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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 죽으나 (롬 14:7-12)

오늘 우리가 로마서 14장의 말씀을 살펴보게 되었는데요. 로마서 14장 7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가 없도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이 없다.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이 없다고, 자신을 위해 살거나 죽는 사람이 없다고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데요. 그러면 누구를 위해 산다고 하는 말입니까? 누구를 위해서 죽는다고 하는 말입니까? 로마서 14장 8절 말씀에 보면 바로 다음 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지금 이 로마서에 표현되어 있는 이 표현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서, 여기서 말하고 있는 “우리”가 누구를 지칭하는 말일까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고 죽는 게 아니라, 주를 위해서 살고 죽는다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고 있는 “우리”는 누구를 가리키는 말일까요? 바울 사도와 그리고 바울 사도와 함께 동역하고 있는 그 동역자들을 가리켜서 하고 있는 말일까요? 아니면 이 편지를 받아 들고 있는 로마 교회 교인들을 다 포함해서 우리들, 그러니까 바울 사도와 바울 사도의 동역자들과 그리고 이 편지를 받아 읽고 있는 로마 교회 성도들 모두가 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살고 주를 위해 산다고 하는 그런 의미일까요? 아니면 더 나아가서 로마 교회뿐만이 아니라, 우리 인간 전체가 우리 인간이란 누군가? 우리 인간 우리들은 우리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 살지 않고 주를 위해 산다고 하는 말일까요? 1번이겠습니까? 2번이겠습니까? 3번이겠습니까?


