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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서 건진 아이 (출 2:1-10)

우리들은 참 좋은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가요?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종종 생각할 때, 참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그 옛날 고종 황제가 누리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누리며, 참 너무나도 좋은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는 그런 생각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역시 고통스러운 일도 많고, 황당한 일도 많고, 답답한 일들도 많이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정말 좋지 않은 시대다. 이 시대는 정말 힘든 시대다. 왜 이렇게 어려운가?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가?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이 있겠지만, 사실 엄격하게 따지고 본다고 한다면, 그 옛날의 시대보다는 정말 우리는 늘 감사할 일들이 많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이야기는 그렇지 못했던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바로 왕이 다스리던 그 애굽 나라에서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삶이었을까요? 정말 고통스러운 시대에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죠. 정말 악한 왕이 황당한 명령, 정말 끔찍한 명령을 내려서, 아기가 태어나면, 그 아이를 나일강에 던져버려 죽여버려야 하는, 그런 정말 끔찍한 시대를 살고 있었던, 그 시대를 배경한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왕은 히브리 민족이 강성해지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히브리 민족에게 명령을 하는 겁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남자 아기는 모두 다 죽여버리라고 명령한 것이죠. 얼마나 끔찍한 명령입니까? 정말 행복한, 아이가 태어나면, 너무나도 행복하고, 너무나도 기쁘고, 정말 즐거운, 어쩌면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 아이를 안는 순간일 것이고, 그 아이를 바라보면서, 힘도 얻게 되는 것인데, 이 바로 왕의 명령은 그 모든 것을 순식간에 끔찍한 일로 바꾸어 버린 것이죠. 끔찍한 명령이고, 반인륜적인 명령을 바로 왕이 내렸던 것이고, 그 명령을 따르지 않으려야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너무나도 힘든 시기를 살아가고 있던, 그 시대의 이야기를 오늘 우리가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서, 바로 왕의 이 끔찍한 명령을 따르지 않기로 결정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등장합니다. 그게 누구죠? 바로 모세의 부모님들이었습니다. 모세의 어머니는 누구죠? 요게벳입니다. 모세의 아버지는 누구죠? 요게벳은 조금 아는데, 아버지는 잘 모르죠? 아므람입니다. 아무튼 이 모세의 아버지 아므람과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이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게 되었는데, 그 아이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어요. 자기 아기가 사랑스럽지 않은 그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마는, 이 부모는 그 아이를 보고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바로의 그 명령을 따를 수가 없는 것이죠. 아이를 죽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를 3개월 동안 숨어서, 소리가 들리지 않게, 정말 조심조심해 가면서, 그 아이를 3개월 동안 기르게 된 것이죠.


하지만 더 이상 기를 수가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아이가 우는 소리가 너무나도 커버렸기 때문일까요? 아무튼 더 이상 이 아이를 기를 수 없게 되자,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이들이 선택한 방법은 나일강의 이 아이를 띄워 놓는 것이었습니다. 갈대상자를 만들어서, 나일 강 가에 두어서, 그 아이를 그곳에 두는 방법을 선택했는데, 이 방법으로 아이가 살아날 수 있겠습니까? 아이가 죽을 수밖에 없겠습니까? 살아난다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겠지만, 그래도 나일 강에 던져 죽일 수는 없어서, 갈대 상자에 넣고, 정말 이 아이를 위해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들을 했던 모습이 보여지는 것이죠.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 아이를 잘 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곁에서 지켜보는 그 일밖에 할 수가 없었습니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그 갈대 상자를 멀리서 지켜보는 것밖에는 더 이상 할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놀라운 일 무슨 일이죠? 마침 바로 왕의 딸이, 공주가 목욕하러, 나일 강가로 시녀들과 함께 나왔다가, 갈대 사이에 있는 이 상자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 갈대 상자에 들어 있는 그 아기를 보면서, 이 아이가 히브리 남자라고 하는 것을 금세 알아챘어요. 왜 어떻게 알아챘을까요? 당연하죠. 애굽의 아이가 거기에 있을 리는 없는 겁니다. 애굽의 아이라고 한다면 집에서 행복하게 잘 기르고 있겠죠. 여기에 나와 있을 리가 없는 겁니다. 이런 데 나와 있는 아이가 있다고 한다면, 오로지 히브리 아이밖에 없는 것이죠. 히브리 아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또 알았을까요? 아마도 할례를 받아서 알았을 것 같아요. 그 히브리 사람들의 특징이, 한눈에 봐도 히브리 아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었기 때문에, 이 아이가 히브리 아이라고 발견하게 된 것이죠.


