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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죽음 (왕상 2:10-12)

오늘 우리는 열왕기상의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다윗이 죽어서 조상들과 함께 안치하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의 말씀을 읽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언젠가는 반드시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죠? 혹시 나는 안 죽을 것 같다 하시는 분 한번 손들어보실까요?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언젠가 다 죽게 되어 있는 게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이래로, 죽음이 이 세상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그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인 우리들은, 누구도 예외 할 것 없이, 죽음을 맛보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죠.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죽음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옛날 진시왕이라고 하는 황제가 늙지 않는 약을 구해서 먹고 싶었고, 영원히 죽지 않는, 영원히 늙지 않는 것을 소망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사람도 역시 아무리 큰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 죽음 앞에서는 그가 이겨낼 수가 없었던 것이죠.

오늘 본문에서도 누가 나옵니까? 다윗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의 위대한 용사가 오늘 등장하고 있는데요. 위대한 용사였던 이 다윗도, 때가 되매, 죽어서 열조에게로 돌아갔다고 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다윗이었지만, 다윗도 나이를 먹으면서 노쇠하게 되었고, 그리고 노쇠하게 되어서 자신의 몸조차 따뜻하게 할 수 없어서, 다른 젊은 처녀의 온기를 이용해서 몸을 따뜻하게 해야만 하는, 그런 참 처량한 모습의 모습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제 죽음을 피할 수 없어서, 이제 마지막 그의 운명을 다하게 되었다고 하는 그 이야기를 오늘 읽게 된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도 기억해야 되는 것인데, 우리도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을 그냥 그 자리에 다 내려놓고, 많은 장점과 부와 권력과 그리고 그 내가 지금까지 이루어놨던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근심과 걱정까지도 다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가야만 하는 인생이라고 하는 사실을 오늘 우리가 다시 한번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그날이 있다고 하는 것, 우리에게 마지막이 있다고 하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시편 90편 12절 말씀에 보면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그랬습니다. 누가 지혜로운 사람인가? 어떤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인가? 내게 주어진 인생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끝나게 되어 있고, “언젠가는 그 삶이 끝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계산하고 대비하고 준비할 수 있는 사람이 그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늘 망각하면서 삽니다. “아, 내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시면서 사시는 분 계십니까? 아무리 연세가 많으셔도,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하기 싫어하고, 망각하면서 살고, 그냥 오늘이 있었던 것처럼 내일도 있을 것이고, 모레도 있을 것이고 계속해서 우리의 인생이 마치 천년만년 계속될 것처럼 착각하면서 사는 게 우리들의 인생인데요. 그런데 누가 지혜로운 사람이냐? 성경은 말하기를, 우리에게 인생의 끝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계수할 줄 아는, “얼마 남지 않았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아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지막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면, 지금 우리가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인데요. 마지막을 준비하는 인생이 지혜로운 인생인 것이죠.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냥 무방비 상태로 있다가, 그냥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고 한다면, 그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 시스템 가운데는 많은 시스템들이 개발되어 있는데요. 그중에 아주 좋은 시스템 중에 하나가 무엇입니까? 보험이라고 하는 거죠. 보험. 무슨 보험을 들어놓으셨습니까? 자동차 보험을 들어놓은 거죠. 자동차 보험을 들어놓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아무리 운전을 잘한다고 할지라도, 내 실수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실수에 의해서도 사고가 날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사고가 났다고 한다면, 내 재정적인 그 손해가 막심할 것이고, 그리고 내가 생명의 위협을 느낄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어려움을 당할 수 있으니까, 그 위험을 미리 감지하고 보험을 들어놓는 거죠. 자동차 보험을 들었을 때 우리는 그 자동차 사고가 일어나도 크게 걱정이 되지 않는 겁니다. 물론 안 일어나면 좋겠지만, 자동차 사고가 일어나도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은 자동차보험을 잘 들어놓았다고 한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또한 무슨 보험을 들으셨습니까? 