인데 왜 아무도 안 도와주는가, 나 이렇게 봉사한다고 이렇게 하는데 왜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나를 따라주지 않는가’ 그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하면 그것이 영적으로 우리를 무너뜨리는 그 첫 번째 징조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의 시각을 주님 앞에 두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눈에 사람들이 자꾸 보이기 시작하면 그러면 그때 빨리 영적으로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많으니 우리가 주님을 바라봐야 되겠다. 사람들을 치워버리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4절에서 5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이 말씀이 어떤 의미라고 이야기했죠? 내가 나의 것에, 내가 할 일에 신경을 써서 내가 할 일에 집중을 해서 내 할 일을 한다고 한다면 다른 사람과 비교함으로 인해서 내가 자부심을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자부심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니 내 일을 신경 쓰라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역할들이 다 다른 겁니다.

어떤 사람은 눈의 역할을 하고 어떤 사람은 귀의 역할을 하고 어떤 사람은 코의 역할을 하고 어떤 사람은 입의 역할을 하고, 각 지체마다 하나님께서는 각각 다르게 한 사람도 똑같이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다 다르게 만들어 놓으셨어요. 쌍둥이도 달라요. 쌍둥이는 똑같던가요? 쌍둥이도 완전히 달라요. 다 모든 사람들 다 다르게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셔서 어쩜 이렇게 같은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는지, 모두가 다 다르게 창조하신 것은 나름대로 각자의 역할이 있기 때문에 우리를 다르게 만들어 놓으신 것인데,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나와 다르다고 하는 이유로 나와 똑같지 않다고 하는 이유로 시험에 들고 불편해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에게 오셨다, 주님이 나에게 은혜를 베푸셨다’고 하는 이 한 가지 사실로 늘 마음속에 기쁨과 감사가 넘쳐나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물론 우리가 함께한다고 하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함께해야 힘이 나잖아요. 함께해야 재미있잖아요.

그래서 함께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러나 때때로 함께하지 못하고 나 혼자 무거운 짐을 다 지고 가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왜 나를 돕지 않는가”로 절망하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남녀 관계, 부부 관계를 다룬 책에 보면은 거기에 나오는 조언 중에 하나가 ‘9대 1의 법칙’이라고 하는 게 있어요. 9대 1의 법칙, 그게 뭐냐 하면 내가 9를 하고 내 배우자가 1을 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게 아마도 똑같이 일을 하고 있다고 하는 증거다. 그렇대요. 이해가 잘 안 되죠? 그래서 상담가가 남편에게 가서 상담을 하고 아내에게 가서 상담을 하면 두 사람의 불만이 똑같아요. 아내는 말하기를 상담가에게 “내가 집안일의 90%를 다 하는데 저 인간은 10%밖에 안 해요.” 남편한테 가서 물어보면 “제가 우리 집 안의 모든 짐을 다 지고 있고 우리 집사람 펑펑 놀고 있어요.” 서로 그렇게 얘기한대요. 그래서 그 상담가가 하는 말이 뭐냐면 내가 90을 하고 있고 내 배우자가 10을 하고 있으면 그게 공평한 거라고 생각하고 그런 9대 1의 법칙을 얘기하고 있는데, 부부 생활에 있어서도 역시 늘 내가 가지고 있는 기쁨과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그 감사 이런 걸 보지 않고 자꾸 생각하면 실망스럽고 불편하고 좌절하게 되듯이, 우리가 주의 일을 할 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의 일을 할 때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가, ‘나는 이만큼 하는데 왜 아무도 안 하나’ 할 게 아니라 모두가 다 예배하지 않는 곳에서 내가 예배하고 모두가 다 손 놓고 있는 곳에서 내가 최선을 다하고 그런 건강한 영적인 상태를 우리가 유지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들의 눈에 누가 보입니까? 예수님이 보입니까? 사람이 보입니까? 만일 주님을 바라보게 된다고 하면 기쁨이 넘치겠지만, 주님이 아니라 사람이 보이면 불편함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보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그 은혜를 누리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여전도 회원뿐만 아니라 온 교우 성도들이 마음속에 주님을 모시는 그 기쁨이 너무나도 크게 넘쳐서 다른 사람들이 눈에 보이지 않고 영적으로 건강한 믿음의 삶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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