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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생각해야 (잠 15:28-29)

혹시 “나비 효과”(the butterfly effect)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처음 듣는 말인가요? 좀 들어보셨죠? “나비 효과”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저 브라질에서 한 마리의 나비가 날갯짓을 한 그 날갯짓이 그 날갯짓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날갯짓에 의해서 공기의 방향이 바뀌고, 흐름이 바뀌면서, 그것이 연결되고 연결되고 연결되어서, 뉴욕에서는 허리케인이 일어날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정말 그런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카오스 이론”(chaos theory)이라고 하는 것에서부터 나온 하나의 이야기인데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 우리가 하는 말 하나하나, 그리고 우리가 만들어내는 하나의 사건들, 이것이 그 하나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과 말과 행동이 다른 사건으로 다른 행동으로 다른 말로 연결되게 되었고, 또 다른 것을 또 연결시키고, 다른 것에 영향을 주고, 그 말이 그 사건이 그 행동이 또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또 영향을 주고 계속해서 영향을 주어서, 그래서 결국에는 정말 엄청나게 큰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이론입니다. 검증할 수야 없겠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럴듯한 말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웨일스 민요 가운데 “못 하나가 없어서”(for want of a nail)라고 하는 그런 노래가 있는데, “못 하나가 없어서”라고 하는 노래는 이렇게 가사가 되어 있습니다. “못 하나가 없어서, 말, 말 그 발에 붙여야 할 그 편자를 붙일 수 없었네. 그 말 편자를 붙일 수가 없어서, 그 말을 사용할 수 없었네. 그 말을 사용할 수 없어서, 메시지를 보내야 될, 그 파발을 보낼 수가 없었고 그 파발을 보낼 수가 없어서, 전쟁을 지고야 말았네. 전쟁을 지고 말아서, 전쟁을 이길 수 없어서, 결국 왕국을 잃고 말았네. 이 모든 게 편자못 하나가 없어서였다네.”라고 하는 민요이죠. 정말로 그 조그마한 못 하나가 없었다고 하는 게, 그냥 못 하나 없는 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못 하나가 없어서, 편자를 발에 붙일 수가 없었고, 말을 사용할 수도 없었고, 전령을 보낼 수도 없었고, 아무것도 하지 못해서 결국 전쟁에서 지게 되었고 왕국이 망하게 되었다고 하는 그런 노래입니다. 물론 전쟁이 지는 것, 그리고 왕국이 망하는 것을 그 원인을 못 하나 없는 것에서, 그 이유를 거기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많은 이유들, 또 다른 많은 원인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이 되지만, 그러나 이 나비 효과라고 하는, 이런 이론이 우리들에게 주는 그 시사점은 아주 크다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내가 말하는 그 말 한마디, 내가 하는 그 행동 하나, 그리고 우리가 만들어낸 그 사건 하나하나가 그냥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한 사람의 삶을 바꾸어 놓고, 한 사람을 흥하게 하거나 망하게 하거나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신중하게 해야 하는 것이고, 우리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해야 하는 것이지, 함부로 그냥 아무런 생각 없이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어떻게 좋은 교회가 될 수 있을까? 1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 교회가 어떻게 하면 정말 좋은 교회가 될 수 있을까? 우리가 고민한다고 하면, 그것은 우리가 오늘 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중요한 것이죠. 내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정말 중요한 것이죠. 교회에 나온 성도들을 향해서 웃음을 띠면서, 따뜻하게 맞이해 주고, 그리고 따뜻한 손 하나 내밀어주고, 그리고 우리가 사랑으로 함께 돌보면서, 따뜻한 교회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고, 말 한마디를 하더라도 그냥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내뱉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말 한마디로 사랑의 말을 해주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오늘 읽은 잠언서 15장 28절의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의인은 어떻게 말하는가? 말할 때, 그냥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나는 대로 지껄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그 말이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내가 하는 이 말이 이 가정을 세울 것인지, 파괴할 것인지, 내가 하는 이 말이 우리 아이를 성공하게 만들 것인지, 무너지게 만들 것인지, 내가 하는 이 행동 하나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인지, 신중하게 또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말하기를 더디 하며, 정말 신중하게 대답하는 것을, 신중하게 이야기한다고 하는 것인데요. 그런데 악인은 어떻게 하는가? 악은 악인은 악을 쏟아내 버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인이 악을 쏟아낸다고 하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악인이 악을 쏟아낸다” 그 말은 그러니까, 악인은 악한 말을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일까요? 그런 말일 수가 있겠습니다. 악인이 악한 말을 하는 것을 말한다고 말할 수가 있겠는데요. 그러나 그 앞에 있는 구절과, 의인에 관한 구절과 악인에 관한 구절을 연결시켜서 생각한다면, 악인이 악을 쏟아낸다고 하는 얘기는 그냥 악한 말을 막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로 보기보다는, 앞부분과 연관시켜서 생각한다면, 악인은 깊이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냥 말을 쏟아내는 것이고, 그렇게 생각 없이 쏟아낸 그 말이 결국에는 악한 말이 되고야 만다고 하는 그런 의미일 것입니다.