장로님, 실비보험을 들으셨어요? 실비보험을 아주 유용하게 잘 사용하시는 권사님이 계시더라고요. 실비보험을 어떻게 하면 잘 받아낼 수 있는가? 지혜를 좀 배우고 싶더라고요. 아무튼 그런 보험을 들어놓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영원히 건강한 것이 아니라, 아플 수 있으며 병원에 갈 수가 있겠고, 그렇다고 한다면 그 부담이 되는 그 의료비를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에 대해서 미리미리 준비해 놓는 것이 보험이 되는 것이죠. 화재보험도 듭니다. 화재보험을 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언젠가 불이 날 수가 있겠는데, 그 불로 인해서 쌓아놓았던 모든 재산을 다 잃어버려서, 그래서 완전히 망연자실할 것이 아니라, 미리미리 대비해 놓는다고 한다면, 그러면 그 대비를 해놓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생이 언젠가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그 죽음에 대해서 미리미리 준비하는 것이 바람직한 인생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누가 행복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이 좋은 인생을 사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좋은 인생인가요? 행복한 인생인가요? 돈 많이 버는 게 좋은 인생일까요? 행복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결혼을 잘하면 행복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세계 최고의 위치에 올라가 있는 사람이 행복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내가 원하는 것들을 성취한 사람이 그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물론 좋죠. 물론 그런 것들을 얻는 것은 아주 좋고 아주 행복한 일이 될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들려주시면서, 누가 행복한 사람인가? 어떤 사람이 정말 행복한 사람인가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들려주시기를, 이 세상에서 원 없이 먹고 마시며 행복하게 지내는 그 사람이 행복한 게 아니라, 그 사람의 마지막 종착역이 천국이 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고, 그 사람의 마지막 종착역이 지옥이 되는 사람이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씀해 주신 것이죠.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떤 신분을 가지고 살았는가? 거지로 살았는가? 부자로 살았는가? 아니면 여러 가지 신분 가운데 살았는데, 지금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가 우리의 그 행복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우리의 마지막 종착역이 천국인가? 죽음 이후의 마지막 종착역이 지옥인가에 따라서 그 인생을 복된 인생이다. 복되지 못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하는 게,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인 것이죠. 안타깝게도 부자라고 하는 사람은 매일매일 연락하면서, 잔치를 벌이면서, 남부러울 것이 없는 인생을 살았지만, 죽고 보니까 그는 지옥 속에 들어가 있는 거예요. 엄청난 그 불 가운데서 혓바닥에 물 한 방울 적시기가 어려운 그 엄청난 지옥의 고통 가운데서 괴로워하는 인생이 되어버렸는데, 그것이 영원하게 계속된다고 한다면, 그 부자를 따라서 지옥에 가고 싶다고 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 사람은 불행한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하지만 이 세상에서 아무리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고 할지라도, 부자의 집 앞에서 정말 정말 가난하게 그냥 흘려 떨어지는 그런 부스러기를 먹고 살뿐만 아니라, 자신의 상처를 개들이 와서 핥을 정도로 그렇게 비참한 인생을 살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었다고 할지라도, 마지막이 아브라함의 품으로 마지막이 천국이라고 한다면, 영원한 천국을 누리고 산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복된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의 삶을 복된 삶이 되게 만들기 위해서는 언제 준비해야 되는가? 언제 준비해야 됩니까? 지금 준비해야 된다. 이 말이에요. 바로 여기서 준비해야 되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해주신 또 하나의 비유 가운데 불의한 청지기 비유라고 하는 비유가 있습니다.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아직 우리들에게 기회가 남아 있을 때, 해고 이후를 준비했던 그 청지기처럼, 우리의 생명이 아직 남아있을 때, 마지막을 준비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는 교훈을 주신 것이죠. 어느 날 주인이 청지기를 불러서 해고를 예고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우리 집에서 일할 수 없다. 내가 해고할 거다.”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러자 그 해고 통보를 받은 이 청지기가 이제 길거리로 쫓겨나기 전에 자신에게 아직도 기회가 있을 때, 아직 채무증서를 고쳐 쓸 수 있는 권한이 아직도 자기에게 있을 때, 사람들을 한 명씩 한 명씩 불러서 채무증서를 깎아주면서, 빚을 얼마 줬는가? 80 100석을 지었으면, 80석으로, 100말을 지었으면 50말로 줄여주면서,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쫓겨난 이후에 그들이 자신을 영접할 수 있도록, 쫓겨나기 전에 아직도 잠깐 남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마지막을 준비해서, 결국 해고 이후를 준비할 수 있었던, 그 불의한 청지기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게 아직 시간이 있을 때 목숨이 있을 때, 오늘 우리들의 목숨이 언제 끝날 수 있습니까? 언제 끝날 수 있죠? 오늘 밤에 끝날 수 있다 이 말이에요. 옆에 한번 얼굴 한번 쳐다보세요. 내일 못 볼 수 있어요. 저도 못 볼 수 있어요. 지금 아직 시간이 남아 있는 바로 이 순간에, 이 시간에 우리가 준비를 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럼 어떻게 준비해야 되는 것입니까? 