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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떡 한 조각 (잠 17:1, 5)

기술적인 문제로 중간에 영상이 잘려나갔습니다. 하지만 아래의 녹취록은 전체 녹취록입니다.

오늘 읽은 잠언서 17장 1절의 말씀을 보면,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낫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마른 떡 한 조각만 있어도 화목하다고 했을 때, 마른 떡 한 조각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마른 떡 한 조각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가난한 것”을 의미할 겁니다. 부유하지 못한 상태, 가난한 상태, 핍절한 그런 상태를 표현하는 표현이 바로 이 “마른 떡 한 조각”이라고 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종종 살펴본 것처럼 제유법적 표현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죠. 그러니까 이 마른 떡 한 조각이 있고 화목하다고 했다고 하는 것이 좋다고 했으니까, 집에 마른 떡이 없으면, 마른 떡을 구해야 하나요? 그게 아니죠? 이 마른 떡 한 조각이라고 하는 것은 “가난한 것”을 나타내기 위한 샘플로 하나를 이야기한 것이지, 반드시 마른 떡을 가져다 놔야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유대 사람들에게 있어서 마른 떡이라고 하는 것은 부실한 음식을 의미하는 것이겠죠. 식사를 한다고 한다면, 어떻게 식사를 하겠습니까? 빵과 그리고 생선과 그리고 포도주와 그렇게 갖추어서 음식을 먹어야, 그래야 안으로 술술 넘어가게 될 텐데, 맛있게 먹어야 될 텐데, 아무런 음료도 없이, 아무런 고기도 없이, 그저 말라 비틀어버린 그 빵 하나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정말 참 비참한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너무나도 가난하기 때문에, 정말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없는, 그저 연명해야 하기 때문에, 맛은 없지만 먹어야만 하는, 그러한 가난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바로 마른 떡 한 조각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 표현을 우리나라로 해서 표현한다고 하면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요? 유대 사회에서는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더 낫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식으로 얘기하면, 뭐라고 얘기해야 되겠습니까? 꽁보리밥을 먹더라도? 요즘 꽁보리밥이 비쌉니다. 어떻게 또 표현하면 좋겠습니까? 라면? 라면 먹으면서도 화목한 것이 훨씬 더 낫겠다고 하는 그런 표현을 할 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가난하게 살아도 행복한 가정이, 그게 나은 것이지, 돈이 많고 부유하지만, 그러나 다투고 싸우고, 정말 집안이 지옥과 같은 그런 곳이 된 가정, 그런 가정보다는, 차라리 아무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화목한 가정이 훨씬 더 낫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여기서 제육이 집에 가득하고도 다투는 것보다 낫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제육이라고 하는 말은 히브리어 단어로 “제바흐”라고 하는 동사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짐승을 잡아서 그 짐승을 희생제사로 드렸을 때, 그 희생 제사를 가리켜서 히브리어로 “제바흐”라고 하는 그런 단어를 사용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사실 이 잠언서 17장 1절 말씀에 제육이라고 하는 표현 자체는 없습니다. “잡는 것” “잡은 것”이라고 하는 표현이 있는 것이죠. 잡은 것이 가득하고도, 집안이 다툰다고 한다면, 그것은 별로 좋은 것이 아니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인데, 여기서 잡은 것은 무엇을 잡았다고 말하겠습니까? 짐승을 잡은 것이겠죠. 고기를 잡은 것이겠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 말 성경에서 번역할 때 제육이라고 하는 말로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고기를 많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부유하게 산다고 한들, 집안이 평안하지 못하다고 한다면, 집 안에서 늘 싸우고 다투고, 그 집안이 지옥과 같은 그런 상태가 된다고 하면, 차라리 아무런 먹을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콩 한 조각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서로 사랑하며 아끼고 돌보는 것이 훨씬 더 낫다고 하는 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에 모두가 다 공감하십니까? 