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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있는 권세 (롬 13:1-7)

어제 아시안게임 2차전이 있었는데, 혹시 보셨습니까? 잘 보시는군요. 감사합니다. 어제 경기를 보면서 참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게 쉬운 일이 아니구나”라고 하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어떠한 경기도 쉬운 경기가 없고, 어떠한 단계에서도 여차하면, 잘못된 실수 하나에 우리나라가 무너질 수도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일이 쉬운 게 아니고, 당연한 게 아니고, 정말 집중해야 되고, 정말 최선을 다해야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승컵을 들어 올리기 위해서 넘어야 할 가장 큰 산이 있다고 하면 무엇이겠습니까? 가장 큰 장애물이 있다고 한다면 무엇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저는 첫 번째 경기를 보면서, 어쩌면 심판이 가장 큰 장애물이 아닐까? 심판이 가장 큰 산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월요일 날 바레인전과의 경기가 있을 때, 중국의 마닝 심판은 우리 한국 선수들에게 5장의 경고 카드를 막 뽑아 드는데, 반면에 상대팀 선수를 향해서는 그냥 경고 카드도 올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파울조차 불지 않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참 너무나도 힘들구나. 그런 상황에서 싸워야만 한 우리 선수들을 보면서 정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생각 안 들으셨습니까? 들었을 것 같아요.


만일 그런 편파 판정을 일삼는 불공평한 심판이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편파 판정을 일삼는 그런 잘못된 판결에 대해서 항의하면 항의할수록 오히려 더 불이익을 당하게 되어 있는, 그런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경기를 하고, 그리고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것은 너무나도 힘이 들 것처럼 생각이 됐습니다. 저는 그 경기를 보면서 마음속에 엄청난 화가 치미로 솟아오르는 걸 느꼈는데요. 그 심판을 향해서 달려가서 때리고, 그리고 선수들 다 “우리 경기 못하겠다고 보이콧이라도 해야 되지 않을까?”라고 하는 그런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작년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되는데요. 튀르키예의 축구 리그에서 지난 12월 12일 날 앙카라귀쥐라고 하는 팀과 리제스포르라고 하는 팀이 경기를 하는 가운데, 홈팀이었던 앙카라귀쥐팀이 1대 0으로 앞서 나갔지만 석연치 않은 심판 판정으로 인해서 경기는 불투명하게 된 것이죠. 심판의 판정으로 인해서 선수 1명이 퇴장당하고, 어려운 경기 가운데 결국 추가 시간에 1대 1로 이길 경기를 비게 되자, 이에 격분한 구단주가 뛰어들어가서 심판을 폭행했던 이 사건이 있었습니다. 뉴스를 들어보셨습니까? 들어왔을 것 같아요. 그리고 다시 일주일 뒤에 이스탄불 스포르팀은 심판 판정에 불만을 품은 구단주가 후반 23분에 모든 선수들을 불러들이고, 경기를 보이콧하는 그런 일들이 튀르키예에서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일들이 축구 경기장에서만 일어나는 일이겠습니까? 어쩌면 축구 경기장은 그나마 가장 공평하고 그나마 공정하게 운영이 되는 경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쩌면 그것보다도 더 심한 일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나도 자주 발생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재판을 하는 재판관이, 그리고 어떤 일을 결정해야 되는 권한을 가진 그 결정권자가, 옳고 그름의 판단을 내려 보도하는 언론이 공의롭고 정의롭게 판단하고 보도하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성으로 가득한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일들을 우리는 매일 경험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만나는 그 불공평함,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만나는 그런 불공정함, 그것 때문에 고통스러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죠. 심지어 우리 어린아이들의 눈에는 우리 부모님들의 판단이나 선생님들의 결정이 너무나도 불공정하고 불합리해 보일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왜 이렇게 억울하게 판단을 하는가? 왜 이렇게 참 억울하게 불공정하게 하는가에서 불만을 가지고 있을 때가 너무나도 많이 있는 것이죠. 이 세상에서 공정하고 객관적인 판단이나 결정이나 보도가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언제나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하는 말처럼, 자신의 이익에 따라서, 자신의 탐욕에 따라서, 잘못된 판결을 내리고, 잘못된 결정을 하고, 그리고 억울한 일들을 하게 되는 그런 기울어져 있는 운동장에서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것을 우리가 느끼게 되는 것이죠.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씀이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13장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지금 로마서의 말씀을 쭉 살펴보고 있는 가운데 로마서 13장의 말씀도 묵상하게 되었는데요.