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는 잠언서 17장 19절의 말씀 이 말씀을 가지고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려고 하는데요. 이 잠언서 17장 19절의 말씀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시 한번 보십시다. 잠언서 17장 19절 말씀 첫 부분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죄과를 좋아하는 자다” 그렇게 표현하고 있고, 두 번째 줄에서 “자기 문을 높이는 자는 파괴를 구하는 자니라”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두 절이 있는데 두 구절이 있는데, 앞 구절은 어느 정도 이해가 쉬울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다툼을 좋아하는 사람, 싸우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싸우는 사람은 죄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렇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싸우는 것은 의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싸우는 것이 의를 이루는 것이 아니고, 싸우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다. 그렇게 앞에 구절에서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고요.
두 번째 구절은 그런데 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자기의 문을 높이는 자는 파괴를 구하는 자다”라고 되어 있는데요. 자기의 문을 높이는 것이 뭐가 잘못인가요? 문을 높게 세우면, 그게 큰 문제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문을 그러면 조그마하게 아주 작은 문을 만들어야 된다는 이야기일까요? 문을 아주 크게 높게 만들면, 안 된다는 말일 것 같은데,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일까? 좀처럼 이해하기가 어려운 말씀이 오늘 19절 두 번째 구절에 있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전에 중국의 자금성(紫禁城)을 갔더니, 그 자금성에는 나무가 없더라고요. 왜? 이 더운 여름에 그늘도 없이, 이렇게 성을 이렇게 황량하게 지어놓았는가 그렇게 물었더니 중국 사람들은 문 문(門) 자에다가 나무 목(木) 자가 그 안에 들어가면 어떤 글자가 되죠? 패할 폐(閉) 자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문 안에 나무가 들어가 있으면, 그 나라는 망한다. 그래서 망하지 않기 위해서, 그 자금성이라고 하는 큰 성을 만들어 놓고, 그 문 안에 나무를 심지 않고, 다 잘라버려서, 정말 그늘 하나도 없이 정말 힘든 여행을 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 자금성이라고 하는 말을 듣고 실소를 금할 수 없었는데,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문을 크게 만든다고 한다면, 문을 넓게 만든다고 한다면, 그게 도대체 왜 파괴가 된다고 하는 의미일까요? 왜 그렇게 문을 높게 세우면, 높게 만들면 망한다고 하는 그런 말일 텐데,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에서 하는 말이겠습니까?
종종 우리 경영계에서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옥을 지으면 그 회사는 망한다”라고 하는 말이 예전에 있었던 것 같아요. 회사가 잘 나가는 것 같아서, 사옥을 건축하고 나면, 꼭 망하는 회사들이 있어서,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인데, 뭔가 이렇게 자신의 부를 과시하고, 뭔가 좀 그렇게 하게 되면, 그러면 망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말씀을 해 주시는 걸까요? 두 번째 구절에 대해서는 좀 이해하기가 어려운 말씀일 것 같습니다.
