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닫기

초대 교회사 4강: 삼위일체 교리의 형성 – 어떻게 초대교회는 삼위일체 교리를 받아들이게 되었는가?

오늘은 초대교회사 강좌 네 번째 시간으로, “삼위일체 교리의 형성이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가?”라고 하는 역사적인 흐름을 살펴보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삼위일체라고 하는 게 무엇이죠? 하나님이 한 분이시면서 동시에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 이렇게 세 분으로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 삼위일체 교리가 되겠습니다. 신비한, 우리의 일반적인 이성으로는 좀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그 신비한 존재 방식에 대해서 묘사하는 것이 바로 삼위일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시간이 지나가면서, 점차 점차 더 많이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구약시대 때에는 하나님에 대한 계시가 아직 불충분하여서, 구약 시대에 살던 성도들은 하나님을 오로지 한 분인 하나님으로만 이해하고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은 몇 분이신가? 유일하신 한 하나님이시니, 그 유일하신 한 하나님만을 섬겨야 할 것이고, 그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었습니다. 십계명의 말씀에서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그렇게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구약의 성도들은 하나님을 한 분이신 하나님으로 이해하면서 신앙생활을 해왔던 것이죠.

물론 구약시대 때에도 하나님이 한 분이시면서 동시에 복수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성경 구절들이 구약에도 이미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디가 그런 것이죠? 창세기의 말씀 가운데 보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하면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이렇게 협력하시는 가운데, 하나님 삼위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만드셨다고 하는 것이 이미 창세기의 말씀 가운데 등장하고 있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구약 성경 이곳저곳을 살펴보면,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그 하나님께서 이런 모양으로 나타나시기도 하고, 저런 모양으로 나타나시기도 하고, 또 시가서, 지혜서 같은 데 보면, 하나님의 지혜나 하나님의 이런 것들이, 영 이런 것들이 존재하고 있다고 하는 것들이 보이고 있어서,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은 한 분이시지만, 복수로 존재한다고 하는 것을 어렴풋하게 알려주신 바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렇게 성부, 성자, 성령 삼위로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 것은 언제 드러나게 되었습니까? 신약시대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 것이죠. 바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이야기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사람이듯이, 짐승의 자식은 짐승이듯이,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인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이 신약에서 드러나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처럼 행동하셨습니다. 하나님처럼 기적을 행하셨고, 하나님처럼, 온 우주 만물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에 바다와 바람도 잠잠하게 되고, 정말 예수님이 신성을 가지고 모든 기적을 베푸시는 모습이 드러났을 뿐만 아니라, 그래서 제자들은 결국 예수님에 대해서 “나의 주, 나, 하나님”이라고 고백을 했는데요. 예수님을 향해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것은 나의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것과 똑같은 표현입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여호와라고 하는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그 여호와라고 하는 하나님의 이름을 헬라어 성경에서는 주라고 하는 말로 번역을 해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주라고 하는 표현이 물론 남편을 주로 부르기도 하고, 주인님을 주로 부르기도 하고, 하지만은 하나님을 부를 때 주라고 했던 것은 여호와라고 하는 의미인 것인데, 예수님을 향해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고백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죠.

