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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빚 (롬 13:8-10)

오늘 아침에 아시안컵 경기가 어떻게 됐는가 확인해 보니까, 카타르가 이겼습니다. 마닝 심판의 아주 우호적인 경기 진행 하에서, 카타르가 우승했다고 하는 소식을 접하게 됐는데요. 우리나라가 결승에 갈 것을 기대했었는데, 안타깝게도 그러한 일들은 일어나지 않고, 패배하고, 쓸쓸하게 퇴장해야만 했었던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운 모습이었던 것 같습니다. 선수들과 그리고 온 국민이 실망하는 가운데, 지난주에 우리 대표팀이 우리나라에 입국하는 장면을 볼 수가 있었는데요. 귀국 현장에서 클린스만 감독 물러가라고 하는 그런 항의가 빗발쳤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엿까지 던지면서 “물러나라. 물러나라.” 그렇게 항의하는 그런 모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왜 사람들은 이렇게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감독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수십억 원의 연봉을 받으면서도 별로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 하는, 아무런 기여를 한 게 없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분노하고, 화를 내고 있는 게 우리 국민들의 반응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분노를 표출하고, 막 엿을 던지는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문화가 조금 아쉽고 안타깝기는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나라 감독들이 동남아시아에서 아주 인기를 끌고 있는 것과는 상반된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박항서 감독이 어디서? 베트남에서. 또 신태용 감독이 인도네시아에서, 김판곤 감독이 말레이시아에서 축구 경기를 잘 이끌어서, 그 나라에서 영웅 대접을 받는 것과는 아주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왜 똑같은 감독인데 어떤 감독은 영웅 대접을 받고, 어떤 감독은 물러나라. 이렇게 비난을 받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그 감독이 어떠했는가? 그 감독이 어떠한 역할을 했는가에 대한 감정이 다르기 때문일 것 같아요. 아주 형편없는 실력을 보여준 그런 감독에 대해서는 분노하게 되어 있는 것이고, 그런데 우리나라에 와서 정말 헌신적으로 최선을 다해서 은혜를 베풀었다고 생각되는 그런 감독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환호하고 좋아하면서, 손이라도 한번 잡아보았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런 반응이 나오는 것은 어쩌면 우리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그 사람에게 빚진 게 있는 것 같아. 그 사람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고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이 되면, 그러면 너무나도 감사한 마음들이 자연스럽게 표현되는 것이고, 만일 그 어떤 사람에게서 우리가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이 되면, 적대적인 감정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죠. 어쩌면 사람들의 마음이 그럴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는 로마서 13장의 말씀을 살펴보게 되었는데요. 로마서를 쭉 진행해 오면서, 이제 종반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읽은 말씀 가운데, 로마서 13장 8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오늘 성경 말씀은 기록하고 있는데, 도대체 이 말씀의 뜻이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가 빚을 지고 살면 안 되는데, 사랑의 빚은 져도 괜찮다고 하는 그런 의미일까요? 사랑의 빚은 받아도 된다. 사랑의 빚은 내가 지어도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일까요? 그러니까 누군가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게 된다고 한다면, 그것을 사양할 게 아니라, “아이고 그 죄송해요. 받기 좀 뭐 하네요.” 하면서 거절할 게 아니라, 누군가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면, “그 사랑의 빚은 받을게요. 사랑의 빚은 제가 그건 제가 받겠습니다.”라고 그렇게 사랑의 빚을 받으라고 하는 그런 의미일까요? 종종 저는 많은 분들이 그렇게 이해하고 행동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언가 선물을 주고, 무엇인가 은혜를 베풀면, 그것을 처음에는 사양하다가도, 꼭 이 로마서 13장 8절을 말을 하면서, “사랑의 빚은 져도 된다고 했으니까 받겠습니다” 하면서 받는 그런 경우를 종종 많이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 로마서 13장 8절의 의미는 그렇게 사랑의 빚을 받아도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니라, 내가 사랑의 빚을 지고 있다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그 사랑을 되갚으며 살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입니다. 