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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의 문제 (잠 15:19)

오늘 우리가 살펴볼 주제는 “게으름의 문제”입니다. 오늘 읽은 잠언서 15장 19절 말씀에서는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 울타리 같으나, 정직한 자의 길은 대로이니라.”라고 표현해주고 있는데요. 한 절만 되니까, 우리 히브리어 원어를 한번 살펴보면서, 히브리어 원어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한번 잠시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히브리어는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가면서 읽는 것이라고 했죠? 그래서 지금 화면에 나오는 것이 바로 히브리어인데요. 그 밑에 영어 해석과 그리고 한국말 해석을 달아 놓았습니다. 번역을 하면 어떻게 되는가? “게으른 사람의 길은 가시 울타리이지만, 정직한 사람의 길은 높음이니라. 정직한 사람의 길은 올림이니라.”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문장이 되겠습니다.

우리가 (이 히브리어 원어를 계속 한번 보여주세요.) 이 히브리어 원어를 보면, 우리 한국말 번역과는 좀 약간 다르게 되어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앞부분은 한국말 번역이 히브리어 원어를 그대로 반영해서,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 울타리 같으나” 사실 이제, 동사가 생략되어 있는 문장이죠? “게으른 자의 길 가시 울타리”로만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원어는 동사가 없이. 두 번째 부분은 어떻게 되어 있는가? 한국말은 “정직한 자의 길은 대로이니라”라고 되어 있는데, 히브리어 원문은 “정직한 자의 길은, ‘길, 높음, 올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슬룰라”라고 하는 단어는 맨 마지막에 있는, 맨 마지막에 있는 이 “술룰라”라고 하는 단어는 “높인다” “쌓아 올린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뜻이 되겠습니다.

(이제 치워도 되겠습니다.) 슬룰라라고 하는 이 단어는 언제 사용된 단어인가? 애굽왕이 자기의 마음을 교만하게 높여서,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을 보내지 않는다고 했을 때, 자신의 마음을 교만하게 높인다고 했을 때 사용됐던 단어가 바로 이 단어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 보면 “너희가 하나님을 높이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높일 것이다.”라고 썼던 단어가 바로 이 “슬룰라”라고 하는 단어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대로라고 하는 번역은 의역으로 볼 수가 있겠습니다. 기본적으로 “높인다. 수축한다. 쌓아 올린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단어인데, 정직한 자의 길은, 정직한 자의 길은 어떻게 되는가? “높아진다” “정직한 자의 길은 쌓아 올려진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일 것인데, 그것을 좀 더 우리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대로처럼 뻥 뚫린 아주 형통한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의역을 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아무튼 그 의미는 다 어떻게 번역을 하든, 그 의미는 통할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게으른 자는 가시 울타리니까, 굉장히 힘들죠. 어렵죠. 고통스러울 겁니다. 하지만 그 정반대로 정직한 자는 어떻게 되는가? 술술 잘 풀리고 높아질 것이고, 모든 것이 평탄할 것이고, “아주 좋은 길을 걸어가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바로 오늘 우리가 살펴본 잠언서 15장 19절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먼저 “게으른 자에게는 가시 울타리라.” “게으른 자에게는 가시 울타리가 있다.” “가시 울타리와 같을 것이다.”라고 하는 이 말을 한번 생각해 보면 좋겠는데요. 게으른 자에게는 가시 울타리 같은 것이 있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예를 찾는다고 한다면,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아마 이런 장면을 보면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집안에 쓰레기들이 가득 쌓여 있어서, 쓰레기더미에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텔레비전에서 보신 적 있으십니까? 있을 거예요. “세상에 어떻게 그런 곳에서 사나?” 싶을 정도로 정말 온 집안이 쓰레기로 가득 차 있는데, tv에 종종 그런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이죠. 