우리말 번역으로만 본다고 한다면, 아마도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포함하는 것이 아닐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주를 위해 사는 사람은 그야말로 극소수의 사람에 불과할 거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누구를 위해서 사나요? 자신을 위해 사는 거죠. 세상 모든 사람들이 누구를 위해서 사는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삽니다. 이기적인 목적을 가지고 삽니다. 나를 위해서 살고 있는 게, 모든 사람들의 모습이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세상 사람 모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소수의 아주 헌신적인 몇몇 사람들을 가리키는 게 아닐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 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이기적인 삶을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이기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 너무나도 뻔하게 드러나잖아요? 정치인들을 보면 아주 잘 드러납니다. 나라를 위해서 일하겠다고 출사표를 던지는데, 알고 보면 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라, 순 자기 자신을 위에서 일하고 있는 모습을 너무나도 많이 목격해 왔습니다. 그저 나라를 위한다. 대의를 위한다. 공의를 위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저 구호에 불과하고, 명분에 불과할 뿐, 사람들은 다 어떤 사람들인가? 철저하게 이기적이어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사는 모습들을 우리가 너무나도 많이 보아왔던 것이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주를 위해서 일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조차도, 말로는 주를 위해서 일한다고 말하는데, 알고 보면 주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일하는 경우를 너무나도 많이 목격해 왔습니다. 성도들 가운데, 아니 목회자들 가운데 선교사들마저도, 주를 위해서 일한다고 말하고, 주를 위해서 헌신한다고 말하고, 나 자신을 위해서 일하지 않는다고 말은 번지르르하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알고 보면 사실은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거나 자신의 삶과 관련이 없거나 하면, 이내 그 열정들이 사라지는 모습들을 보면서, 사람들의 속마음을 알아채게 되어서, 너무나도 낙심하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로마서 14장에서 말하기를 우리들은 아무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없고, 우리는 모두 다 주를 위해서 살고 주를 위해서 죽는다고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바울 사도나 몇몇 소수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우리말 번역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본문의 말씀을 우리가 가만히 살펴보면 이 말씀은 우리 모두가 다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하는 “현재의 상태”를 묘사하는 말씀이라기보다는, 우리 모두가 마땅히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당위”를 설명한 말씀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겁니다. 우리 모두가 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해서 살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누군가?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아야 하지 않고 우리는 누군가 주를 위해서 살아야 될 사람이다. 우리는 마땅히 주를 위해서 살고 주를 위해서 죽어야 한다고 하는 “당위성”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해주고 있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겁니다.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 살지 말고 주를 위해서 살아야 할까요? 왜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까? 그것을 다시 한번 로마서 14장 8절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우리가 주를 위해서 살아야 될 이유가 뭐예요? 우리가 누구의 것이에요?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누구예요? 주님에게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주님은 우리의 주인이시고, 우리가 주님의 종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종이기 때문에, 주님을 위해서, 주님께서 시키는 대로, 주님께서 명령하는 대로, 주를 위해서 살고, 주를 위해서 죽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종이라고 한다면 누구의 뜻을 듣고 누구의 뜻을 따라서 행해야 할까요? 주인의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이죠. 종은 당연히 주인의 말을 듣는 것이 옳습니다.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요즘에는 종이 없으니까요.)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직원을 생각해 볼 수가 있겠는데, 직원은 누구의 말을 듣고 행동해야 합니까? 사장님의 말을 들어야 되는 거죠. 고용주의 말을 들어야 되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가 공무원 시험에 합격을 해서 그래서 공무원이 되었다고 한다면, 누구의 말을 들어야 돼요? 상관의 말을 들어야 되는 것이죠. 군인은 누구의 말을 들어야 됩니까? 상관의 말을 들어야 되는 것이죠. 상관의 지시와 명령을 따라야 될 의무가 군인에게 있는 것이죠. 옛날 왕과 신하가 있을 때 신하는 누구의 지시와 누구의 명령을 들어야 됩니까? 왕의 명령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누군가 우리가 주님의 종이라는 거예요. 우리가 주님의 종,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살아도 주를 위해서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주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라 하는 것이 오늘 로마서 14장 7절과 8절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누구라고요? 주님의 종입니다. 우리 옆사람에게 한번 이야기해 봅시다. “주님의 종이시군요.” 주님의 종이기 때문에 살아도 죽어도,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고 하는 게 오늘 본문의 말씀이요. 우리들을 향해서 권면해 주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는 이 성경의 가르침은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에게는 상당히 불편한 말씀입니다. 불편합니까? 좋습니까? 불편해요. 왜냐하면 우리는 종이 되고 싶은가요? 자유인이 되고 싶은가요? 자유롭게 살고 싶어요. 우리는 누구에게 얽매여 살고 싶지 않고, 우리는 자유롭게 살고 싶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 말씀을 읽을 때 약간 불편한 겁니다. 믿음이 있는 분이라고 한다면 내가 하나님의 종이지 내가 하나님의 종으로서 살아야 되겠지 받아들이시겠지만 아직 믿음이 온전하지 못하신 분, 아직 깊지 못하시는 분들은 이 말씀을 들을 때 그 마음 가운데 불편함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는 자유에 대한 갈망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우리가 자유롭게 살고 싶은 그런 갈망이 있는데, 성경에서는 우리가 자유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다.” 더 심한 말로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노예다”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우리의 마음 가운데 불편함이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간에 우리가 냉정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는데요.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기를 거부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종이 되는 것이 싫어서,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 것이 너무나도 싫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자유를 우리가 선언하게 된다고 한다면, 그러면 그 순간에 우리가 자유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에게서부터 자유로워지는 그 순간, 우리는 “사탄의 종”이 되어버리게 된다고 하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어차피 누군가를 예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 예배할 대상이 있는 것이고, 그 예배하면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 대상이 하나님이냐 하나님이 아닌 우상이냐? 하나님이냐? 이 세상에 썩어질 것이냐? 사탄이냐를 그런 차이가 있는 것이지, 어차피 우리는 누군가를 예배하면서 살아야만 하는 존재이고, 우리가 자유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냐 아니면, 사탄의 종이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되어 있는 것이지, 이도 저도 아니고 온전히 자유롭게 되는 경우가 결코 없다는 거예요.


어떤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에 대해서 둘이 싸우고 있을 때, 누구 편을 들 수 있습니까? 이 사람 편을 들 수 있습니까? 이 사람 편을 들 수 있습니까? 중립을 지키겠습니까? 중립을 지키면 중립이 되나요? 아니요. 중립을 지키면 중립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중립은 나쁜 사람 편에 서는 것과 똑같아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있을 때 좋은 사람 편에 서지 않으면, 그 사람 이 사람 편도 아니고 이 사람 편도 아니고, 내가 중립이라고 선언하는 그 순간, 우리는 악한 자의 편에 서 있는 것과 똑같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중립적일 수가 없는 겁니다. 이 편이든지 저 편이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게 되어 있는 것이지, 우리가 완전히 자유롭고 완전히 중립적이고, 하나님도 사탄도 필요 없는 그 중립의 상태, 아주 자유로운 상태를 찾아볼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냉정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마치 물고기에 비유할 수 있을 건데요. 물고기의 그림을 한번 보시면 이 물고기가 물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물고기가 어느 날 생각을 합니다. 내가 이 물속에서 물의 지배를 받으며 물의 제약 속에서 사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다. 내가 이렇게 물속에서 갇혀 살 것이 아니라, 자유를 얻고 싶다 해서, 물속에서 튀어나가면 어떻게 돼요? 죽어요! 우리는 물의 지배를 받든 지, 아니면 물이 없는 공기의 지배를 받든 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지, 물의 지배도 없고 공기의 지배도 없는, 완전히 자유로운 공간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점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예수님의 비유가 바로 탕자의 비유입니다. 어느 날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집에 있는 것이 싫었습니다. 성경에는 왜 그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집을 떠나려고 했는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아마도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잔소리가 싫었을 거예요. 나는 내 마음대로 살고 싶은데, 내가 하고 싶은 것 하고 싶은데, 아버지가 “이거 해라, 이거 하지 마라 이걸 해라. 저걸 해라” 하면서, 아버지의 명령을 들어야만 하는 그 삶이 너무나도 싫었을 겁니다. 아버지의 잔소리가 싫었을 겁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당겨 받아서, 그래서 자유를 찾아 이 세상으로 나가게 된 것이죠. 아버지의 집에서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버지의 집을 떠나게 되는 그 순간 둘째 아들은 자유를 얻었을까요? 물론 얻은 것 같았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아버지의 잔소리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면 됩니다. 잠자고 싶으면 자도 되고, 술 마시고 싶으면 술 마셔도 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대로 하면서, 내가 원하는 대로 마음껏 살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되었던 것이죠.


