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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이와 같이 하라 (눅 10:30-37)

이번 주간을 보내면서,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남겨주신 십자가가 있으며, 우리가 지고 가야 할 그 고난이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깊이 묵상해 오고 있는데요. 특별히 오늘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다시 한번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십자가가 무엇인가? 우리로 하여금 감당하기를 원하는 그 고난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함께 묵상해 보려고 합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강도 만난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강도 만난 사람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지고 가라고 하는 십자가인 것이죠. 어느 날 하나님께서 갑작스럽게 만나게 해 주신 사명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 옆을 지나가게 된다고 한다면, 쓰러져 있는 그 사람의 옆을 지나가게 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연히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다가 지나다 보니까, 그런 사람을 재수 없어서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천지를 다 주관하시고 우리의 삶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주관하신다고 우리가 믿는다고 한다면, 우리가 이런 강도 만난 사람의 옆을 지나가게 되는 것은 우연히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십자가요, 사명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 옆에 있게 하신 것이라고 보는 것이 성경적인 관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았으면서도 불구하고, 이것이 내가 할 사명이 아니라고 생각한 거죠. 이것은 내게 주어진 십자가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그냥 지나쳐 버렸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다른 사명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전에서 섬기는 일이 자기가 해야 될 일이고, 내가 해야 될 그 당면한 과제가 잔뜩 쌓여 있기 때문에, 그 과정 가운데서, 그 길을 일탈해서 그 정해진 루틴에서부터 벗어나서, 다른 사람을 돌보아줄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내가 해야 된다고 하는 내 생각, 나의 사명이 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내 생각이 너무나도 커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맡겨주시는 사명,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그 십자가가 우리 안에 들어올 만한 마음의 여유의 공간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계획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다니길 원하는 우리들의 마음의 속성 때문에 그런 것이죠.


베드로를 향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시기를 네가 젊었을 때는 네가 띠 띠고 네가 원하는 곳으로 갔다고 할지라도, 이제는 네가 팔을 벌리리니 네가 스스로 띠 띠고 가는 것이 아니라, 남이 너를 이끌어주는 대로, 하나님께서 너의 삶을 이끌어주는 대로 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신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라며 순종하고 그 사명을 받아들여야 되는데, 내가 생각하는 것이 너무나도 커서, 내 마음에 가지고 있는 계획, 내 생각이 너무나도 커서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 안에 들어올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이죠. 시인과 촌장이라고 하는 가수들이 부른 “가시나무”라고 하는 가사에 보면 “내 속에 내가 너무 많아, 당신의 쉴 곳이 없네.”라고 하는 그런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우리의 생각이 너무 많아서 하나님의 인도하심,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들려주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해서 인도해 주시는 그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우리의 삶 가운데 개입할 만한 여지를 전혀 남겨두지 않았기 때문에,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 사람을 보면서도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던 것일 겁니다.


하지만 여기에 등장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그 강도 만난 사람을 바라보는 가운데 불쌍한 마음이 들었어요. 그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그 사람은 가던 길을 멈추고, 자기가 하려고 했던 원래의 계획들을 포기해 버리고, 그 사람에게 다가가서 그 사람을 돌보아 주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예상하지 않은 채 맡겨주신 그 사명, 하나님께서 갑자기 내게 들려주신 그 십자가를 받아들이면서, 그 사명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한 사람의 생명을 살려낸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갑자기 우리가 예상치 못한 십자가를 받아들이게 된다고 한다면 원래의 계획이 망가져 버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원래의 계획을 포기해 버려야만 하는 것이죠. 시간 계획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여행 계획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재정 계획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자기가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다 한순간에 중단 돼버리고 망가져 버리고, 이 사람을 살리기 위한 그런 노력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투자해야만 하기 때문에, 이것이 사실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저도 그래요. 성품상 제 마음 가운데 무엇인가 계획을 했는데, 그 계획이 하나라도 흐트러지거나 계획이 망가지는 것을 쉽게 용납하기가 어려워요. 그런 상황이 발생하게 되면 갑자기 당황스럽고 갑자기 화가 나기도 하고, 갑자기 모든 것들이 불안해지는 그런 마음의 경험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아마 우리 모두가 다 그러한 상황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갑자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런 말씀에 순종하기가 어려운 것이죠.