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잠언 17장의 마지막 넉 절을 읽었는데요. 25절부터 28절까지의 말씀을 읽었는데, 26절의 말씀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 따로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 생각이 들고, 25절, 27절, 28절 석 절의 말씀을 함께 묵상하면서, 오늘 이 저녁 시간에 은혜를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잠언서 17장 25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미련한 아들은 그 아비의 근심이 되고, 그 어미의 고통이 되느니라.” 미련한 자식이 부모에게 근심거리가 되고, 걱정거리가 되고, 고통을 준다고 하는 말인데요. 당연한 것이죠. 슬기롭고 지혜로운 자녀라고 한다면, 부모에게 기쁨이 되고, 참, 부모를 웃게 만들고 행복하게 만들 것이지만, 그러나 미련한 자식들은 그 부모를, 참, 근심 가운데, 걱정 가운데, 참, 크나큰 고통 가운데 넣게 되는 것이죠. 왜냐하면, 미련한 자식은 자꾸만 문제를 일으키고, 사고를 치고, 그래서 계속해서 끊임없이, 참, 무거운 짐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 부모에게 큰 근심 걱정거리, 고통거리가 된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됩니까? 미련하면 안 되겠죠! 지혜로워야 되겠죠. 우리가 지혜롭게 삶을 살아야,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 우리 부모님들에게 효도하는 길이 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 자녀들이 지혜로운 삶을 살아야 되겠는데, 사실은 이 부모님들에게만, 근심거리 걱정거리가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근심거리요.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걱정거리가 되는 것이죠. 따라서, 참, 우리가 지혜롭지 못하고, 우둔하고, 지혜롭지 못해서 어리석다고 한다면, 우리와 관계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이 고통 가운데 빠질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참 지혜롭게 살아야 되겠죠.
특별히 우리가, 어리석은 자가 어떤 리더십에 있다든지, 지혜로운 지혜롭지 못한 자가 어떤 일을 결정하는 그런 책임을 맡은 자가 된다고 한다면, 결국 그 사람이 속한 모든 공동체가 고통을 당하게 되고, 그 사람이 속한 모든 공동체가 근심과 걱정 가운데 있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미련한 길을 걸을 게 아니라, 지혜로운 길을 걸어야 되겠는데, 우리가 어떻게 하면 지혜로운 삶을 살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우리가 잠언서의 말씀을 쭉 살피면서, 잠언서의 말씀을 묵상해 왔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지혜로운 삶을 사는 것이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지혜가 다른 어떤 특별한, 정말 재주, 특별한 어떤 기발한 아이디어,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 잠언서에서 들려주는 지혜가 무엇이냐? 그것은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그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게 지혜로운 겁니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생각될 때가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그 하나님 무서운 줄 알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가, 지혜로운 자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삶을 사는 게, 그게 지혜로운 길이고, 우리가 그렇게 지혜롭게 산다고 한다면,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기쁘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겠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쳐 줄 수 있겠지만, 그러나 우리가 지혜롭지 못한 삶을 살게 된다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의 근심거리, 고통거리가 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다시 한번 늘 매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누구처럼 그래야 될까요? 요셉처럼 그래야 되는 거예요. 요셉이라고 하는 사람은 어느 날 자기 주인의 아내로부터 유혹을 받게 됐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하게 되었을 때, 요셉은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왜 안 넘어갔을까요? 하나님이 계시니까, 하나님 앞에서 내가 이런 악을 행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을 알고, 아무도 보지 않지만, 하나님이 보고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그 하나님이 두려운 줄 알아서, 그 순간에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 지혜가 있었던 것이죠. 지혜로운 자는 누구냐?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죄악을 범하지 않는 거예요. 지혜로운 자는 누구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기 때문에 정직한 거예요. 지혜로운 자는 누구냐?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죠. 그렇게 될 때, 거룩하고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근데 만일 요셉이 그 순간에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 하나님이 보시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 순간에 “어리석은 자처럼 그냥 행동했다”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요셉은 그것으로 끝난 겁니다. 온 세상 사람들을 먹이고 살릴 수 있는, 그런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요셉이 받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요셉을 인도해 주고 계시는데, 그런 메시아의 사명을 받지 못하고, 그냥 애굽 한 군대 장관의 종으로 살다가, 그냥 거기서 인생 종 치고 끝나는 것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사람이 아니라, 손가락질당하고, 비난을 당하고, 비참한 인생으로 끝나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죠.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 다시 만날 수 없고, 그 어떤 해피엔딩을 기대할 수 없는, 어리석은 자의 삶을 선택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놀랍게 요셉은 그 순간에 지혜로운 선택을 했어요. 