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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종 (잠 17:2)

이번 영상은 기술적인 문제로 영상와 음성이 맞지 않게 된 점 양해바랍니다.

오늘은 한 구절만 살펴보려고 합니다. 잠언서 17장 2절의 말씀을 살펴보려고 하고 있는데요. 잠언서 17장 2절 말씀은 종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7장 2절 말씀. “슬기로운 종은 부끄러운 짓을 하는 주인의 아들을 다스리겠고, 또 형제들 중에서 유업을 나누어 얻으리라.”라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종들 중에서도 슬기로운 종은 어떠한 위치에까지 올라갈 수 있겠는가? 종들 중에서도 슬기로운 종은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주인의 자녀를 다스리는 위치까지 올라갈 수 있겠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여기서 다스린다고 했을 때, 이 다스린다고 하는 말은 히브리어로 “마샬”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마샬”이라고 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통치하다” “다스리다”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요. 통치하고 다스리는 일은 왕이 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왕이 백성을 통치하는 것처럼, 왕이 백성을 다스리는 것처럼, 종이 주인의 아들을 그렇게 다스리게 될 것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주인의 자녀가 종보다 더 높은 신분이겠지만, 종이 슬기로운 종이라고 한다면, 심지어 자신의 주인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을지라도, (주인의 아들은) 결국 자신의 주인이잖아요? 주인의 아들도 결국 자신의 주인인 것인데, 그 주인인 주인의 아들을, 그 종이 왕처럼 다스릴 수 있다. “왕처럼 통치할 수 있다.”라고 오늘 잠언서 17장 2절 가운데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종은 형제들과 함께 유산을 나누어 얻을 수 있겠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종은 주인으로부터 유산을 받을 만한 자격이 되지 않습니다. 유산은 누구에게 줍니까? 상속자에게 주는 것이죠. 아들 딸들에게 주는 것이지, 종들에게 주는 법이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슬기로운 종은 어떻게 되는가? 마치 그 주인의 자녀들인 것처럼, 다른 형제들과 함께 그 유산을 나누어 물려받을 수 있겠다고 표현한 것이 오늘 잠언서 17장 2절의 말씀입니다.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종이 정말 주인의 아들을 왕처럼 다스리기도 하고, 그리고 그 종이 주인의 그 유산을 상속받을 정도로, 그렇게 마치 자녀처럼 취급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까지 올라가는 것이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아마 현실 세계에서는 거의 가능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데, 그런데 실제로 그런 종이 성경에 한 명 있었습니다. 누가 그런 종이었죠? 요셉이라고 하는 종입니다. 요셉은 노예로 팔려서 애굽 땅에 왔습니다. 그리고 보디발 장군의 집에 들어가서, 노예로서 살기 시작했는데, 그 요셉은 슬기로운 종이 되었습니다. 요셉은 슬기로운 종이 됐는데, 그 슬기로운 종이 됐다고 하는 말의 의미는 어떤 종일까요? 누가 슬기로운 종인가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종이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종이 슬기로운 종이고, 하나님 앞에서 행동할 줄 아는 종이 바로 슬기로운 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보디발을, 그 자신의 주인을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서 섬겨주는 가운데, 보디발은 그 요셉을 보면서, 이 사람이라고 한다면 내가 모든 것을 다 맡겨도 되겠다. “이 요셉이라고 한다면 우리 집안의 모든 일을 다 맡겨도 되겠다.”라고 믿고 신뢰하면서, 요셉을 전폭적으로 믿어준 것이죠. 마치 자기 아들처럼 믿어준 것이고, 자신의 모든 것들을 그 요셉이 관장할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들어 주었던 것입니다. 요셉은 그 보디발을 주인을 향해서 어떻게 섬겼을까요? 노예로서 그 요셉은 어떻게 그 집에서 섬겼을까요? 아주 최선을 다해서 섬겼을 것이라고 생각이 드는데, 마치 신약 성경에서 해주셨던 권면의 말씀을 요셉이 들은 것만 같습니다.


