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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눈, 어두운 눈 (잠 15:30-33)

오늘 우리가 잠언서의 말씀을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매주 수요일마다 잠언서의 말씀을 살피기 시작했는데, 벌써 오늘이 15장 마지막 절까지 살펴보니까, 거의 잠언의 반절을 벌써 끝냈습니다. 그 반절을 끝낸 여러분들이 대단하신 것 같아요. 우리 옆에 있는 사람들한테 격려하면서, 정말 “책 잠언서 반절을 끝내시다니, 정말 대단하시군요.” 우리 격려 한번 합시다. 잠언서 공부하는데 괜찮습니까? 재미가 없습니까? 재밌습니까? 재밌다고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재밌습니다. 잠언서를 읽으면서, “아, 이런 뜻이었구나” “이런 말씀이었구나” 다시 한번 발견할 수 있는 그런 귀하고 복된 시간이 된 것 같아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넉절을 살펴보게 되겠는데요. 먼저 30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눈이 밝은 것은 마음을 기쁘게 하고, 좋은 기별은 뼈를 윤택하게 하느니라.” 눈이 밝은 것이 마음을 기쁘게 한다고 하는데, 눈이 밝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눈이 밝은 게 뭔가요? 눈이 밝은 상태에 있으십니까? 눈이 어두운 상태에 있습니까? 도대체 눈이 밝다고 하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원문을 보니까 이 원문에는 밝다고 나와 있는 것이 아니라, 빛으로 나와 있더라고요. “눈의 빛은 마음을 기쁘게 하지만” 하고 “좋은 소식은 뼈를 살찌게 한다”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눈에 빛이 마음을 기쁘게 한다는 건데, 빛이 있다고 하는 것은, 곧 밝다고 하는 것이니까, 우리 한국말 성경에서 눈이 밝은 것은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눈의 빛이라고 번역을 하든, 눈이 밝은 것이라고 번역하든 그 의미가 비슷할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눈의 빛이 마음을 기쁘게 한다고 하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그 뒤에 있는 부분과 비교해서 생각해 보면, “좋은 소식이 뼈를 살지게 한다.” “좋은 소식이 뼈를 윤택하게 한다”는 것과 짝을 이루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니까, 한번 두 개를 연결시켜서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먼저 좋은 소식이 뼈를 윤택하게 한다. 뼈를 살찌게 한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말이죠. 좋은 소식, 뭔가 좋은 소식을 듣게 되면, 너무나도 기분이 좋은 것이죠. 행복한 것이죠. 좋은 소식을 듣게 되면, 기쁨이 솟아오르게 되어 있습니다. 좋은 결과가 나타나게 되면, 너무나도 기쁘죠. 예를 들어서 우리 아이들이 1등을 했다든지, 아니면 어떤 뛰어난 두각을 나타냈다든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다든지, 아무튼 좋은 소식을 듣게 되면, 정말 너무너무나도 기쁘고 행복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그런 좋은 결과, 좋은 결과에 대한 소식들을 우리가 듣게 된다고 한다면, 마음이 기뻐지는 것,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축구 선수 가운데 히샬리숑이라고 하는 축구 선수를 혹시 아십니까? 대단합니다. 우리나라 축구선수 손흥민 선수와 함께 영국의 토트넘이라고 하는 축구 클럽에서 같이 뛰고 있는 브라질 선수 히샬리숑이라고 하는 그런 축구 선수가 있는데, 아주 뛰어난 공격수 축구 선수인데, 토트넘으로 이적해 와서는 별로 성과를 내지 못했어요. 내가 많은 돈으로 이렇게 스카웃이 돼서 이 축구단에 들어왔으면, 골도 많이 넣고, 많은 기여를 팀에 해야 그래야 좋을 텐데, 안타깝게도 이 선수는 이적한 이래로 골을 별로 넣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출전 기회도 자꾸만 줄어들고 하는데, 그것이 엄청난 스트레스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정말 너무나도 괴롭고 스트레스가 되어서, 정말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가 정말 심리적으로 굉장한 고통 가운데 있고, “내가 심리 치료를 받아야 될 정도가 되었다”라고 그렇게 인터뷰까지 하던 사람이 바로 히샬리숑이라고 하는 그런 선수였어요. 그런데 지난주에 경기를 하면서 토트넘이 지고 있던 그 경기를 이 히스살리스송 선수가 아주 잘해가지고, 한 골 한 도움을 해서, 토트넘이 극적인 역전승을 하도록, 어마어마한 그런 뛰어난 두각을 발휘하는 그런 경기를 하게 됐습니다. 지금까지는 별로 두각을 잘 드러내지 못했는데, 지난번 경기에서 그렇게 엄청난 결과를 나타나게 되었을 때, 그것을 본 많은 사람들이 뭐라고 평가를 했냐면, 히샬리숑 선수가 심리치료가 필요하다고 그랬는데, “이미 심리치료는 다 끝났다” 그랬습니다. 너무나도 좋은 결과를 얻게 되니까, 너무나도 기분이 좋고, 너무나도 신이 나서, 전혀 지금까지 억눌리고 있던 그 모든 심리적인 불안감, 그 아픔, 고통들이 다 사라져 버리고, 이제는 아무 문제가 없어지게 되었다고 그렇게 평가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죠. 