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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사람에게 배우라 (잠 17:24)

오늘 잠언서에 한 말씀 우리가 묵상하면서 은혜를 받으려고 하는데요. 제가 잠언서 강해를 하면서, 이렇게 설교 제목을 잡을 때, 언제 잡냐면, 순서에 따라서 미리 잡습니다. 한글 성경을 읽고, 그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의미가 무엇일까 생각하면서, 고민하면서 설교 제목을 적는 것이죠. 그래서 잠언서 17장 24절 말씀을 읽으면서, 지혜가 누구에게 있는가? “지혜로운 자에게 있구나”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잠언서 17장 24절 말씀 다시 한번 보면은, “지혜는 명철한 자 앞에 있거늘, 미련한 자는 눈을 땅 끝에 두느니라”라고 되어 있으니까, 지혜가 어디에 있습니까? 명찰한 자의 앞에 있다. 지혜가 명철한 자 앞에 있다고 말씀해 주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지혜를 얻으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명철한 자에게로 가야, 지혜가 있는 사람에게로 가야, 지혜를 배울 수 있는 게 아닐까? 지혜로운 사람에게 가서 배워야, 우리도 지혜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을 해서, 설교 제목을 “지혜로운 사람에게서 배우라”라고 적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에게 가야, 지혜를 배울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겠죠. 어리석은 사람은 누굽니까? 지혜로운 사람에게 찾아가지 않고, 지혜롭지 못한 것을 자꾸만 바라보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일 수 있겠습니다. 지혜자 앞에 가서, 지혜를 배우고, 정말 그 사람에게 많은 것을 배워야, 그래야 나도 지혜로워질 텐데, 어리석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그런 지혜자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괜히 허황되게, 땅끝만을 바라보고, 엉뚱한 곳을 찾아다닌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닐까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혜자 앞에 서야 하고 지혜 있는 사람, 명찰하는 사람 앞에 서는 것이 중요할 거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충분히 의미가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좋은 선생님 앞에 서는 것이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중요한 선생님, 대가 앞에 서는 것, 정말 지혜로운 자 앞에 서는 것은 우리가 정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우리 아이가 바이올린을 하기 때문에, 바이올린을 이렇게 배우다가, 종종 매스터 클래스(master class)라고 하는 것을 할 때가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방문을 하게 되면, 그 사람 그 사람이 하는 매스터 클래스(master class)로 수많은 학생들이 몰려들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 대가 앞에서 학생들이 지금까지 연주를 하면서 갈고닦은 실력을, 그 대가 앞에서 연주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대가가 그 연주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레슨을 해줍니다. 많은 시간을 레슨을 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원포인트 레슨을 해주는 거죠. 그 연주를 할 때 너무 힘을 주지 말라고, 너무 평범한 교훈인가요? 연주할 때, 좀 이렇게, 이렇게 한번 해보라고, 이 부분은 이렇게 한번 해보라고, 대가가 그렇게 원 포인트로 이야기해 주는 것들이, 정말 자기가 선생님에게 잘 배우고 있기는 하지만, 대가에게서 듣는 그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이죠. 그래서 그 사람이 성장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줍니다.