에베소서 6장 5절에서부터 8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누구께 하듯 하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우리 성도들을 향해서, 성도들 중에서 노예의 신분에 있는 종의 신분에 있는 그 성도들을 향해서 권면해 주시는 말씀이, 에베소서 6장 말씀 가운데 있는데, 종들아, 너희의 주인을 어떻게 섬겨라? 마치 우리가 그리스도를 섬기듯이, 너희들의 주인을 섬기라고 권면해 주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골로새서 3장 22절에서부터 24절의 말씀 가운데서도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누구께 하듯이 하고?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우리 성도들을 종 된 자들을 향해서, 주시는 이 말씀을 마치 요셉이 들었고, 그 말씀을 깨달은 것처럼, 그래서 최선을 다해서 섬기는 아주 슬기로운 종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을 볼 수가 있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러니까 노예 제도가 정당한 제도라고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역사상 수많은 크리스천들은 성경에 종에 대한 교훈이 있기 때문에,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종에 대한 여러 가지 규정들을 말씀해 주고 있고, 종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노예 제도를 인정한 것이라고 생각을 한 크리스천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노예 해방 운동이 일어났을 때, 성경을 들어서 노예 해방을 반대한 그런 크리스천들이 있었는데요. 그런데 우리가 성경에 이런 노예 제도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고, 종에 대한 교훈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노예 제도를 인정한 것이라고 오해하시면 안 되겠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성경의 큰 그림을 보아야 하는 것이고요.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하는 것이죠. 종과 종에 대한 하나님의 가르침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노예 제도에 대한 하나님의 가르침이 있다고 한다면 무엇일까요?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있는데, 우리가 사람들을 대할 때 어떻게 사람을 대해야 되는 것이죠? 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라고 인정하고, 그 사람들을 존중해야 되는 겁니다. 모든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돼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랑할 때는 어떻게 사랑해야 됩니까? 내 이웃을 사랑하되 내 몸을 사랑하듯이,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듯이, 너희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는 주님의 말씀도 있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사람들을 사랑할 때,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도 있고, 뿐만 아니라 사람을 대할 때 어떻게 대해야 되는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으로 대하라고 하는 말씀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모든 사람들을 대할 때 존중하고 인격적으로 대하고 아주 소중하게 대해야 되는 것은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선 창세기의 말씀 가운데서는, 하나님께서 태초에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고 말씀하셨고, 야고보서 3장 8절에서부터 10절의 말씀에서도 우리가 사람들을 저주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혀는 능이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그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지은 사람으로 바라보고 존중해 줘야지, 그 사람을 저주하거나 잘못 대하거나, 아주 그 사람을 학대하거나 그 사람의 권리를 빼앗아버리는, 그런 나쁜 짓을 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 바로 야고보서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가 노예 제도를 하나님께서 인정한 것이라고 보아서는 안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노예 제도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비참하게 대우하는 것이고, 사람들을 착취하는 비인격적으로 착취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바른 성경적인 제도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전해질 때,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상황과 문화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우리들에게 전해 주셨다고 하는 것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구약시대 때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그 당시에는 형사 취수 제도라고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데리고 차지하고 하는 그런 제도도 있었고, 뿐만 아니라 일부다처 제도도 있었고, 노예 제도도 있었고, 이런 여러 가지 제도들이 있었는데, 그런 제도들이 다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제도니까, 다 갈아 뒤엎어버려라. 그렇게 혁명적인 메시지의 말씀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런 상황 가운데서 너희가 어떻게 행동해야 될 것인가? 이런 상황 가운데서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에 대한 그런 말씀들이 주어져 있는데, 이걸 통해서, 그러니까 노예 제도나 이런 것들이 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것이라고 오해하시면 안 되고, 그 문화와 제도 속에 들어 위에서 말씀해 주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해 내고,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이 아닌 당시의 문화가 무엇인가를 구분해 낼 필요가 있는 것이죠.