우리나라 말의 번역은 조금 애매하게 번역이 되어서, 그런 느낌이 잘 살지 않습니다마는, 영어 번역을 보면 이렇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한번 영어 번역을 봤으면 좋겠네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어떤 빚도 갚지 않은 채 남겨두지 마십시오.” 빚이 있으면 다 갚아야 된다는 겁니다. 빨리빨리 갚아야 된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서로 사랑해야 하는 빚은 남겨두라.” 이 말이에요. “서로 사랑해야 되는 그 빚은 다 갚았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그것을 다 청산했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 빚은 계속 남겨두어서,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 사랑하라. 빚진 마음으로 그 사랑을 갚으면서 살아라.” 왜냐하면 자기 동료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율법을 다 이룬 것이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우리가 빚이 있다고 한다면 빨리빨리 그 채무를 갚아버려야 할 겁니다. 그래서 그 빚을 다 갚아버려야 되지만, 그러나 사랑의 빚을 지고 있는 우리가 그 빚을 다 갚을 수 있는가? 다 갚을 수 없다는 거예요. 우리가 진 사랑의 빚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그 빚은 항상 지고 있다고 생각해서, “그 빚을 갚는 삶을 살아야 된다”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고요. 두 번째는 그 빚을 갚을 때, 우리가 어떤 자세로 빚을 갚아야 되는 것입니까? 우리가 사랑을 베풀 때, 그것은 내가 무엇인가 시혜를 베풀고, 내가 근사한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무엇인가를 은혜를 베푸는 그런 것이 아니라, “제가 빚을 갚는 것뿐이에요. 내가 무슨 도움을 주고, 사랑을 베풀었지만, 그것은 내가 근사한 사람이기 때문에, 나 자신을 드러내고, ‘내가 이렇게 멋진 사람이야. 내가 사랑을 이렇게 많이 베푸는 사람이야.’ 하면서, 뻐기면서, 그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니에요. 제가 한 것은 제가 받은 사랑에 비하면은, 부족한 것밖에 없고, 그것을 사랑의 빚을 갚으려고 한 것뿐이니까,” 빚을 갚는 사람이 큰소리칠 수 있나요? 없잖아요. 빚이 없는데, 주는 사람은 큰소리칠 수 있겠지만, 빚이 있는데, 그 빚을 갚는 것은 큰소리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랑을 어떻게 베풀어야 되는가? 빚을 지고 있는데, 그 빚을 갚는다는 마음으로 그 사랑을 실천하라고 하는 게 바로 로마서 13장 8절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만일 누군가에게 사랑을 베푼다고 한다면, 으스댈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인가 큰일을 했다고 뻐길 것이 아니라, 자랑할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그 은혜를 갚아 나가는, 채무를 변상하는 그 일에 불과하다고 겸손하게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하는 게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우리는 사랑의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한번 옆사람을 보면서 얘기합시다. “사랑의 빚이 많네요.” 맞아요. 우리는 사랑의 빚을 너무나도 많이 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가 어떻게 지금 우리는 이 자리에 앉아 있는가? 그것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죠. 누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해 줬어요? 우리 부모님이 사랑해 줬어요. 우리 아버지가 우리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고,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들을 다 희생해 가면서, 우리를 길렀기 때문에 이 자리에 우리가 앉아 있는 것이죠. 나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식들의 유익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쏟아내 버린 우리 부모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거 아닙니까?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삽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도와주고, 우리에게 도움의 손길을 주어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 우리가 혼자서 여기까지 온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어떤 도움을 받았을까 하면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있어요. 