아직 시간이 그래도 우리들에게 있는데, 우리는 어떻게 준비해야 되는가? 가장 큰 준비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모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는 것이 그게 가장 큰 준비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에서 26절의 말씀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영접하게 된다고 한다면, 영원한 생명에 대한 준비가 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한다고 하는 이야기는 “나 예수님 믿는다”라고 말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영접한다고 하는 것은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죠. 전에는 죄악에 따라서 살았다고 한다면, 지금은 예수님과 함께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들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사명을 따라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우리가 악한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이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주님을 영접한 사람은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나의 보스를 바꾸는 거예요. 조폭 두목을 바꾸는 것과 마찬가지죠. 전에 내가 조폭 그 그룹 속에 들어가 있다고 한다면, 누구의 말을 들으면서 삽니까? 조폭 오야붕의 말을 듣는 것이죠. 조폭이 명령하면 그 조폭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던 그 사람이, 이제는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했다고 한다면, 이제는 누구의 말을 들으면 안 돼요? 조폭의 말을 들으면 안 되는 거죠. 전에는 우리가 사탄을 왕으로 모시고, 사탄을 나에 주로 모시면서 사탄이 시키는 대로 사는 삶을 살았어요. 사탄이 미워하라고 하면 미워했고, 사탄이 욕심을 내라고 하면 욕심을 냈고, 이기적으로 살려고 하면 이기적인 삶을 사는 그런 죄악의 길을 따라 살아갔던 우리들이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한다고 하는 것은 더 이상 사탄을 나의 왕으로 모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나의 왕으로 모시는 것이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는 것이고,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다고 하는 얘기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사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거라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사탄이 명령하는 대로 살아오는 삶을 살아왔다고 한다면, 오늘 이 시간에 결단하면서 주여 이제는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고백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어떻게 준비해야 됩니까? 예수님께서 또 하나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는데 달란트 비유를 말씀해 주셨어요.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맡긴 종들을 그렇게 맡겨놓은 다음에, 주님께서 마지막에 오셔서 너희들이 그 달란트를 어떻게 사용했는가를 보자 하셨는데, 한 달란트 맡은 종은 그걸 썩여둔 것이죠. 묻어둔 것이죠. 사명을 망각해 버린 것이죠. 그런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주신 사명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면서, 그 사명에 따라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또 사명에 따라 두 달란트를 맡기는, 그런 주님과 동행하면서 사명에 따라 순종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그 사명이 무엇입니까? 우리 가정을 잘 돌보는 것도 사명이에요. 주의 일을 하는 것도 사명이에요. 오늘날 우리 하나님께서 나에게 갑작스럽게 맡겨주시는 사명도 사명이에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이 사실은 다 사명이에요. 그래서 그 사명, 하나님께서 나를 왜 이렇게 만드셨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왜 여기에 두셨는가?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만일 우리가 대통령을 뽑았는데 그 대통령이 국민들을 보호하지 아니하고, 그 대통령이 국민들을 위해서 좋은 정책을 펴지 아니하고, 그 대통령이 계속해서 이기적으로 자기 가족들만을 위해서 그리고 사악한 짓을 계속한다고 하면, 그 사람은 사명을 망각한 지도자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있는데, 우리가 지금 마치 대통령을 뽑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만들어주신 거거든요. 그래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가정으로 보내셨고, 직장으로 보내셨고, 우리가 있는 바로 그곳이 우리가 사명을 감당해야 될 그 자리로 우리를 불러주셨는데, 그것을 다 망각해 버린 채 살아갈 것이 아니라,.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맡은 종처럼, 믿음으로 그 사명들을 잘 감당해 나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을 준비해야 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는 것이죠.


오늘 본문에 보면 그 다윗은 정말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그 사명을 잘 감당하면서 살다가, 하나님께서 부르시니까, 이제는 열조 가운데로 돌아가게 된 것이죠. 다윗을 하나님께서는 불러주셔서 골리앗을 무찌르는 일에 사용해 주셨고, 억울한 자 갇힌 자, 고통을 당하는 자들 사이에서 그들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나님께서 주셔서, 그런 일들을 하게 만들어 주셨고, 또 왕이 되게 되었을 때는 그 왕으로서 이스라엘 민족을 부강하게 만드는 그런 일들을 성실하게 감당하다가 죽게 되었는데요.