그런데 그 둘째 아들이 그래서 완전히 자유롭게 되었는가? 자유롭게 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지막 결국이 어떻게 되었는가? 돼지 치는 사람에게로 들어가서, 그 사람의 명령을 들으면서 돼지를 길러야만 하는 비참한 상태로 빠져버리게 된 것이죠. 아버지의 집에서 떠나온 것이 자유가 아니라, 아버지의 그 잔소리에서부터 벗어난 것이 나에게 자유를 줄 줄 알았는데, 결국 그가 맞이하게 된 것은 자유가 아니라, 더 큰 억압과 더 큰 고통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을 때, 이 둘째 아들이 그때서야 생각하는 겁니다. “우리 아버지의 집에는 그 종들도, 노예들도 풍요롭게 먹고 있는데,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아버지의 집에는 종들도 행복한데, 아버지 집에는 종들도 풍성하게 먹는데, 나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의 집을 떠나오니까, 결국 비참하게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또 이 돼지를 기르면서, 돼지 쥐엄열매를 먹으면서 고통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죠.


우리가 종종 착각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우리가 자유로워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 주님의 다스림을 거부하면, 우리들은 곧 사탄의 종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죠. 우리들에게 있는 선택은 무엇이냐 하면, 어느 종이 더 나은가예요. 하나님의 종이 더 나은가? 사탄의 종이 더 나은가? 왜냐하면 우리들의 마음속의 왕좌는 비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의 왕좌 가운데, 주님을 우리의 왕으로 모시면, 주님의 말씀에 따라 우리가 순종하며 살게 되겠지만,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서 주님을 쫓아내 버리게 되면, 우리들의 마음이 빈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빈 왕좌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사탄이 가득 차버려서, 결국 사탄이 시키는 대로 절망의 그늘로 걸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죠.

마치 컵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이 컵에 물을 채우면 이 속에 물이 있는데요. 이 속에 있는 컵에 물을 다 쏟아내 버리면, 빈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컵 속에 공기가 그 순간에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물을 채우든지 공기로 채우든지, 어차피 무엇인가에 의해서 채워져야만 하는 이 컵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마음은 비어 있는 법이 없고, 누군가의 지배를 받아야 되고, 누군가의 종이 되어야 되는데, 누구의 종이 좋겠습니까? 하나님의 종이 좋습니까? 사탄의 종이 좋습니까?

하나님의 종이 훨씬 더 좋은 것이죠.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떤 주인이십니까? 우리를 착취하고 멸시하고 고통을 주는 악덕 기업주와 같은 주인이 아니라, 우리 주인은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와 같은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우리 주님은 어떤 주인이셨는가? 섬기기 위해서 오셨어요. 마태복음 20장 25절에서부터 28절 말씀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주님이신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억압하고 다스리고,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멸시하고 착취하기 위해서 우리의 주인이 되어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섬기시는 종으로 오셨어요.