사실 의도적으로 악한 말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사실 의도적으로 “내가 나쁜 말을 해야 되겠다” “내가 악한 말을 해야 되겠다” 나는 정말 나쁜 말을 하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마 극히 정말 예외적으로 어떤 사람은 그럴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아요. 누가 나쁜 부모가 되고 싶겠어요? 누가 나쁜 선생님이 되고 싶겠어요? 누가 나쁜 지도자가 되고 싶겠어요? 아무도 그렇게 나쁜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렇게 악한 역할을 감당하고 싶은 사람은 이 세상에 거의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 좋은 부모가 되고 싶어 해요. 좋은 아빠가 되고 싶다.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 나는 좋은 교사가 되고 싶고, 나는 좋은 지도자가 되고 싶고, 나는 좋은 이웃이 되고 싶고, 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고, 선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는 그런 간절한 마음들이 우리 모두에게 다 있는 것이죠.

그런데 왜 우리는 악한 부모가 되어 버리고 말았는가? 왜 우리는 나쁜 부모가 되어 버리고 말았는가? 왜 우리는 나쁜 사람, 나쁜 지도자가 되어버리고, 왜 우리는 나쁜 이웃이 되어 버리고 말았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가 깊이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냥 말해버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생각 없이 내뱉은 그 말이 사실은 악한 말이 되는 것이고, 악인이 악을 쏟아낸다고 하는 이야기는 악인이 일부러 악한 말들을 쏟아내고 싶어서 그렇게 의도적으로 악한 말을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라기보다는, 악인이 그 악을 어떻게 쏟아내는가? 사실은 그 마음 가운데 악한 말을 하고 싶은 마음에서 악한 말을 하는 게 아니라, 사실은 선한 말을 하고 싶어요. 사실은 좋은 말을 하고 싶어요. 사실은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런데 악인은 왜 악인인가? 생각하지 않아서, 악인이 되는 거예요. 생각하지 않고 그냥 내뱉어버린 그 말이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엄청난 상처를 주는 것이고, 생각 없이 화를 냈던 내 분노가 우리 자녀들로 하여금 의기소침하게 만들어버리고, 자신감이 없어지게 만들어 버리고, 생각 없이 내뱉은 내 말 한마디가 교회에 대해서 정말 정나미가 떨어져서, 다시는 이런 교회에 다니고 싶지 않다고 하는 그런 결단을 하게 만드는 그런 말이 되어버리는 것이고, 내 행동 하나, 내 모습 하나하나가 생각 없이 나오는 그 모든 일들이 사실은 우리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히고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생각 없이 내뱉은 말 한마디가 악한 결과를 가져오고, 생각 없이 했던 나의 행동이 결국 악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지, 나비가 날갯짓을 하면, 그 날갯짓에 의해서, 내가 날갯짓을 할 때는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그냥 나비는 날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날갯짓을 하는 것이고, 나는 그냥 습관적으로 날갯짓을 한 것뿐인데, 그 나비의 날갯짓에 의해서, 저 뉴욕에서는 허리케인이 몰아닥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엄청난 재난이 다가올 수도 있다 이 말입니다. 내가 나비의 나비로서 내가 어떤 날갯짓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것은 허리케인이 될 수도 있고, 그 나의 날갯짓은 따뜻한 바람이 되거나, 시원한 바람이 되어서, 사람들에게 기분 좋게 만들고, 그리고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새 힘을 얻게 하는 그런 시원한 바람이 되기도 한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했던 그 날갯짓이 허리케인을 가져오는 것처럼, 나는 왜 악한 사람이 되었는가? 내가 악한 사람이 된 것은 내가 의도적으로 악한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깊이 생각하지 않고 했던 그 말이 사람을 죽인 겁니다. 나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던 그 말이 어떤 사람을 생명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이지, 늘 하던 대로 했던 그 말과 행동, 그냥 보는 대로 그냥 나왔던 말과 행동들이 결국은 나를 악인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선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우리는 의인이 될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이 의인이 되는 것입니까? 오늘 잠언서 15장 28절의 말씀에 의하면, 깊이 생각하는 자가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을 해야 의인이, 깊은 생각에서부터 나오는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의인이 되는 것이죠. 내가 말 한마디를 하면서 이 말이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겁니다. 내가 행동을 하면서 이 행동이 과연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죠.

