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닫기

큰 광풍 앞에서 (막 4:35-41)

먼저 영상을 하나 보았으면 좋겠는데요. 지금 나오게 될 이 영상은 갈릴리 바다를 촬영한 것입니다. 제가 지난번 성지순례 갔을 때, 갈릴리 바다에 배를 타고 가면서 찍은 사진인데, 갈릴리 바다인지 아닌지 모르겠죠? 다 똑같습니다. 갈릴리 바다인데, 제가 한국에 있을 때는, 뭐 얼마나 크겠나? 그냥 감이 잘 잡히지 않았는데, 이번에 가보니까 정말 상당히 큰 호수더라고요. 그러니까 이 갈릴리 바다가 짠물이 아니고 민물 호수인데, 호수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바다라고 부른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동서로 하면 21km의 반경이 되고, 남북으로 하면 11km. 잘못 말했나요? 잘못 말한 것 같습니다. 남북이 21km의 길이가 되고, 동서가 11km의 크기니까, 상당히 큰 호수입니다. 바다 수면보다 훨씬 더 낮은 곳에 위치해 있는 갈릴리 호수인데요. 바다의 해수면보다 209m에서 215m 정도까지 아래로 내려온, 그런 육지 안에 있는 호수로서 166제곱킬로미터의 면적이 되는 그런 어마어마하게 큰 호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중호수 같지가 않더라고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마가복음 4장의 말씀을 읽었는데, 이 본문은 바로 이 갈릴리 바다에서 일어난 한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시고, 그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언제 건너가게 되었냐면, 밤중에 건너가게 된 것이죠. 아마도 낮에는 사역을 하시느라고 여러 가지로 참 바쁘고 참 눈코 뜰 새 없는 그런 시간을 보내다가, 이제 배를 타고 건너가게 된 것입니다. 한밤중에 건너가게 되니까, 시간도 시간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많이 피곤했었을 것이고, 그리고 또한 배를 타고 가니까, 진동이 있고 하니까,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들이 잠에 빠지게 되는, 잠이 들게 되는 그런 상황 가운데서 배가 건너가게 됐습니다. 당시에는 전등이 없던 시절이니까 횃불 같은 거를 켜고, 그리고 배를 타고 건너가야 하는 것인데, 그런 점에서 밤에 운행한다고 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고 쉽지 않은 길이었겠다고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것이 크게 문제 되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밤중이라고 했던 것이. 왜냐하면 제자들은 늘 밤에 고기를 낚곤 했었으니까, 어부 출신들이었기 때문에 밤중에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가는 것 그렇게 어렵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광풍이 일어나게 됐어요. 큰 세찬 바람이 몰아치게 되는데, 이 자연의 이 모습에 이 배가 침몰하기 직전까지 가게 된 것이죠. 아마도 비가 쏟아졌을까요? 아무튼 파도가 커서, 엄청난 그 파도에 배에 부딪히면서, 그 호수물이 배 안으로 차게 들어와서, 결국 이 배가 호수에 빠지게 될,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위험한 상황을 만나게 된 것이죠. 살아나기가 좀 어려운데, 왜냐하면 그곳의 수심이 얼마나 되냐 하면, 25m에서 아주 깊은 곳은 43m까지 깊은 물이었다고 하니까, 아무리 뛰어난 베테랑 어부들이라고 할지라도, 바다 한가운데서, 호수 한가운데서 살아남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 상황 가운데서 갑자기 두려움이 닥치게 되었고, 그 위기 가운데 그때 이 제자들은 예수님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고 계셨냐면, 주무시고 계시는 겁니다. 지금 바깥에서는 죽을지도 몰라서 다들 두려움 상태에 있고 공황에 빠져 있는데, 정작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시는 그 모습을 보고 답답해서 이 제자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외쳤습니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된 것을 왜 그냥 내버려 두십니까?” “왜 그냥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제자들은 예수님에게로 달려가서, 예수님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수많은 능력을 행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죠. 하지만 그 제자들이 이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할 것이라고까지는 예측하지 못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는데, 마치 인격체를 향해서 꾸짖으시는 것처럼, 사람을 향해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자연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까, 자연이, 이 바람과 바다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잠잠해지는 그런 놀라운 일이 있었다고 하는 게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이 다시 한번 깜짝 놀라게 된 것이죠. 다시 한번 정말 경이로움을 표하게 된 겁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기도 하고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면서 많이 놀랐던 그런 제자들이었고, 사람들이 정말 많이 놀랐었는데, 자연을 잠잠케 하고, 비바람이 치는 상황 가운데서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에 잠잠해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이 과연 누구신가? 예수님이 누구시겠어요? 하나님이신 것이죠.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고, 그래서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그 주님께서 명령하실 때, 이 바람과 바다도 잔잔해지는 그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어서,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면서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와 같은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라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그런 내용의 말씀입니다.

