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의를 거의 마쳐가는 시점에서, 이제는 어떤 말씀으로 준비해서 전할까 고민하는 가운데, 이번에는 성경 전체를,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한번 쭉 살펴보았으면 좋겠다고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에 중요한 내용들을 발췌해서, 중요하다기보다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고, 유명한 성경의 이야기들을,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쭉 발췌를 해서, 그것을 쭉 한번 살펴보는 것으로, 이렇게 메시지를 전하는 것으로, 그렇게 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성경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대략적으로 살펴보는 기회가 될 것 같아서, 앞으로 그렇게 진행해 보려고 하는데요. 오늘은 그 첫째 시간으로서 창세기 1장의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창세기 1장 1절에서부터 5절에까지 말씀을 살펴보았는데, 창세기 1장 전체를 생각하면서 말씀을 묵상했으면 좋겠습니다. 천지창조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는 여러 가지 질문이 떠오르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궁금한 것들이 참 많을 겁니다. 이 세상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됐을까? 창세기 1장에서 모든 것을 다 알려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 가지 궁금한 질문들이 참 많이 있을 것 같아요. 어떤 질문들이 있을까요? “정말 하나님께서는 6일 만에 창조하신 것일까”라고 하는 그런 질문이 떠오를 겁니다. 그때 하루가 과연 24시간이었을까? 아니면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고 했으니까, 그 하루라고 하는 것이 아주 긴 시간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런 질문도 떠오르게 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성경이 아닌, 일반 과학에서는 진화론을 이야기하고, 또한 빅뱅 이론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그리고 블랙홀 이야기도 하고 하면서, 이 세상의 기원에 대한, 또 생물의 기원에 대한 다른 설명들을 과학에서는 이야기해 주고 있는데, 과연 이 과학의 이야기와 성경의 이야기가 어떻게 조화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될 것인가”라고 하는 그런 질문이 떠오르게 될 것입니다.
또 어떤 질문들이 있을까요? 빛은 첫째 날에 창조되었는데, 태양은 나중에 창조되었다고 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좀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그런 내용일 것 같기도 하고요. 어린아이들이 주로 던지는 질문도 있죠 무슨 질문을 던집니까? 그러면 “공룡은 언제 만드셨나요”라고 하는 그런 질문도 떠오르게 될 겁니다. 뿐만 아니라 이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의 내용과, 창세기 2장의 천지창조의 내용이 약간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 것 같은데, “1장과 2장의 조화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요”라고 하는 그런 질문도 있을 것이고, 뿐만 아니라 천지창조가 언제 이루어진 것인가? 수천만 년 전에, 수억 년 전에 천지창조가 이루어진 것인가? 아니면 지금으로부터 한 6천 년 전, 한 7천 년 전, “그때 만들어진 것인가” 하는 그런 질문들도 많이 던지는 질문이 되겠습니다. 오늘 이 짧은 시간에 그 모든 질문들에 대해서 다 대답해 드릴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런 질문들에 대해서는 제가 간혹 가다가 영상을 통해서 올리는 해답을 통해서 들으시면 될 것 같고요.