안타깝게도 우리가 원하는 그 목적을 가지고, 말을 하기도 하고 행동을 하기도 할 텐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말과 행동은 그들이 원하는 목적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그 목적과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훨씬 더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깊이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의인이 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의인이 되기 위해서는 깊이 생각하면서, 상대방의 마음을 읽어야 하는 것이죠. 내가 이 말을 했을 때 상대방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 내가 그 사람의 입장에서 보아서 그 사람의 마음을 읽고 공감하고 그래서 신중하게 말을 해야 하는 것이고요. 같은 말이라고 할지라도 시간이 정말 중요한데, 타이밍이 언제냐에 따라서 똑같은 말이 선한 말이 될 수도 있고, 악한 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깊이 생각하는 그런 습관을 가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835년에 베스 데이(Beth Day)라고 하는 사람이 쓴 시가 하나 있는데요. “세 개의 황금문”이라고 하는 그런 시가 있습니다. 베스데이라고 하는 사람은 이렇게 노래를 했습니다. 누군가 들려준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거들랑,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싶거들랑, 다른 이에 대해 말하기 전에 세 개의 황금문을 반드시 지나야 한다. 좁은 이 문들은 첫째로 “이것은 사실인가?”라고 묻는 문이고, 그리고 두 번째 문은 “이것은 정말 필요한가?”라고 하는 문이고, 그대의 마음에 진실하게 대답을 그런 질문들에 대해서 대답을 해야 하고, 그다음으로 마지막 가장 좁은 문은 “이것이 친절한가?”라고 하는 세 개의 검증의 문을 통과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만일 이 세계의 그 검증의 관문을 지나, 그래서 그 말이 마침내 그 입술에 도달한다면, 그러면 그때는 그런 이야기를 해도 괜찮다고, 그 말의 결과가 어떠할지 두려워할 필요 없이, 그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노래한 바 있습니다. 이 베스 데이의 그 조언은 정말 유익한 조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오늘날 사람들은 사실인가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카톡으로 전해져 오는 그러한 비난의 말들, 남들을 비판하는 그런 말들, 사실은 그것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침소봉대하여, 참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만들어내고, 사람들을 분노케 만들어서, 어떤 이득을 얻기 위해서 만들어낸 가짜 뉴스들이 대부분인데, 우리들은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조차 하지 않은 채, 마구 뿌려대고 있는 것인데, 우리 크리스천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첫 번째 관문, 이것이 과연 사실인지에 대해서 확인을 해봐야 하는 것이죠. 사실인가, 아닌가를 확인해 봐야 하는 것이고, 사실이 아니라고 하면 말해서는 안 되고 전해서도 안 되고,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없어도 말해서는 안 되고 전달해서는 안 되는 것이죠. 사실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절반의 진실이 사실이 아닙니다. 약간의 사실을 가지고 과대하게 포장해서, 그래서 무엇인가를 정말 아주 나쁜 것이라고 그렇게 포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할 수가 없을 겁니다. 대부분의 거짓말은, 무엇이 거짓말인가? 약간의 진실에 엄청난 거짓말을 섞은 것들이 그것이 가짜 뉴스들인데, 그런 약간의 진실에 엄청난 거짓을 섞은 선동적인 가짜 뉴스들을 우리 크리스천들은 전달해서는 안 되는 것이죠. 첫째, 관문을 통과하지 못한 것들을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죠.