물론 그 사람들의 문제는 단순히 게으름의 문제만이 아니고, 아마 정신적인 문제, 어떤 집착증, 뭔가 버리지 못하는 그런 강박증 등등 과거의 경험 등등 여러 가지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쓰레기를 자기 집 안에 계속 쌓아두고, 정말 얼마 안 되는 그 비좁은 곳에서 겨우 자고 겨우 생활하는 그런 비참한 삶을 사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우리가 텔레비전에서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원인이 어떤, 어떤 것이든지 결국은 제때제때 치워야 하는데, 빨리빨리 치워야 깨끗하고 단정한 그런 삶을 살 수가 있는데, 게을러서 계속 쌓아두고 또 쌓아두고 또 쌓아두다가 결국 그 인생이 너무 힘들어지게 되는 그런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생생한 예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게으르면 인생이 힘들어지는 거죠. 게을러지면 가시밭길을 걷는 것과 같은 일을 만나게 될 겁니다. 게으르게 되면 정말 우리의 인생이 풀리지 않게 되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해야 살 수 있는 겁니다. 부지런해야 모든 것들이 잘 풀릴 수 있는 것이고, 원하는 대로 자기가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는 것이고, 부를 이룰 수도 있고, 명예를 얻을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목적을 성취할 수도 있고 부지런해야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이지, 게으른 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고, 그 인생이 아주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은 성경이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가 다 이해할 만한 보편적인 진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젊었을 때는, 학생 시절에는 정말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되는 것이죠. 미래를 위해서 준비를 해야 되는 것이죠. 지금 아직 젊었을 때 미래를 위해서 부지런히 살아야, 그래야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농부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농부는 열심히 부지런히 농사를 지어야 되는 것이죠. 농부가 게으르면 농사를 망치는 겁니다. 제때제때 씨를 뿌려야 되는 것이고, 제때제때 풀을 맺어야 되는 것이고, 제때 제떼 그 거름도 줘야 되는, 거름도 줘야 되는 것이고, 제때제때 수확을 해야 되는 것이고, 그 기간을 놓쳐버리면, 게으름 피우면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가 없는 것이죠. 안전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는데요. 비가 오거나 또는 여러 가지 위험이 닥치게 될 때, 그럴 때 제때제때 빨리빨리 시급하게, 부지런하게 이 모든 위험 요소들을 없애버려서, 그래서 제방이 넘칠 것 같으면, 그 차단도 빨리 해버리고, 지하차도 진입을 막아버리고, 안전을 위해서 최대한의 노력을 부지런하게 대응을 해야 참사가 일어나지 않게 되는 것이죠. 타이밍이 모든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인데, 그 타이밍을 놓치게 되면, 일이 두 배로, 3배로, 4배로 힘들어지고, 인생이 너무나도 괴로워질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 우리 모두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너무나도 뼈절하게 느꼈던 그런 원리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도 어떻게 전해야 되는가? 부지런히 전해야 돼요. 부지런히. 디모데후서 4장 2절 말씀에 보니까, “너는 말씀을 을 전파하라.” 어떻게 전파해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전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도 어떻게 전해야 되는가? 항상 힘쓰고 부지런하게 힘써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는 일을 열심을 내서 복음을 전해야 된다. 이 말씀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죠. 물론 이 말씀은 사람들이 들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든지, 되어 있지 않든지, 그냥 무대뽀로 외쳐버리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닌 것입니다. 그것은 무례한 일이 될 것이고, 사랑은 무례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는데, 복잡한 버스 속에서 지하철 속에서, 사람들이 많이 있는 곳에서 그냥 외쳐버리기만 하면, 그것은 복음을 잘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사랑은 다른 사람들을 배려해야 되고 듣는 사람들을 배려하면서 지혜롭게 복음을 전해야 되는 것인데, 무례하게 행동하면, 지혜롭지 못한 것이 되어서, 그래서 결국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역효과를 낳게 되는 경우만 있게 됩니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압니다.