오늘은 창세기 1장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해 주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싶어 하는가”라고 하는 그 부분을 우리가 집중해서 한번 묵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발견할 교훈이 있다고 한다면, 첫 번째로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라고 하는 메시지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분명하게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이 그것이죠. 이 세상은 어떻게 해서 존재하게 되었는가? 이 세상은 어떻게 해서, 이런 상태로 있게 되었는가? 그에 대한 대답이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말씀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태초에” 아주 아주 맨 처음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데요.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고 표현하고 있지만, 그 내용은 하늘과 땅을 포함하여, 그 안에 들어있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성경의 가장 근본적인 전제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말씀이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고 하는 이 말씀 위에서부터 건축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중에 그 누구도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목격한 사람은 없습니다. 저도 못 봤습니다. 아무도 본 적이 없죠.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을 기록하고 있는 성경의 기록자인 기록자도,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직접 눈으로 목격한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셨다고 하는 것을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첫 번째로 그것은 성경이 그렇게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 이 세상은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라고 성경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우리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분명하게 흔들릴 수 없는 과학적인 진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무엇인가 만들어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무(無)에서 유(有)가 나올 수가 없는 것이죠. 얼마를 기다리면 무에서 유가 나올까요? 10년 기다리면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무엇이 만들어집니까? 100년을 기다리면, 천만 년을 기다리고, 수억 년을 기다리고, 몇 광년을 기다려도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무엇인가가 만들어질 수 없다고 하는 것은 과학적인 진리라고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 그 어느 것도 없는 것에서, 무엇이 만들어질 수는 없다고 하는 것이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은 다 누군가 만들었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지, 그냥 만들어진, 그냥 나타나게 되는 것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고 하는 게 과학적 진리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은 그냥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그냥 저절로 생겨난 것이라고 믿으라고 한다면, 그것처럼 믿기 어려운 말이 없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아이작 뉴튼이라고 하는 과학자가 있었는데요. 아이작 뉴튼이라고 하는 사람을 아십니까? 아주 요즘 유명하기 때문에 잘 알 거라고 생각입니다. 됩니다. 17세기에서 18세기에 활동했던 과학자였는데요. 이 사람은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통해서 만유인력의 법칙이라고 하는 것을 발견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작 뉴턴이라고 하는 사람이 어느 날 태양계를 모형을 만들었습니다. 태양과 그리고 그 주위를 돌고 있는 지구와 행성들, 우주에 있는 것 그 모든 것들을 그 당시 과학적인 지식들을 총동원해서 이 태양계의 모형을 수일 동안 노력해가지고 잘 만들어 놓은 것이죠. 그랬는데 그 집에 어느 날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그 친구는 무신론자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가 와서 그 아이작 뉴튼이 만들어 놓은 그 조형물을 보고서 깜짝 놀라면서, “야, 이걸 누가 이렇게 만들었을까?” 정말 너무나도 잘 만들었다고 하면서, 칭찬하면서, 아이작 뉴튼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이거 어떻게 된 거냐고, 누가 만든 거냐고 이야기했더니, 아이작 뉴턴이 대답했습니다. “그거 누가 만든 거 아니고, 저절로 생겨난 거야.” 그러니까 이 사람이 괜히 그런 놀리지 말라고, 이걸 누가 안 만들면, 여기에 있을 수 있겠느냐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그때 아이작 뉴튼이 친구에게 한 말이 이것입니다. 이것처럼 단순한 것도 누군가 사람이 만들어야만 생기는 것인데, 이 태양과 우주 만물이 얼마나 복잡하고 얼마나 정교한 것인데, 이것을 만든 사람이 없이, 만든 분이 없이 “저절로 생겨났다고 하는 것을 믿을 수 있겠느냐?”라고 이야기를 한 것이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셨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지 아니할래야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는 줄로 믿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이 세상에 나타나 있는 그 모든 것들이, 그냥 저절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에,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거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믿음으로 알게 된다. 믿음으로 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하는 것을 아는 것이죠.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을 직접 눈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무엇을 보고 알 수 있어요?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것을 보고서, “아, 이것을 만드신 하나님이 있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죠. 로마서 1장 20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그 흔적이 온 세상 천지에 다 묻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직접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눈으로 확인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이 세상을 보면서, 이 세상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하나님의 흔적이 묻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면서, 하나님께서 계시고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가 있는 것이죠.
지리산에 가면 밤달곰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습니까? 예?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많이 계시는데 보셨나요? 못 봤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떻게 반달곰이 있다고 하는 것을 알죠? 반달곰의 발자국을 보면서 하는 겁니다. 반달곰의 배설물을 보면서 아는 겁니다. 그 동물이 지나간 흔적들을 보면 “아, 여기에 반달곰이 사는구나”를 아는 거예요. 어느 마을에 그 반달곰의 흔적이 많이 어질러져 있다고 한다면 어떤 결론을 내려야 됩니까? “이것은 누군가 그냥 저절로 생겨난 흔적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까? “어떤 동물인가가 다녀갔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까? 당연한 것이죠. 이 세상의 모든 흔적들을 볼 때, 무엇인가 있다고 하는 것을 아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신 그 흔적들이, 온 세상 천지에 널려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하는 사실을 믿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도 믿음이 필요한 것이지만, 이 세상이 저절로 생겨났다고 생각하는 것도 믿음이 필요한 거예요.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저절로 이 세상이 생겨났다. 믿음이 필요합니까? 필요하지 않습니까? 믿음이 필요해요. 왜냐하면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요. 저절로 생겨났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데, 그것을 믿는 믿음이 필요해요. 믿는 믿음이 있어야, “이 세상이 저절로 태어 만들어졌다”라고 그렇게 이야기할 수가 있는 것이죠. 둘 다 다 믿음이 필요한 것인데, 하나의 믿음은 “이 세상이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그냥 생겨났다”라고 믿는 믿음이 필요한, 믿음이 있고, 또 하나의 믿음은 이 세상이 생겨난 것은 하나님께서 계셔서, 그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만드셨다고 하는 그 믿음인데, 어느 믿음이 더 그럴듯한 믿음이고, 어느 믿음이 더 좋은 믿음입니까?