뿐만 아니라 그 예수님께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어 주시겠다고 하셨고, 실제로 성령께서 강림하신 사건이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어서, 삼위로 존재하시는, 세 분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 바로 신약에 들어서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8장 19절 말씀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세례를 베풀 때 어떻게 세례를 베풀려고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등하게 아들과 성령의 이름이 똑같이 하나님의 반열 가운데 기재되어서, 세례를 베풀 때 세 분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그렇게 말씀해 주셨고, 그뿐만 아니라 고린도후서 13장 13절 말씀에 보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축복의 인사를 보내는 것이 보편화되어서, 하나님이 한 분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으로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 분명하게 신약 성경에서 드러났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렇게 세 분으로 존재한다고 한다는 사실은 일반 성도들이 일반인들이, 유대인 특히 유대인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배웠어요? 하나님은 오로지 한 분 하나님이시고,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을 정말 철저하게 믿었고, 철저하게 배워왔던, 그런 유대 성도들이 하나님 한 분뿐만 아니라 예수님도 하나님, 성령님도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쉽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초기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나님보다 좀 부족한 존재, 예수님이 하나님과 똑같은 게 아니라, 하나님보다는 좀 낮은 한 차원이 낮은 존재라고 하는 그런 개념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초대교회 가운데 있었던 것이고, 그래서 그런 의견들이 서로 충돌하면서, 결국에 삼위일체의 교리가 정식적으로 확립된 때가 언제냐면 325년 니케아 회의를 통해서 하나님이 세 분으로 성부, 성자, 성령으로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 공식적인 교리로 채택되게 되었습니다.

이 말은 325년이 되어야 비로소 삼위일체 신앙이 삼위일체 교리가 확립되었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고, 예수님의 등장과 더불어서 삼위일체 신앙을 가지고 있었어요.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었어요. 그리고 그 믿음이 계속해서 전수되고 전수되고, 전수되고 전수되어 내려왔는데, 그런데 중간에 사람들이 “설마 그럴 리가 없다” “예수님은 하나님보다 낮은 존재지 하나님과 똑같을 리가 없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 한 분뿐이고, 예수님은 하나님보다 좀 못한 존재, 뭔가 좀 부족한, 한 단계 낮은 등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계속해서 반발을 하던 사람들이 있어 와가지고, 그런 사람들과의 논쟁 속에서 그런 사람들이 그것이 공식적으로 잘못된 생각이고, 삼위일체가 진짜 정통 교리라고 확립된 것이 325년 니케아 회의라고 하는 것에서 이루어졌다고 하는 것이지, 그때서야 비로소 삼위일체의 교리가 그때 짠하고 나타났다고 하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이해가 되셨습니까? 종종 어떤 사람들은 삼위일체의 교리란 4세기에 들어와서야 생긴 교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 주장이 사실은 옳지 않다고 하는 것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왜 니케아 회의를 통해서 이런 삼위일체 교리가 확립되어야만 했었느냐?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하는 그 가르침에 대해서 반발했던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반발했던 사람의 이름이 “아리우스”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한번 해보셔요. 졸리니까, “아리우스” 이 아리우스는 좋은 사람 아닙니다. 아무튼 이 아리우스라고 하는 사람이 예배 시간에 예배를 드리다가, 어디서 예배를 드렸냐면, 지금의 이집트 카이로, 옛날 지명이 무엇이냐면, 알렉산드리아라고 하는 지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라고 하는 곳에 있는 교회의 감독이 누구였냐면 알렉산더 감독이라고 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 알렉산더 감독이 예배 가운데 설교를 했어요. 뭐라고 설교를 했냐면, “통일된 삼위일체의 위대한 신비”에 관해서 설교를 한 거죠.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그 위대한 신비에 대해서 한 분이시면서, 동시에 세 분이신 이 하나님에 대해서 알렉산더 목사님이 설교를 열정적으로 했어요.

근데 그것을 듣고 있던 아리우스가 반발을 한 겁니다. 반발을 하면서, 뭐라고 이야기를 하냐면 절대 그럴 일 없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하나님보다 한 등급 낮은 분이다. 로고스는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고, 이 예수님은 로고스는 만물이 창조되기 전에 만들어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은 만세 전부터 계셨지만, 우주는 중간에 생겼잖아요? 온 세상은 나중에 생겼잖아요? 근데 이 온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로고스를 먼저 만들어 놓고, 그다음에 온 세상을 만들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지만, 로고스(예수님)는 중간에 만들어진, 하나님은 안 만들어지고 영원한 존재이지만, 로고스는 중간에 만들어지고, 로고스가 만들어진 이후에, 이 세상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완전한 신도 아니고, 완전한 인간도 아니고,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중간 정도 되는 그런 존재이지, 하나님과 똑같은 분이 아니라고 누가 주장했다고요? 아리우스! (100점입니다.)