디모데 후서 4장 2절 가운데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복음을 전하기를 힘쓰라”라고 하는 그 말씀은 무슨 말이냐면, 내 때가 좋든지 나쁘든지, 상대방의 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 때가 좋은 때든지, 나쁜 때든지, 내가 지금 좋은 컨디션에 있든지, 좋은 컨디션이 아니든지, 지금 복음을 전하면 저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일 것 같은데, 내가 조금 피곤하니까 오늘은 안 되겠어. 나중에 하지. 지금 이 사람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아주 적절한 타이밍인데, 내가 오늘 너무나도 힘들다고 하는 그 핑계로, “아니야. 오늘은 너무 힘들어. 내가 쉬어야 되겠어.” 하면서, 차일 피를 미루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때가 아니라고 하는 이유로 피할 것이 아니라, 때가 되든지 아니 되든지, 내가 좋은 시간이 되든지 되지 못한 시간이든지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그때에, 복음을 전하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저으라고 하는 말이 있는 것처럼, 복음을 누군가 받아들일 만한 상황이라고 한다면, 내가 아주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있다고 할지라도 “아, 이건 때가 아니야, 내가 너무 힘들어. 내가 지금 준비가 안 됐어. 내가 너무 어려워. 어려운 상태야.” 하면서 게으르게 다음 기회로 미룰 것이 아니라, 항상 복음을 전할 준비를 하고,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도 역시 부지런해야 한다고 말씀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물론 게으르다고 해서 항상 나쁜 결과만 오는 것은 아닌 것 같아요. 우리가 살다 보면 늘 부지런한 사람만 좋은 결과가 있고, 게으른 사람은 늘 나쁜 결과만 있다고 한다면 사람들이 다 부지런할 것입니다. 하지만 살다가 우리가 경험하는 것을 보면 성경 말씀에서는 아주 명확하게 이 말씀을 해주고 있지만, 실제 우리들의 삶 속에서는 게을렀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거나, 더 나아가서 게을렀기 때문에 오히려 더 행운을 얻게 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가요? 그렇죠.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서둘러야 되는데, 늦잠을 자고 게으르게 좀 일을 미루다가, 결국에 자기가 타야 될 비행기를 놓쳐버렸는데, 그 비행기가 나중에 알고 보니 사고가 나서, 내가 그때 조금 머뭇거리고 게으르고 미처 준비를 안 해서 “게을렀던 것이 내가 목숨을 건지는 그런 행운이었다.”라고 말하는 경우를 들어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얘기 들어봤어요? 그런 얘기가 있어요.

어떤 사람이 산을 하나 가지고 있었는데, 그 산을 잘 관리하고 그 산을 잘 활용해서, 그래서 열심히 그 산을 관리해서 수익을 창출해야 되는데, 그 사람이 너무나도 게을러서, 산을 관리를 전혀 하지 못하고, 그냥 수년 동안 방치만 해 두었는데, 나중에 정부에서 그 땅을 이렇게 수용하면서 보상을 해주는데 LH 공사에서 나와서 보상을 해주는데, 그 밤나무에서 떨어진 그 밤들이 다 이게 거두고 수확을 하고 팔고 그래야 되는데, 그걸 그냥 내버려 둬 가지고 방치해 뒀더니, 그 밤들이 떨어가지고, 딱 거기서 밤나무가 수없이 많이 나서, 밤나무 하나하나마다 돈을 다 보상해 줘서, 엄청나게 돈을 벌었다 그런 얘기 들어봤어요? 그런 얘기도 듣기도 합니다. 게으른 게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행운이 되는 기회가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들을 놀랍게도 우리 주변에서 많이 듣게 됩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성경 말씀이 잘못된 거 아닌가? 성경 말씀이 순 엉터리 아닌가? 실제 생활은 그것과는 상관이 없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일반적인 원칙을 말씀해 주는 것이고요. 우리가 현실에서 만나는 몇 가지 예외적인 케이스들을 보면서, “아, 안 그렇네. 우리 공부 못한 사람도 성공하는구나.” 뭐 하는 사람도, “게으른 사람도 연예인 돼서 잘 되더라. 게을렀더니 어떻게 더 잘 됐더라.” 하는 그런 예외적인 케이스를 가지고 보편적인 진리를 뒤엎어 버릴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물론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우리가 항상 쉼 없이 정말 열심히 부지런히 정말 열심히 일하면서 살아야만 하고, 쉬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일주일 내내 쉼이 없이 계속 일만 한다거나,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열심히 열심히 일하고, 그래서 자신을 혹사시킬 정도까지 열심히 일하는 것이 우리들이 가져야 자세라고 그렇게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해야 된다고 하는 이 명제는 “우리 자신을 그렇게 일에 혹사시키는 정도로 해야 된다.”라고 의미하는 그런 말이,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하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는데요.