축구도 역시 마찬가지더라고요. 축구 경기를 하는데, 조기 축구팀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수들이 와가지고, 어떻게 하면 골을 잘 넣을 수 있겠는가? 내가 슛을 쓰면 이 볼이 떠버리고 마는데, 내가 슛을 쏘게 되면, 이것이 날아가 버리고 마는데, 어떻게 하면, 그러면 이 볼을 골대 안으로 정확하게 차 넣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대가들이 와서 한 마디씩 해주는 거죠. 발을 들지 말고 끝까지 펴고 차라고, 이걸 들지 말고 끝까지 꺾은 상태에서 차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해주면, 정말 그 유명한 선수들이 가지고 있는 그 노하우를 얻는 것이 엄청나게 큰 유익이 되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우리 인생의 전반에 걸쳐서 지혜 있는 사람 위대한 사람 앞에 서는 것은 중요할 것이고, 그리고 좋은 선생님 앞에 서는 것, 지혜자 앞에 서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충분한 의미가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제 설교 제목을 그렇게 잡아놓고, 이제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본문을 연구를 하면서, 이 말씀이 과연 어떻게 되어 있을까? 원문을 한번 살펴보았습니다. 이 본문을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원문을 보니까 이렇게 되어 있어요. “슬기로운 사람 앞에는 지혜가, 어리석은 사람의 눈은 땅끝을”이라고 하는 말로 되어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렇게 되어 있는 히브리어 원어를 우리 한국말 성경에서는 17장 24절처럼 이렇게 번역을 했는데, 이 히브리어 원문의 의미를 보면, 슬기로운 사람 앞에 무엇이 있는가? 지혜가 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의 눈은 땅끝을 본다. “땅끝을”이라고 하는 그런 표현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의 의미가 이 의미를, 어떤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까? 그 말씀의 의미는 지혜 있는 사람은, 지혜에 있는, 슬기로운 사람은, 슬기로운 사람 앞에는 지혜가 보인다는 것이죠. 슬기로운 사람은 지혜를 발견하게 된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자기 눈앞에 있는 지혜를 보지 못하고, 여기에 지혜가 없나 보다. 그럼 어디서 지혜를 찾을 것인가 저 땅끝을 바라보고 있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지혜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지혜라고 하는 것은 사실 우리가 눈을 뜨기만 하면, 우리가 귀를 열기만 하면,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기만 하면, 바로 우리 앞에 지혜가 있다고 하는 것이죠. 지혜가 있고, 정말 소중한 보물들이 있는데, 우리의 눈이 가려지고, 어리석어서, 그 지혜를 보지 못하는데, 슬기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슬기로운 사람은 바로 그 슬기로운 사람의 눈앞에는 모든 것이 지혜로 보이고, 지혜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의미로 잠언서 17장 24절의 말씀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가 무엇일까요? 우리의 문제는 정말 소중하고 정말 가치 있는 것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지혜가 무엇이냐 하면, 지혜는 마치 땅속에 감추인 보화와 같은 거예요. 그 보화가 어디에 있어요? 여기 있어요! 보화가 어디 있어요? 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에 있는 보화가 어디에 숨겨져 있어요? 땅 밑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보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화를 보지 못하는 겁니다. 보화가 있는 줄 모르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냥 무시해 버리고, 그냥 지나쳐버리고,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죠.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누구인가? 땅속에 뭉쳐진 보화가 있다고 하는 것을 보는 사람이에요.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땅속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가 있는데, 그 사람은 땅속에 보화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팔아서, 그 보화를 살 정도로 그렇게 최선을 다해서, 그 보화를 얻고자 했는데, 그 사람과 다른 사람과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보화가 있는 걸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지혜는 바로 우리들의 눈앞에 소중한 지혜가 있고, 바로 우리들의 눈앞에 소중한 것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죠.

언제나 풍성하게 주어지고 있는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를 모르는 아이들처럼, 아이들은 부모님의 정말 한없는 사랑을 받고 자라면서도, 늘 불평과 또 짜증을 내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참 안타까운 모습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인데요. 마치 우리 인생은 어떤 인생인가? 마치 그런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정말 소중한 보물이 우리들에게 주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가치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보화를 꼭꼭 숨겨놓으신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에게 내어주신 하나님이세요. 지혜를 주신 하나님이시죠. 그래서 우리가 눈을 들어서 보기만 한다고 한다면, 그 지혜를 알 수 있을 텐데, 그 소중한 지혜가 바로 우리 앞에, 우리 곁에, 어디든지 있다고 하는 사실을 망각해 버린 채, 이곳에는 보화가 없고, 이곳에는 지혜가 없고, 저 멀리 어느 곳에 가야만, 저 먼 곳에 가야만, 거기서 보화를 얻을 수 있고, 거기에서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 가운데 우리 모두가 대부분 있는 것이죠.


대부분의 처녀 총각들의 문제가 뭡니까? 바로 내 주변에 있는 처녀 총각들은 별로 소중해 보이지 않고 별로 감동이 없어요. 그런데 모르는 사람, 알지 못하는 사람,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람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가지고 있어서, 그래서 결혼하지 못하는, 그런 어리석은 처녀 총각들과 마찬가지로 지혜도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지혜가 어디에 있는가? 지혜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다. 이 말씀이에요.