공감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사실 제일 좋은 건 뭐죠? 제일 좋은 거? 제육도 풍성하고 화목한 거, 그렇죠?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 화목한 것보다는, 제육도 풍성하고, 먹을 게 풍성하고 부자이면서, 화목하면 제일 좋겠죠. 부유한 가운데 집안이 화목하면 제일 좋을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 그런데 놀랍게도 잠언서 17장 1절 말씀에서는 제육이 풍성하고 화목한 이야기는 하지 않고, 마른 떡 한 조각이 있으면서, 화목한 것과 제육이 많으면서 불화한 것을 대비시켜 놓고 있다고 하는 것이 정말 특이합니다. 왜 그렇게 대비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림을 한번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가난하면서 화목한 것과 그리고 부유하면서 불화한 것을 그렇게 양극단으로 대비시켜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어떤 것이 더 나은가? 가난하지만 화목한 쪽이, 부유하지만 불화한 쪽보다 훨씬 더 좋다. “이게 훨씬 더 좋다”라고 비교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일 좋은 건 부유하면서, 화목한 게 제일 좋을 것인데, 왜 이 성경은 가난하고 화목한 것을 이야기하고, 부유하면서 불화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왜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부자가 되면 화목하기가 어렵기 때문일까요? 종종 사람들은 부자가 되면 화목하기가 어렵다고 생각을 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뉴스에서 그런 뉴스들을 많이 접하게 되는데요. 재벌가 내에서 서로 재산 다툼 때문에 아빠와 아들이 서로 소송을 걸고, 형과 동생이 서로 소송을 걸면서 싸우고 있다고 하는 그런 참 안타까운 뉴스들을 우리가 종종 접하게 됩니다. 그런 이야기를 보면서, 경영권 다툼을 위해서 가족들끼리 서로 싸우고 있는 그런 재벌가들의 그런 추한 모습들이 뉴스에 방영되는 것들을 보면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부자가 되면, 그러면 화목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닐까, 가난해야 화목할 수 있고, “부자가 되면 화목하기가 어렵지 않겠는가”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어떤 종교에서는 말하기를, 차라리 소유를 다 내버리는 게 낫다. 차라리 무소유로 살아가는 게 낫다. 그게 오히려 행복의 길이고, 무소유로 살아가는 것이 그게 훨씬 더 바람직한 것이라고, 그렇게 가르치는 종교들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일부의 케이스를 가지고 보편화시키는 결론을 너무 성급하게 내리는 것은 잘못이에요. 그래서 물론 부자이면서 불화한 경우들이 많이 있지만,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보편적으로 확대시켜서, 그러니까 부자가 되면 불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가난하면 화목할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성급한 결론을 우리가 내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사실 불화한 것은 누가 불화하는 것이죠? 돈이 많으면 불화합니까? 돈이 적으면 불화합니까? 누가 불화하기가 더 쉬운 거죠? 둘 다 불화해요! 돈 많은 사람들만 서로 싸우는 게 아니라, 가난해도 싸워요. 가난해도 엄청 싸워요. 불화하는 것이 쉬운 일, 불화하는 일이 너무나도 자주 일어나고 있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 재물에 따라서 우리가 화목할 수 있는가, 화목하지 못하는가를 말하는 것은 사실 성급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럼 거지들은 아주 화목하게 잘 살게요? 아니요. 거지들도 맨날 싸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왜 꼭 가난해야만 화목한 게 아니고, 꼭 부자가 되면 꼭 불화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왜 성경은 가난하면서 화목한 게, 부자가 되면서 불화한 것보다 훨씬 낫다고 그렇게 이렇게 대비시켜 놓는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극적인 대비 효과를 나타내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아무리 부자라고 할지라도 불화하면 그건 아무 의미가 없고, 그건 불행한 것이고, 아무리 가난하다고 할지라도, 만일 화목하다고 한다면, “그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다”라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화목하면 행복한 것이고, 불화하면 불행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대비시켜서 놓는 것이죠.  