그러한 아리우스의 주장에 대해서 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한 거죠. 교리의 논쟁이 벌어지기 시작한 겁니다. 그래서 이 아리우스의 주장을 강하게 반박하고 정통 교리를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람의 이름은 “아타나시우스”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또 졸리니까 한번 따라서 해봅시다. 아타나시우스.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이에요. 아타나시우스라고 하는 사람이 아리우스와 논쟁을 벌이면서, “아리우스, 네 주장이 다 틀려 먹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똑같은 하나님이다. 동등하신 하나님이다.”라고 하면서, 아타나시우스가 아리우스에 대해서 반박을 했는데, 어느 성경 구절을 가지고 반박을 했는가 베드로후서 1장 4절의 말씀을 가지고 반박을 한 겁니다. 이 성경 구절을 가지고 예수님이, 우리의 신성에 참여, 우리가 신성에 참여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었고, 그래서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 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알렉산더 감독이 321년에 아리우스를 이단이라고 지정해 버리고, 그래서 그 아리우스를 쫓아내 버렸어요. 이단은 교회에다 놔두면 안 되잖아요? 쫓아내 버렸어요. 그래서 알렉산더가 목회하는 그 교회 내에 아리우스 추종자들을 다 쫓아내 버렸으니까, 문제가 해결이 됐을까요? 아니요. 쫓아내면 순순히 쫓아내 집니까? 아니요. 그 아리우스가 다른 곳으로 돌아다니면서, 팔레스타인을 돌아다니고 소아시아를 돌아다니면서 지지자들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지지자들을 모았는데 엄청난 지지자들이 생기게 된 거예요. 그래서 그 지지자들끼리 모아가지고, 이번에는 아리우스가 알렉산더를 이단이라고 지정해 버렸어요. 그리고 이 아리우스는 제대로 된 사람이라고 명예를 회복시켜줘 버린 것이죠. 따라서 이 알렉산드리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그리고 저 튀르키예 지방에 있는 안디옥 교회와 서로 다투기 시작한 겁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삼위일체를 지지하는 교회였고, 안디옥 교회 쪽은 “예수님이 하나님보다 못하다”라고 하는 아리우스의 주장을 따르는 교회여서, 그 두 교회가 서로 싸우면서 분열이 일어난 거죠.

그런데 교회가 서로 분열이 나니까, 황제가 괴롭겠어요? 안 괴롭겠어요? 괴롭습니다. 지난번에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그래서 제국을 기독교적으로 통치하고 있었는데, 교회가 분열이 나니까, 제국의 질서가 흐트러지고 그래서 이 황제가 교리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어요. 이 문제를 해결해서 교회의 일치를 가져와야지, 그래야 제국의 평화가 이루어지지 하면서 아리우스 파와 알렉산더, 아타나시우스 파 두 사이에 누가 옳으냐? 누가 맞느냐? 한번 끝장 토론을 해가지고, 이 문제를 해결해 보자 하면서, 모든 목사님들, 다 집합. 모든 신학자들 다 집합. 모든 성도들 다 집합해 가지고 회의를 열었는데, 어디서 열었느냐 튀르키예라고 하는 곳에서, 튀르키예의 니케아라고 하는 곳에서 회의를 열었습니다. 지도를 한번 봅시다. 지금 튀르키예가 현대 지명이고요. 불가리아, 그리스, 지중해, 흑해 이게 다 현대 지명인데, 튀르키예의 그 북쪽, 지금의 지명으로는 이즈니크, 이즈니크 호숫가 옆에 있는 도시가 이즈니크인데, 그 당시 이름은 니케아라고 하는 이름으로 불려졌던 바로 그곳에서 모든 성직자들과 신학자들을 다 불러 모아가지고, “과연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하냐? 하나님보다 못한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중재자 정도의 신분이냐?”라고 하는 것으로 회의를 시작했는데, 약 300명이 참석하여 두 달 동안 이 문제를 가지고 논의를 해서 결국 325년 5월 20일 날 아리우스가 틀렸고, 아타나시우스가 맞다고 하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겁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비슷한 분이 아니라, 하나님과 유사한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과 완전히 동등한 분이시다”라고 하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죠.