슬기로운 사람은, 슬기로운 사람의 눈에는 그 지혜가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의 눈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아서 먼 곳만 바라본다는 것이죠. 지혜가 어디에 있는가? 지혜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와 가까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잠언서 1장 20절에서부터 21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시끄러운 길목에서 소리를 지르며 성문 어귀와 성중에서 그 소리를 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잠언서 1장에서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설명을 해드렸습니다마는, 지혜가 어디에 있는가? 지혜는 저 먼 곳에 있기 때문에, 마치 우리가 유비가 삼고초려를 해서 제갈량이라고 하는 그런 스승님을 모셔와야만, 그래야만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저 먼 곳에 가서, 정말 최선을 다해서, 무엇인가 지혜를 사 와야만, 그렇게 지혜가 우리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지혜가 어디에 있는가? 널려져 있다는 거예요. 우리 눈앞에 보여 있다고 하는 것이죠. 어떻게 하고 있는가? 지혜가 우리를 향해서 소리를 지른다는 거예요. 시장에서 소리를 지르고, 길거리에서 소리를 지르고, 우리의 가정에서 소리를 지르고, 우리의 침실에서 소리를 지르고, 우리가 있는 그 모든 곳에서 지혜가 우리를 향해서 소리를 지르는 겁니다. 어떤 지혜의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들이 우리를 향해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아야 한다고 하는 그 지혜의 소리들이 우리들의 귀에 들리고 있는 것인데,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애써 그러한 지혜를 외면해 버리면서, 듣지 않으려고 하고, 계속 어리석은 길로만 가면서, 지혜를 찾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문제일 것입니다.


신명기 30장 11절에서부터 14절 말씀까지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들의 삶 가운데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지혜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 가운데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그것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는 믿음의 결단들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어리석은 탕자는 아버지의 집이 바로 그것이 행복의 처소요. 아버지의 집이 정말 좋은 곳이라고 하는 사실을 망각해 버린 채,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저 먼 곳에 행복이 있는 줄 알고, 저 먼 곳에 무엇인가 더 좋은 줄 알고, 여기서 조금만 힘들면, 이게 아니지 하면서 뛰쳐나가서, 저 멀리에서 더 좋은 것이 있는가 찾으려고 하는, 그런 어리석은 모습을 보일 것이 아니라, 참된 지혜의, 참된 은혜의 참된 축복이 어디에 있는가? 바로 우리 가운데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고, 또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그 하나님의 말씀이 내 것이 되기를 기도하는 가운데, 순종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어떤 특별 세미나를 해서 최고의 강사를 모시고 와야 지혜를 얻는 게 아니에요. 매일 드리는 예배, 우리가 매일매일 읽는 성경 말씀, 우리가 매일매일 묵상하는 그 하나님의 말씀, 우리가 무미건조하게 그냥 피곤한 상태에서 졸면서 참여하는 이 수요 예배가 아무 의미 없다 이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의 눈을 열고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 앞에 설 수만 있다고 한다면,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은혜요 지혜가 되고 소중한 보배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슬기로운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우리 앞에 있는 보배로운 말씀들, 지혜의 말씀들을 소중한 것으로 여기고 받아들이고 그것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그런 믿음의 결단들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무엇인가? 그것들을 다 무시해 버리고, 어디 저 먼 곳에, 어디 지금 내가 처하고 있는 이곳을 떠나서, 저 어디에 가면, 내가 보지 못하는 저 먼 곳에 가면, 그곳은 행복한 곳이 있을까? 그곳이 더 지혜로운 곳이 있을까? 찾아다니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니라, 오늘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그 은혜가 무엇인지, 지혜가 무엇인지, 믿음의 눈을 열 수 있는 그런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불신자들도 이야기를 하죠. 무슨 이야기를 합니까? “삼인행”이면 “필유아사”라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거기에는 반드시 나의 선생님이 있다”라고 하는 말을 하는데, 사실은 불신자들도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시고 지혜를 주시는 거예요. 이 사람을 통해서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또한 여러 가지 경험들을 통해서 예배를 통해서, 기도하는 가운데, 말씀 묵상을 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다양한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들이 들려진다고 할 때, 그것을 그냥 한 귀로 흘려버릴 것이 아니라, 슬기로운 자는 그것을 분별하여 지혜를 나의 것으로 만드는 그런 결단들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우리의 마음을 닫아버릴 때가 많은 것이죠. 사탄이 우리들의 마음을 부추겨서, 우리의 마음을 닫아버리게 만들고, 귀를 닫아버리게 만들고, 교만해지게 만들어서, 또는 분노하게 만들어서, 우리의 마음이 지혜를 보지 못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게 만드는 일들을 우리가 늘 경험하면서 살게 되는데, 오늘 우리가 기도해야 될 기도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주님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지혜를 분별하여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성경 말씀을 읽는 가운데 거기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지혜를 발견하게 해 주시고,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은혜를 지혜를 발견하게 해 주시고, 믿음의 눈을 뜨게 해 주옵소서. 저희들의 그 완악한 마음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녹여주셔서,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 되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가는 우리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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