이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가 먼저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이 있는데요. 그것은 주님과 함께 가는 그 배 속에 풍랑이 닥쳤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저곳으로 건너가자 말씀하셨고, 주님과 함께 배를 타고 건너가는 그 배에도 풍랑이 닥쳤다고 하는 이 점에 우리가 먼저 주목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과 함께 가면 아무런 문제도 없고, 주님과 함께 가면 아무런 걱정과 근심거리가 없는 게 아니라, 주님과 함께 가는 그 길에도 풍랑이 있었다고 하는 이 점을 우리가 먼저 눈여겨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시편 1편의 말씀에서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그렇게 노래하고 있는데요. 하나님께서 나의 목자가 되신다고 하는 그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이 나의 목자라고 하는 이야기는, 그러니까 우리들의 인생 가운데 아무런 근심과 걱정거리가, 아무런 어려움이 없이, 아무런 슬픈 일이 없이, 평탄대로가 우리 앞에 쫙 뚫려서, 정말 근심 걱정거리 하나도 없이 편안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시편 1편의 말씀을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하면서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지날지라도 내가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노래하고 있는데요. 그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입니까?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되신 그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삶 가운데도 어떠한 일이 닥치는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는 것과 같은 그런 두려운 일들이 무서운 일들이 있을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시편 1편에서 노래하고 있는 것이죠.

믿음의 길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믿음의 길은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면,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이 다 정리되고, 모든 것이 다 완벽하게 정리되어서, 아무런 아픔과 고통이 없는 그런 편안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점을 먼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들의 삶 가운데는 아픔이 있고 고난이 있을 수 있는 것인데요. 만일 그런 고난이 우리들에게 닥친다고 한다면,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가운데 당연히 만나야 할 것, 어차피 우리가 만나야 할 것을 만났다고 하는 그 사실을 기억하면서, 의연하게,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면서 그리고 절망할 것이 아니라,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려운 일이 닥치면, 이게 왜 닥쳤을까? 왜 이런 문제가 생겼을까? 절망할 것이 아니라, “옳게 왔구나” 생각하셔야 돼요. 내가 만나는 그 일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예외적인 일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까 재수 없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의 길 가운데, 여러 번 여러 번 수시로 만나게 되는 그런 장애물과 아픔들이 또 다른 장애물, 또 다른 아픔, 또 다른 슬픔들이 왔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올 게 왔구나” 생각해야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오늘 2부 시간에는 세례를 받는 한 자매가 있는데요. 세례를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공포하게 되면, 그러면 그때부터 아무런 문제가 없이 평탄한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들의 삶은 아픔과 고난의 연속이 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 주무셨다고 하는 사실이죠. 우리가 정말 힘들고 어려울 때, 그래도 우리에게 힘이 된다고 한다면, 주님께서 우리들을 알아주시고,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시고 또한 우리들에게 힘과 용기를 북어 준다고 한다면, 그래도 견디기가 쉬울 겁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걱정하지 말라 말씀하시기도 하고, 이런 말씀해 주시고도 또 저런 말씀해 주신다고 한다면, 그래도 힘을 얻을 수 있을 텐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배 속에서 주무시고 계시는 겁니다. 한쪽에서는 죽겠다고 난리인데 태어나게 주무시고 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제자들이 너무나도 당황스러웠던 것 같아요. 지금 제자들은 목숨이 끊어질 그런 위험한 상황인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전혀 아는 척도 하지 아니하시고 모르는 척하면서, 잠만 주무시고 있는 그런 모습이 어쩌면 우리가 만나는 현실인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들의 힘들고 어려운 여러 가지 일들을 만나는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왜 아무런 응답을 해주시지 않는 것인지, 왜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피할 길을 주지 아니하시고, 정말 이 문제들을 우리가 정말 고통스러워하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 것처럼 느끼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아요. 기도했는데, 기도하면 응답해 주시겠다고 말씀해 주셨고, 구하라. 그러면 주시겠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이상하게도 다른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은 들어주셔도, 내가 기도하는 것은 안 들어주시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어서, “하나님은 나를 아는 척하지 아니하시는가? 주님께서는 나를 외면하고 계신 것이 아닌가?”라고 하는 그런 의심이 들 때가 많이 있는 것이죠.