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자기의 십자가를 질 수 있는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고난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십자가를 지기 위한 첫 번째 전제 조건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 마음에 가득 쌓아놓았던 것들을 비워야 하는 것이죠. 내가 쥐고 있던 그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아야 새로운 십자가를 우리가 받아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 말씀에 주님께서 해주신 말씀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말씀해 주셨는데요.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실 때 그전에 해주셨던 말씀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부인해야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거예요. 자기를 부인하지 않고 내가 가지고 있는 계획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그 모든 생각들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모든 것들이 하나도 망가뜨리지 않은 채, 자기 십자가를 질 수가 없다고 하는 겁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기 위한 첫 번째 전제조건이 있다고 한다면, 내가 가지고 있던 것들을 다 비워내야 되고, 내려놓아야 되고, 그것을 가리켜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내려놓아져야, 내 계획을 내려놓아야, 그래야 십자가를 질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오늘 이 아침에 깊이 묵상하며 오늘 하루 종일 깊이 묵상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 가운데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예수님을 만난 그 이후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그 얘기는 내 생각을 버렸다는 거예요. 내 고집을 내려놓았다는 거예요. 내가 하고 싶은 그 마음을 다 내려놓고, 예수님께서 내 안에 살아계셔서, 내가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살았기 때문에, 이제는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말씀대로, 내가 원치 아니하여도, 내가 행하고 싶지 아니하여도,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나아가는 것이 그게 바로 십자가를 지는 삶이고,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삶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다시 살아나는 그러한 믿음의 삶이 다 될 수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여기서 끝이 난 것이 아닙니다. 이 선한 사마리아인이 가던 길을 멈추고 쓰러져 있던 강도 만난 사람을 만나서 그 사람을 향 불쌍히 여기고 그 사람을 사랑해 주고 자기의 그 모든 것을 다 다 투자해서 그 사람을 살려낸 자신의 사명으로 받아들였다고 하는 그 이야기로, 이것이 이 비유의 말씀이 다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실 핵심은 다른 데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사마리아 사람에게 있어서 이 강도 만난 사람이 누구였었느냐?” 하는 것이에요. 누구였습니까? 원수지간이었던 것이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당시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철천지 원수처럼 살았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대 사람들은 말도 섞지 않았어요. 대화하지도 않았습니다. 갈릴리에서 유대 지방으로 갈 때, 유대 지방에서 갈릴리 지방으로 갈 때, 그 사이에 사마리아라고 하는 마을이 끼어 있는데, 유대인들은 그 사마리아 사람들과 만나고 상종하기가 싫어서 옆으로 빙 돌아서 먼 길로 해서 갔어요. 사마리아 사람들과 만나고 싶지도 않고 상종하고도 원치 않았기 때문에, 그들과 만나기를 싫어했기 때문에, 그들을 비난하면서 다른 길로만 다녔던 철천지 원수와 같은 사람들이 바로 사마리아 사람이고 유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아마 오늘날로 비유하자고 한다면 이스라엘과 하마스 사이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서로 전쟁을 하면서 서로 죽이고 서로 비난하고 그래서 정말 철천지 원수가 되어버린 그 관계, 더 이상 관계하고 싶지 않았던 그 사람들이 바로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대 사람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그 철천지 원수와 같은 사마리아 사람이 자신을 모욕하고 미워하던 그 유대인이 쓰러져 있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 사람을 보고 잘됐다. 저 사람이 우리를 늘 비난하고 욕하고 정말 돌들을 던지는 그런 악한 사람들인데, 저 사람을 강도 만난 그 모습을 보면서 샘통이다 하면서, 그냥 그 자리를 지나가 버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털어서 그 원수까지 사랑해 준 그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들려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 36절에서부터 37절 말씀에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그 유대인들을 향해서 가서 너도 이같이 하라. 그냥 사랑하라가 아니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거예요. 미워하는 사람을 그 사람을 사랑하는 거예요. 오늘 우리가 이 주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야 할 것인데요. 우리는 누구를 위해서 십자가를 져야 하는가? 우리는 누구를 위해서 고난을 당해야 되는가?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그 십자가 내게 주어진 십자가가 무엇인가? 우리 자녀들이 십자가라고 생각해요. 내 마음을 속 썩이는 그 아이들을 위해서, 내가 눈물을 흘리고 내가 고생하는 그 십자가가 “내가 지고 가야 될 십자가”가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우리는 생각하기에는 우리 남편이 십자가라고 생각해요. 성질 더럽고 마음도 알아주지 못하고 화만 내기도 하고, 그런 남편이 나의 십자가라고 생각하면서, 그래도 감당해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또는 완악하고 내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고 늘 나를 구박만 했던 우리 부모님이 나의 십자가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그런 십자가를 내가 져야 되겠다. 그 고난을 내게 남겨주신 주님의 고난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물론 그것이 사랑의 대상이긴 합니다. 