따라서 당시에 서로 입 맞추면서 인사를 했으면, 입 맞추어서 인사하라고 하는 말이 있으면, 오늘날도 그렇게 해야 되는 것이 아닌 거예요. 여성들이 예배할 때 두건을 쓰고 수건을 쓰고 예배하라고 하는 말씀이 있다고 해서, 오늘날도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당시 상황 속에서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일 코로나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셨다면, 너희들은 예배할 때 마스크를 쓰고 예배를 드리라고 그렇게 말씀하셨을 거예요. 그러나 마스크를 쓰라고 하는 것은 당시의 상황과 문화 속에서 하시는 말씀이지, 그런 코로나 상황이 아닌데도 마스크를 써야 될 이유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을 때 그냥 피상적으로 읽어 나갈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과, 그리고 당시의 문화가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그 문화와 하나님의 뜻을 구분해 낼 수 있는,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분해 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오늘 잠언서 17장에서 노예에 대해서 종이 어떻게 해야 되는가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있는데, 그러니까 노예 제도를 괜찮다고 장려하면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얻어야 될 교훈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오늘날에는 노예 관계 속에 있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다 자유자이고 다 그냥 아무런 노예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잠언서 17장 2절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유익하기도 하고 또한 우리들에게 적용할 점이 있다고 볼 수가 있겠는데요. 왜냐하면 우리는 그 옛날 노예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을 감당해야만 했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들도 우리들에게 사명이 있고 해야 할 일들이 있다고 하는 그 점에 있어서, 어쩌면 우리 이 종에게 주셨던 이 말씀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우리가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것이죠.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슬기로운 종처럼 살아야 되는 것이고, 그렇게 슬기로운 종처럼 살게 될 때, 그 슬기로운 종은 심지어 주인의 아들을 다스릴 정도가 되고, 또한 주인의 유산을 물려받을 정도가 되는 그런 인정받는 자가 될 것이다. “높은 위치에 올라가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이 말씀을 오늘 깊이 생각하고 묵상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셉은 어떻게 했는가? 주인의 인정을 받았어요. 집안 전체를 성실을 다해서 섬기게 될 때, 주인이 그 요셉을 인정하면서,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다 관리하도록, 아마 자기 자녀들도 다 관리하도록 그렇게 맡겼을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그래서 그는 집안 전체를 맡아서 다스리는 그런 최고의 위치까지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이 요셉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그래서 요셉의 인생은 끝나버렸던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이집트 나라의 총리가 되는, 그런 인정받는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점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 10절에서부터 12절 말씀에 보면 우리를 향해서 이렇게 권면의 말씀을 해 주십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라고 주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있든지, 어떠한 위치에 있든지, 어떠한 신분에 있든지, 어떤 직분을 맡았든지, 슬기로운 종이 되어서, 주께 하듯이 최선을 다하고 신실하게 살아가는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또한 사람으로부터 인정받는 귀한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저는 사회생활을 많이 해보지는 못했어요. 저는 사회생활을 한 것은 군대에서 5년 생활을 한 경험이 있었고, 그리고 출판사라고 하는 곳에서 한 몇 년 동안 일을 해본 경험이 있고, 그다음에 미국에서는 아르바이트하면서, 청소도 해보고, 아이들 라이드도 해보고, 또 세탁소에서 일도 해보고,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해봤지만, 그러나 그 일들의 사회생활의 경험은 여러분들에 비하면, 아주 지극히 너무나도 좁은 경험이어서, 사회생활 가운데서 예를 들 만한 게 별로 없어요. 그래서 예를 들면 어디서 예를 들어야 되냐면은, 우리 교회 생활에서 예를 드는 게 많아요. 그래서 교회 생활을 통해서 예를 들 수가 있겠는데, 제가 지금까지 경험해 본 수많은 교역자들이 있었는데요. 그 수많은 교역자들 가운데는 두 종류의 교역자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교역자들은 어떤 모습을 보였는가? 무슨 교회 일들을 하게 되면, 마지못해서 억지로 그냥 목사님이 담임 목사님이 시키니까, 그냥 마지못해서 일을 하는 그런 교역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뭔가 좀 일을 더 시킬까 봐 자꾸만 더 일을 많이 시키는 것을 두려워하고, 피하려고 하는 그런 교역자가 있었어요. 놀랍죠? 그런 교역자가 있다고 하는 게? 근데 그게 우리 인간의 모습이에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교역자들이 있었습니다.