그것을 가리켜서 “이오타 논쟁”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유사 본질이냐? 하나님과 유사 본질을 가지고 있느냐?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느냐의 논쟁인 것이죠. 한번 봅시다. 지금 영어 알파벳을 써놓았습니다마는 로마 로마의 로마 글자로 라틴어로 “호모이우시오스”하면 비슷한 본질, “호모이”가 비슷하다는 거고, “우시오스”가 본질이라는 얘기니까, 유사한 본질을 가지고 있느냐? 예수님이 하나님과 아니면 “호모” 똑같은 본질을 가지고 있느냐? “우시오스” 이오타가 있느냐? 없느냐? 문제로 싸웠다고 해가지고, “아이”를 헬라어로는 “이오타”라고 하죠. 이오타가 있느냐? 없느냐? 문제를 가지고 싸웠다고 해서, 이오타 논쟁이라고 하는데, 이 니케아 회의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비슷한 게 아니라, “완벽하게 똑같다. 동일하다”라고 하는 결론을 내리게 되어서, 예수님은 성부에 의해서 창조된 피조물이 아니라, 참으로 참된 외아들이며, 그래서 그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라고 하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게 니케아 회의였습니다. 따라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아타나시우스를 인정하고, 알렉산더를 인정하고, 아리우스를 정죄했는데, 아리우스 파를 축출해 버리고, 성직에서 다 쫓아내 버리고, 아리우스의 서적들을 다 불태우고 하면서 완전히 삼위일체 교리가 니케아에 의해서 완전히 정립되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니케아 신조를 그때 만들었는데 니케아 신조를 한번 봤으면 좋겠어요. “우리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창조주이신 한 분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며, 만세 전에 아버지로부터 태어나신,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태어나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하나님이시며, 빛으로부터 나온 빛이시며, 참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참된 하나님이시며, 창조되지 않고 태어나신 아버지와 동일 본질이신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것이 창조되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내려와 성령과 처녀 마리아에 의해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고통을 당하셨으며 매장되었습니다. 그러나 제3일에 성경대로 다시 부활하셨고, 하늘에 오르사,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영광 가운데 오셔서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이며 그의 나라는 영원할 것입니다. (계속해서) 우리는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이신 성령님을 믿습니다. 성령님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시고, (만들어진 게 아니라) 나오시고,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예배를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십니다. 성령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전체 전체의 교회, 사도적인 하나의 교회를 믿습니다. 우리는 죄의 용서를 위한 하나의 세례를 인정합니다. 우리는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오는 세상에서의 삶을 고대합니다. 아멘.”이라고 하는 신앙 고백설을 니케아 회의에서 만들게 된 것이죠.

끝.