만일 우리가 좋은 결과를 얻게 된다고 한다면, 좋은 소식을 얻게 된다고 한다면, 마음이 기뻐하는 것이 당연할 겁니다. 그래서 좋은 소식은 좋은 기별이 오게 된다고 한다면, 우리 아이들이 엄청난 결과를 이뤄냈다고 하는 그런 좋은 소식을 우리가 듣게 된다고 한다면, 너무나도 기분이 좋을 것이고, 행복해질 것이고, 그것을 이 오늘 잠언서의 말씀에서는 “뼈를 윤택하게 한다”라고 하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뼈를 윤택하게 한다고 하는 것은 뭡니까? 고민이 있고 정말 스트레스가 많고, 심한 우울증에 걸리면 비쩍 마르게 되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너무나도 행복하면 마르지 않고 살이 찌는 것과 마찬가지로 좋은 소식을 얻게 된다고 한다면 마음에 기쁨이 생기게 되는 것이고 그리고 윤택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그런 소식을, 그런 좋은 소식들을 항상 가져오느냐? 항상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어떤 때는 좋은 소식이 없는 겁니다. 좋은 소식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또 안 좋은 소식이 들리고, 또 안 좋은 소식이 들리고, 수고하고 애썼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는 그런 일들이 생기게 되면, 살이 마르게 되고 뼈가 마르게 되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잠언서 17장 22절의 말씀을 보니까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잠언서 17장 22절 말씀 [스크린에] 준비가 안 됐는데,)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마음이 기쁘고 즐겁고, 좋은 소식을 들어서 좋은 결과를 얻어서 그렇게 즐거움이 있으면, 정말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 좋은 결과가 없어서, 근심하고 걱정하고, 그렇게 되면, 비쩍비쩍 말라갈 수밖에 없다고 그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 읽은 잠언서 15장 30절에서는 두 구절을 이렇게 대비시키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좋은 소식은 뼈를 윤택하게 한다고 말하면서, 그 반대말로 무엇을 이야기하냐면, 좋은 소식이 없으면, 좋은 소식이 없으면, “그러면 슬퍼질 것이다”라고 표현한 것이 아니라, 앞부분을 어떻게 표현했어요? 눈이, 눈이 밝은 것은 마음을 기쁘게 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좋은 소식을 얻을 때에, 기뻐하고 즐거움이 생기는 것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좋은 소식이 없으면, 그러면 우리가 우울하고 절망적이고 고통 가운데 살아가야 되는가?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쁠 수가 있는데, 어떻게 기쁠 수 있는가? 우리의 눈이 밝으면, 우리의 눈에 빛이 있으면, 마음이 기쁘게 된다 이 말이죠. 실제로 어떤 소식이 전해졌는가, 결과가 어떠한가에 따라서 우리의 마음이 좋았다, 나빴다, 좋았다, 나빴다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지금 우리들의 앞에 펼쳐지는 것이 절망적인 소식들이 들리고 좋은 소식이 없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눈이 빛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의 눈이 빛난다고 한다면, 우리의 눈이 밝다고 한다면, 그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믿음의 눈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기쁨이 생긴다고 하는 그런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치기를 뭐라고 가르치냐면, 항상 기뻐하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만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꼬이기 시작하고 우리가 계획했던 것들이 실패로 돌아가고, 우리가 원했던 것이 이루어지지 않고, 온갖 절망적인 일이 우리 앞에 막 펼쳐진다고 할지라도, 그런 순간에도 절망하며 괴로워할 것이 아니라,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항상 기뻐하기 위한 그 방법이 있다고 한다면 무엇입니까? 오늘 잠언서 15장 30절에서 들려주시는 말씀이, 눈이. 눈이 밝으면 기뻐할 수 있다는 겁니다. 눈이 빛이 나면 기뻐할 수 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하자면 믿음의 눈으로 우리가 바라볼 수 있으면, 우리가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서, 우리는 그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같은 것을 보면서도, 관점에 따라서 정반대의 반응을 보이곤 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무엇일까요? 