놀랍게도 성경은 밸런스를 유지하면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부지런해야 될 것에 대해서 해서 말씀하면서, 동시에 무엇도 이야기하죠? 쉼도 이야기를 합니다. 열심히 일하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계속 일만 하고 일주일 내내 일하고 쉬는 거 휴가도 없이 아무것도 없이 무조건 일만 해야 된다. 그게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 성경은 일과 쉼을 동시에 밸런스를 맞추어서 이야기를 해 주고 있는 것이죠. 예를 들자면 안식일의 법이 있어서 7일 가운데, 하루는 쉬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으며, 또 안식년의 법이 있어서, 1년은 일을 했다고 한다면 1년은 쉬게 해 주는, 그런 안식년의 법도 성경에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구약의 안식일의 법이나 안식년의 법을 오늘날에도 우리가 문자적으로 그대로 문자적으로 지켜야 될 이유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첫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의 모든 율법적 요구가 성취되었고, 더 나아가서 우리는 더 이상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신정 국가 시스템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구약 성경에 나와 있는 이런 그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면서 살아가야 할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이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어느 정도 적당히 일을 하면서, 또한 적당히 쉼을 가져야 되고, 일과 쉼, 부지런함과 쉼을 동시에 밸런스를 맞추어서 살아가야 한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성경 말씀을 통해서 배워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이 밸런스를 잃어버리죠. 어떤 사람들은 너무나도 게을러서 정말 열심히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책임감을 가지고 자신에게 주어진 그 달란트가 있다고 한다면, 달란트를 가지고, 열심히 일을 해야 할 텐데, 마치 한 달란트를 맡은 그 종처럼 땅속에 묻어버리고, 전혀 일하지 않고 게으르게, 하나님께서 주신 그 능력과 하나님께서 주신 그 재능과 하나님께서 주신 그 사명들을 땅속에 감추어 두어 버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렇게 게으른 사람이 있는 반면에, 또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일에 혹사시키면서, 전혀 쉬지 않으면서 마치 일이 자기 자신의 자신을 살리는 것인 양, 일이 마치 구세주인 양, 돈이 자신의 우상인 양, 그렇게 몰두하고 있는 그런 경우가 있는 것이죠. 양극단의 잘못이 있을 수 있는데, 우리 개혁적인 우리 개혁주의 신학을 가지고 있는 우리 성도들은 이 둘을 성경적인 가르침대로 잘 배분해서, 밸런스를 맞추어서 일과 쉼을 적절하게 게으르지 아니하면서, 동시에 쉼도 가질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자기 자신을 혹사하면서까지, 일을 하고 쉼이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돈을 우상으로 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하나님이 나를 살리신다,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산다고 하는 그런 믿음의 고백을 가지고 살아야, 그래야 밸런스가 있는 삶을 사는 것인데, 하나님이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돈이 나를 살리고, 내가 더 많이 가지면 더 행복할 것이라고 하는, 돈을 우상으로 섬기게 되면, 결국은 그 돈을 좇아서 열심히, 너무나도 열심히 살고, 자신을 혹사시킬 것처럼 살다가 결국에는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자기 자신을 망쳐버리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겁니다.