지혜로운 선택은 다른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하는 선택이 지혜로운 선택인 것이죠. 그 지혜로운 선택을 했을 때 요셉의 삶이 망가지는 것 같았어요. 그는 그곳에서 감옥으로 가야만 하는 그런 억울한 일을 당했어요. 세상 사람들이 인정해주지 않고, 그래서 완전히 망하는 줄 알았어요. 하지만 그 길이 어떤 길이었는가?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인도하셔서 애굽의 총리로, 온 세상의 구주로 만드시는 지혜자의 길이 되어서, 결국 그가 요셉으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끼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는, 그런 높은 위치에까지 올라갔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지혜가 무엇인가? 지혜에는 하나님이 계심을 알고 두려워하는 것,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미련한 사람이 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오늘 잠언서 17장 27절과 28절의 말씀은 이런 해답을 해주고 있습니다.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냉철한 자는 명철하니라.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겨지고, 그의 입술을 닫으면 슬기로운 자로 여겨지느니라.” 지금 우리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게 지혜의 근본이라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다시 한번 기억했는데요. 27절과 28절에서는 또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잠잠한 것이 지혜로워지는 길이다”라고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겁니다. 누가 지혜로운 사람인가? 누가 지식이 있는 사람인가? 그 사람은 말을 막 하는 사람이 아니라, 말을 아끼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하자면 함부로 말하지 않는 사람인 것이죠,
어리석은 사람은 누굽니까? 그냥 말을 쉽게 쉽게 하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이고, 지혜로운 사람이 누군가? 지식 있는 사람이 누군가? 함부로 말을 하지 않는 사람, 섣불리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오늘 27절, 28절에서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을 한다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말을 한다고 하는 것은 판단한다는 겁니다. 내가 쉽게 판단하고, 내가 성급하게 판단해서 말을 하는 것이죠. 그런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거예요. 내가 너무나도 쉽게 성급하게 판단을 내리고, 그 성급한 판단에 근거해서, 쉽게 말해버린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 이 말입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누구인가? 지식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말을 아끼는 사람이에요. 왜 말을 아낄까요? 왜 말을 함부로 하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아직 판단이 내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말을 함부로 할 수 없는 겁니다.
사실 우리들은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느냐 하면, 다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의 머리로 모든 진리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의 머리가 큽니까? 진리가 더 큽니까? 어느 게 더 크죠? 진리가 훨씬 더 커요. 그 어마어마하게 큰 진리를, 그 어마어마하게 큰 사실을, 우리의 알량한 머리로 다 이해할 수 있느냐 하면, 다 이해하지 못하는 거예요. 우리는 무엇만을 알고 있습니까? 그중에 일부만을 보고, 일부만을 알고 약간의 정보만을 얻을 수 있는 것이지, 모든 것을 다 꿰뚫고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문제에 대해서, 어떠한 사실에 대해서, 모든 것을 완벽하게 다 이해하고, 완벽하게 다 알아서 그래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누구와 같은 존재인가? 우리는 마치 장님과 같아요. 마치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만지듯이, 코끼리가 앞에 있으니,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만져보라고 했더니, 장님이 그 코끼리를 만지는데, 코끼리 다리를 만지면서,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는가를 생각하는 겁니다. 그리고 코끼리 다리를 만져놓고 코끼리는 나무 둥치와 같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코끼리가 무엇인가? 코끼리는 나무 동치와 같다. 그렇게 판단을 해버리는 것이, 그런 코끼리에 나무 둥치와 같은 다리가 있기는 있지만 그게 코끼리의 전부가 아닌 것이죠. 마치 그런 장님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진리를 다 아느냐 하면, 다 알지 못해요.
우리는 사실을 다 아느냐? 사실을 다 알지 못해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오로지 조그마한 양의 정보, 오로지 조그마한 한쪽 면, 약간의 일부만을 바라보고 있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가, 그 조그마한 정보를 바라보고, 얼른 결론을 내려서, 그래서 쉽게 말을 해버린다고 한다면, 그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은 무엇인가? 내가 보고 있고, 내가 듣고 있고, 내가 느끼는 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고, 함부로,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인 겁니다. 쉽게 판단하지 않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고, 쉽게 판단하지 않기 때문에, 함부로 말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말을 하지 못하는 거예요.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어리석은 사람은 조그마한 정보를 가지고, 자기가 본 바로 그 모습만 가지고, 너무나도 쉽게 결론을 지어버리고, 너무나도 쉽게 말을 해서, 그래서 분노하기도 하고, 그래서 슬퍼하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하고, 그래서 너무나도 쉽게 판단을 내려버려서, 모든 일을 망쳐버리는 그런 어리석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죠.