그런데 그 공주의 마음 가운데, 이 아이에 대한 측은한 마음, 이 아이에 대한 불쌍한 마음이 들고, 자비의 마음이 들어서, 이 아이를 “히브리 아이구나” 하면서 죽여버리라고 한 것이 아니라, 이 아이를 데리고, 살리려고 하는 그런 마음이 공주의 마음 가운데 들게 된 것이고요. 그 순간에 미리암이 용기를 내어서, 그 공주 앞에 나아가 이야기를 하는 것이죠. 아이를 위해서 유모를 구해다 드릴까요? 히브리 여인 중에 유모를 데려다줄까요? 물어보고 결국 누구를 데려왔습니까? 그 바로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을 데려가서, 그래서 왕의 경비를 지원받으면서, 그래서 이 모세를 기르게 되었고, 이 모세가 결국 자라게 되어서 바로 공주의 아들로 자라게 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고 하는 이야기를 오늘 이 이야기 가운데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아이의 이름을 모세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그 모세라고 하는 이름의 뜻이 무엇인가? 물에서 건져냈다고 하는 그런 의미이고요. 물에서 건져냈다고 하는 이 아이가, 이 아이가 물에서 건져냄을 당한 이 아이가, 결국에는 물에 빠진 것과 같은 이스라엘 민족을 구해내는 메시아의 역할을 감당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건져낸 영웅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그 상황 가운데서, 이제는 소망이 없고, 이제는 이 아이에 대해서 어떠한 기대도 할 수 없는 그런 상황 가운데서, 놀랍게도 기적적으로, 놀랍게도 이 아이를 죽이라고 한 바로 그 바로의 딸에 의해서 구원을 당하는 얻게 되는, 생명을 건지게 되는, 그런 놀라운 일이 있게 된 것이고, 그리고 이 아이를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이 구원을 받게 되는, 그런 엄청난, 어떻게 보면 정말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성경 출애굽기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이 이야기가 늘 읽어도 재미있고 정말 놀라운 이야기인데요. 이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요? 이 이야기를 보면서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들을 이루어 나가고 계시구나! 하나님께서 지금 이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아이를 건지시고, 이 아이를 훈련시키시고, 이 아이를 사용하시는, 그 하나님의 계획이 하나씩 하나씩 이루어지고 있구나! 나약한 가정, 아무런 힘도 없는, 그 평범한 가정의 그 아이를, 하나님께서 모세로 민족의 구원자로 만들어 나가시기 위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죠.