다음 그림을 한번 보았으면 좋겠는데, 부유하든 가난하든, 화목하면 좋은 것입니다. 반면에 부유하든 가난하든, 불화하면 좋지 않은 것이죠. 행복의 기준에 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화목한가 화목하지 않는가에 달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부를 얻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부를 얻기 위한 선택을 할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더 화목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고 화목을 선택해야 합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이고, 교회도 마찬가지이고, 그 어느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언제나 잘못된 선택을 합니다. 어리석게도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할 것에 우선순위를 두곤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바른 선택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조카 롯의 목자들이 서로 싸울 때, 아브라함은 화목을 선택했습니다. 창세기 13:8-9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게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들도 배워야 하고, 우리 자녀들에게도 가르쳐야 합니다. 어떻게 가르칠 수 있을까요? 말뿐이 아니라 우리들의 행동으로 실제적으로 모범을 보여서 가르쳐야 합니다.     화목은 어떻게 선택할 수 있을까요? 대체로 가난을 선택할 때 가능합니다. 손해를 선택할 때 가능합니다. 우리는 더 나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서로 싸우면서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서 싸울 게 아니라, 차라리 양보하고 배려하고,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우리 형에게 동생에게 양보하고, 내 스스로 가난함을 손해를 선택할 때 가정이 행복해질 수 있다고 하는 놀라운 진리를 기억해야 할 것이고, 썩어질 것 영원하지 못한 것 때문에 불행을 선택하는 그런 어리석은 선택이 우리에게 있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가치관을 물질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늘 물질이 우리의 가장 최상의 가치관이 되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그 물질을 가장 많이 얻는 것이 가장 우리의 소망이 되고, 그리고 그 물질을 많이 얻는 것이 성공이기 때문에, 성공을 우리가 안달하면서 성공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질 때가 많이 있는데요. 그런데 우리가 물질을 가장 큰 물질의 가장 큰 가치를 두고 살아가게 되면 어떤 현상이 나타나느냐 하면, 그런 물질에 따라서 사람들을 판단하게 됩니다. 물질에 의해서 사람을 판단하고, 그 사람이 가진 것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일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가난한 자들은 무시하게 되고, 경멸하게 되고, 부자들은 막연히 동경하게 되는 그런 잘못된 관점을 가지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 읽은 잠언서 17장 5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 자니라.” 가난한 자를 모독하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과 같다고 하는 것이죠. 가난한 자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인데, 그가 가난하다고 하는 이유로, 그가 부족하다고 하는 이유로 많은 것을 가지지 못했다고 하는 이유로, 멸시하고 갑질을 해대고, 그리고 경멸하는 태도를 가진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것과 똑같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우리의 가치관을 물질에 둘 때 우리는 그런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데요. 우리의 가치를 물질에 둘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됨됨이를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이든, 어떤 사람이든, 측은하게 여기고 불쌍히 여기고 또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가져야 될 마땅한 자세라고 믿습니다. 사람은 그 사람이 누구든지 간에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존중해 주고, 사랑해 주고, 어려움 가운데 있다고 한다면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는 것이 옳습니다. 북한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거나 일본에 지진이 나면 통쾌하게 생각할 게 아니라, 그들에게도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바라보아야 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원수가 어려움에 처했다고 할지라도, 그 원수를 향해서 정말 경멸하는 태도로 무시하는 태도로 지낼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의 손길을 내미는 게 그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그런 교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왜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합니까? 왜 우리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왜 우리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왜 우리는 가난한 사람도 존중해 주어야 되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우리도 비난받아야 마땅하고 우리도 멸망해야 마땅하고, 지옥불에 쳐넣어야 마땅한 우리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존중히 여겨주시고 소중히 여겨주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해 주신 그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우리가 받았기에 그 하나님의 사랑을 늘 마음속에 기억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정말 주님께서 원하시는 기뻐하신 선택이 무엇인지 늘 고민하면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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