성도들은 그래서 이 밸런스를 잘 맞추는 거죠. 6일 동안 열심히 일을 하고, 7일째도 일을 하면 더 많이 벌 수 있는데, 그런데 쉬면서 하나님이 내 삶을 책임질 거라고 생각하고 쉴 수 있는 믿음이 있는 거죠. 내가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삶을 인도해 주실 거라고 하는 그 믿음을 가지고, 그 가운데 일부를 내가 하나님 앞에 드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사는 것이고, 돈이 나의 우상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고백하면서 사는 것이 그렇게 밸런스 있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면서 사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가만히 보면 아주 놀라운, 특이한 특이한 면을 하나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게으름의 반대말이 부지런함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점입니다. 다시 한번 잠언서 15장 19절의 말씀을 보았으면 좋겠는데요.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 울타리 같으나, 그다음에 뭐라고 나왔어요? “정직한 자의 길은 올림이니라” “정직한 자의 길은 높임이니라.” 게으른 자의 반대말로 그다음 문장이 나오는 것이,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 울타리 같다고 이야기하면서, 부지런한 자의 길이 대로다. 부지런한 자의 길이 높임이다. 올림이다고 말하지 않고, 이상하게도 “정직한 자”의 길이 대로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 평행법으로 본다고 하면, “아첼” 게으름이라고 하는 것이, “예샤림” 정직함이라고 하는 말과 이렇게 대구되고 있는 것인데요. 왜 부지런함을 정직함과 대비되는 말로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요? 왜 이 게으름에 대비되는 말로 정직함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당연하죠. 부지런함이 어디에서부터 오는가? 부지런함이 오는 것은 정직함에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게으르지 않을 수 있는 그 비결이 있다고 한다면 무엇일까요? 게으르지 않을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하면 무엇일까요? 그것은 돈을 주면 게으르지 않을 수 있을까요? 보상을 많이 해주면 열심히 삶을 살까요? 우리 자녀들이 열심히 안 하면 상을 제시하면, 우리 아이들이 그 상을 보고 열심히 하게 될까요? 우리 직원을 뽑았는데 그 직원이 열심히 일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그 직원에게 보상을 더해주면, 더 열심히 일을 하게 되는 것일까요? 물론 어느 정도 돈이 효과를 발휘하기는 하고, 보상의 효과를 발휘하기는 하지만,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그런 돈이나 보상이 사실은 열심을 내게 만드는 동기가 되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냥 눈 가리고 일을 하는 시늉을 보여줄 수는 있지만, 그러나 진심으로 열심히 일하게 만드는 동기가 되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건축할 때 보니까, 일당을 받고 일하시는 분들을 이렇게 데리고 와서 일을 시키는데 감독자가 있으면 어느 정도 일을 해요. 그래서 감독자가 이거 이거 해놓으라고 얘기하고, 잠깐 자리를 빌면 어떻게 하나 봤더니, 다 같이 그 드럼통 주변에 불 켜놓고, 그 옆에 쫙 둘러서서 불을 켜놓고 담배 한 대씩 딱 빨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서로 이야기하고, 계속 이야기를 1시간 2시간씩 계속 이야기하더라고요. 보상이 있어도 일하지 않는 거죠. 부지면 부지런하면 어디서 오는가? 그 어떤 보상이나 돈으로 부지런함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정직함에서부터, 부지런함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죠. 근데 그 정직함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정직함일까요?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함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옛날 요셉이라고 하는 청년은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의 집에서부터 떨어져서, 머나먼 애굽 땅에 노예로 끌려오게 되어, 보디발의 가정에서 노예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때 요셉은 그 보디발의 그 채찍이나, 그 어떤 보상이나 그것 때문에 열심히 일한 것이 아니라, 정말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께 하듯이 열심을 다했는데요. 부지런함은 어디서 오는가? 그 어떤 다른 것이 동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함을 가지고 있으면, 그러면 부지런해질 수 있기 때문에, 오늘 잠언서 15장 19절에서 그렇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장 5절에서부터 8절 말씀은 우리 성도들을 향해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죽게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알미라.” 이것이 우리가 늘 기억해야 될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사람에게, 사람이 주는 그 어떤 보상, 사람이 주는 어떤 그 돈 때문에 할 수 없이 마지못해서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보내주셨다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내가 지금 이곳에 있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이 자리에 넣어주셨다. 하나님이 나를 이 학교에 넣어주셨고, 하나님이 나를 이 은행에 넣어줬고, 하나님께서 나를 이 직장에 넣어주셨고, 하나님께서 나를 이 가정에 넣어주셨고, 하나님께서 이 교회에 나를 넣어주셔서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게 하신 그 일을 하는 것이라고 하는 그런 믿음의 삶을 살게 될 때, 진정으로 부지런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의 정직함 자가 부지런할 수 있는 것이고, 그런 사람에게는 어떠한 결과가 나타나는가 대로가 열린다. 높아질 것이다. 그렇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죠.