우체국에서 일하고 있는 우체국의 그 섬기는 사람들, 정말 아침부터 저녁까지 택배를 하면서 물건을 배달해 주는 그런 택배 노동자들, 정말 놀라운 것은 이번 연휴 기간에 물건을 주문했는데, 세상에 어제 배달이 되더라고요. 설날인데도 배달을 해요. 오늘도 배달한다고 그래요. 정말 쉬는 날이 없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배달하는 택배 노동자들 때문에, 우리들의 삶이 편안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죠. 수많은 서비스 제공자들, 식당에서 우리들에게 밥을 제공해 주는 사람들, 아파트를 관리하고 있는 사람들, 쓰레기를 치워가는 사람들, 세탁소에서 우리의 옷을 빨아주는 사람들, 학교 선생님들, 경찰관들, 소방관들, 의사들, 간호사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공무원들이 우리들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게 만들기 위해서, 자신들의 그 수많은 노력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편리한 삶을 살도록 도와주었다고 하는 그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우리가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섬김과 봉사 때문에, 우리가 그런 사랑의 빚을 지고 살아왔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며, 우리가 이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사랑의 빚을 갚을 수 있을까 생각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지난번에 뉴스 유튜브 영상을 한번 보았는데요. 어느 날 택배를 하던 그 68세 된 어떤 어르신이 택배를 하다가 심장에 문제가 생겨서 병원에 가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그분의 와이프가 부인이 택배를 받을 사람들에게 문자를 다 보냈습니다. 제 남편이 쓰러져서 병원에 입원해서 오늘 물건을 배달하지 못하게 돼서 죄송합니다. 급하신 분들은 본부에 와서 찾아가시고, 아니면 늦게라도 전달해 드리겠다고 하는 그 문자를 받고, 그 아파트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안타까운 마음에 “우리 돈이라도 좀 걷어서 도와주자” 그래 가지고, 십시일반 돈을 모금해서 전달해 줬다고 하는 너무 가슴 따뜻한 그런 뉴스를 보게 되면서, 아마 한 6개월 전 뉴스였던 것 같아요. 너무나도 참 마음이 따뜻하고, 왜냐하면 그 사랑의 빚을 지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고, 그 빚을 어떻게 갚을까 노력하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사랑의 빚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사람들입니까? 그냥 가만 내버려 두면 영원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악을 행하며, 오히려 배신하며 살았던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사,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그 놀라운 사랑을 우리가 받아서,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받았던 그 하나님의 사랑에 빚을 진 우리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사람들인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빚을 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날마다 날마다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인가? 빚진 자다! 채무자다. 우리가 사랑의 빚을 너무나도 많이 지고 있는 사람들이다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항상 자기 자신을 표현할 때 빚진 자라고 표현했습니다. 로마서 1장 14절 말씀에 보면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다.” 바울 사도가 지금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엄청나게 많은 노력을 했는데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죽을 뻔한 위기를 몇 번씩 넘겨야만 했었고, 아픔 가운데 슬픔 가운데 고통 가운데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사람들이 던지는 돌에 맞기도 하고 엄청난 고통을 당하면서 복음을 전하러 다녔는데, 그 복음을 전할 때 어떤 마음을 가지고 다녔냐면 “내가 무엇인가 시혜를 베푼다.” 내가 무슨 은혜를 베푼다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러 다닌 것이 아니라, 나는 빚진 자다. 내가 빚졌기 때문에 그 빚을 갚기 위해서 이 일을 한다고 하는 그런 빚진 자의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러 다닌 것이죠. 그래서 자랑할 것이 없고, 교만할 것이 없고, 내가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하는 그런 겸손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한 것이죠.


