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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공동체 (행 4:32-37)

덴마크의 철학자이자 종교 사상가라고 할 수 있는 쇠렌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학교 시간에 배웁니다. 이런 쇠렌 키에르케고르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했던 아주 유명한 말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냐면, 우리가, 우리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옆에 사람, 주변 사람 의식하면서, 그렇게 신앙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1대 1로 마주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는 것이라고 말한 바가 있는데요. 어쩌면 그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을 정확하게 짚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사람들에게 칭찬받기 위해서,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하나님 앞에 1대 1로 서는 것이 그 참된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교회라고 하는 신앙 공동체를 이루어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신앙의 핵심이, 신앙의 본질이 하나님과 1대 1의 관계라고 말하고 있는데, 왜 우리는 공동체를 이루어서, 교회라고 하는 이 신앙의 공동체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서, 서로가 도움을 주고, 그리고 또한 도움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교회라고 하는 영적인 공동체, 신앙의 공동체를 구성해서, 서로가 영적으로 성숙해질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고, 또한 그렇게 도움을 주는 과정 속에서, 내가 도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숙은 어디에서 이루어지는가? 성장은 어디에서 이루어지는가? 진공 속에서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진공 속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죠. 마치 우리가 어린아이들을 기를 때, 온실 속에서 우리 아이들을 기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온실 속에 우리 아이들을 넣어 놓으면, 안전한 것 같고, 아무런 해도 입히지 않은 것 같아서, 그래서 마음이 놓일지 모르지만, 온실 속에서 자란 아이들은 제대로 성장할 수 없는 것이죠. 밖에 나가야 하는 겁니다. 친구들을 만나야 하는 겁니다. 이 세상을 만나는 가운데, 그 가운데서 성장해야, 우리 아이들이 제대로 성장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 앞의 단독자, 하나님과 1대 1의 만남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신앙이 나 혼자만 진공 속에서 신앙생활을 할 때, 그것은 온전한 신앙의 성숙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공동체 속에서 다른 성도님들과 다른 사람들과 유기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을 때, 비로소 우리의 신앙이 성숙해질 수 있는, 그런 여건이 갖추어진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이런 사람들과 부딪히기보다는 진공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열망들이 있습니다. 진공 속에 내가 들어간다고 한다면, 아무런 고통도 없을 것이고, 진공 속으로 들어간다고 하면, 그 어떠한 마음 아픈 일도 없을 것이고, 저 산속에 들어가면 나를 괴롭게 할 것이 없으니까, 그곳에서 우리가 믿음이 성장해지는 것 같고, 무엇인가 한 단계 올라가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사실은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거나, 우리의 영적인 능력이 상승한 것이라기보다는,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들이 없어졌을 뿐이지,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요.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 속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주 건강한 사람도 있는가 하면, 여러 가지 연약하고 부족한 지체들도 있을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런 부족한 사람들, 연약한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서,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연약할 때 부족할 때, 문제가 있을 때, 이렇게 영적으로 도와주어서 성장하게 만들야 될 그 책임이, 그렇게 성장하게 만들어야 될 그 사명이 누구에게 있는 것이죠? 목사님에게 있습니까? 교역자들에게 있습니까? 우리 장로님들에게 있습니까? 그게 아니고, 모든 성도님들에게 다 그런 사명이 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다 그런 사명을 가지고, 이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 속에 있는 것이죠. 연약한 지체가 있을 때, 그 연약한 사람을 도와주고,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도록 손길을 내어주는, 그것을 통해서, 오히려 우리가 더 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영적으로 성장하는가? 가만히 있으면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다른 사람들을 도와줄 때, 우리의 힘과 능력이 생기는 겁니다. 저 반석 위에서 저 밑에 있는 사람을 잡아끌어주는 사람이 있는데요. 잡아끌어주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저렇게 끌림을 받아서 올라가는 사람만 유익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위에서 잡아끌어주는 사람도 이런 일들을 함으로 말미암아, 근력이 생기는 것이죠. 능력이 생기는 것이죠. 영적인 파워가 생기는 겁니다. 우리는 어떻게 영적으로 성장하는가? 다른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을 통해서, 그 과정 속에서 우리도 성장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양육할 때 보면, 어떤 마음으로 자녀들을 양육하나요? 모든 것을 희생한다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양육합니다. 