특별히 잠언서의 말씀은 문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이 잠언의 말씀만을 따로 모아놓은 구절이기 때문에, 이야기를 하면서 중간에 나온 잠언이 아니라 잠언만 모아놓은 곳에서 나오기 때문에, 문맥도 없어서 이 잠언서 17장 19절 뒤쪽 부분에 있는 이 부분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굉장히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해석했을까 하고, 주석 책들을 살펴보니까, 주석 책들이 한결같이 이 말씀의 의미는 어렵다. 해석하기 어렵다. 전부 그렇게 써놓았습니다. “해석하는 것이 어렵다”라고 다 써놓았고, 그러면서 가장 추측을 하고 있는 그 해석이 무엇이냐 하면, 교만함과 자랑하는 것, 이런 것들을 경고하는 말씀으로 해석하는 주석 책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교만해지게 되면, 문을 높이 세우고, 그래서 마치 내가 무엇인가 큰 인물이 된 것처럼, 그렇게 자기 자신을 그렇게 교만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교만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곧 망하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말씀을 한 거라고 그렇게 해석하고 있는 주석들이 꽤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어떻게 보았느냐 하면, 저는 어떻게 이 말씀을 해석했을까요? 저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이것은 앞부분에 나왔던, 그 표현을 다시 한번 설명해 주는 그런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앞부분에서 무슨 이야기를 해주고 있어요? 앞부분에서는 말하기를, “싸우는 사람”은 그건 죄짓는 것이다.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은 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죄짓는 것이다”라고 말해놓고, 그리고 그다음 구절에서 다시 한번 싸우는 것에 대해서, 다른 방식을 통해서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표현인가요? “문을 높이는 것” 그것이 왜 싸우는 것과 연관이 있는 것인지는 설명하기가 어렵지만, 아마도 이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싸움과 관련된 어떤 행위가 아니었을까 추측해 볼 수가 있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서 창세기 22장 16절에서부터 17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아브라함에게 해 주신 적이 있습니다.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네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 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 이삭을 하나님 앞에 바치려고 했을 때, 그것을 보신 우리 주님께서 이삭을 죽이지 못하게 만드신 후에 해주셨던 말씀인데요.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시면서 하는 말이, 네 후손은 대적의, 네 원수의 그 성문을 차지하게 할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성문을 차지한다고 하는 것은, 아마 그 성을 차지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일 것이고, 그러니까 싸워서 어느 한 도시를 점령하고, 어떠한 성을 점령할 때 “성문을 차지한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니까, 어쩌면 전쟁 가운데, 서로 싸워서 함락당하지 않기 위해서, 그래서 싸우는 과정 가운데, 내가 이기기 위해서, 문을 더 높게 세우고, 그래서 저 높은 곳에서, 공격하는 사람들을 공격하고, 방어하고 하는, 그런 것들과 연관이 되어 있는 표현이 “문을 높이는 것”이라고 하는 그런 표현이 아닐까 제가 추측해 보았습니다. 전 세계에서 제가 최초로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잠언서 17장 19절의 말씀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싸움을 좋아하는 것은 죄일 뿐만 아니라, 싸움을 좋아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망하게 될 것이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바로 잠언서 17장 19절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싸우는 것보다는 화평을 추구해야 하고, 우리 성도는 무엇을 선택해야 되는가? “싸움보다는 화평을 추구하는 그런 삶을 살아야 되겠다”라고 하는, 그런 마음의 다짐이 오늘 이 저녁 시간에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싸우는 게 좋을까요? 싸우지 않는 게 좋을까요? 네? 싸워요? 싸우지 않는 게 그게 주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9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가 하나님의 자녀인가? 누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수 있는가? 화평을 추구하는 자, 평화를 추구하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수 있다고 예수님께서 팔복을 교훈하시면서 말씀해 주신 것이죠. 만일 우리가 화평을 추구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싸움을 일삼는 자, 싸움을 추구하는 자는 누구의 자녀라고 이야기해야 될까요? 사탄의 자녀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싸우면 그 사람은 사탄의 자녀인 것이고, 화평을 추구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라 할 수 있는 것이죠.