그런데 이 다윗의 다윗이 죽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또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겠는가? “다윗이 메시아는 아니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또 한 번 발견해야 될 것입니다. 다윗이 누구였습니까? 이스라엘의 영웅이었던 것이죠. 골리앗을 무찌르고 이스라엘을 구원해 낸 민족의 영웅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40년 동안 7년은 헤브론에서 33년은 예루살렘에서 통치하는 그 일을 하는 가운데, 이스라엘을 가장 강대국으로 부강한 나라로 만든 사람이 다윗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지도자도 이런 다윗과 같은 지도자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다고 한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궁극적인 소망이 될 수 없었다고 하는 점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실감한 적이 있는데, 언제 실감했죠? 다윗이 밧세바를 빼앗고, 그 남편을 전쟁에 보내어 죽이는 그런 파렴치한 일들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것을 깨닫게 된 것이죠, 사실은 백성을 보호하라고 왕을 세워준 것인데, 보호하기는커녕 다윗이 강도가 돼버린 거죠. 남의 아내를 빼앗아 버렸어요. 그리고 그 남편을 죽여버린 거죠. 보호하라고 세워준 그 왕이 강도짓을 하며 빼앗아버리며 사악한 짓을 해버리는 그런 정말 충격적인 일들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다윗이 우리의 진정한 메시아일 수 없다. 다윗이 진정한 우리의 소망일 수 없다고 하는 것까지를 우리가 깨달은 적이 있었는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니까 그 다윗이 또한 죽어버려요. 영원히 이스라엘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죽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 세상에 모든 좋은 것들은 다 제한적이고 한계가 있고, 우리를 영원히 구원해 줄 수 있는 것들이 아닌 “일시적인 것들뿐이다”라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번 발견하게 되는 것이죠.


돈이 그렇습니다. 성공이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그 모든 것들이 다 한계가 있고 제한적인 것이고,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단점이 있는 것이고,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목숨이 끊어질 수밖에 없는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진정으로 마음을 두어야 될 소망이 누군가? 다윗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소망이라고 하는 사실을 바라보면서, 주님께 소망을 두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헛된 우상을 쫓아간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의 진정한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가짜 메시아 돈을 쫓아가거나 명예를 쫓아가거나 권력을 쫓아가거나 사람을 쫓아가거나 정치인을 쫓아가거나 우리 자식을 쫓아가거나, 모든 좋은 것들이 우리의 우상들이 될 수 있는 가능성들이 있는 것인데, 그런 우상들을 쫓아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윗이 죽는 것처럼 닭 쫓는 개가 되는 것이죠. 어느 날 내가 쫓아갔는데 그 쫓아가던 것이 나를 구원해 주는 것이 아니라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찬송가 522장 3절 말씀에 3절에 보면 “웬일인가? 내 형제여, 재물만 취하다. 이 세상 물질 불탈 때에, 너도 타겠구나”라고 하는 찬송가 가사가 있어요. 재물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재물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 재물을 쫓아가다가는 그 재물이 불탈 때, 우리도 불타게 되는 그런 안타까운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의 소망을 이 세상의 것들에 두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두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무소유로 살아야 된다고 말씀드리는 것 아닙니다. 그러니까 아무런 노력도 성공도 할 필요 없다고 말씀드리는 거 아닙니다. 아무런 정치 지도자들이 아무나 되라고 말씀드리는 것 아닙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에요. 최선을 다하십시오. 성공하기 위해서 최고의 노력을 다하십시오.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십시오. 또한 좋은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 좋은 우리 자녀들을 만들기 위해서 갖가지 모든 노력들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가장 좋은 것이 어느 순간에 우상의 단계로 넘어가 버리면, 결국은 그것이 우리에게 소망이 아니라 절망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되는데, 그것을 언제 어떻게 봐야 되는가?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읽으면서 깨닫는 것이죠. 그 훌륭한 다윗도 죽는구나. 영원한 우리의 소망이 될 수 없구나. 내가 아무리 내 소망을 이런 데 걸어보았자, 이것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죠.