지금 이렇게 모세가 갈대 상자에 뉘어져 있다가, 바로 공주의 바로의 딸 공주의 손에 의해서 구원을 받아, 그래서 모세가 왕자로서 성장하게 되었다고 하는 이 이야기가 우연히 일어난 것이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까? 어쩌다 보니까 바로의 공주가 발견한 것이고, 어쩌다 보니까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요? 전혀 아닌 것이죠. 우리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하셨구나. 하나님께서 살리셨구나. 하나님께서 개입하고 계시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볼 수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출애굽기 2장 1절에서부터 10절 말씀 가운데 우리가 읽어나가는 가운데 하나님이 등장합니까? 하나님의 이름은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은 전혀 등장하지 않아요.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누군가? 모세의 아버지가 등장하고, 모세의 어머니가 등장하고,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등장하고, 바로의 공주가 등장하고, 사람들이 등장하는 이야기이고, 거기서 우연의 일치로, 어떤 우연에 의해서 모든 일들이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우리가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런 일들을 계획하시고 인도하시면서, 하나님께서 하나하나 준비시켰다고 하는 사실을 오늘 우리가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옛날 아브라함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저 갈대야 우르에서 살고 있던 아브라함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죠. 너는 내 본토를 떠나라. 내가 살고 있는 그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 내가 내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하나님 어디로 가야 됩니까? 목적지가 어디입니까? 알지도 못하는데, 그냥 내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오라고 하는, 그 하나님의 말씀, 뭔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온, 그 아브라함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너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겠다. 아들 하나도 없던 그 아브라함을 향해서 들려주신 약속의 말씀이, 너무나도 엄청난 꿈을 말씀해 주시는 것이, 너무나도 엄청난 미래에 대해서 말씀해 주는 것이죠.

내가 너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할 것이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할 것이고, 그래서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되는, 그런 일을 하게 하겠다고, 우리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가나안 땅을 지금 땅 한 평도 얻지 못했어요. 그냥 나그네로서 와 있는 그 아브라함을 향해서 이 가나안 땅을 봐라. 동서 남북을 바라보라. 네가 밟는 그 모든 땅을 이 땅을 너의 후손들에게 주겠다고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셨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네 후손들이 이방에서 객이 될 것이고, 이방에서 종살이하다가,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민족들을 이끌어 이 땅으로 데리고 오겠다고 하는 예언의 말씀을 이미 아브라함에게 해 주셨던 것이죠.


창세기 15장 13절 14절 말씀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내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400년 동안 내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내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일이,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서 살던 야곱의 가족이 어떻게 하다가 보니까, 애굽 땅에 오게 된 것이고, 그 애굽 땅에서 종살이를 하게 된 것이고, 그래서 정말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는데, 그것이 그냥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대로,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이스라엘 민족이 그 종살이하던 곳에서부터 구원을 받아 나올 거라고 하는 놀라운 이야기를 하나님께서 해주신 적이 있는데요.

오늘 그 출애굽기 2장의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하는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하나씩 하나씩 이루어 나가고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볼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사실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이 출애굽기 2장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출애굽기 1장에서도 이미 일어나고 있었어요. 무슨 일을 통해서 일어났죠? 이스라엘 민족이 기하급수적으로 막 늘어나는 거. 아브라함의 후손이 바닷가에 모래와 같이 많아질 것이다.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셨는데, 그 약속대로, 핍박을 당하고 있는 그 이스라엘 민족이 아무런 소망이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나가는 가운데, 이스라엘 민족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그 모습,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고 계셨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겠는데요.


오늘 이 출애굽기 2장에서도 그 하나님의 약속을 성실하게 이루어 나가고 계시는 것이죠. 바로 왕은 남자 아기를 모두 다 죽여버리라고 했지만,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이스라엘 민족의 수가 늘어나게 된 것이고, 남자아이들은 모두 다 죽이라고 했지만, 그러나 그 가운데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할 모세라고, 한 사람을 놀랍게도 살리시고, 바로의 궁전 가운데서 자라게 하시고 훈련시키셔서,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로 만드는 그 일이, 우연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께서 하시고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야기에서 하나님께서는 메시아 모세를 준비시키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겠는데요. 우리가 지난번에 살펴본 것처럼, 요셉이 고난을 받는 게, 그게 정말 재수 없어서 고난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요셉이 고난을 받는 것을 통해서, 야곱의 가족을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해 나가고 계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그 뜻 가운데서, 그 요셉의 고난이 참 의미가 있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살펴보게 되었는데, 모세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죠. 아므람과 요게벳의 집에서, 모세를 기를 수가 없었고,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극한 상황까지 들어가게 됐지만, 그래서 그 과정 하나가 정말 고통스러운 것이었지만, 그러나 이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나가는 과정을 하나씩 하나씩 해나가고 계시는 것이죠.