우리 자녀들, 우리 가족들, 우리가 져야 될 사랑의 대상이고, 우리가 힘들게 어렵게 고난을 당하면서도 최선을 다해서 사랑해야 될 대상이 맞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그 정도가 아니라 마태복음 5장 46절에서부터 48절의 말씀 가운데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오?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지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사랑하면서 그래서 나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나는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가 쉬워요. 우리가 정말 힘든 우리 가족들을 돌보는 게 그게 내게 주어진 십자가이고, 나는 주님께서 주신 그 사명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고, 조폭도 할 수 있는 일이고 깡패들도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사악한 독재자도 자기 가족은 아낄 줄 알고, 사악한 독재자도 자기편은 끔찍하게 챙길 줄 아는 게 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에요.


근데 무엇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하나님의 말씀인가?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거예요. 나를 비난하고 욕했던 그 사람을 향해서 나를 힘들게 하고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그 악한 사람을 위해서 나를 힘들게 하는 그 사람들을 오히려 사랑으로 돌보고 사랑의 손길을 내밀며, 하나님의 뜻대로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그것이 우리들에게 주어진 십자가이며 고난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 우리가 이 고난 주간에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들려주신 말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라고 하시는 이 말씀을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깊이 새기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 너무나도 힘들어요. 주님 여기까지 하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데 왜 이런 명령을 우리들에게 해주십니까? 다른 것은 순종할 수 있어도 이것만큼은 순종하기가 어려워요. 이것만큼은 너무나도 힘들어요.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그 일이 우리 주님께서 저희들을 위해서 해주셨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우리가 사랑스럽고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충성했고,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쓸 만하고 유용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들을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죽으신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가 주님과 원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을 위하여 십자가를 쥐어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5장 7절 8절 말씀에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늘 하나님의 원수처럼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산 것이 아니라 사탄이 시키는 대로 사탄의 자녀처럼 살았던 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한 지옥에 합당한 사람들이었고, 영적으로 본다고 한다면 강도를 만나서 이제 조금만 놔두면 이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영적으로 강도 만난 사람과 같은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외면해 버리신 것이 아니라, 먼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비워서 자신이 지시해야 될 그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6절에서부터 8절 말씀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놀라운 것은 바로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내가 헌금 많이 하고 내가 충성 많이 하고 내가 봉사할 만했기 때문에, 그래서 정말 쓸모 있어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가운데 늘 사악한 마음과 악한 일들을 했던 우리들을 원수가 되었던 우리들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다고 하는 그 놀라운 사랑을 오늘도 우리가 기억하면서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그 십자가를 지고 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게 어려워요. 저도 못해요. 저도 저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을 보면 마음속에 아프고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고, 힘들게 하는 그 모든 것들을 바라보며 우리들의 마음이 도무지 그 사람을 보기도 싫고 정말 견딜 수 없어요. 그래서 바로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바로 우리들의 그 사악한 마음 때문에 바로 그러한 연약한 마음 때문에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내려오셨고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주셨습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진다고 한다면 그것은 내가 근사한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멋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멋있게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베풀어주신 그 사랑에 비하면 너무나도 부족하지만, 그 놀라운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만 달란트에 엄청난 그 빚을 탕감해 준 것과 같아서 백대나리온 빚진 자들을 향해서 용서를 베푸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우리들의 삶 가운데 우리가 만나게 되는 그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이제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주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살아계셔서,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그 명령, 내가 너희를 향해서 들려주시는 그 음성에 순종하는 가운데 믿음으로 순종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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