하나님이 만드셨다고 하는 것이 더 훌륭한 믿음이고, 더 좋은 믿음 더 그럴듯한 신뢰할 만한 믿음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 다 믿음의 영역에 있는데, 그 믿음의 영역 가운데서 어떤 믿음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달라집니다. 만일 이 세상이 우연의 산물이고 아무도 만들지 않았는데 저절로 나온 그런 것이 이 세상이라고 우리가 믿는다고 한다면 그러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이 그냥 아무 목적도 없이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저절로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저절로 모든 것들이 만들어졌다고 한다면, 도대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열심히 살아야 될 이유가 무엇이죠? 이 세상에서 힘들고 어려워도 인내해야 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어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선하게 살아야 될 이유가 어디에 있어요?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저절로 생겨났다가, 그랬다가 저절로 사라지는 아무런 목적도 의미도 없는 것이 이 세상이요. 우리 인생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제대로 살아가야 될 이유를 발견하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만들어졌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 가운데서 믿음으로 살아가야 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힘들어도 참고 인내해야 될 이유가 있는 것이고, 고난 가운데서도 소망을 바라봐야 될 이유가 있는 것이고, 모든 사람들이 악하게 산다고 할지라도, 내가 선하게 살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될 충분한 이유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이라고 믿는다고 한다면, 우리에게 소망이 있고 삶의 이유와 목적이 있다고 믿습니다.
두 번째로 창세기 1장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메시지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과는 다르게,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 창조”되었다고 하는 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만드셨는데, 이 세상의 모든 것들과 사람의 창조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 차이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작품이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게 된 것이죠. 창세기 1장 26절에서부터 28절의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과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라,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의 창조와 사람의 창조에 다른 점이 무엇이냐?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셨지만, 하나님은 이 사람을 어떻게 만드셨는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만드셨다는 거죠.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하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도 우리처럼 눈이 있고 코가 있고 입이 있고 우리들 모양과 같이 손도 있고 발도 있고 하나님이 우리랑 똑같이 생겼다고 하는 그런 의미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이런 표현이 있죠. 하나님의 눈, 하나님의 입, 하나님의 귀, 하나님의 팔 이런 표현들이 많이 있지만, 그것은 우리가 이해하기 좋도록 사람에 빗대어서 표현하는 표현인지, 실제로 하나님이 우리들처럼 눈코입이 있고 손과 발이 있고 우리의 모양과 같은 그런 육신을 가지신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영이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아무런 형상이 없는 것이죠. 그런데 아무런 형상도 없는 그 하나님을 닮아서, 그 형상을 닮아서 우리가 만들어졌다고 하는 이야기는 무슨 의미냐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누구를 닮아요? 부모님을 닮는 거죠? 안 닮으면 큰일 나는 겁니다. 자녀가 부모님을 닮아서 태어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모습을 닮았다고 하는 이야기는, 이 세상 천지 만물과는 다르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었다고 하는 그런 의미예요. 그냥 어쩌다 보니까 무에서부터 생겨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이 세상에 만들어졌고,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을 우리가 가만히 살펴보면, 마치 출산을 앞둔 부모가 출산할 아이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준비하는 것과 같은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 날 창조하시고 둘째 날 창조하고 해서 계속해서 여섯째 날까지 하나님께서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창조하시는 그 모습이 마치 어떤 모습과 같은가? 출산을 앞에 둔 우리 아빠 엄마가 예비 아빠, 예비 엄마가 아이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준비하는 것 같아요. 우리 아이가 딸이니까? 핑크빛 옷을 준비하고, 유모차를 준비하고, 또 아기 침대를 준비하고, 아이에게 신길 조그마한 신발을 준비하고, 아이의 방을 꾸미고, 그래서 아이가 태어날 것을 손꼽아 기다리며, 그래서 그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그 아이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다 갖추어 놓고 출산을 기다리는 그런 부모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첫째 날 둘째 날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만드시면서, 마지막에 우리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보내시기 위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자녀로 보내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셨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어쩌다 보니까 태어난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소중하게 탄생한 인생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죠.