모세가 아므람과 요게벳의 집에 있었다고 한다면 무엇을 배웠을까요? 그냥 평범한 한 사람으로만 살게 되었을 겁니다. 그냥 집안일 정도 배우고, 그냥 엄마 아빠로부터 배울 수 있는 정도까지만 배웠을 것 같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모세를 아므람과 요게벳에서부터 애굽의 궁정으로 인도해 주셔서, 애굽의 궁정 속에서 리더십을 배우게 해 주고, 무술을 배우게 해 주고, 그 애굽 나라의 학문을 배우고, 지도자로의 수업을 배워서, 광야 40년 동안, 남자들만 해도 60만이라고 하는 그 대군을 이끌고 나오게 만드는, 그런 지도자로서의 훈련을 그 애굽의 궁전 가운데서 충분히 배웠다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구나. 하나님께서 통치하고 계시구나.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가? 이 세상이 바로의 명령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고,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가? 자본의 의미에 의해서 이 세상이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고, 어떤 미치광이 같은 어떤 대통령이 나타나서, 그래서 관세를 올린다고 하고, 세계를 뒤흔들어버리는, 그런 것에 의해서 세계가 요동치는 것처럼 보이고,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정말 악한 자들에 의해서, 모든 것들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이 세상이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고, 하나님께서 다스린다고 하는 이 사실을 다시 한번 확신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참 절망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너무나도 엉망진창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기 때문인 것이죠. 정의는 땅에 떨어져 버리고, 악인은 마음대로 악을 저지르면서, 모순된 행동을 하면서도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아니하고, 뻔뻔하게 악을 저지르면서도 전혀 개의치 않는 그런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권력을 잡고, 그런 사람들이 휘두르는 이 세상 가운데서, 자신들을 향해서는 한없이 관대하고, 힘없고 연약한 자들을 향해서는 무한하게 짓밟아버리는 악한 사람들이 다스리는 이 세상 가운데서, 과연 우리는 어디에 소망을 둘 수 있을 것인가? 이 세상은 악한 자들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고, 결국은 악이 승리하고 마는 것이 아닐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불안한 마음들이 있는 거예요. “이러다가 악이 승리하는 게 아닐까? 이러다가 악한 사람들이 장악하는 것이 아닐까? 이 세상이 정말 엉망진창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닐까?”라고 하는 우려가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너무나도 강한 것이죠.

하지만 우리가 이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는 다시 한번 믿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 계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 의로우신 하나님이 계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결국에는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시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고, 기대하며,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신실하게 살아가는 그런 믿음의 결단들을 우리 모두가 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며, 하나님께서 지금도 온 세상을 다스린다고 믿는 사람들은 소망 가운데 살아갈 수 있어요. 하나님이 계시며, 그 하나님이 지금도 이 세상을 다스린다고 믿는 사람은 의롭게 살아갈 수가 있어요. 거룩하게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죠. 왜냐하면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님이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절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공의로우신 하나님, 의로우신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은 악한 자들에 의해서, 돈의 힘에 의해서, 권력에 의해서 이 세상이 돌아간다고 믿는 사람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착한 게 죄라고 뻔뻔하게 이야기하는 그런 행동들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절망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악을 저지르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 성도들은 분명하게 우리가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 성경 말씀은 우리들에게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는 것이죠. 이 세상이 엉망진창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컨트롤하고 계시다. 하나님께서 의롭게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시고, 인도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번 바라보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아가는 그런 믿음의 결단들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그 과정 가운데서, 어떻게 그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나가셨는가? 거기에는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갔다고 하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오늘 이야기는 그 모세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누나의 작은 헌신과 결단들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죠. 이들은 바로의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바로의 그 서슬 퍼런 그 엄청난 명령 앞에서 아이를 죽이려고 하지 않고 그 아이를 숨어서 기른 것이죠. 이 아이를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겁니다. 생명을 살리는 게 하나님의 뜻인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왕의 명령에 순종할 수 없는 겁니다. 바로 왕이 위협하지만, 그 위협 앞에서 목숨을 내놓고 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해 나간 것이죠.