하지만 이 순간에 제자들은 주님에게 달려가서 주님을 깨우고 주님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갈 것이 아니라, 그 어떤 방법 다른 방법을 찾는 방법을 쓴 것이 아니라, 주님 잠자고 계시는 그 주님을 향해서 찾아가서, 그 주님을 깨우면서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된 것을 왜 그냥 내버려 두십니까?” 주님 앞에 나아가게 되었을 때, 주님께서 일어나셔서 제자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이죠. 따라서 오늘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도 이 말씀을 기억하고 늘 주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있다고 한다면, 혼자 고민할 것도 아니고 좌절하거나 포기할 것도 아니고, 구하라. 그러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신 주님 앞에 나아가서, “주님, 왜 주무시고 계셔요?” “왜 안 들어주셔요?” 왜 내 기도에 응답하지 않느냐고 주님을 향해서, 또 엎드리고 또 기도하며 나아갈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해 주시는 경험들을 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 세상에 그 어느 것도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죠. 이 세상에 사람이나 이 세상에 그 어떠한 명예나 권력이나 돈이나 그 어떠한 것도 우리의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소망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힘들고 어려운 문제들을 만날 때마다,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될 일이 있다고 한다면, 주님 앞에 엎드리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 왜 우리의 문제를 외면하고 계십니까?” “왜 응답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해주셨는데, 왜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다시 한번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주님은 말씀으로 바다를 잔잔케 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우리의 예상과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이 바다를 잔잔케 하신 것이죠. 어떻게 잔잔케 할 수 있었을까요? 쉬워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창조주로서 이 세상을 만드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하면 들으신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처럼 중요한 것이 없어요. 어리석은 사람이 누구일까요? 그것은 주님 앞에 나아가지 않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 나아가면, 주님께서 일어나셔서 말씀으로 잔잔케 하시는, 이 말씀을 보면서, “그렇구나. 주님에게 나아가면 주님께서 말씀으로 잔잔케 하시는 분이시구나” 생각하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현명한 사람이고 지혜로운 사람인 것이죠.

그 주님을 우리가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주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주님 앞에 나아가지 않는 것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 아주 좋은 약이 있다고 합시다.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정말 획기적인 약이 개발이 되었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 약을 약이 있다고 한다면, 누가 병에서 낳는 사람이에요? 그 약을 신뢰하고 복용하는 사람이 낫는 거예요. 여기에 치료제가 있으면 그 약을 먹어야 낫는 거예요. 그런데 아무리 치료제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 치료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신하고 먹지 않는다고 하면 그러면 살아날 수가 없는 것이죠.

그 옛날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서 죽게 되는 그런 위험한 상황 가운데 처해 있었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향해서 놀라운 해결책을 하나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그 불뱀에게 물렸는데, 그 불뱀의 형상을 한 놋뱀을 달아서 장대 위에 높이 매달라고 하는 것이죠.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 놋뱀을 바라보라고 얘기하면, 그러면 그 놋뱀을 바라보는 자마다 살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빨리 그 놋뱀을 만들어 가지고 높이 들고 이스라엘 민족에게 말한 거죠. 불뱀에 물려서 이제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말한 겁니다. “너희들이 이 놋뱀을 바라보면 살 것이다”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살았습니까? 죽었습니까? 본 사람은 살았고 안 본 사람은 죽은 거예요. 왜 안 봤을까요? 이해가 안 되니까, 안 본 겁니다. 놋뱀이 어떻게 나를 살릴 수 있나? 어떤 약도 아니고, 놋뱀을 바라보는 것으로 내가 어떻게 살 수 있나 믿지 않고, 아니 안 바라볼 이유가 뭐가 있어요? 믿져도 본전인데,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끝끝내 마음의 문을 완악하게 하고, 바라보지 않고 모세의 말을 거부하면서 바라보지 않다가 결국 죽고야 만 것이죠.