세 번째로 창세기 1장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은 선하고 좋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시면서 하셨던 말씀이 있어요. 보시기에 좋았더라. 보시기에 좋았더라. 첫째 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또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계속해서 반복하고 계셔요. 그런데 하루는 보시기에는 좋았다라고 하는 말이 빠져 있어요. 혹시 알고 있습니까? 성경을 주의 깊게 본 사람은 그걸 찾아냈어요. 여기에는 이 날에는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하는 말이 없네? 그러면 그날에 만든 것은 보시기에 좋지 않았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 천지창조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다 마쳐놓은 다음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좋았더라. 다 좋았다는 거에요. 다 좋았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이 선하고 좋다고 하는 이 관점, 성경적인 관점을 우리가 회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헬라 철학과 이 세상의 수많은 종교들은 기본적으로 이 세상의 물질이라고 하는 것을 악하고 나쁘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서 헬라 철학자들은 이 세상의 물질이라고 하는 것은 더럽고 악하고 나쁜 것이기 때문에, 가능하면 이 세상의 물질에서부터 해방되어서 영의 세계, 정신의 세계로 가야만 한다고 이야기를 한 거죠. 예를 들어서 플라톤과 같은 철학자는 무슨 이야기를 했냐면, 우리의 영혼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육신이라고 하는 감옥에 영원히 가두어져 있는 상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빨리 이 육신이라고 하는 감옥에서 벗어나서, 바로 저 이데(idea)아의 세계 정신세계로 나아가는 것이 그게 우리의 목표다. 이 험난한 세상에서 이 물질의 세계 가운데서 이렇게 고통스럽게 살지 말고, 우리가 영적인 차원으로 넘어가야 된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죠. 이러한 생각이 헬라 철학에 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종교가 그런 이야기들을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종교는 무슨 이야기를 하죠? 이 세상의 모든 물질들을 다 악하게 보는 겁니다. 그래서 악하니까 어떻게 해야 돼요? 버려야 되는 거예요 악하니까 멀리해야 되는 거에요. 악하니까, 그것을 사용하면 안 되는 거에요.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악하게 보는 관점이 많이 있는데, 놀랍게도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는 그렇게 이 세상의 것들을 악하게 보는 것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 세상의 것들을 악하게 보는 그런 관점에서 나온 것이 바로 금욕주의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금욕주의는 무엇입니까? 이 세상의 것들을 자꾸만 배제하는 거죠. 거부하는 것이죠. 그래서 금욕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마치 고상하고, 정말 어떤 영적인 높은 차원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예를 들어서 이 세상의 물질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악한 것이기 때문에, 그 물질을 모으려고 하지 말고 무소유로 살아가야 된다. 그런 이야기를 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을 하는 거죠. 저 사람은 물질에 대한 욕심을 다 버리고, 그리고 “무소유로 살아가고 있구나”라고 하면서 열광하는 겁니다. 또 이 세상에서 결혼하면서 살고, 그렇게 하지 말고, 독신으로 살아가야 된다 하면서, 독신주의로 가게 되면, 저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다 내버리고, 그리고 그렇게 거룩하게 혼자 살아간다고 하면서, 독신을 그렇게 아주 바라보면서 좋아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말하는 것은 우리를 더럽히니까 침묵하면서 살아야 된다. 먹는 것은 별로 안 좋으니까 금식하면서 살아야 된다. 그래서 30일 금식하고 40일 금식하고 하면 그 사람을 아주 우러러보고 있고, 인도에 가면 먹을 것을 하나도 안 먹고 지금 몇 년째 살고 있다는 어떤 남자 수도승이 하나 있다고 그래요 보셨습니까? 뒤에 가서 혹시 먹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삐쩍 마른 어떤 아이가 수도승이 사람들과 거리를 멀리한 채, 늘 기도만 하고 정진만 하고, 아무것도 먹지 않는 미동도 하지 않으면서 앉아 있는 그 사람을 보려고, 세계 각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와서 그 사람을 보려고 하고 있고, 그 앞에서 경외심을 가지고 있는데, 그렇게 아무것도 안 먹는 사람을 좋아하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고, 자신의 욕망을 끌어버리는 그 모든 것들이 금욕주의가 정말 좋은 것이라고 수많은 사람들이 열광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더 나아가서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물질이나 탐욕이나 욕망에 찌들어 있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실증을 느꼈기 때문에 반발 작용으로 그 금욕주의를 좋아하게 되는 경향들이 많이 있는 것이죠.