이런 일에 대해서 히브리서 11장 23절 말씀 가운데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모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믿음으로! 무슨 믿음으로?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그 믿음으로,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우리의 목숨을 쥐고 있는 것이 바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 이 세상에 자본이 우리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 이 세상의 것들이 우리를 위협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우리가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고, 바로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았는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이었는가? 믿음으로 그랬다고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사실 이들이 믿음으로 한 일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모세의 아버지 아므람과 어머니 요게벳과 그리고 누이 미리암이 한 일이 무엇일까요? 그들은 군대를 조직하고, 독립군을 조직하고, 그래서 바로 왕의 암살 계획을 세우고,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전투를 모의하고, 반역, 반란을 계획한, 그런 위대한 일들을 해 나간 것이 아니라, 사실 이 사람들이 한 일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작은 일이에요. 이 사람들이 한 일이란 무엇인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조그마한 일이에요. 자신들에게 주어진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너무나도 작은 일을 하는 겁니다. 그 작은 일이 뭐예요? 아기를 살리는 거죠. 아기를 숨어서 기른 겁니다. 그 작은 일이 무엇입니까? 누나 미리암은 그저 멀리서 갈대 상자를 지켜보는 거예요. 그리고 용감하게 달려가서 유모를 소개해 주는 거죠. 이들이 한 일이라고 한 건 무엇인가? 엄청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작은 일을 한 거예요. 그 작은 일을 할 때 어떤 마음으로 했을까요? 내가 이 모세를 살리면 우리 민족이 구원을 받을 거야라는 생각을 했을까요? 아니요.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없었고, 그런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내가 하는 일이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는 일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아무것도 예상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들은 무엇을 했는가?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 가운데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거룩한 일을 조금씩 조금씩 해 나간 것이죠. 그런데 오늘 내가 했던 그 조그마한 일이 결국은 모세를 살렸고,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했어요.

오늘 우리가 하는 작은 일, 오늘 내가 우리 아이를 위해서 한 번 안아주는 일, 내가 오늘 한 사람을 바라보며, 그 사람의 손을 한번 잡아주는 일, 너무나도 작은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게 생명을 살리고, 사실은 그게 나라를 살리고 어마어마한 일들을 하게 만드는 것이죠.