군대에 가면 군의관들의 마크가 있는데, 그 군의관 마크가 무슨 마크냐 하면, 뱀 한 마리가 이렇게 장대에 달려 있는 마크가 군의관 마크예요. 이 성경의 이야기를 따 가지고 만들어놓은 거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구원의 약속을 주셨는데, 바로 그 놋뱀에 들린 뱀처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 높이 달리시고, 우리를 위하여 피를 흘려주시며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주님으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마다 구원을 받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 주님께 나아가는 자마다 놀라운 은혜가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 우리들의 삶 가운데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을 의지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자들은 이때 주님을 찾았고, 주님께서 그들을 구원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이 정말 절망의 상황 가운데서 구원받은 이 이야기를 우리가 묵깊이 묵상하면서, 오늘 또 우리들의 삶 가운데 우리들의 인생의 여정 가운데 반드시 만나게 되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고난들이 있을 때, 근심과 걱정에 휩싸일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께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 해주신 말씀을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 보면 좋겠는데요. 예수님께서는 바다를 잔잔하게 하신 후에 한마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마가복음 4장 40절의 말씀이죠.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두려워하고 제자들이 무서워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너희가 이렇게 무서워했느냐? 어째서 너희가 믿음이 없느냐?”라고 질문을 던지셨는데요. 이렇게 질문하신 말씀에 의미가 무엇일까요? 의도가 무엇일까요? 그러니까 우리가 어떠한 무서운 일을 만나도 무서워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일까요? 무서워하면 안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일까요? 믿음만 있다고 한다면 전혀 두려울 것이 없다고 하는 그런 의미일까요?

물론 그렇게 이 구절을 이해할 수가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전적으로 신뢰한다고 하면 무서워할 일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높은 케이블카를 탄다든지 출렁다리를 건너간다든지 아니면 비행기를 탄다든지 하면 무섭나요? 안 무섭나요? 대부분은 안 무섭죠. 그런데 고소 공포증이 있는 사람들은 무서워해요. 무서워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서워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안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요. 출렁다리 안전할 것이다. 케이블카 안전할 것이다. 놀이공원에 가면 아주 위험해 보이는 그런 놀이기구들이 있는데 그것을 즐기면서 탑니다. 왜 이것이 안전할 거라고 하는 그런 믿음 가운데 타게 되는 것이죠. 비행기를 탈 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의 안전이라고 한다면 주님께서 우리의 보호자가 되신다고 한다면, 그 어떠한 고난과 그 어떠한 환란과 그 어떠한 아픔이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두려워할 것이 아니고,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 마치 이 세상에 출렁다리나 아니면 케이블카나 이런 것을 보면서, “안전하구나” 생각하고 우리가 타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의 마음 가운데 두려움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강하고 담대한 믿음을 가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사실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제가 참 주님을 믿기 때문에 두려움을 많이 벗어날 수 있었고, 근심과 걱정을 많이 벗어날 수 있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제 삶 가운데 아주 편하고 늘 잘 되기만 하고 늘 성공만 하는 그런 삶이 제 앞에 탄탄대로가 그냥 늘 펼쳐져 있었느냐 하면,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걸어온 삶의 여정 가운데 어떤 일이 있었는가? 실패가 있었어요. 열심히 수고하고 애썼지만 장벽 앞에서 막혀버려서 그 이상 넘어갈 수 없는 그런 장벽 앞에서 포기해야만 하는 실패의 경험들이 있었어요. 어떤 도전을 하고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고 내가 어떤 목표를 향해서 열심히 노력했지만 떨어지는 경험들이 우리들의 삶 가운데 있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아픔이 있습니다. 장애물이 있습니다. 때로는 황당한 일을 겪게 되기도 하는 것이 정말 소원하고 있었던 것들이 실패로 돌아가버리는 그런 경험들이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그런 순간 가운데, 저는 비교적 슬퍼하지 않았어요. 저는 비교적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아직 무엇이 결정되지 않아도 그렇게 절망하거나 걱정하거나 초조하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이냐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고 계실 뿐만 아니라, 주님이 나의 목자시고 여호와께서 내 발걸음을 인도해 주시기 때문에,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천금같이 만들어 주실 것이고, 지금은 고난의 길을 가지만, 그 고난의 길이 결국에는 이것이 약이 되고 또한 보약이 되고 또한 경험이 되고, 그래서 더 좋은 결과로 만들어질 거라고 하는 그런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힘들고 어려운 상황 좌절하고 실패가 내 앞에 닥친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그나마 다 견뎌낼 수 있는 힘이 있었는데, 그 힘의 원천이 어디에서부터 나왔는가? 바로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그런 힘과 능력이 나오게 된 것이죠.