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은 우리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위에 있는 권세에게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위에 있는 권세에게 복종해야 되는 것인데, 왜 복종해야 되는가? 그 권세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세이기 때문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죠. 이 세상의 모든 권세는 그 어느 것도 하나님께서 세우시지 않은 권세가 없고,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세이기 때문에 그 권세 앞에 복종해야 하는 것이고, 만일 그 권세를 가진 사람에게 반항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라는 게 오늘 로마서 13장의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불합리한 결정을 내리고 재판을 하고, 그리고 잘못된 보도를 하고 있는, 그러한 악한 권세, 불공평한 판결, 악한 통치에도 우리가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이 그에 순응하는 것이 그게 우리 성도들이 가져야 될 믿음의 자세인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 가장 중요한 원칙이 있다고 한다면, 성경 구절 한두 구절에 보고, 그 한두 구절에 있는 말씀을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해주고 계시는지를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하는 것이죠.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한두 구절에만 집중할 게 아니라,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선 성경 말씀을 우리가 쭉 살펴보면, 베드로는 유대 당국자들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유대 당국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겁박하면서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파하지 말라고 겁박을 했는데, 그 유대 당국자들의 권세를 인정하고 순종하면서, 그다음부터 조용히 살았던 것이 아니라, 베드로는 이 말을 거부했습니다. 사도행전 4장 19절에서부터 20절의 말씀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렇게 이야기를 한 것이죠. 다시는 예수의 이름을 전파하지 말라고 하는 유대의 당국자들, 유대의 권세를 잡은 사람들의 그 명령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천하지 아니할 수 없고, 우리는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을 듣는다고 하면서 유대 당국자들의 명령을 거역했던 말씀이, 거역했다고 하는 것이 사도행전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잘못한 것일까요? 베드로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이러한 베드로와 요한의 행동이 정당하고, 우리 성도들이 본받아야 될 믿음의 자세라고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더 나아가서 다니엘과 세 친구들도 역시 똑같이 행동한 것이죠.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왕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금신상을 만들어 놓고 그 금신상 앞에 모두가 다 절해야만 하는 것이고, 만일 절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용광로 속에 집어던져 넣어서 그래서 죽이겠다고 하는 그런 엄한 명령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그러한 왕의 명령에 눈 하나 깜빡하지 아니하면서 거부하고 반응했던 것이죠. 다니엘서 3장 16절에서부터 18절의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느브갓네살 왕이 바벨론 나라를 통치하고 있는 다스리는 왕이었고,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세를 가지고 있는 왕이었지만, 그 왕의 명령에 복종하고 따른 것이 아니라, 그 명령을 거부하며, 우리는 왕의 명령을 들을 수 없다고 반항했던 것이 다니엘의 세 친구의 모습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니엘도 역시 마찬가지였는데요. 바벨론 나라의 법이 하나 만들어졌습니다. 그 며칠 동안의 기간 동안에는 다른 신들에게 예배하거나 기도하거나 아무런 종교적인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법령이 만들어진 것이죠. 법을 만들고 그 법에 대해서 왕이 인장을 찍어, 그 인장을 찍어서 그 법령을 공포하여서, 그 법이 발효되었는데, 다니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계속해서 기도했습니다. 다니엘서 6장 10절의 말씀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바벨론에 세워진 율법이 무엇입니까? 법이 무엇입니까? 다른 신에게 기도하지 마라. 다른 신에게 예배하지 말라고 하는 국법이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다니엘은 그러한 법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의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죠.