물론 게으른 자에게 종종 행운이 찾아올 수가 있겠고, 부지런하고 정직한 자에게는 아무런 보상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일들을 우리가 종종 만나게 될 겁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여전히 사탄이 다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그 세상이라고 한다면, 정직한 자에게는 보상이 주어지고 게으르고 악한 자에게는 심판이 내려져야 정상인데, 그러나 이 세상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 저 천국에 가기 그전까지는, 사탄이 다스리고 있는 것과 같아서, 오히려 악을 행하는 자가 더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이고, 오히려 게으른 자가 더 좋은 것을 가지는 것처럼 보이고, 수고하고 애쓰는 자가, 정직한 자가 오히려 고난을 당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우리들의 눈앞에 더 많이 나타나게 될 거예요. 왜? 그것이 모순이기 때문에 더 크게 우리들에게 나타나게 보인다 이 말입니다. 하지만 이 잠언서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오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말씀을 마음속에 깊이 새기며, 이 말씀 가운데 우리가 게으른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그 부름의 상을 위하여 신실하게 달려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왜 우리는 게으르지 말고 정직한 삶을, 부지런한 삶을 살아야 할까요? 왜 우리는 열심을 내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위하여 열심을 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어실 때,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건지실 때 머뭇거리지 않았어요. 우리를 살려내시기 위해서 딴짓하고 계시지 않았어요. 호출을 해도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는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으셨어요. 하나님께선 우리를 향해서 열심을 내주시고, 그 열심이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하나님의 열심에 감사해서, 열심을 내야 하는 것이죠. 이사야서 37장 31절, 32절 말씀에 보니까 “유다 족속 중에 피하여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으리니, 이는 남은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 산에서 나올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 유다 민족이 죄악을 범하여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을 때, 인간들이 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죄악 가운데 거하면서, 그래서 완전히 멸망하게 되었을 때, 그 상황 가운데서 완전히 그 이스라엘 모습만 보면 아무런 소망이 없었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약속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그 예루살렘에서 가지가 나고 뿌리가 나고, 그래서 남은 자들이 있게 될 것인데, 왜 있게 될 것인가? 하나님의 열심이 이를 이루실 것이기 때문에, 그 죽어가지 않게 살리기 위해서 남은 자들을 살려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그 열심 때문에, 다시 구원을 받게 된 것이고, 또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것은 하나님의 그 놀라운 열심, 그 사랑, 그 열정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면서까지 사랑해 주신 그 놀라운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면, 우리가 단순히 부지런하면 편안한 삶을 누리고, 게으르면 힘들다고 하니까, 편안한 삶을 얻기 위해서 그런 목적으로 부지런할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셨고 열정을 내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수고와 헌신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그 사명이 결국은 많은 사람들을 살리고, 하나님의 그 일들을 이루게 될 거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최선을 다해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살다 보면 힘들어요 열심을 내면, 고통스러울 수 있어요. 나 혼자 모든 짐을 다 짊어지고 가는 것 같아요. 나에게 맡겨진 짐이 너무나도 커서 주님, 내가 어떻게 이것을 나 혼자 쥐고 어떻게 갑니까? 내가 어떻게 이 모든 것을 다 내가 감당합니까? 우리들의 마음속에 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 정말 이거, 이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정말 고통스러운 마음들이 몰려들 때, 그런 마음이 있다고 한다면, 오늘 이 말씀을 보면서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포기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사랑해 주셨고 나 같은 사람을 위하여 열정을 내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다시 살고 천국의 약속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 또다시 한번 용기를 내고, 다시 한번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부지런하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얻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늘 죄성으로 가득 차서 또 넘어지려고 할 때, 또 넘어지려고 할 때, 고꾸라지려고 할 때,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주여, 저희들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씻기셔서, 다시 원래의 자리로, 하나님께서 부르신 그 부르심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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