두 번째는 “과연 이것을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것이죠. 과연 이 말이 과연 필요한가? 이 말을 해야 될 이유가 무엇인가? 과연 이 말을 함으로써 우리는 어떠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유익한가? 그렇지 않은가? 반드시 필요한 말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있어야 되는 것이죠. 마지막으로 “이것은 친절한 말인가?” 정말 내가 친절하게 하는 말인가 아닌가에 대해서 마지막 관문을 통과해서, 이 세 개의 관문을 다 통과한 후에 그리고서 말하라 하는 게 베스 데이의 조언입니다.

그리고선 말아라 그랬는데, 사실은 이 세 개의 관문이 아니라, 관문들이 더 많아요. 이것 말고도 더 많은 관문들이 필요해요. 어떤 관문들이 필요합니까? “이것은 과연 선한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선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라고 하는 그런 질문을 던지는 관문이 또 필요한 것이죠. 뿐만 아니라 이것이 적절한 때인가? 적절하지 않은 때인가? 타이밍에 관한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것이죠. 내가 하는 이 말이 과연 배려가 담긴 말인가? 애정이 담긴 말인가? 사랑으로 하는 말인가? 치유의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파괴하려고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여러 가지 관문들을 가지고서, 항상 또 생각해 보고 생각해 보고 모든 차원에서 정말 엄청나게 많은 그 관문들을 놓고서 고민하고 고민하고 생각해서 그런 다음에 우리가 신중하게 대답을 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는가? 악인이 된다 이 말이에요. 악인.

선인과 악인, 의인과 악인의 차이는 그 사람이 내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기만 하면, 그러면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깊이 생각해서 신중하게 말하면, 의인이 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아니하고 신중하지 못하게 섣불리 대답했다가, 섣불리 이야기했다가 결국 사람들을 죽게 만들고 파괴하게 만들고,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그런 말을 한다면 사실은 그 사람은 악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상대방이 듣기 좋은 말만 해야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듣기 좋은 말만 하라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것인지, 우리가 진지하게 물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선하고 아름다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인지 항상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것이죠.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만큼 깊이 생각할 능력이 없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날갯짓을 하고 있는데, 과연 이 날갯짓이 허리케인이 될지, 훈풍이 될지 순풍이 될지, 우리는 모르고 날갯짓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게 우리 인간의 모습이죠. 저도 잘 몰라요. 과연 이게 옳을지 저게 옳을지, 이렇게 말하는 게 옳을지, 침묵하는 게 옳을지, 말하는 게 옳을지, 이렇게 말하는 게 옳을지 저렇게 말하는 게 옳을지, 우리로서는 잘 알 수 없다고 하는 것이, 그게 우리의 문제예요. 마치 우리는 하수 같아요. 바둑을 두다 보면, 고수는 우리가 정말 이해하지 못하는 수를 둡니다. 아무 의미가 없는 곳에 바둑알을 놓습니다. 저기다 도대체 왜 바둑가알을 둘까? 저 많은 그 반상 위에서, 놓을 때가 정말 많이 있는데, 왜 그 돌을 이 시점에 그 돌을 이곳에 놓지 않고 저곳에 놓을까? 하수는 고수의 그 돌을 이해하지를 못하는 겁니다. 고수는 때로는 사석작전을 쓰면서, 내 것을 빼앗기는 작전을 써서, 대마를 잡는 것인데요. 우리 하수들은 이해를 하지 못하죠. 내 생각에는 지금 이 순간에 아다리를 쳐서, 따먹으면 좋을 것 같은데, 그런데 결국은 그게 망하는 길이었어요. 내 생각에는 지금 이 순간에 여기를 막아줘야 될 것 같은데, 그렇게 막았기 때문에, 내가 지는 그런 수를 하는, 그런 바둑의 하수처럼, 어쩌면 우리는 인생의 하수인 것이죠. 그래서 과연 이때 이 말을 이렇게 하는 것이 선한 일인지, 악한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는 것인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하고 깊이 생각해야 하겠지만, 그러나 아무리 깊이 생각한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뜻대로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능하면 또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깊이 생각하고, 깊이 묵상하면서, 동시에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며, 하나님께서 선하신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을 기도하며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시편 127편 1절의 말씀에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에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우리가 그 아무리 신중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말해도, 그것이 때로는 우리를 파괴하는 허리케인이 될 수밖에 없기에,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도우심을 인정하고 기도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우리의 실수를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깊이 생각해도 충분히 생각하지 못했을 때, 잘못된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을 텐데요. 그럴 때 분노하거나 좌절할 것이 아니라, 내가 연약한 자였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고, 내가 충분히 생각하지 못했고 하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더 깊이 생각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고, 그럴 때마다 넘어질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울부짖으며 회개해야 할 것이고, 또한 주님의 은총을 간구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고요. 