바로 12명의 정탐꾼들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모세가 각 지파에서 1명씩 12명의 정탐꾼들을 뽑아서, 선발해서, 그래서 가나안 땅을 한번 둘러보고 오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열두 명의 정탐꾼들이 가나안 땅, 예루살렘 그리고 여리고 등등 여러 도시를 다니면서, 그 마을을 다 이렇게 살펴본 다음에, 그리고 돌아와서 모세에게 보고하기 시작했는데요. 그런데 그 가운데 10명의 정탐꾼들은 부정적인 보고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지도자, 모세시여, 큰일 났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가나안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정말 엄청나게 큰 거구를 가진 그 엄청난 그 거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 성은 아주 든든합니다. 무기도 잘 갖추고 있습니다. 요새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오합지졸이고, 우리는 군대 훈련도 되지 않았고,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저 어떻게 저 가나안과 전쟁을 해서 저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있겠습니까? 큰일 났습니다. 우리는 그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없다고 보고를 했습니다. 하지만 여호수아와 갈렙 2명의 정탐꾼은 정반대의 보고를 합니다. 우리가 가서 보니, 저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그 땅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들어가서 차지할 수 있겠습니다. 이 12명의 정탐꾼들 가운데 10명은 나쁜 것을 보고 온 것이고, 2명은 좋은 것을 보고 온 것일까요? 서로 따로따로 다녀서, 그래서 그 결론이 다른 것일까요? 그게 아니에요. 12명의 정탐꾼들이 본 것은 똑같은 것을 봤어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똑같은 것을 본 거죠. 하지만 그 10명의 정탐꾼의 관점은 어떤 관점이었는가? 부정적인 것을 본 것이죠. 절망적인 것만 본 겁니다. 하지만 두 명의 정탐꾼은 무엇을 봤습니까? 바로 이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바로 그 땅이다. 그곳에 아모리 족속들, 히위 족속들, 여러 족속들이 살고 있는데, 바로 그 땅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는데, 바로 우리가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는데, 결국 이 관점의 차이, 눈에 빛이 있는가 눈이 밝은가 어두운가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가, 믿음의 눈으로 보고 있는가에 따라서 이 보고가 완전히 달라졌던 것을 우리는 성경 말씀 가운데서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도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삶을 그냥 내 팽개쳐 두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세심한 손길로 인도해 주시며,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우리들 가운데 있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면서, 우리가 만나는 그 어떠한 형편과 그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당장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걱정하고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그러한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이걸 통해서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실까?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이것을 경험하게 하셨는데, 이걸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큰 일을 만들어내실까? 하나님의 그 역사가 무엇일까? 하나님의 그 인도하심이 무엇일까? 하나님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믿음의 눈, 눈에 빛이 있어서, 눈이 밝은 눈을 가지고 있어서,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우리가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하나님 앞에 영광을 올려드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기도해야 될 기도의 제목이 있다고 한다면, 주여, 믿음의 눈을 주시옵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따라서 해봅시다. “주여, 믿음의 눈을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해야 돼요. 뿐만 아니라 우리들 가운데 부정적인 생각이 들고 절망적인 생각이 들고 슬픈 생각이 든다고 한다면, 빨리 정신을 차리고, “아니지. 이게 아니지.”