고린도전서 9장 16절의 말씀에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니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부채를 갚지 아니하면, 큰 화가 미치잖아요? 차압을 당하기도 하고, 고통당하게 될 것인데, 내가 엄청난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큰 화가 될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죠. 따라서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도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많고 빚진 것이 많기에, 이 빚을 늘 갚으면서 갚고 또 갚아도 없어지지 않는 그 빚, 우리가 죽는 그 순간까지라도 아무리 갚아 나간다고 할지라도 그 빚을 다 청산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큰 빚을 지고 있다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우리가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며 은혜를 베풀며 사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랑을 베풀게 될 때 우리들의 마음은 기쁨을 얻게 됩니다. 사랑을 베풀면 우리들의 마음이 기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이고, 그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있기 때문에, 우리가 무엇인가 선한 일을 하고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고 강도 만난 자를 위해서 우리가 선을 베풀면 우리들의 마음이 기쁨이 넘치게 되어 있어요. 그게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마음의 그 성향이에요. 우리가 사랑을 베풀면 내가 기쁨이 생기는 거죠. 내게 감사가 넘치는 거죠. 오히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악을 행하고 미워하고 분노를 표출하면 내가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나는 더 고통 가운데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사랑을 베풀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면 얼마나 행복해지는지 몰라요. 해보세요. 정말 기뻐요. 너무너무 좋아요. 만일 우리의 삶 가운데 기쁨이 없다고 한다면, 심각하게 자기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가 기쁨이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 내가 행복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사랑해야 될 것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랑을 베푸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기쁨을 사모하며 살아가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베풀며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기쁨만 넘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아픔도 있습니다. 사랑을 베풀면 좋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아픔도 있는 것이죠. 왜냐하면 그 사랑을 베풀 때 우리가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을 당하게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사랑을 베푼다고 했는데, 오히려 나를 비난하기도 하고 내가 사랑으로 선한 일인데, 오히려 나를 더 미워하기도 하고 나를 향해서 욕하고 비난하는 경험을 우리가 종종 하게 될 거예요. 혹시 그런 경험해 보셨습니까? 내가 정말 사랑하고 있는데 오히려 내가 더 비난을 당한 그런 경험을 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마 있으실 것 같아요. 그런 일을 당할 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어떤 생각이 드냐면 차라리 아무 짓도 하지 않을걸. 내가 사랑을 베풀지 않았더라고 한다면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았을 텐데, 내가 괜히 사랑한다고 했다가, 내가 괜히 섬긴다고 했다가, 내가 오히려 더 억울한 일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다시는 사랑하지 않겠다고 그렇게 말하는 경우를 얼마나 자주 보는지 모릅니다.


유행가 가사 가운데 보면요. 이런 가사가 있어요. 아마 다 아실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 “정 주지 않으리라.” 옛날에 많이 들어봤던 노래죠? 장경수 작사 장욱조 작곡의 “정 주지 않으리라.”라고 하는 가사인데요. “정 주지 않으리라. 정 주지 않으리라. 사랑보다 깊은 정을 두 번 다시 주지 않으리라.” 내가 사랑한다고 했고, 내가 정을 다 쏟아부어 주었는데, 결국 돌아온 것은 배신을 당하고, 결국 사랑에 쓰디쓴 그 아픔만을 경험하게 될 때, 그 마음 가운데 어떤 생각이 드냐 하면, 다시는 이런 아픔을 겪지 않기 위해서 다시는 내가 정 주지 않을 거다. 다시는 내가 사랑하지 않을 거다. 다시는 내가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을 거라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갖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도 그런 분들이 종종 계셔요. 예전에 주를 위해서 열심히 헌신하고 봉사했던 분이에요. 교회에서 반주하기도 했어요. 봉사하기도 했어요. 교회에서 여러 가지 헌신과 수고를 했어요. 청소도 하고 정말 내 모든 것들을 다 바치면서 열심히 수고하고 애썼는데, 그런데 돌아온 것은 사람들의 비아냥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밖에 못하냐는 비난을 받게 될 때도 있습니다. 왜 그런 식으로 일을 했냐고 오히려 비난하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경우도 많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그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어떤 생각이 드냐면, “다시는 이런 일 하나 보자.” 다시는 못하겠다는 거예요. 다시는 주를 위해서 헌신 안 하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배는 드리지만, 예배는 드리지만, 내가 그렇게 다시 봉사하고 헌신하고 남을 위해서 수고하다가 그렇게 비난당하는 일을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다고 자신의 마음을 꼭 닫아버리는 경우를 종종 만나게 되는 것이죠.