싸우는 것, 폭력을 쓰는 것, 분노하는 것 이런 것들은 모두가 다 사탄의 방법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이러한 사탄의 방법을 사용해서 의를 이룰 수는 없는 겁니다. 사탄의 방법을 통해서 의를 이룰 수 있는가 의를 이루지 못하는 거예요. 싸움을 통해서, 폭력을 통해서, 다투는 것을 통해서, 의를 얻을 수 있는 길은 없다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20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죠.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우리는 화를 내면서, 그래서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권면해 주시고 있는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화를 내는 방법을 통해서는, 화를 내는 것으로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다. 말씀해 주고 계시는 거예요. 그런데 화를 내는 것보다 더 나쁜 게 뭐예요? 싸우는 거잖아요? 화내는 것이 나쁘다고 한다면, 싸우고 폭력을 쓰는 것은 더더욱 나쁜 것인데, 더더욱 나쁜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느냐? 이룰 수 없다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성내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면, 성내는 것보다 훨씬 악한, 싸우는 것을 통해서 더더욱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늘 속아 넘어갑니다. 늘 속아 넘어갑니다. 어떻게 속아 넘어갑니까? 우리가 의를 이루기 위해서 싸워야 된다고 설득을 당하는 것이죠. 싸우지 아니하면, 의를 이룰 수 없고, 가만히 있으면 다 빼앗겨버릴 것이고, 화평한 자세로 있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망하게 될 것이고, 우리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의 권리를 추구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우리는 싸워야만,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쟁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착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고, 놀랍게도 목회자들 가운데서도 많은 사람들이 의를 위해서라고 한다면 싸워야 된다고 하는 메시지를 공공연하게 전파하고 있는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정말일까요? 우리가 의를 얻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싸우고, 의를 얻기 위해서라고 하면, 다투는 것을 통해서라도, 그 의를 이루는 것이 맞는 것일까요? 성경은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습니까? 그렇게 가르쳐주고 있지 않는 것이죠. 로마서 12장 17절에서부터 21절의 말씀을 보면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악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되는가? 악에게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악한 자를 대적하면서 싸워서, 그래서 그 악을 이기는 방법을 쓰지 말고, 악을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라. 만일 우리가 악으로 악을 대적한다고 한다면, 그래서 이기는 것 같다고 하면, 그게 이긴 겁니까? 이긴 게 아니라, 사탄에게 진 거예요. 하나님의 방법을 써야 될 하나님의 백성들이 사탄에게 굴복해서, 사탄이 명령하는 대로, 사탄의 방법을 쓰면서 싸우기 때문에, 사탄에게 지는 것이 되는 것이죠. 우리는 어떻게 악을 이길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사탄을 이길 수 있는가? 우리는 선으로서 악을 이기는 것이지, 악으로서 악을 이길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죠. 만일 우리가 싸움을 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죄를 짓는 것이고, 싸움을 하게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망하는 길이다”라고 하는, 잠언서 17장 19절의 말씀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런데 정말 싸움을 하면 다 안 되는 건가요? 그래서 싸울 수 있는 싸움은 있습니까? 모든 싸움이 다 안 되는 건가요? 그래도 싸워야 할 때가 있는 것일까요? 모든 싸움이 다 불의한 것이고, 모든 싸움들이 다 악한 것일까? 아마 이 싸움이라고 한다면 여러 가지 싸움이 있을 겁니다. 개인적인 싸움도 있을 것이고요. 스포츠 경기도 어떻게 보면 일종의 싸움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그리고 국가 간의 전쟁도 싸움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 아무튼 싸움이라고 하는 모든 싸움들이 다 악한 것이고, 죄를 짓는 것이고, 그래서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싸움을 모두 반대해야 하는 것일까?”라고 하는 질문을 던져보아야 하는 것이죠.
가만히 생각해 보면, 싸워야만 하는 싸움도 있을 것 같기는 합니다. 싸우는 것은 죄라고 말씀하고 있고, 싸우는 것은 파멸로 가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워야 하는 경우도 있을 수가 있는 것이죠. 전도서 3장 8절 말씀에 보면, 전도서 3장에서 하고 있는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하면, 천하만사에 다 때가 있다고 말하면서, 어떤 때가 있다고 말을 합니까?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싸움이 다 나쁜 게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싸워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는 거예요. 어떤 경우에는 싸워야만 하는 케이스가 있다고, 성경은 이야기해주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 민족은 이방 민족들과 싸우고 전쟁을 했을 뿐만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사람들이 이방 민족들과 싸우기 위해서, 하나님을 의지하여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 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며 전투에 나갔던 이야기가 구약 성경 가운데 많이 기록돼 있는 것이죠. 만일 모든 싸움들이 다 악한 것이라고 한다면, 모든 전쟁 아예 하지 말라. 그렇게 말씀하셨을 텐데, 전쟁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죠.