우리 주인이신 우리 예수님께서 그 옛날 제자들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그 손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면서, 종의 자리로 들어가서 우리 제자들을 섬겨주셨듯이, 우리가 믿고 섬기고 따르는 주님은 어떤 분이신가? 어떤 주인이신가? 우리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죄인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서라고 한다면, 자신의 몸까지 다 내어놓고 피와 물을 다 쏟으시기까지 사랑해 주신 사랑의 주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번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한 백부장이 나오는데요. 이 로마 백부장은 참 이상한 백부장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 백부장의 하인 하나가 병들어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보통 그 당시의 주인들이라고 한다면 그냥 외면해버리고 말았을 겁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주여 내 하인이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제 하인을 고쳐달라고 예수님 앞에 머리를 조아린 것이죠. 그런데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우리에게 문제가 있을 때, 우리에게 아픔이 있을 때 우리 주님께서는 저 하늘 위에서 그냥 바라보시면서, 그냥 혀를 끌끌 차면서 “거 참 안 됐네. 왜 저랬을까?” 하면서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가만히 계셨던 것이 아니라, 저 높고 높은 보좌 위에서 낮고 천한 이 자리에 내려오시고, 우리를 위해서 자신의 몸을 다 드리시고,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주시기까지 사랑해 주신 놀라우신 은혜로우신 주님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저와 여러분들이 기억하며,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이 그것이 복된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왜 로마서 14장에서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다 누구인가? 주님의 종이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주님을 위해서 살고 주님을 위해서 죽어야 하는 주님의 종이라고 하는 사실을 로마서 14장 7절과 8절에서 강조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성경 전체의 흐름을 보면서 이해를 해야 되는데요.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로마서 14장 10절 말씀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로마서 14장 10절 말씀에 이렇게 표현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지금 이 로마서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지금 우리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보면서, 우리들에게 권면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누군가 조금 잘못을 하면, 그리고 누군가 좀 내 마음에 맞지 않게 행동을 하면, 비판하고 욕하고 또한 정죄하고 심지어 분노하는 일들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가요? 그럴 자격이 없는가요?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에 그래요. 나도 하나님의 종이고 내 옆사람도 하나님의 종이예요. 우리가 다 종이예요. 누가 높고 누가 낮은 게 아니라 모두가 다 종이예요. 그런데 종이 종을 책망할 수 있어요? 종이 종을 나무랄 수 있어요? 종이 종을 지적하고 뭐라고 말할 수 있어요? 종은 누구의 말을 들어야 돼요? 주인의 말을 들어야 해요,

지난번에 우리가 로마서 14장 4절 말씀을 살펴본 적이 있는데요. 로마서 14장 4절 말씀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누구에게 있으매?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누군가 잘못을 한다면 그 잘못을 누가 책망할 거예요? 주님께서 책망할 거예요. 누가 잘못하고 있다고 한다면 주님께서 그 문제를 다스릴 거예요. 우리들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동료 종들로서, 우리가 그 누구에게 비난하거나 욕하거나 또한 화를 내거나 책망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겸손하게 우리 이웃들을 도와주고 또한 사랑해 주고 또한 보듬어 주어야 할 텐데요. 만일 우리가 우리 동료들을 비난하고 또한 욕하거나 또한 정죄하거나 화를 낸다면, 그러면 우리가 누구의 위치에 올라가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위치로 우리가 올라가는 것입니다. 내가 마치 하나님인 양, 내가 마치 그들의 주인인 양 우리가 정죄하고 비난하고 화를 내고 욕하게 되는 것이죠.

이것은 괜찮은 일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교만의 죄를 짓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리로 올라가려고 하는 그런 악한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 서로 하나님의 종으로서, 누가 더 높고 누가 더 낮은 사람이 없어요. 돈을 더 많이 버는 사람이 높은 사람이 아니고, 어떤 직책을 맡은 사람이 더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니고, 우리는 우리 몸에 있는 여러 가지 지체들이 각각 그 역할이 다르듯이 눈은 눈의 역할, 코, 입, 귀, 손, 발 역할들이 다 다를 뿐이지, 누가 누구보다 더 높고 누가 누구보다 더 낫고 말할 수 없고, 우리는 서로 합력해서 서로 사랑하고 도와주어서 하나의 그 사역을 만들어 나가야 될 동료들이지, 누가 누구를 향해서 비난하고 정죄하고 화를 낼 것이 아니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결국 이런 모습을 화를 내고 비난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서서 서로 사랑하고 돌보는 그런 믿음의 동료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마서 14장 10절 말씀에서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우리는 남들을 판단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감 놔라 배 놔라 하면서, 지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 하나님 앞에 심판대 앞에 서야 될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겸손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스스로를 향해서 생각하셔야 돼요. 내가 하나님이 아니고, “내가 주인이 아니고 나도 종이지!” 따라서 해봅시다. “나도 종이지!” 나도 하나님의 종이고, 저 사람도 하나님의 종이고, 내가 누구를 판단하고 비난하고 욕할 대상이 아니라, 서로 협력하며 사랑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해 살고 사나 죽으나 주님의 종이 되어서 믿음으로 살아가야 될 그 과제가 우리에게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날마다 날마다 자기 자신을 죽이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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