제가 예전에 미국에 있을 때 미국 한인교회의 아주 큰 사명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유학 온 학생들이 있으면, 그 유학 온 학생들을 사랑하고 돌보아주고 그들에게 복음 전하는 일이 아주 중요한 사명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우들에게 이야기를 한 거죠. 우리 이 필라델피아 지역에 수많은 유학생들이 오는데, 그들이 유학 오면서 얼마나 마음이 힘들겠나? 생활이 너무나도 힘들지 않겠나? 우리가 좀 도와줍시다. 그들에게 맛있는 밥도 좀 해주고, 필요하다고 한다면 통역도 해주고, 여러 가지 많은 일들을 “좀 도와주자” 하면서, 제가 얼마나 감동적으로 설교를 했는지 몰라요. 그런데 우리 교우들이 반응이 없어요. 그러면서 저에게 슬쩍 와서 얘기합니다. 목사님 유학생들 어차피 우리 교인 안 됩니다. 그러니 유학생들은 잊어버리시고, “우리 교민들을 집중해서 우리가 복음을 전합시다.” 그러는 거예요. 왜 이렇게 됐는가 하고 알아봤더니, 사랑을 베풀었는데 돌아온 것이 너무나도 쓰디쓴 열매만 받은 거예요. 우리가 철저히 잘 도와주고 헌신하고 사랑을 많이 베풀어주면, 그들이 우리들에게 똑같이 사랑을 베풀어주고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그 사람들이 많은 걸 도움을 받다가 나중에 비난하고 떠나버린다는 거예요. 욕하고 떠나버린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 경험을 너무나도 크게 했기 때문에 그 성도들의 마음 가운데 다시는 우리가 이 일을 하지 않겠다. 다시는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의 문을 꼭 닫아놓은 경우가 있어서, 그래서 그 사람들의 마음을 설득시키고 설득하는 게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그게 자연스러운 우리들의 감정인 것 같아요. 불에 대본 사람은 불 만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마음이고, 물에 한번 빠져본 사람은 물을 깎아야 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수영을 못해요. 왜냐하면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 강 속에서 놀다가 물에 빠져서 죽을 뻔했어요. 그 경험을 하고 난 다음에 물이 저는 두려운 거예요. 수영하는 게 너무 힘들어요. 물에만 가면 겁이 나서 수영을 못합니다. 어쩌면 이게 우리들의 자연스러운 마음인데, 우리가 사랑을 하다가, 친하게 지내다가 서로 갈라서게 되고, 사랑을 베풀었는데 오히려 비난당하는 일을 경험하게 될 때마다, 우리가 사랑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 다시는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 성경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사랑의 빚을 지고 있는데 그 빚은 갚아도 갚아도 영원히 갚을 수 없는 빚이기에, 우리가 끝까지 사랑을 베풀며,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 성도의 바른 태도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오늘 또 우리들의 마음을 변화시켜 “사랑할 수 있는 자가 되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언젠가 제가 한번 소개를 해드렸을 것이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유명한 영국의 문필가 C.S. 루이스가 했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한번 보시죠. 제가 그 C.S. 루이스의 말을 좀 번역을 했는데요. “사랑하는 것은 상처받는 것이다. 어떤 대상이든 사랑해 보라. 그러면 그대의 마음은 찢어질 것이다. 아마도 깨져버릴 것이다. 그대의 마음이 전혀 손상되지 않기를 바란다면, 아무에게도 그대의 마음을 주지 마라. 심지어 반려동물에게조차도 주지 마라. 그저 취미나 약한 애 사치로 꼭꼭 감싸버려라. 그 누구와도 그 무엇과도 얽히지 마라. 그대의 마음을 관에 안전하게 넣고 잠그라. 그대의 이기심에 이기심이라고 하는 관 속에. 그러면 그 관에서 안전하고 어둡고 아무런 움직임도 없고 공기조차도 없는 그 관 속에서, 그대의 마음은 서서히 변해 갈 것이다. 결코 부서지지도 않을 것이고, 그 무엇도 건드리지도, 관통하지도 못하게 될 거야. 결코 되살릴 수도 없을 거야.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게 될 거니까. 사랑하는 것이란 무엇인가? 상처를 받을 수 있게 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픔을 피하면, 열매를 거둘 수가 없는 것이죠.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라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지만, 그 아픔을 피하기 위해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면 기쁨도 행복도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사랑에 빚을 지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도 사랑을 갚아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율법이 무엇인가요? 로마서 13장 8절 9절 말씀을 다시 한번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13장 8절 9절 말씀인데요.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율법의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뜻이죠.