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우리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그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일을 허락하셨다고 한다면, 나를 망가뜨리기 위해서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떠한 큰 일을 만들어 나가고 계시는가? 그것을 기대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바라볼 수 있는 그 믿음의 눈을 재빨리 회복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31절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잠언서 15장 31절 말씀인데요. “생명의 경계를 듣는 귀는 지혜로운 자 가운데 있느니라.” 성경을 좀 이해하기가 좀 어렵죠 생명의 경계가 뭡니까? 뭘 생명의 경계라고 하는 거죠 뭔가 좀 이렇게 확 무슨 뜻인지 이해가 좀 되십니까? 잘 이해가 안 되죠? 저도 이 표현을 읽으면서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뭘 봐야 돼요? 원어를 봐야죠. 원어를 봤더니, 뭐라고 되어 있냐면, “생명의 책망”을 듣는 귀는 지혜로운 자들의 처소 가운데 있느니라. 책망을 듣는 거예요. 누군가 나에게 책망을 하고, 꾸짖고 혼내고, “그러면 안 되지.” “이렇게 살면, 안 되지.” “믿음 생활해야지.” 책망을 하는 그 책망을 듣는 귀는, 그런 귀를 가진 사람은 어떻게 된다? “지혜로운 자의 처소 가운데 있는 사람이다”라는 말씀이 15장 31절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책망하는 그 책망이 어떤 책망이라는 겁니까? 생명의 책망이라는 거예요. 다시 말하자면 우리를 살리는 책망이라는 거예요. 우리가 책망을 듣는 것은 굉장히 힘듭니다. 칭찬을 듣기를 원하지, 책망 듣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어요. 잘한다고 박수 쳐주고, 너무너무 훌륭하다고 박수 쳐주고, 너무너무 감사하다고 감사의 표현을 듣고 싶고, 그런 이야기를 듣고 싶지, 왜 이거 잘못했느냐고, 그렇게 나쁜 짓 하면 안 되지, 이렇게 악한 일을 하면 안 되지, 그런 잘못하는 것에서 돌아오라고 하는 그런 책망의 말을 듣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31절의 말씀에서 들려주시는 교훈이 무엇이냐면, 그런 책망을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는 자가 지혜로운 자다고 하는 것이고, 그 책망은 무슨 책망이냐? 우리를 죽이기 위해서 하는 책망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해주는 책망이라고 하는 것이 15장 31절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책망하시거나, 또한 들려주실 때, 그 말씀을 잘 들어야 될 텐데요. 32절 말씀에서도 역시 같은 말씀을 해주고 있습니다. 훈계받기를 싫어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경히 여김이라. 견책을 달게 받는 자는 지식을 얻느니라. 훈계를 싫어하게 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영원히 망하게 된다는 거죠. 정말 바른 길을 가라고 훈계하는 것인데, 그 훈계를 듣기 싫어하게 되면, 결국 그 사람은 멸망의 길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훈계가 있습니다. 책망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양심을 향해서 두드리시는 주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그런 그런 음성을 듣게 될 때, 책망을 듣게 될 때, 우리는 애써 외면하면서 못 들은 것처럼 할 것이 아니라, 그런 말씀이 우리에게 들리면, 우리가 “아, 내가 잘못했구나. 내가 이러면 안 되지.” 하면서, 돌아서서, 하나님 앞에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결단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살아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결단의, 그 책망의 말씀을 듣는 것이죠.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양심 가운데 말씀해 주셔요. 이런 말씀도 해주시고, 우리의 삶을 자꾸만 채찍질하면서, “너 그렇게 살면 안 되지”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하면 안 되지” 하면서, 우리들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시는데,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냐면, 성경을 읽으면서 그냥 흘려버려요. “나한테 하는 얘기가 아니겠지” 하면서, 성경을 읽는데, 그 성경 말씀을 그냥 읽기만 하고,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냥 지나쳐 버리는 것이죠. 성경을 암송하면서, 그 암송하는 그 말씀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해야 되는데, 그냥 암송만 하지, 그냥 흘려버릴 때가 있다는 거예요. 설교하는 자가 설교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만 들으라고 하고, 나 자신에게 들려주는 설교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흘려버리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 망하게 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을 향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만들고, “이렇게 신앙생활하면 안 되지”라고 하는 그런 강력한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된다고 한다면, 그 순간에 우리가 그 생명의 경계, 생명의 책망, 우리를 살리는 그 훈계를 우리가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우리들의 삶을 바꾸어 나가면, 살아갈 수 있다 이 말입니다.