변방의 한 노인이 있었는데, 그 노인의 집에 있던, 말 한 마리가 우리를 뛰쳐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애지중지하던 말 한 마리인데, 그 말 한 마리를 잃어버리게 된 것이 그 순간에 어리석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화가 나는 거죠. 슬퍼하는 거죠. 괴로워하는 것을 좌절하는 것을. 우리 집에서 유용하게 쓸 수 있는 그 말 한마디를 잃어버렸으니,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얼마나 화가 납니까? 괴로워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데 그 변방 노인이 좌절하지 않는 거예요. 슬퍼하지 않는 거예요. 화를 내지 않는 거예요. 가만 이것이 우리에게 나쁜 일인가?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한번 더 기다려보자.
얼마 뒤에 보니까 그 말이 어떻게 됐어요? 다른 말 한 마리를 데리고 들어왔어요. 말 한 마리를 더 데리고 들어왔다. 그래서 말 한 마리가 공짜로 생겼어요. 그럼 좋아해야 됩니까? 말 한 마리가 생겼으니까 너무나도 좋은 거죠. 그래서 좋아하려고 막 하고 있는데, 그 변방의 노인이 이게 좋아할 일일지 기다려보자. 이 얘기야 아직 판단하지 않는 겁니다. 아직 결론 내리지 않는 겁니다. 쉽게 말하지 않는 겁니다.
그 말을 자기 아들이 타다가 떨어져서, 다리가 부러져버렸어요. 그 말을, 들어왔던 그 공짜 말을 타고 놀다가, 다리가 부러진 그 아들을 보면서, 고통스럽고, 정말 슬퍼하는 그 상황 가운데 있을 때, 다들 너무나도 괴로워하고 있을 때, 이 변방의 할아버지는 기다려 보자. 기다려보자.
전쟁이 일어나서 군인들을 모집하는데, 다리 부러진 우리 아들은 군대에 안 나가게 됩니다. 이웃집 아이들은 전부 군대로 차출되어 나가서, 그래서 동네 아이들 10명 가운데 9명이 다 죽어나가는 그 상황 가운데서, 자기 아들은 죽지 않고 목숨을 건지는 그런 일 그래서 인생지사 새옹지마라! 신약 성경보다 약 200년 전에 쓰인 중국의 회남자라고 하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다 아는 게 아니에요. 다 아는 게 아니에요. 조그마한 것을 보고 화를 내고, 조그만 걸 보고 슬퍼하고, 조그마한 거 보고 절망하고 할 게 아니라, 우리가 보는 그 모든 것들이 우리가 쉽게 판단해서 쉽게 결론을 내리고, 그래서 쉽게 말을 내뱉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일 뿐인 것이죠.
누군가 만들어낸 이야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어느 병원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한 아이가 응급으로 수술을 해야 되는 그런 상황 가운데, 의사를 수소문했는데 의사가 병원에 없는 겁니다. 부랴부랴 의사를 호출해서, 결국 그 아이를 스스로 할 수 있는 의사가 허겁지겁 허겁지겁 달려오는 그 의사를 보면서 그 소년의 아버지는 너무나도 화가 났어요. 아니, 의사가 지금 수술할 환자가 있는데, 지금 오면 어떡하냐고. 여기 오는데 하루 종일 걸리냐고. 왜 이렇게 천천히 오냐고. 이 아이의 생명이 얼마나 위급한지 그것도 모르냐고. 의사로서 책임도 없느냐고 하면서, 그 의사를 향해서 화를 내고 있는 겁니다.
의사가 달려 들어가면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수술을 해야 할 테니까 조금만 진정해 주세요. 제가 수술을 할 테니까, 좀 진정해 달라고 이야기할 때, 그 아빠가 화를 내면서, 이야기하는 것이, 진정하라고? 자기 아들이 아니라고 그렇게 말해? 죽으면 책임질 거야?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고 있는데, 그 안에서 수술을 끝낸 의사가 나오면서, 그 아버지에게 이야기합니다. 천만다행입니다. 수술이 잘 끝났습니다. 아이의 생명에 문제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간호사한테 물어보세요 하면서 또 막 어디론가 가버리는 거예요. 아이의 아빠가 너무나도 화가 나서, 저놈의 의사는 왜 이렇게 거만한 거냐? 우리 아이의 상태에 대해서 설명도 제대로 안 해주고. 도대체 이게 무슨 책임감 없는 의사냐? 하면서 화를 냈습니다.