또 한 편의 교역자들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어떤 교역자였는가? 정말 신실하게 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일하시는 그런 교역자들도 있었어요. 그래서 정말 제가 이야기하지 않아도, 정말 무엇이 교회를 위해서 좋은 일일까? 무엇이 하나님을 위한 섬김이 될까? 그렇게 신실하게 찾아가면서, 정말 신실하게 일하려고 하는 그런 교역자들도 있었다 이 말이에요. 마지못해서 억지로 하는 그런 교역자들은 안타깝게도 저랑 오랫동안 일할 수가 없고, 얼마간 같이 일하다가 그냥 헤어질 수밖에 없는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경험들이 많이 있는데요. 종종 교인들이 물어요. 왜 그분 참 좋아 보이는데, 왜 안 보여요? 그러면 제가 뭐라고 말도 못 하고 그냥 지나갑니다.   그런데 어떤 교역자들은 어떤 모습을 보였는가? 정말 신실하게 사역하는 그런 교역자가 있었어요.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제가 우리 교회에 와 있던 협동 목사님이 한 분 계셨어요. 근데 그 협동 목사님이 계셨는데, 그분은 교회에서 사례를 받는 것도 아니었고 그런 것인데, 그냥 토요일 말 와 가지고, 교회 청소도 하고, 그냥 교회를 막 닦고 막 그러는 거예요. “우리 아이들이 이곳에서 예배를 드릴 텐데, 이곳이 너무 정돈이 안 된 것 같아 청소 좀 하러 왔어요.” 하면서 청소하고, 또 다음에 보면 또 이거 이거 정리도 좀 하고 하면서 시키지 않는데도 얼마나 성실하게 일을 하든지 그 모습을 보고, 정말 많은 감동이 됐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국에 나올 때, 한국으로 이제 부임하게 돼서 나올 때, 우리 교우들을 모아놓고 여러분 제 후임으로 다른 분 찾을 필요 없고, 멀리서 찾을 필요 없고, 우리 곁에 와 있는 요 목사님 보니까, 괜찮은 목사님 같은데, 그냥 목사님 우리 제 후임으로 받아주면 어때요? 그랬더니 우리 교인들이 다 좋아해요. 다 좋아해. 적어도 그때만큼은. 그래가지고 그래가지고 아주 잘 되었던 그런 경험이 있는데요. 신실하게 자신에게 맞춰진 일들을 감당하면서, 최선을 다하는 그 사람은 결국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또한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놀라운 은혜를 받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지금 현재 어떤 위치에 있는가?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닌 것이죠. 지금 내가 왕의 위치에 있는가? 지금 내가 종의 위치에 있는가? 지금 내가 현재 어느 위치에 있다고 하는 그 사실 때문에, 자부심을 갖거나 부끄러워하거나 절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이 자리에 있게 했다고 한다면, 그 자리가 그냥 자리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보내신 곳이고, 그리고 내가 이곳에서 해야 될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사명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 무엇인가 슬기롭게 그 일들을 감당해 나갈 때, 그 모습이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게 될 거라 믿습니다. 지금 그 자리에 내가 어느 위치에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느 위치에 있든지 정말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슬기로운 종처럼 사역을 하느냐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다윗 왕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윗 왕은 어느 날 갑자기 사무엘 선지자가 나타나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면서 하나님께서 너를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으로 세웠다고 하는 그 말씀을 들을 때, 이 다윗의 마음 가운데 너무 놀라기도 하고 너무 기쁘기도 했었을 겁니다. 나 같은 사람을 하나님께서 왕으로 선발해 주셨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너무나도 기뻤죠. 하지만 그 다윗이 정작 맞이하게 된 상황은 어떤 상황이었는가? 다윗은 제일 먼저 맞이한 것이 사울 왕의 신하로 들어가게 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울 왕이 미쳐서 날뛸 때 악기를 연주하면서, 그 사울의 마음을 평온하게 만드는 그 일을 하는 일을 다윗이 맡게 되었는데요. 그 일이 굉장히 편한 일이었겠습니까? 굉장히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었겠습니까? 굉장히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거라고 생각이 돼요. 사울의 감정의 쓰레기를 온갖 받아내면서, 그 사울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평온하게 해 주기 위해서 악기를 연주해야만 하는 그 위치에 있게 되었을 때, 다윗은 어쩌면 그 상황 가운데서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나? 자괴감을 들 수도 있는 그런 상황 가운데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 순간에 절망하거나 괴로워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보내셨다고 생각하고 사울에게 악기를 연주하면서, 사울의 마음을 딱 편안하게 만들어주고, 그의 마음을 누그러뜨려서 정상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그런 일을 신실하게 감당해 나가기 시작한 것이죠, 그리고 그 이후로 다윗은 어떠한 일을 만나든지, 그가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한 거예요. 