우리의 부족함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오셨기에, 주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잠언서 15장 29절의 말씀 가운데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악인을 물리치신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하는 것인데요. 그 말은 우리가 깊이 더 생각하고, 말을 하는 것을 분별하고 행동하는 것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야 될 필요성을 더 아주 실감하게 해주는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그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내가 하는 그 말 한마디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내가 하는 그 행동 하나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그리고 실질적으로 악한 노릇을 하고 살면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한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우리가 마음대로 악을 행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와 기도하는 것은 그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악인의 기도를 듣지 아니하시고 물리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인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가 “나는 그저, 내가 크게 나쁜 짓 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의인이겠지”라고 착각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내가 하는 그 몸짓 하나, 내가 말하는 그 말, 표현 하나, 억양 하나, 내 눈빛, 그게 사람들의 마음에 비수를 꽂고, 사람들을 죽이고, 악한 일을 했다고 하는, 그런 너무나도 악한 모습이 우리들에게 있다고 한다면, 그 악한 모습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하시겠느냐 이 말이에요. 멀리할 수밖에 없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더욱더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 주여 우리가 주님의 뜻을 잘 분별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뻐하시는 말을 하게 주시고 행동을 할 수 있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의인이 되기 위해서는 말을 분별할 수 있어야 되는데요. 내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이 나를 의인으로 자동적으로 만들어주는 게 아니에요. 내가 선한 의도, 내가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이 나를 좋은 부모로 만들어주느냐? 아니에요. 내가 그렇게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이 나를 좋은 교인으로 만들어주느냐? 아니에요. 내가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이 나를 좋은 지도자로 만들어주느냐? 아니란 말이에요. 깊이 생각하지 아니하면, 그 부모가 나쁜 부모가 되는 거예요. 깊이 생각하지 아니하면 그 교인이 나쁜 교인이 되는 것이고, 기쁘게 생각하지 아니하면 그 지도자가 나쁜 지도자가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게 바로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착하고 선한 사람이 아무런 생각이 없고, 고민하지 아니하고, 그래서 무능하다고 한다면, 결국 악이 판치는 세상이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비둘기같이 순전하기만 하면 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비둘기같이 순전할 뿐만 아니라, 뱀같이 지혜로워서, 정말 지혜로워서 분별하고, 과연 선한 결과를 어떻게 하면 만들어 낼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내 말 한마디, 한마디가, 행동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을 선하게 만들어 낼 수 있는지, 우리가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있어야 된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죠.

안타깝게도 우리의 자녀는 누가 망치고 있는가? 안타깝게도 이 세상은 누가 망치고 있는가? 착하지만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 망치는 거예요. 사랑이 많은 것 같지만, 그러나 깊이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이 망치고 있는 거예요.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무능하고, 어리석은 자들이 되어서, 그렇게 하면 결국 악인일 수밖에 없다. 내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니까,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악,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깊이 생각하고, 그래서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한 말 한마디의 날갯짓, 행동 하나의 날갯짓, 그래서 그것이 허리케인이 아니라 순풍으로, 훈풍으로 우리 모두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늘 실패하죠. 그게. 저도 늘 실패해 왔어요. 우리 아이를 기르면서, 늘 실패해 왔어요. 그래서 오늘도 다시 한번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될 줄로 믿습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주님 앞에 엎드리면서, 다시 한번 새 힘을 얻고, 용기를 얻고, 주께서 원하시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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