그러므로 참된 믿음은 무엇인가? 위에 있는 권세에 무조건 복종해서 가만히 있는 것이, 그게 참된 믿음이 아니라, 잘못된 명령이라고 한다면 거부하고, 바른 길을 따라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참된 믿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당시에 그 종교 권력을 잡고 있는 교황청의 명령에 항거하면서, 복음을 증거하고 교회를 개혁하는 그런 엄청난 일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국왕들이 그 종교개혁자들을 핍박하고 박해했지만, 그러한 핍박에도 전혀 굴하지 아니하고, 계속해서 종교 개혁을 일으켜, 우리가 참된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만든 터전을 닦았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 초기 기독교인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는데요. 왜정 시대 때 일제 제국은 우리 성도들을 향해서 신사 참배를 강요했습니다. 그 당시에 권세를 잡은 사람은 일본 제국이고, 일본 천왕의 명령에 따라서 우리가 신사 참배를 해야 된다고 했을 때, 거기에 복종하고 순종한 것이 아니라, 목숨을 내놓더라도, 감옥에 가더라도 내가 공부를 하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러한 잘못된 명령에 따를 수 없다고 했던 것이, 신사 참배를 거부했던 우리 선조들의 믿음이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권세 가진 사람들에게 항거하고 불순종하는 것이 그게 성경의 가르침인 것이지, 무조건 권세에 다 복종하는 게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옳지, 이 세상 권세 잡은 자들이 명령하는 그런 사악한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되는 것이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는 무엇입니까?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그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그게 우리들의 성도의 자세인 것이지, 악한 통치에 따라서 그냥 협조하고, 악한 통치에 따라 살아가는, 그런 힘이 없는 그런 무기력한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게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왜 로마서 13장에서는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모두가 다 모든 명령을 다 순종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왜 로마서 13장에서는 위에 있는 권세에게 복종해야 되는 것이고 복종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지금까지 설명드린 것처럼, 그러니까 우리가 악한 명령 잘못된 통치에도, 무조건 순응해야 된다고 하는 의미에서 이 말씀을 해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씀을 해주시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국가가 행하는 정상적인 그런 역할, 국가가 행하는 그런 정상적인 그런 기능에, 우리가 협력하고 순응하는 것이 옳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기 위해서입니다.   국가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을 전제하는 가운데 원론적인 말씀을 로마서 13장에서 해주고 계시는 것이죠. 국가의 기능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같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죠. 개인이 자신의 자유를 무한대로 사용하다 보면, 그런 개인들의 자유가 서로 충돌이 되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그렇게 나쁜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니까, 그래서 자신들의 자유를 조금씩 제한하고, 그리고 법질서 안에서 행동하게 만들어서, 모든 사람들이 함께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도록 하는 게 바로 국가의 기능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한 기능들에 우리가 순종하며 복종해야 된다고 하는 것을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이죠.


로마서 13장 3절은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다스리는 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다시 말하자면 이 권세가 어떤 권세인가? 우리로 하여금 선을 행하게 만드는 권세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로 하여금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그런 조정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 권세라고 하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가 그러한 정상적인 국가의 기능 가운데 있다고 한다면, 그 안에서 선을 행하고 우리가 바른 일을 행한다면, 권세를 두려워할 일이 전혀 없는 것이고, 만일 우리가 악을 행한다고 한다면, 오히려 권세를 두려워하는 것이고, 징계를 받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국가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거라고 한다면, 그 국가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이죠. 하나님의 사역자라고 하는 겁니다. 국가의 권세를 잡은 사람이 그냥 아무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역자고, 하나님의 대리자이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그런 대리자이기 때문에, 그 명령에 순종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3장 4절도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그러니까 지금 로마서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은 원론적인 말씀을 해주고 계시는 겁니다. 국가가 있고, 권세를 잡은 사람이 있고, 어떤 판단하는 자가 있고 결정하는 자가 있고 모든 일들을 권세를 가지고 행하는 자가 있는데, 그 권세가 정상적인 그런 기능을 하고 있다고 한다면, 선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선을 잘 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악을 행하는 사람을 징벌하는 그런 국가의 정상적인 기능이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당연히 순종하고 당연히 복종해야 된다는 것이죠.