이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니케아 회의에서 그렇게 결론이 났지만, 아리우스는 죽지 않았습니다. 쫓아낸다고 쫓아내 지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의 일들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도표를 한번 보면서 살펴보겠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325년에 아리우스를 이단으로 정죄하고, 삼위일체 교례를 확립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3년 뒤에 328년, 유세비우스라고 하는 사람이 국가의 평화적 회복을 위해 아리우스에게 선처를 황제에게 간청하게 되고, 결국 황제는 아리우스를 복직시켜 줍니다. 이때 아타나시우스는 반발을 하게 되고, 아리우스를 왜 복직시키냐고 따지고 들었는데, 이번에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아타나시우스를 귀양을 보내버립니다. 황제의 관심은 제국의 평화에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이번에는 정통파라고 할 수 있는 아타나시우스를 귀양 보내버리고 만 것이죠. 결국 로마 나라 가운데,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교회는 아타나시우스를 지지하고, 콘스탄티노플 교구를 중심으로 한 동방 교구는 황제를 지지하면서, 서로 교회들 사이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사이에 삼위일체 문제를 가지고 서로 다른 주장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다가 337년에 아타나시우스가 다시 복직이 되는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고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죽고 나서 콘스탄티누스 2세 황제 때 유세비우스가 아타나시우스를 축출해야 된다고, 그 황제를 꼬셔가지고, 결국 339년에 다시 아타나시우스가 쫓겨나게 되는 겁니다. 동방이 승리하게 된 것이죠. 그래서 이 아타나시우스가 어디로 도망갔겠습니까? 서방교회로 도망갔겠죠. 로마로 피신한 아타나시우스를 서방교회가 보호하게 된 겁니다. 콘스탄트 황제 때, 그리고 그런데 유세비우스가 죽고 난 다음에 343년에는 콘스탄트 황제가 사르디카 회의에서 이번에는 아타나시우스를 지지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삼위일체파가 교권을 장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콘스탄스가 암살을 당하고 콘스탄티누스 2세가 유일한 황제가 되자, 또 이런 여러 여러 회의를 통해서 이번에는 아리우스가 득세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의 존재를 뜻하는 “우시아”라고 하는 용어도 사용을 금지해 버리고, 아리우스가 승리하게 되고, 아리우스가 잘 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아타나시우스와 아리우스 사이에 중도파들이 가만히 눈치를 보고 있으니까, 아리우스가 이기면서 너무 막 나가는 거예요. 삼위와의, 예수님의 관계, 예수님의 위치를 너무나도 낮춰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중도파가 반발하면서 아리우스 파에서 빠져나와 이번에는 중도파가 아타나시우스를 다시 지지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가지고, 또 이번에는 아타나시우스가 좀 더 세력을 얻기 시작하다가, 결국 율리아누스 황제 때 니케아 신조파들을 향한 박해가 중단이 되고, 다시 아타나시우스가 복귀하게 되었던 것이죠. (그대로 또 있습니까?) 율리아스 황제 때 다시 아타나시우스를 귀양 보내고, 황제 사위에 다시 복귀하게 되고, 발렌스 황제가와 들어서는 다시 아타나시우스를 귀양 보내고, 발렌시아누스 1세 황제 때는 다시 니케아 교리를 지지하다가, 아타나시우스 황제가 사망하자 그라티아누스 황제 때는, 그리고 니케아 지지하고, 제국을 통합한다고 선언해서, 결국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아리우스를 단죄하고 콘스탄티노플 신조를 채택해서, 결국은 삼위일체가 역사적으로 승리하게 되는 정치적으로 교리적으로 승리하게 된 것이죠.

그래서 그렇게 승리하게 되는 과정 가운데, 갑바도기아 출신들인 가이사랴 바질, 닛사 그레고리, 나지안주스 그레고리 등이 베드로, 마리아, 요한이 서로 다른 개인이지만 사람이듯이 성부, 성자, 성령은 독립된 분이지만 하나님이시고, 사람 그러나 차이점이 있다고 한다면 사람은 서로 다르게 행동하지만, 하나님은 완벽한 일치 가운데 성부, 성자, 성령께서 일하신다. 동일 본질을 가지고 계시며, 세 실체로 존재한다고 하는 그래서 삼위일체가 궁극적으로 승리하게 돼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복잡하죠? 복잡합니다. 그래서 제가 역사를 별로 안 좋아해요.