자녀들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모든 것을 다 쏟아내고, 자녀들을 제대로 성장시키기 위해서, 나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희생해 가면서, 그렇게 우리 자녀들을 기르게 되는 것인데, 그런데 나중에 보면,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내가 자녀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고 모든 것을 희생해서 우리 자녀들을 기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누구도 성장했어요? 나 자신도 성장한 거예요. 젊었을 때, 아무것도 몰랐을 때, 철없던 우리들이 어떻게 인격적으로 성숙할 수 있었고, 어떻게 인내심이 길러질 수가 있었고, 어떻게 용기가 길러질 수 있었겠는가? 모두가 다 자녀들을 기르면서, 엄청난 능력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죠. 자녀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가운데 인내심이 길러지게 된 것이고, 자녀들에게 사랑을 베풀면서 용기를 가지게 된 것이고, 인내심을 훈련을 하게 된 것이고, 내가 모든 것을 다 쏟아서, 우리 자녀들에게 다 부어준 줄 알았는데, 그리고 자녀들에게 일방적인 사랑만 제공한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알고 보니까 우리 부모가 자녀들의 사랑을 오히려 더 많이 받았고, 우리 자녀들 때문에 우리 부모들이 더 성숙하게 되는 그런 놀라운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라고 하는 신앙 공동체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함께 서로 돕는 가운데,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가운데,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해져 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혼자 있으면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같이 성장해 가게 되는 것이죠. 지금 와서 돌아보면, 어떻게 지금의 제가 여기까지 올 수가 있었을까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그동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저를 도와줬던 것 같아요. 힘을 줬던 것 같아요. 아직도 갈 길이 멀기 때문에, 이런 말하기가 어렵지만, 조금이라도 제가 예전보다는 좀 더 성숙한 면이 있다고 한다면, 그 이유가 어디에 있었겠는가? 그냥 제가 잘라서 성숙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 아이들을 기르면서, 저도 성장한 거예요. 아이들에게 모든 걸 다 쏟아부어주은 것 같았는데, 알고 보니까, 제가 영적으로 성숙해질 수가 있었던 것이죠. 뿐만 아니라 제가 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성도님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기도 하고, 또한 여러 가지 영적으로 도움을 준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까 성도님들로부터 오히려 많은 사랑을 받았고, 또 돕는 과정 가운데, 제가 더 성숙해지고 더 잘할 수 있도록, 그렇게 그 과정이, 정말 내가 희생해서 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오히려 더 많은 축복을 받았고, 성장하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을 기를 수 있었던 것이 너무나도 감사한 것이고, 또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 속에서 사역을 할 수 있었던 것이 너무나도 감사한 것이고, 오늘날에 제가 조금이라도 과거보다, 과거보다 나아진 것이 있다고 한다면, 모든 것이 다 그런 은혜 가운데 있었던 것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라고 하는 것은 여러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서로가 도와주며, 또 도움을 받으며, 돕는 가운데, 오히려 능력이 생기고, 그래서 함께 성장하는 것이 교회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옆 사람 보면서 한번 얘기합시다. “우리 서로 돕고, 도움을 받읍시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 속에서 유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 속에서 오히려 해를 당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 속에서, 사람에게 시험을 받기도 하고, 그래서 믿음을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도 생기게 되는 겁니다. 교회라고 하는 곳에서 영적인 성숙이 이루어져야 되는데, 이상한 사람들, 좀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 이기적인 사람들,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들을 교회 안에서 만나게 되면서, 영적인 성숙이 이루어지기보다는, 오히려 시험에 들고, 믿음을 잃어버리고, 심지어 예수님을 부인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경우가 많이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압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교회가 세상과는 다를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교회에 가면 “세상과는 좀 다르겠지.” 기대하면서,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죠. 사람들은 교회는 세상과는 달라야만 한다고 생각을 하면서, 교회 안에 들어옵니다. 그런데 막상 교회 안에 들어오니까, 좋은 것이 보일 때도 있었지만, 처음에는 굉장히 좋아 보여요. 환영도 해주고, 사랑도 해주고, 많은 그것을 베풀어줄 때, 교회라고 하는 건 “내가 참 잘 왔다”라고 생각이 들게 되지만, 그것은 처음이 그렇고요.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교회 일에 좀 더 연관을 갖기 시작하고, 그리고 사역을 하기 시작하면서,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세상과 다를 게 없다고 하는 것을 발견하기 시작하는 겁니다.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에 들어와서 “정말 따뜻하구나.”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에 들어왔더니, “너무나도 좋구나.” 하면서 들어왔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가만히 교회의 민낯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죠.