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항상 주의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성경이 원론적인 차원에서 말씀을 해 주시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잠언서의 말씀을 매주 수요일마다 살펴보고 있는데, 이 잠언서의 말씀도 역시 마찬가지예요. 어떤 원론적인 상황 가운데서 우리들의 얻어야 될 교훈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 그러나 예외적인 일들을 찾아보라고 한다면 예외가 너무나도 많을 거예요. 이런 예외 저런 예외 이런 케이스 저런 케이스, 예외적인 케이스들이 많이 있는데, 그 모든 것들을 다 말하는 것이 아니라, 원론적인 면에서, 원칙적인 면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는가? 권세가 있다고 한다면, 복종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게 원론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결론은 무엇입니까? 선한 통치라고 한다면 복종해야 되는 것이고, 나쁜 통치라고 한다면 항거하는 것이 그게 옳은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적용하는 데는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칼로 무를 베듯이 선한 통치와 악한 통치를 아주 깔끔하게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이 우리들에게 없고, 이 세상은 모든 것들이 다 복잡하게 뒤섞여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디까지가 선한 통치이고, 어디서부터가 악한 통치인가를 구분하기가 굉장히 어렵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로마서 13장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이 있는데요. 그것은 이 말씀이 누구에게 1차적으로 주어졌는가입니다. 이 말씀이 1차적으로 누구에게 주어져 있죠? 그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지금 마주하고 있는 상황은 어떤 상황일까요? 그들이 마주하고 있는 로마 국가는 어떤 나라였을까요? 로마 국가가 좋은 나라였습니까? 나쁜 나라였습니까? 괜찮은 나라입니까? 아주 옳지 않은 나라였습니까? 사실 로마 나라는 정말 좋지 않은 나라였습니다. 그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을 핍박하고 압박하던, 압제하던 그런 나라였을 것이고요. 오늘날의 민주국가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뿐만 아니라 로마는 황제에 대한 숭배를 하도록 황제 숭배를 강요하던 나라였습니다. 그러니까, 로마 나라가 좋은 나라예요? 나쁜 나라예요? 나쁜 나라란 말이죠. 괜찮은 나라가 아니라 괜찮지 않은 권세자들이 있는 나라가 로마 나라였던 것이죠. 그런데 로마서 13장에서는 그런 상황 가운데 있는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이 말씀을 해주고 계시다고 하는 것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계실 때에도 마찬가지였는데요.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로마 정부가 세금을 수탈하는 것에 대해서 엄청난 불만이 있었고 반발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로마 정부의 앞잡이들로서 세리들이 활동하고 있었는데요. 그 세리들이 악랄하게 세금을 거두어 가는 것 때문에 그들을 증오하고, 그리고 로마 정부에 대해서 항거하는 그런 상황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 종파들 가운데서는 세금을 거부해야 된다. 로마와 싸워야 된다라고 하는 그런 주장을 하는 열혈당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 가운데서 어느 날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예수님 우리가 가이사 황제에게 로마 정부에게 세금을 내야 합니까? 내지 말아야 합니까? 그런 질문을 들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아주 놀라운 대답을 해주셨죠. 아주 유명한 말씀이죠. 누가복음 20장 25절의 말씀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말씀하신 것이죠. 로마 정부가 악한 정부인데 그 악한 정부에게 세금을 바치라라고 말씀해 주신 것이 언뜻 보면 굉장히 당혹스럽습니다. 악한 정부인데 “우리가 세금을 내서 협력해야 되는가? 그래도 괜찮은가?”라고 하는 그런 질문들이 우리들에게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모든 것이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딱 나누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점이에요. 모든 대상을 선과 악, 좋은 것과 나쁜 것 이렇게 칼로 무 자르듯이 딱 나눠질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하는 것이죠. 우리는 늘 어떤 생각을 가지냐면 이분법적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양분하는 거죠. 그래서 저 사람이 우리 편이냐? 우리 편이 아니냐? 저 사람이 선한 사람이냐? 나쁜 사람이냐? 저 권세가 좋은 권세인가? 나쁜 권세인가? 그렇게 질문을 던지고 그래서 우리 편이면 무조건 좋아하고, 나쁜 편이면 저쪽 편이면 무조건 미워하고, 우리 편이면 그냥 옹호하고 두둔하는데, 우리 편이 아니라면 무조건 배척하고 비난하고 거부하는 그런 경향이 우리들에게 많이 있는 것이죠.


신앙적인 면에서도 그런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신앙적인 경우에도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늘 저에게 질문하는 것이 이거예요. “목사님, 이런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단체가 있는데, 목사님, 그 단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러면 쭉 설명을 해주면 저한테 묻습니다. “그러니까 좋다는 거예요? 나쁘다는 거예요?” 우리 편이냐 아니냐, 이단이냐 아니냐, 그걸 자꾸만 물어보는 것이죠.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아요. 이 세상이 선과 악으로 그렇게 분명하게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이죠. 좋은 사람에게도 나쁜 면이 들어있는 것이고, 나쁜 사람에게도 좋은 면이 들어있는 것이죠. 이단이 아니고 정통 교단에 있으면, 다 괜찮은가요? 그렇지 않아요. 정통 교단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악을 행하는 사람이 있고, 잘못 행하는 사람이 있고, 그래서 잘못된 길로 가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그 교회가 좋은 교회에 속해 있는가? 교단에 속해 있는가? 그것이 그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죠.