전쟁에 나가면 전쟁터에서 이겨야 되는 싸움에서 이겼고, 목숨을 내걸어야 될 때 목숨을 내걸었고,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두목이 되어서 그들을 보호해야 될 때는 그들을 보호하기도 했고, 가는 곳곳마다 자신이 최선을 다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그 사명들을 잘 감당해 나가게 되었는데, 다윗의 신부는 왕의 신분이 아니었지만 놀라운 것은 그가 한 일은 바로 왕이 해야 되는 일들을 다윗이 한 것이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오늘 잠언서 17장 2절의 말씀 가운데서 슬기로운 종은 주인의 아들을 다스릴 것이다. 왕처럼, 왕처럼 다스릴 거라고 이야기했는데, 종이 왕처럼 다스릴 거라고 했는데, 다윗은 종의 신분이었지만 도망자의 신분이었지만, 그냥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사람의 신분이었지만, 가는 곳곳마다 그곳에서 왕처럼 사역을 다 한 것이죠. 성실하게 일을 할 때 그는 왕의 역할들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누가 왕입니까? 어떤 사람을 가리켜서 왕이라고 하죠? 왕관을 쓰고 왕좌에 앉아 있는 사람이 왕입니까? 좋은 옷을 입고 뻐기고 있는 게 왕입니까? 사람들의 인사를 받으며, 사람들이 엎드려 경배하고 90도 폴더 인사를 받으면, 그 사람이 왕입니까? 자신의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잘라내 버리고, 자신이 원하는 사람들을 심어 넣을 수 있는 권력을 행사하면, 그 사람이 왕입니까? 그게 왕이 아니란 말이에요. 왕이 누구냐? 왕의 일을 하는 사람이 왕인 거예요. 왕의 일이 무엇이냐? 왕의 일은 억울한 사람들의 마음을 풀어주고 잘못된 것이 있으면 바로잡고, 재난을 당하고 슬픔을 당한 사람들의 눈물을 씻겨주고, 적의 공격이 있으면 그 적의 공격에서부터 구원해 내고 그런 왕의 역할들을 신실하게 감당하는 자가 진정한 왕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는데, 왕의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이 진짜 왕이 아니라, 다윗처럼 어느 곳에 있든지 백성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슬픔을 없애주고, 전쟁에서 이겨내고, 그리고 빼앗겼던 것을 되찾아주고, 억울한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주는 그 역할을 할 때 다윗은 종의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이미 마샬 다스리고 있었던 왕의 역할들을 하고 있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됐습니까? 다윗은 왕의 역할을 했고, 사울 왕의 유산 왕위를 이어받게 되는 놀라운 자리에까지 올라가게 된 것이죠.


안타깝게도 우리는 섬기는 일은 잘하지 못하면서, (지금 내게 주어진 곳에서 우리는 다 왕들입니다. 믿으십니까? 여러분들은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다 왕의 역할들을 감당해야 될 사람입니다. 옆에 있는 분들한테 말씀해 주세요. 왕이시군요. 폐하 만수무강하시옵소서.) 우리가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 내게 주어진 그 사명들을 잘 감당해 내는 게 그게 왕이에요. 종이 주인의 아들을 다스리는 것처럼,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내게 주어진 그 사명들을 잘 감당해 낼 때, 우리는 “마샬” 하면서, 잘 다스리면서, 왕의 역할들을 감당하게 될 때, 결국 우리가 그 주인의 유산을 얻어 받는 그런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죄성이 가득한 인생은 왕이 해야 될 그 성실함, 왕이 감당해야 될 그 충성에 대해서는 망각해 버린 채, 그저 왕이 누리고 있는 왕관만 탐하고, 왕이 가지고 있는 권력만을 탐하고, 왕이 가지고 있는 그 높은 자리만을 갈망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제자들도 그랬습니다. 그때 우리 주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0장 25절에서부터 28절의 말씀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에 오셔서 섬기는 모습으로 사셨습니다. 왕의 그 권세와 영광을 내놓으라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친히 낮고 천한 자리로 들어가셔서 십자가의 자리까지 올라가셨고, 우리를 위하여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왜 우리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됩니까? 우리는 우리가 있는 그곳에서 왜 최선을 다해서 다스리는 그 일을 신실하게 감당해야 합니까? 그게 왕이 되는 길이며,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친히 낮아지시고,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도 죄성이 많아서 늘 그러한 마음에 따라 살기보다는, 우리의 교만한 마음 가운데 우리가 늘 망각하며, 우리의 사명을 망각할 때가 너무나도 많은데, 주여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믿음으로 신실하게, 어느 자리에 있든지 “정말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왕 같은 제사장으로 보내셨구나. 나를 하나님께서 이 가정에 이 직장에, 이 교회에 내가 서 있는 바로 그곳에 나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종으로 이곳에 보내셨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으며,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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