간호사에게 가서 물었어요. 도대체 그 선생, 도대체 뭐 어떤 선생이냐? 간호사가 하는 말이, 그 의사 선생님의 아들이 사고로 죽어서, 장례식을 치르다가, 급한 환자가 있다고 해서, 그래서 장례식 도중에 온 거라고. 지금 장례 마무리하러 갔다고. 누군가 만들어낸 얘기. 사실은 아니겠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는 것입니까? 과연 내가 알고 있는 그게 진실입니까? 내가 알고 있는 그게 전부인가요? 우리는 왜 보면서 분노하고, 왜 우리는 분노 좌절하고, 왜 우리는 슬퍼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어리석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가 모든 것을 알지 못하고, 조그마한 것만 보고, 조그마한 정보만 보고, 그것에 의해서 섣부른 판단과 그 섣부른 판단을 했기 때문에, 섣부른 말을 하고 있는 것이고, 전부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너무나도 쉽게 화를 내고 슬퍼하고 있게 되는 것이죠.
지혜로운 사람은 누구인가? 그 어떠한 상황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잠잠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다시 말하면 쉽게 판단할 게 아니라, 우리의 판단을 유보하고, 진리를, 사실을 더 알아가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우리가 너무나도 쉽게 판단한다면, 결국은 분노하게 될 것이고, 결국은 좌절하게 될 것이고, 결국은 절망하게 될 것인데, 사실은 이게 다, 사탄이 우리로 하여금 넘어뜨리려고 하는 계략에 속아 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의 열쇠를 빼앗아 버리기 위해서, 결국 우리들의 마음을 분노하게 만들고, 조그마한 정보를 보고, 슬퍼하게 만들고 좌절하게 만들어서,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탄의 전략에 우리가 속아 넘어가는 것이고, 결국 그 결과는 무엇인가 엄청난 손해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죠.
지혜로운 자는 단 1분을 살아도 기쁨과 감사로 살아요.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 시간이 너무나도 감사한 거예요.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그 은혜를 생각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거예요. 지혜로운 사람은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의 손길을 생각하며 늘 감사하고 기뻐하며 사는 것이죠.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와 축복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이것이 결국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이것이 결국에는 우리를 변화시키고,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놀라운 은혜의 길로 인도해 주실 거라고 하는, 그 어마어마한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가 망각해 버린 채, 사탄의 꾐에 속아 넘어가서, 그 조그마한 것 하나를 보고 분노하고, 그 조그마한 것 하나를 보고 속상해하고, 그 조그만 거 하나를 보면서, 마음의 문을 닫아버려서, 결국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단절이 되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의 은혜의 그 공급을 막아버리는 그런 어리석은 선택을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우리들 마음 가운데 슬픔이 생기게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왜 그렇습니까? 전부를 보지 않고 일부만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 가운데 좌절이 생겨난다고 한다면, 그것은 전부를 보지 않고 일부만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래요. 조그만 것을 바라보고 그래서 너무 쉽게 판단해 버리고, 너무나도 쉽게 말해버리고 슬퍼하고 좌절하고 분노해 버린 것이죠.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매 순간순간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돼요. 주님, 저희들의 눈에 보이는 그것이 전부가 아닌 것을 발견케 해 주옵소서. 이 상황, 이 아픔이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더 크다고 하는 사실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허락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야 돼요. 마음에 분노 가득할 때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엎드려야 되는 거예요. 마음의 슬픔이 몰아쳐 올 때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해야 되는 거예요. 마음속에 여러 가지 좌절이 생길 때, 그냥 거기에 우리의 감정을 그냥 맡겨버리고, 지나갈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여러 가지 분노들을, 하루 해가 넘어가기 전까지, 다 주님 앞에 나가서 풀어버리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볼 수 있는 눈을 허락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엎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27절 말씀 가운데서 “성품이 냉철한 자는 명철하니라”라고 표현되어 있는데요. 여기서 “성품이 냉철한 자는 명철하다”라고 번역된 이 말씀은 우리가 “차분하게 판단할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롭다”라고 하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쉽게 분노하고, 화를 내고 할 게 아니라, 우리는 차분하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그것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배경 속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한 발짝 물러서서 냉철하게, 차분하게 판단할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리석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리석은 길을 계속 걸어갈 것이 아니라, 쉽게 말하지 않고 잠잠하며, 말을 하기 전에 우리가 판단하게 되어 있는데, 쉽게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을 유보하며,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바라볼 수 있는 그런 믿음의 눈, 믿음의 마음을 허락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사실 이 세상에 분노할 게 없어요. 사실 이 세상에 슬퍼할 게 없어요. 감사할 거예요. 다 기뻐할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 가운데서 보면, 절망할 게 아니라 소망 가운데 바라볼 거예요.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도 연약하기 때문에, 어리석은 자처럼 늘 사탄의 꾐에 속아 넘어가기 쉬운 우리이기 때문에, 매 순간순간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가, 주님 저희들의 마음을 오염된 마음을 씻어주시고, 우리들의 오염된 눈을 씻어주시고, 우리들의 오염된 그 눈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주셔서, 정말, 주님의 그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을 허락해 주옵소서. 기도하는 가운데, 지혜롭고 거룩하고 기쁘고 감사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