오늘 총회 주일로 지키고 있는데, 우리 교단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단 보면 좋은 점만 있을까요? 나쁜 것만 있을까요? 어떤 분들은 보면 나쁜 면 별로 좋지 않은 면들도 많이 보게 될 겁니다. 저도 그래요. 제가 우리 교단을 바라보면 좋은 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아쉬운 게 너무 많아요. 이것도 아쉽고 저것도 아쉽고 이것도 안타깝고 저것도 안타까운 것들이 많아요. 그러면 그런 것들이 있으면, 다 나쁜 것인가? 나쁘다고 이야기할 것인가? 그렇게 판단하는 게 아닌 것이죠. 우리가 쉽게 우리 편이냐 아니냐로 이분법적으로 나누면, 편리하기는 하고 그리고 안전해 보이기는 할 겁니다. 이단이냐 아니냐로 이야기하면, 편리하기도 하고, 안전해 보이기도 할 것이지만, 세상이 그렇게 간단하지도 않고,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태도는 그것은 미성숙한 것이고, 유치한, 어린아이와 같은 방식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죠. 어떤 사람들, 그렇게 극단적인 이분법을 적용해서, 어떠한 이슈에 대한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사람들을 색칠해 버리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아주 중요한 이슈들에 대해서 이 사람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가? 반대 입장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서, 무조건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이렇게 판단해 버리고 선동해 버리고, 그래서 그렇게 반대하는 그런 경향들이 많이 있는데요. 사실은 그럴 수가 없는 것이죠. 국가도 마찬가지. 국가는 어떤 국가인가? 권세는 어떤 권세인가? 위에 있는 권세는 어떤 것인가?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좋은 권세인가? 나쁜 권세인가? 그렇게 질문하면 좋은 면을 보면 좋아 보이고, 나쁜 것을 보면 나빠 보이는 거죠. 하지만 좋은 면도 있고 나쁜 면도 있는 겁니다.  

지금 초대교회 성도들,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맞닥뜨리고 있는 로마 정부는 어떤 정부였는가? 분명히 나쁜 점이 있는 겁니다. 로마 황제에 대한 숭배를 강요하고 있기 때문에 나쁜 정권임에 분명합니다. 사악한 일을 강요하고 있기 때문에 따르지 않아야 될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국가가 있기 때문에, 전쟁에서부터 나라를 보호해 주고, 우리가 장사를 하면서 그리고 농사를 지으면서 교육을 받으면서, 질서 있게 살아갈 수 있는, 질서를 유지해 주는 그런 선한 기능들도 함께 있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고 법을 지키고 질서를 지키는 것이 필요한 것이죠. 하지만 어떤 순간에는 그 옛날 베드로와 요한이 그랬던 것처럼, 그 옛날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그랬던 것처럼, 종교개혁자들이 그랬고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항거해야 될 그러한 면도 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로마서 13장의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를 다루고 있는 로마서 12장 이후에 있는 말씀의 한 구절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무엇을 살펴보았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 이웃들과 관련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고 하는 그 질문에 대해서 이웃들에게 선을 행하며 살아야 된다. 누가 나를 핍박하고 박해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을 저주하지 말고 오히려 축복해야 된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원수가 있다고 한다면 그 원수 갚는 것을 하나님께 맡겨버리고, 그리고 우리는 오로지 선으로 악을 이겨야 된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이제 오늘 로마서 13장의 말씀은 그러면 우리를 핍박하고 있고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는 “권세 잡은 자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라고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인데요. 권세 잡은 사람들이 다양하죠. 노예라고 한다면 그 노예의 주인이 자신의 권세 잡은 자일 것인데요. 노예는 주인에게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군인이라고 한다면 군인의 상관들에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직장인이라고 한다면 직장의 상사에게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자녀들이라고 한다면 부모에게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라고 하는 이 질문에 대하여 위에 있는 권세에 순종하고 복종해야 된다. 그 권세는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이기 때문에, 마치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듯이, 우리 위에 있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이 맞다고 원론적으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죠. 대체로 우리가 순종하고 복종하는 게 맞는 겁니다. 그래야 축구 경기가 축구 경기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죠. 편파 판정이 나오고 잘못된 판정이 나와도, 그래도 그걸 박차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판정을 이기고 경기에서 승리할 실력을 갖추면서 승리해 나갈 필요가 있는 것이죠. 대체로 순종하고 복종해야 되는데, 때로는 거부해야 될 때도 있다고 하는 것이죠.