안타깝게도 가롯유다는 예수님께서 마지막 기회를 주셨을 때, 그것을 애써 외면하고 그냥 흘려버렸어요. 우리가 예수님의 그 마지막 1주간의 그 행적을 살펴보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성만찬을 하시면서, 가롯유다를 향해서 말씀하시는 거죠. “나와 같이 이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배반할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그것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예수님이 도대체 이 말씀을 해주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다른 제자들은 몰라요. 하지만 한 사람은 분명하게 아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구나. 나의 그 행적을 알아보시고 말씀하시는 걸 정확히 알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가롯유다는 마치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그냥 애써 아무것도 아닌, 그냥 나에게 한 말이 아닌 것처럼 딴짓하면서, 그러면서 그냥 흘려버리는 거죠. 우리가 설교 말씀을 들으면, “이 말씀은 우리 김 집사가 들으면, 참 좋을 말씀인데, 목사님 정말 말씀 잘해주셨는데, 우리 김 집사가 들었으면 좋겠는데”라고 하면서, 자신에게 오는 말씀이 아니라, 그냥 흘려버리는, 하지만 귀를 막아버렸기 때문에 가롯유다는 망해버리고, 그런데 그 옛날 예수님께서 가롯유다를 향해서 책망하시며 마지막 기회를 주신 것처럼, 오늘 우리들에게도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 기회를 주세요.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오늘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회개하며 결단해라. 그렇게 살면 안 된다. 그렇게 하나님을 배신하며 살면 안 되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면 안 되고, 그렇게 하나님의 그 명령을 어기면서 살면 안 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씀해 주실 때, 그 훈계의 말씀이, 책망의 말씀이 나를 살리는 양약이 된다고 하는 그 말씀을 기억하면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매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설교를 듣거나, 우리가 어떠한 순간에든지, 정말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들에게 훈계해 주시고, 책망해 주실 텐데, 그 책망의 순간순간마다 그것이 나를 살리는 생명의 책망이라고 받아들이면서, 믿음으로 결단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디모데후서 4장 3절, 4절 말씀에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역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오늘날에는 무슨 이야기를 좋아합니까? 우리를 그냥 마음이 편해지는 이야기, 그저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 내 만족을 줄 수 있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에게 열광하는 것이죠. 그런 것들에게만 열광을 하고, 우리의 잘못을 책망하고 우리를 살리는 그 책망은 귀 닫아버린다고 한다면, 그러면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믿음의 길로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잠언서 15장 33절의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지혜의 훈계라.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잠언서를 통해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말씀이 무엇이냐면, 지혜는 다른 게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을 무서워할 줄 알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지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들려주시는 그 놀라운 축복의 말씀들을 우리의 마음속에 깊이 새기며 믿음으로 결단하여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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