아무튼 이 삼위일체의 교리를 가지고 니케아 회의 때 한번 정립을 했지만, 그걸로 끝난 게 아니고 황제가 누구냐에 따라, 그 황제가 누구를 지지하느냐에 따라, 삼위일체 교회가 세워지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하고 하기를 계속 반복 반복 반복 반복 반복하다가 결국 나중에 콘스탄티노플 회의에 가서야, 그게 381년에 가서야 이제는 정식적으로 완전하게 삼위일체가 성립이 되게 되었던 것이죠. 뭐 그 역사의 구체적인 세부사항까지는 우리가 기억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하지만 지난번에 우리가 콘스탄틴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좋게 되었다고 하는 것도 살펴봤지만, 단점도 살펴보았는데, 그 단점이 뭐라고 그랬죠? 국가가 교회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한 것이 큰 문제 중에 하나라고 했는데, 삼위일체 논쟁 가운데서도 그런 일들이 있었던 겁니다. 아무튼 결국 그렇게 해서 교리가 정립이 됐는데 참 아쉬워요.

제가 21세기에 사는 제가 그 당시에 삼위일체의 논쟁이 일어났던 것들을 생각해 보면 너무나도 아쉬워요. 왜냐하면 성경을 이해하는 방식이 너무나도 차원이 낮은 단계로, 수준으로, 성경을 이해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비유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성경을 읽었더라고 한다면, 이런 싸움이 없었을 것인데, 비유의 특성을 오해해서 자꾸만 싸워버린 것이죠. 어차피 영적인 진리는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 영적인 진리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이 세상에 비유로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성경의 표현이고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 비유를 이해할 때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되느냐? 유사점과 차이점을 구분해서 잘 이해해야 하는 겁니다. 한번 그림을 봤으면 좋겠는데요. 하나님을 묘사하는 비유가 있는데, 하나님을 묘사하기 위해서 비유를 사용하는 겁니다. 하지만 비유의 빨간 점이 하나님의 보라색 점과 유사하기 때문에 그 비유를 사용하는 것이죠. 하지만 그 비유를 사용하면 빨강과 보라색이 어느 정도 비슷하다고 하는 것을 보여줄 수는 있지만, 노랑과 파랑처럼 전혀 다른 면도 동시에 오해, 비유인 것처럼 오해되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기가 쉬운 것이죠.

예를 들자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하나님을 목자라고 비유하면, 어떤 점이 목자와 하나님 사이에 닮은 점입니까? 목자가 양들을 돌보고 또 안전한 길로 인도하고 사랑을 베풀고 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입을 것, 먹을 것 공급해 주시고 우리의 삶을 돌보신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 하나님은 나의 목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그 목자는 양을 잡아먹어요. 팔아먹어요. 그러니까 하나님도 우리를 잡아먹고, 우리를 이용해 먹고, 우리를 이익의 수단으로 삼는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은 거거든요. 비유를 볼 때 유사점이 무엇이고 차이점이 무엇인가를 보아서, 그래서 그 비유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비유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기 시작한 겁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비유한 것은 마치 사람의 아들이 백 퍼센트 사람인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은 백 퍼센트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창조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성경이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아들이라고 하는 표현을 사용하니까, 사람들이 하나님보다 못한 존재, 하나님과 좀 다른 존재, 하나님보다 뭔가 한 등급 낮은 존재라고 오해할 위험성들이 있는데 정말로 그렇게 오해한 거예요. 제가 그 3세기, 2기, 4세기에 가서 좀 설명을 좀 해줬으면, 좀 싸우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어요. 아무튼 삼위일체 교리가 그런 싸움 속에서 우여곡절이 많이 있었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잘할 수 있도록 잘 정립이 되어서, 참 그 과정은 굉장히 매끄럽지 못했지만 결국에는 우리의 연약함이나 우리의 부족함마저도 선한 길로 사용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삼위일체 교리가 잘 정립되게 만드셔서, 지금까지 우리에게 정통 교리로 내려오게 되었다고 하는 것을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Loading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