오늘 다윗이 죽은 이후에는 솔로몬이 아버지를 이어서 이스라엘의 세 번째 왕이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12절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은 솔로몬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왕위에 앉으니 어떻게 됐다? 그의 나라가 심히 견고하니라. 놀랍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최고인 줄 알았는데, 그리고 다윗이 사라져 버려서 소망이 사라진 줄 알았는데 솔로몬도 어때요? 괜찮아요? 솔로몬도 괜찮아요. 솔로몬은 전투의 영웅은 아닙니다. 다윗처럼 골리앗을 쓰러뜨릴 수 있을 만큼의 힘은 없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에는 무엇이 있었나요? 지혜가 있었어요. 지혜로 다스리는 거예요. 다윗은 칼로 세계를 정복했다고 한다면 솔로몬은 지혜로 세상을 정복하고 있는 것이죠.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 다르다는 교훈이죠. 우리는 생각, 우리의 생각에는 내 방식이 최고인 줄 알고 내가 하던 방식대로 해야만 다 되는 줄 알아요. 하지만 내 방식대로 안 해도 괜찮아요. 우리 자식들의 앞길을 우리의 생각으로 막지 말아야 된단 말이에요. 우리의 어쭙잖은 생각으로 미래의 세대들을 자꾸만 제안하지 말아야 된단 말이에요. 우리가 볼 때는 망할 것 같아요. 칼도 못 쓰는 놈이 무슨 왕을 해 칼도 못 쓰는 이 나약한 이 인간이 어떻게 왕을 알 수 있을까 생각이 되겠지만, 그러나 칼을 안 써도 지혜로서 온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우리 1 남전도회 회원들은 어쩌면 우리 교회 어른들에 해당하죠. 그래도 그래도 어른급에 속합니다. 그런데 어른은 어떤 어른이 돼야 되는가? 마음이 너그러운 어른이 되셔야 돼요. 내 경험과 내 생각을 다음 세대에게 강요하면서, 내 방식을 따르라고 강요하는 어른이 아니라, 솔로몬과 같이, 나와는 정반대고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도 충분히 일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믿고 기도하면서 응원해 줄 필요가 있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다 다르게 창조하셨어요. 정말 하나님은 위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어쩜 그렇게 한 사람도 안 똑같이 생기게 만들었는지 대단해요. 그렇죠 다 틀려요. 성격도 틀리고 능력도 틀리고, 얼굴도 틀리고, 생각하는 게 틀리고, 짐은 하나도 똑같은 게 없고, 지문만 다 똑같은 게 없는 게 아니라 귀 생긴 것도 다 틀리대요. 한 사람도 같은 사람이 없대요. 세상에 이렇게 다르게 만들 수가 있을 수 있어요. 그런데 그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다양하게 만들어 놓으시고 일하게 만들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참 믿음으로 응원하고 또 격려해 주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제1 남전도의 헌신 예배를 드리는데 우리 남자들은 단점이 하나 있습니다. 무슨 단점이죠? 서로 저 잘난 맛에 화합이 잘 안 되는 게 남자들의 단점이죠. 하지만 우리 교회 남전도회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이 됩니다. 믿음의 사람으로 서로를 인정해야 되는 거죠. 다윗이 솔로몬과 다르지만 인정하면서 다른 또 하나의 왕이 되게 만들었던 것처럼, 우리 남전도회 회원들 한 사람 한 사람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며 하나가 되고, 또 우리 교의 교우들 한 사람 한 사람 다 다르지만 서로가 다르기 때문에 부족한 점을 메워주고 채워주고, 그래서 복된 공동체가 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 교회가 더욱더 사랑이 넘치는 복된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년도에는 우리 교회가 성경 읽기 한다고 예고를 해 드렸습니다. 처음 듣습니까? 몇 번 들었습니까? 몇 번 들었죠? 내년에 성경 읽기를 하게 될 텐데 우리 남전도회원들끼리 서로 성경 읽었다. 나도 오늘 성경 읽었다. 서로 카톡으로 대화하면서, 오늘 은혜받은 거 한 구절이라도 얘기해 주고, 얘기해 주면 모른 척할 게 아니라 “아이고 은혜가 되네요.” 하트라도 하나 날려주고, 따봉이라도 하나 날려주고 그러면서, 서로 격려하는 가운데 우리 예수비전교회가 믿음으로 한층 더 성장해 나가는 귀하고 복된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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