우리 성도들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가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세우셨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고 우리가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입니다. 순종은 무엇입니까? 복종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내가 다 이해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내가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따르는 것이 순종이고 따르는 것이 복종입니다. 내가 이해해야만 따르고 내가 납득이 되어서야만 따른다고 하는 것은 진정한 순종이나 복종이라고 말할 수가 없어요. 물론 이렇게 말하는 것이 상당히 위험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이 굉장히 조심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악한 지도자가 무조건적인 순종, 맹목적인 추종을 요구하면서 결국 우리를 파멸의 길로 인도할 가능성을 열어주는 말이기 때문에, 굉장히 위험한 말이기 때문에 굉장히 조심스럽게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들에게 순종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성경적인 개념에서 순종은 무엇인가? 내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또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세이기 때문에, 내가 이해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순종하는 것이 그게 바른 순종인 것이죠.  

우리에게는 주인이 되려는 경향이 있는데요. 내가 이해가 돼야만 따르고 내가 납득이 돼야만 순종하겠다고 하는 것은 진정한 순종이 아닌 겁니다. 특별히 우리 자녀들이 그렇죠. 자녀들이 부모의 마음을 이해가 이해할 수 있습니까? 납득이 됩니까? 안 돼요. 어느 날 부모님이 말하는 겁니다. “얘야, 자려고 하면 이를 닦고 자야지.” 그러면 아이가 이야기해요. “어제 이, 이를 닦았는데, 왜 또 닦아야 돼요?” 이해가 안 돼요. 그래도 부모가 자녀들에게 해주시는 말씀이 있다고 한다면, 나를 파멸로 이끌기 위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괴롭게 하기 위해서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해 주시기 때문에, 나의 유익과 나의 복지를 위해서 해주신다고 하는 것을 믿고 따라가야 하는 것이죠. 게임을 더 하고 싶은데, 하는 말이 “이제는 게임기를 끄고 이제는 잠을 자야지” 하면, “더 하고 싶은데, 왜 꺼요?”라고 말할 게 아니라, 부모님이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라고 하는 사실을 믿고 순종하는 게, 그게 부모를 순종하는 거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위에 있는 권세에 순종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훈련을 해 가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따라갔습니다. 어느 날 네 본토 친척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내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했을 때, 어디로 가라고 목적지도 알려주지 않고, 그냥 가라고 하는 말을 누가 이해하기가 쉽겠어요? 하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니까, 하나님을 믿고 따라간 것이죠. 어느 날 하나밖에 없는 네 아들 네 독자를 하나님께 바치라고 했을 때, 그 말을 누가 이해할 수 있고 누가 따를 수가 있겠어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따르고 순종하는 가운데 믿음의 사람이 된 줄로 믿습니다.   원하기는 저와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순종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가 교만한 마음의 태도를 내려놓고, 우리가 권세 있는 것에 순종하며 복종하는 가운데, 그리고 하나님 앞에 순종의 길을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 주님께서도 순종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목숨을 내어놓으라고 하는 그 하나님의 말씀에, “주님의 뜻이라면,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고백하며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주셨고, 그 피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먼저 우리의 마음이 교만해서, 복종하며 낮은 자리에 서기보다는, 내가 주인이 되길 원했고, 내가 내 마음대로 하고 싶었던 그런 마음들을 하나님 앞에 회개했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은 우리 부부를 향해서 피차 복종하라고 말씀하고 계셔요. 남편은 아내에게 복종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우리 자녀는 부모에게 복종하고, 위에 있는 권세가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라고 믿고, 그렇게 복종하는 삶, 세상 주관자들처럼 높은 곳에 올라가 사는 게, 그게 바른 길이 아니라, 낮아져서 순종하는 삶이 복된 길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죄성이 너무나도 강해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면 거부하기 쉽고, 따르기 어려웠고, 마치 어린아이들처럼 부모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그렇게 행동한 적이 너무나도 많았다는 것을 회개하면서, 하나님 순종하며 겸손한 마음으로 살게 해 주옵소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더욱더 순종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옵소서. 오늘 기도하며 나가는 시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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