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그 계명들이 무엇입니까? 그 율법들을 하나하나 다 알 수 없어요. 다 몰라도 돼요. 우리가 던질 수 있는 질문이 있다고 한다면, 과연 이것이 우리가 사랑하는 방법인가 사랑하지 않는 방법인가를 던지면, 그 질문을 던지면 율법이 무엇인가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그 어느 날 다윗이라고 하는 사람이 아히멜렉 제사장을 찾아왔을 때, 그 아히멜렉 제사장은 성전에서 진설병을 꺼내서 다윗에게 주었습니다. 허기져서 배고파서 괴로워하고 있는 다윗과 소년들을 위해서 다윗이 이야기를 합니다. 여기 먹을 것이 없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본 아이멜렉 제사장은 하나님의 율법을 생각하면서, 진설병은 제사장만 먹을 수 있으니까, 일반 사람들이 먹을 수 없다고 하는 그 율법을 생각해 낸 것이 아니라, 지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지금 이 순간에 이 다윗에게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시는가? 질문을 던졌을 때, 그에게 빵을 주고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라고 생각하고, 진설병을 다윗과 그 소년들에게 준 것이죠. 율법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가? 과연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가? 우리가 질문을 던져야 되는 것이고, 그 질문을 통해서, 그 대답이 나왔다고 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고 우리가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야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안타깝게도 수많은 우리 종교인이 되어버리면,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율법의 문자적인 조항에 얽매인 종교인이 되어버리면, 그 율법의 문자들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에 거슬리는 행동들을 할 때가 많습니다. 특별히 안식일법도 마찬가지인데요. 안식일법은 일주일에 하루를 쉬라고 하는 하나님의 법인데, 하나님께서 이 법을 왜 만드셨을까요? 안식일법을 주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돈을 우상으로 섬기지 말고, 차라리 하루를 일하지 않아도 좋으니, 내가 데리고 있는 그 직원들에게, 그 종들에게 일주일 내내 일을 시키지 말고, 하루는 그들에게 쉼을 주라고 하는 것이 안식일법이에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그 사람들에게 쉼을 줘라. 그들을 자꾸만 부려먹어서 일주일 내내 착취해서 고통을 주지 말고, 일주일 중에 하루는 그들에게 쉼을 주라고 하는 것이 안식일법인 것이죠.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 안식일법을 망각해 버리고, 그 목적을 잊어버리고, 바리새인들은 어떤 일을 하게 되는 겁니까? 안식일날 밀 이삭을 잘라먹었다고 비난하는 거예요. 안식일날 병자를 고쳤다고 비난하는 거죠. 율법의 그 중요한 그 의미를 잊어버린 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 하나님의 율법의 핵심인데, 그것을 잊어버리고 살아가서는 안 된다 이 말이죠.   왜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면서 살아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사랑의 빚을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죽으시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 엄청난 사랑의 빚을 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해야 하는 것이죠. 마태복음 18장의 말씀을 보면 1만 달란트 빚진 종의 비유가 나옵니다.


하루는 그 임금님이 그 종에게 1만 달란트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돈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면제해 준 것이죠. 그래서 빚을 탕감받았으니까 이 사람은 더 이상 빚진 자가 아닌 것인가요? 아니에요. 돈은 탕감받았지만, 이 사람이 새로운 빚을 얻게 된 거예요. 그 빚이 어떤 빚입니까? 사랑의 빚을 지게 된 거죠. 임금님으로부터 사랑의 빚을 내가 새롭게 지게 되었다고 한다면, 이제는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다른 사람들에게 그 빚을 갚으면서 살아야 돼요. 사랑을 베풀면서 살아야 돼요. 그런데 그 종이 길을 가다가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그 사람을 만나고 그 돈을 내놓으라고 그 사람의 멱살을 붙잡고, 그 사람을 감옥에 처넣으면서 포악하게 행동하는 그 모습을 보게 될 때, 결국 그 사랑의 빚을 갚지 아니한 그 사람을 감옥 속에 다시 집어넣었다고 하는 예수님의 비유가 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될 때, 우리가 빚진 자다 하나님의 사랑에 빚을 진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면, 오늘 다시 하나님 앞에 엎드리면서, “주여, 사랑의 빚을 늘 기억하며, 겸손하게 그 사랑을 갚으며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옵소서.” “주님의 사랑을 늘 마음속에 품고 살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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