하지만 아무리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할지라도 두려운 마음이나 걱정과 근심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냐 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너무나도 많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있어도 불안하고 초조하고 그리고 어떻게 될까 걱정될 때도 너무나도 많이 있는 것이죠. 예전에 우리 둘째 딸아이가 한 4개월이나 됐을 때였던 것 같아요. 4개월이나 됐는데 이 아이가 아파서 근처에 내과를 데리고 가고, 그랬는데 내과 의사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그 소아과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애가 체한 것 같다고 그 정도로 말씀해 주셨어요. 그러니까 그런가 하면서 뭐 소화제 같은 거 처방해 주고 해서 또 들어왔는데, 집에 있는데 아이가 계속해서 피똥을 막 싸는 거예요. 막 피가 막 항문으로 막 나오는 거, 너무나도 깜짝 놀라가지고, 그 아이를 데리고 한밤중에 삼성의료원으로 달려간 거죠. 그때 제 아내는 너무나도 불안해서 마음을 어떻게 할 줄을 몰랐어요.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 내가 주님을 믿고 있지만 내 앞에서 그렇게 막 피똥을 피 싸고 있는 그 아이를 보면서, 이 아이가 어떻게 될 것인가? 너무나도 걱정되는 마음에 불안하는 것을 우리가 떨쳐낼 수가 있느냐면 떨쳐내기가 어려운 것이죠. 그래서 병원에 같이 못 가고 저 혼자만 갔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장중첩증이어 가지고, 이게 뭐 해서 막 피가 나왔던 것인데, 응급 처치해서 잘 치료를 했습니다마는, 그런 상황들이 닥치게 된다고 한다면, “왜 무서워하였느냐? 왜 너희가 믿음이 없느냐?”라고 하는 그 말씀에 따라서 무서워하지 않아야지, 의심하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을 우리가 갖는다고 해서, 그렇게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죠.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두려우면 두려운 마음이 생기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슬프면 슬픈 마음이 드는 것이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 말씀은 제자들을 책망하시는 말씀으로 이해하실 수도 있겠지만, 이런 말씀으로 이해할 수도 있어요. 이 말씀을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따뜻하게 등을 두드리시면서, “왜 무서워하니?” “무서웠구나.” 위로하며 제자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밤중에 무서워서 꿈을 꾸다가 너무 무서워서 막 울고 있으면, 엄마 아빠가 달려가서, “뭐가 무서워? 아빠가 여기 있는데. 엄마가 여기 있는데, 뭐가 무서워.” 따뜻한 목소리로 달래주는 것처럼, 우리 아이가 혼자 겁을 먹고 울고 있을 때, “내가 사라진 줄 알았니? 여기 있어. 나 없다고 무서워했던 거야?” 그러면서 달래주는 것처럼,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한편으로는 책망으로 볼 수도 있지만, 또 한 편의 말씀으로는 또 한편으로는 제자들을 위로해 주시고 또한 돌봐주시는 말씀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너희가 무서워하지 말라. 내가 여기 있다.” 제자들과 함께하시겠다고 하시는 그 약속을 해주고 계시는 것이죠.

어쩌면 우리는 늘 불안해서 어떻게 참 힘들게 살 때가 많이 있습니다. 풍랑이 일어날 때마다 우리들의 삶 가운데 참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그런 문제들이 닥칠 때마다, 그리고 우리가 열심히 수고하고 애썼지만 좋은 성과를 내는 것이 아니라, 또다시 씁쓸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고, 내 수고와 노력이 인정받지 못하게 되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는 일들을 경험할 때마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하고 슬픈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주님, 저희들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옵소서,” “저희들의 불안한 마음을 붙들어 주옵소서,” “주님만을 온전히 믿고 신뢰하며 믿음으로 일어설 수 있게 해 주옵소서.” 그 옛날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다가 죽을 수도 있는 그런 위험한 상황 가운데서 불안했던 그 제자들을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그 제자들의 마음을 달래주셨던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들의 삶 가운데 함께 오셔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또한 담대한 믿음을 얻게 인도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Loading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