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들이 악하고 나쁘기 때문에, 다 버려야만 하고, 그것이 없이 살아가고, “끊어버려야 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선언해 주고 계신 것이죠. 그래서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이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우리가 누리기도 하고, 또한 즐기기도 하면서, 그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와 손길들을 보며,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사는 삶이 그게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좋은 삶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스리고, 공중에 나는 새와 또한 짐승과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다스리고 발전시키고 유지시키고 보호하는 그런 사명이 우리에게 있다고 하는 점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창세기 1장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메시지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창조의 질서”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시면서, 창조의 질서를 만들어 주셨어요.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시면서 하나님 그리고 사람, 그리고 이 세상 만물이라고 하는 그 창조의 질서를 만들어 놓은 것이죠. 우리가 예배해야 할 대상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하나님을 향해서 예배하고 찬송하는, 그래서 우리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예배하는 것이 창조의 질서이고 이 세상 만물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 세상 만물은 우리가 다스리고 가꾸고 보존하고 사용하고 관리하고 청지기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창조의 질서인 것이죠.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는 서로가 사랑하고 우회하고 살아가는 것이 이게 바로 창조의 질서로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창조의 질서를 왜곡해버려서, 우리들의 삶 가운데 왜곡된 현상이 나타나게 됐습니다. 왜곡된 현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세상 만물을 예배하는 거예요. 돈을 예배하고 물질을 갈망하고 그것이 최고인 줄로 생각하면서, 세상 만물을 우상으로 여기면서 살아가는 삶이 그게 왜곡된 현상인 것이죠.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무시하고 외면해버리고 저 세상 만물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을 사용해버리기도 하고, 그러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사랑과 우애가 아니라, 서로 대적하며 세상 만물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기는 그런 왜곡된 현상이 나타나게 될 때, 결국 우리의 삶은 고통 가운데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이 창세기 1장의 말씀을 통해서 발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왜곡된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은 바로 우리의 죄 때문인데요. 이제 우리가 또 살펴보겠지만 바로 선악과를 먹는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예배하려고 했던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의 물질을 예배하고 공경하는 그런 왜곡된 질서가 나타나게 된 것을 알 수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 가운데서 이러한 왜곡된 현상 가운데 살 게 아니라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며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그런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그 창조의 하나님 오늘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 창조하신 하나님, 온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그 하나님이 누구예요? 우리의 아버지예요. 우리의 부모님이에요. 그 부모님께서는 우리를 그냥 이 세상에 어쩔 수 없이 그냥 아무렇게나 태어나게 만든 것이 우리가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만드셨고 우리를 소중하게 아끼시는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예레미야 1장 5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를 모태 짓기 전에 너를 앓았고, 내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향해서 주신 말씀인데, 예레미야가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셨고, 모태 조성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시고 조성하셔서, 그리고 그에게 놀라운 사명을 주셨다고 하는 말씀인데, 이 말씀은 예레미야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어쩌다 보니까 그냥 아무런 이유도 없이 목적 없이 그냥 태어난 인생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세상 천지를 우리를 위해 만드시고 그의 주인공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를 삼아주셨기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고 하는 사실을 담대하게 믿으면서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고통 가운데 있을 때, 또한 여러 가지 문제들이 생길 때 그때 좌절할 것이 아니라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사,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