뿐만 아니라, 그런 국가적인 것 말고, 개인적인 경우에도 역시 마찬가지일 겁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가만히 있는데 어떤 강도가 쳐들어와서, 그 강도가 우리를 위협하고, 우리의 재산을 빼앗아가고, 그래서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 그런 상황이라고 한다면 싸우지 말라고 했으니까, 싸우는 것은 악한 것이고 싸우는 것은 다 패망하는 것이라고 했으니까, 그럼 난 싸우지 않겠다고 하면서, 그냥 손 놓고만 있어야 되는 것일까요? 그게 아니죠. 그런 상황 가운데서는 방어적인 싸움, 정당방위와 같은 그런 싸움들은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싸움들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혼란스러운 것이죠. 과연 이 싸움은 싸워도 되는 싸움인가? 과연 이 싸움은 싸우지 말아야 될 싸움인가? 그거 하나하나를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그 상황 상황마다 지금은 내가 싸워야 될 때인가? 화평할 때인가? 그것을 결정하는 게 어려운 거예요. 이 싸움이 전부가 다 악해서, 그래서 도무지 “아무 싸움도 하면 안 된다”라고 그렇게 쉽게 생각해 버리면 가장 마음이 편할 텐데, 아니면 무조건 싸우겠다고 하든지, 싸우지 않겠다고 하든지, 그렇게 딱 결정해놓고 나면, 마음이라도 편할 텐데, 그런데 정작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는,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상황에 따라서, 어떤 때는 하는 수 없이 싸워야만 하는 때가 있는 것이고, 어떤 때는 화가 나고, 어떤 때는 정말 정의감에 불타오른다고 할지라도, 싸우는 것이 아니라, 참고 인내하며, 그 상황을 우리가 싸움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악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대응해야 되는 경우도 생기게 되기 때문에, 그것을 결정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그래서 쉽지 않은 것이죠. 그냥 맹목적인 신앙은 그냥 너무나도 모든 것을 단순화시켜 버려서, 행동하기 때문에, 생각 없이 신앙생활하면 편할 수는 있겠으나,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그렇게 우리가 맹목적으로 획일화된 신앙생활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서 우리가 어떤 식으로 반응해야 할지, 그때그때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신 뜻을 분별해야 하는 과제가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매 순간순간마다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것이죠. 주님 이 순간에 싸워야 합니까? 주님 이 순간에 싸우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선으로 악을 갚아야 됩니까? 지금 이때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입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의로운 일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일입니까? 그것을 질문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고, 사실 그렇게 질문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 굉장히 어려워요. 왜 어렵습니까? 왜냐하면 판단하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상황에서는 어떤 상황에서는 이렇게 질문을 던지면 안 되는 때가 있거든요. 어떤 때가 그렇습니까? 지금 전쟁을 하고 있는데 자 적군이 쳐들어온다. 우리 전쟁하러 가자! 그런데 그 명령을 받은 병사가, 이건 전쟁을 싸워야 되나? 말아야 되나? 그렇게 질문하고 있으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조차도 어려운 상황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모든 삶의 싸움이 일어날 때마다 항상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것이죠.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내가 의를 위한다고 하는 것이 사실은 사탄의 종이 되어버리는 그런 잘못된 결과를 가져오고야 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게 되었을 때, 제사장이 보낸 그 군병들에 의해서 예수님이 잡히게 되었을 때, 그 순간에 베드로는 칼을 빼들었습니다. 그 순간에 베드로의 생각은 아주 쉬웠습니다. 단순했습니다. 저 군병들은 악한 사람들이고, 아무 죄가 없는 우리 예수님은 잡혀갈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저 불의한 정권, 저 불의한 사람들에게서 예수님을 보호하는 것은 의로운 일이라고 판단했고, 그래서 의로운 일을 하기 위해서 베드로는 칼을 빼들어서 되들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해서 무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까? 마태복음 26장 52절의 말씀에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참 당혹스러운 말씀이에요. 아무 죄가 없는 예수님을 잡아가는데, 불의한 세력이 예수님을 잡아가고 있는 그 상황 가운데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 의를 위해서 내가 칼을 들었다고 생각을 했는데, 예수님께서는 칼을 집어넣으라고 말씀해 주신 것이죠.