옛날 미국의 지금으로부터 한 70년 전, 1955년에 미국은 흑인들을 아주 차별하던 그런 세월을 살고 있었던 나라였습니다. 지금도 미국에 살아있는 수많은 백인들은 흑인들을 차별하던 그 당시의 경험들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요. 지금으로부터 70년 전에는 미국에 버스가 있으면 버스를 탈 때 백인들이 앉을 수 있는 좌석과 흑인들이 앉을 수 있는 좌석이 나뉘어져 있는, 그리고 백인들이 앉을 수 있는 좌석의 자리가 부족하면, 흑인들로 하여금 일어서게 하고, 백인이 그 자리를 앉게 만드는 그런 차별법이 있었죠. 그런데 1955년 로자 팍스(Roja Parks)라고 하는 어떤 흑인 여자 아이가 흑인석에 앉아 있다가 백인들의 자리가 모자라니까, 다가와서 비키라고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고 할 때 이 아이는 비키지 않았어요. 지금 우리 헌법에 흑백 차별이 폐지됐는데, 비킬 수 없다고 하면서 비키지 않았어요. 그걸로 인해서 경찰들이 와서 그 사람을 체포해 갔습니다. 지문을 찍었습니다. 그 작은 일, 자기 자리에 있었던, 그 작은 일이 사실은 나중에 이것이 엄청난 흑인 민권운동의 시발점이 되어 버렸고, 그때 탔던 그 버스가 지금 박물관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미국 사회에서 지금도 여전히 차별이 많지만 그나마 그런 철폐가 이루어진 것이 어디서 시작이 됐는가? 작은 자리 하나에서 시작이 된 것이 오늘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은 매주 매우 작은 일들이에요. 하지만 그 일들이 생명을 살리는 일들이 되는 겁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님들을 보면서 얼마나 참 감사한지 몰라요. 정말 남들이 알아주지도 않고 박수 쳐주지도 않고, 이렇게 칭찬도 없고, 그런 일들이지만 내게 주어진 그 자리에서 내가 조그마한 일들을 해 나가고 있는 모습, 전도하기 위해서 매주 토요일마다 나가고, 또 우리 교사들은 우리 아이들을 정말 믿음으로 양육하기 위해서 양육하고,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고 가르쳐주고, 근데 어제 토크로 모임을 하면서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내가 어떻게 믿음을 더 많이 가지게 됐는가? 우리 딸아이가 기도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것 때문에 내가 엄청난 감동과 충격을 받았다는, 알고 보면 교사 선생님들이 그 아이의 믿음을 길러준 것이고, 그리고 그 아이가 기도하는 그 모습을 통해서, 어머니가 또 영향을 받은 것이고, 또 이 사람의 작은 헌신을 통해서, 또 어떤 사람이 어떠한 영향을 받을지, 우리가 작은 일들을, 직장에서 신실하게 해 나가고, 그리고 우리가 엄마 아빠로서 아이들에게 조그마한 일들을 해 나가고,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있게 하신 그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그 일들을 해나가는 것들이 결국에는 온 세상을 변화시키는 어마어마한 일들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미리암의 역할이 작아 보였지만, 몇 살 정도나 됐을까요? 5살 정도 꼬마였을까요? 10살 정도의 꼬마였을까요? 곁에서 지켜보다가 유모를 소개해 주고, 그런 작은 하나의 헌신과 할 수 있는 일들을 통해서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그 일들이 사람들이 박수 치는 일이 아니라, 그저 내가 해야 할 일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고,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있게 하신 그 자리에서,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외면하며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해 나갈 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역사가 있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믿음의 결단을 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놀랍게도 모세는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 가운데서 살아났습니다. 바로의 명령에 의해서 완전히 죽을 수밖에 없을 때, 이제는 물에 빠져 죽거나, 아니면 짐승의 밥이 되거나, 이제 살아날 수 있는 가망성이 전혀 없는 그 모세가 놀랍게도 이런 사람들, 저런 사람들, 그리고 바로의 공주에 의해서 살아나게 되는 그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는데요. 그런데 바로 그 일을 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실 어쩌면 우리가 우리의 모습이라고 하는 게 아기 모세와 같은 상황에 우리가 있어요. 어쩌면 이 세상의 풍파에 우리가 쓰러져 죽을 수도 있고, 물에 빠져 죽을 수도 있고, 우리는 정말 아무런 힘도 없이 죽을 수도 있는 그런 상황에 있을 때,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저 하늘 위에서 손 놓고 계시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누나가 그 찰나의 순간에 감히 바로의 공주 앞에 뛰어나가서, “아이의 유모를 찾아줄까요?”라고 외쳤던 그 용기처럼, 우리 주님께서는 저 높고 높은 보좌 위에서, 낮고 천한 이 땅에 내려오셔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젖이 아니라, 자신의 피와 물을 다 쏟으시며, 우리를 살려내시는 그런 놀라운 은혜를 우리가 받은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소망하며, 주님, 우리를 이 어려움 가운데서 건져주옵소서 기도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우리로서, 신실하게 믿음의 역할들을 감당해 나가는 그런 믿음의 결단들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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