언젠가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이런 글을 썼습니다. 예전에 제가 요한계시록을 강의하면서 한 번 소개했던 표현인데요. 유진 피터슨의 말씀입니다. “폭력적인 세상에 상당 기간 살게 되면 우리도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하기 쉽다. 특히 우리의 대의의 명분은 옳고 상대방이 악하다고 하는 사실을 알 때 더욱 그렇다. 그때 폭력적인 수단을 사용하기가 쉽다. 뜨거운 열심이 있을 때 그럴 위험이 더욱 크다. 사도 요한은 인내하라는 권면을 주면서, 거기에다 폭력에 호소하지 말라고 하는 경고를 달고 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즉 폭력에 호소하는 것은 “겁이 나서 순순히 응하는 것 못지않게 나쁜 것이다. 우리 예수님이 우리도 얼마든지 처할 수 있는 한 폭력적인 장면에서 내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고 말씀하지 않았던가. 적을 죽이는 것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바다 짐승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우리의 방법이 아니다. 우리에게 속한 것은 인내와 믿음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무엇이 가까워요? 주먹이 가까워요. 주먹 주먹은 쉽게 해결해 주는 것 같고, 폭력은 쉽게 해결해 주는 것 같아요. 싸우는 것은 내가 소리를 지르면 문제가 빨리 해결되는 것 같아요. 가만히 있으면 나에게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고, 가만히 있으면 아무도 나에게 신경 써주지도 않는데, 내가 분노하고 화를 내면, 그때서야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왜 그러십니까? 왜 그러십니까?” 하면서 문제가 해결되는, 그런 세상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자연스럽게 우리 폭력을 사용하고 싸우고 분노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가장 익숙해지는, 사람들을 향해서 분노하는 게, 그게 우리들에게 익숙해질 수가 있습니다. 특히 언제 그런 일들이 있습니까? 우리가 정당할 때 우리는 포악하게 되고, 강압적이 되게 되고 싸우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옳을 때, 그때 우리는 더욱더 잘못된 길로 갈 가능성이 많아지는 겁니다.
아이가 잘못하는 것을 혼내야 되겠다고 하는 부모의 마음 때문에, 내가 옳고 아이들이 잘못했기 때문에, 그 아이들을 훈계한다고 하는 것이 아이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행동들을 부모들이 하는 것이고요. 소비자들이 어떤 가게에서 정당한 내가 낸 돈에 대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때, 나는 정당하기 때문에 화를 내고 분노하고, 그래서 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그런 경향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우리가 옳고 의로울 때 더더욱 겸손해야 하는 겁니다. 우리가 정당할 때 오히려 더 침묵해야 되는 것이고, 인내해야 되고, 사랑함으로 다가가야 되는 것이죠. 우리는 너무나도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러나 우리는 늘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보다는, 싸움에 의존하기 쉽고 폭력적이 되기 쉽고, 우리가 죄악을 저지르기가 너무나도 쉬운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그렇게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 흘려주시고 우리를 영원한 죄악에서부터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주님 앞에 다시 한번 나아가 엎드려 기도하는 가운데, 겸손하게 정말 우리가 싸움을 통해서 악을 행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에 따라 신실하게 사랑과 긍휼을 베풀고 인자하게 사람들을 대할 수 있는 믿음의 능력들을 얻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