교회가 다를 줄 알았는데, “세상과 다른 게 아무것도 없구나.”라고 하는 말이 나오는 겁니다. 심지어 세상보다도 더 나쁘다고 하는 말도 나오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은 서로 원수가 졌어도, “우리 술 한잔 마시자. 막걸리 한잔 하자.” 하면서, 한 잔 마시면, 서로 툴툴 털어버리고 화해하는데, 교회에서는 화해가 안 이루어져요. 서로 싸우고만 있어요. 그래서 세상보다도 더 나쁜 것 같다고 하는 그런 자조 섞인 이야기들이 나오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실망 가운데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교회가 세상과 다르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니 교회가 세상보다 더 나빠 보이는 그런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이 듭니까? 제가 정답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오른손을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가슴을 한번 대보세요. “바로 나 때문입니다.” 세상과 다를 바가 없는 내가 이 교회 안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세상과 똑같은 거예요. 나 자신이 죄성으로 가득한 인생이기 때문에 똑같은 거죠.

비유를 하나 들고 싶습니다. 원숭이 마을에, 원숭이들이 바글바글한데, 어느 날 그 원숭이 마을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러니까 원숭이들이 너무나도 기뻐서 교회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교회에 가면 “뭔가 다르대.” 교회 가면 “뭔가 좋은 게 있을 거야.” 그래서 그 원숭이들이 교회 안으로 다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 안에 들어왔을 때, 원숭이들이 발견하게 된 것은 무엇일까요? 그 안에서 사람을 발견했을까요? 아니요. 무엇을 발견해요? 원숭이를 보는 거예요. 교회 안에 들어오면 원숭이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원숭이 그대로 그 교회 안에 있는 거예요.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인생이라고 하는 건 죄성으로 가득한 인생들인데, 이 세상에서 싸우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그렇게 싸우던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 들어오면, 그 순간에 갑자기 완전히 바뀌어버려서, 천사들이 되어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세상에서 살던 그 모습 그대로 이 교회 안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위선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에, 그런대로 좀 잘 보이려고 하고, 그런대로 좀 괜찮아 보이려고 하기 때문에, 괜찮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한 모습이 금세 탄로가 나는 겁니다. 위선적인 모습이 탄로가 나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다. 죄성으로 가득한 인생들이 가득 차 있는 곳이구나. 교회는 의인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 죄인들이 모인 곳이라고 하는 사실을 금세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 안에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 세상과 똑같은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 그 사실은 교회를 떠나야 할 이유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교회를 떠나야 할 이유라기보다는, 오히려 바로 그러한 모습 때문에 교회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도움을 주고,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도와주면서, 함께 성장해 나가는 것이죠. 영적으로 연약한 사람들,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 이기적이고 화를 내기 쉽고, 원수를 용서하지 못하는 그런 이기적인 그런 모습의 사람들에게, 영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서, 그렇게 돕는 과정에서, 나도 성장하고, 도움을 받는 사람도 성장하고, 함께 영적으로 성장해 가는 것이 그게 교회라고 하는 사실을 먼저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는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예루살렘 교회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사도행전 4장의 말씀을 읽었는데, 오늘 본문의 말씀에 보면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예루살렘에 있었던, 처음 생겼던 바로 그 교회에 펼쳐지고 있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 교회와는 좀 다른 것 같아요. 오늘날의 우리 교회의 모습은 문제가 많고, 이기적이고 여러 가지 갈등이 있는 그런 교회가 오늘날의 교회라고 한다면, 오늘 읽은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사랑이 넘치는 교회였어요. 정말 멋있는 교회고, 정말 좋은 교회고, 정말 바람직한 그런 교회의 모습이 오늘 사도행전 4장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 겁니다.

한번 같이 다시 한번 읽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도행전 4장 32절부터 35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정말 멋있는 공동체였습니다. 성도들이 사유재산을 포기한 겁니다. 내가 가지고 있던 부동산 팔아서 헌금한 겁니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가 함께 쓰자고 한 거예요. 가난한 사람들 있는데, 내 물건을 나누어 주면서, 함께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 간 것이죠.

그 가운데 오늘 특별히 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누가 등장하냐면 요셉이라고 하는 사람이 등장을 합니다. 이 요셉이라고 하는 사람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그 밭을 팔았습니다. 토지를 팔았습니다. 그리고 그 토지 판 돈을 사도들 앞에, 사도들 앞에 내어놓고,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쓸 수 있도록 만들어주어서, 예루살렘 교회에는 어떻게 되었는가?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는 거예요. 배고픈 사람이 없었다는 거예요. 모두가 다 충만이 먹고, 모두가 다 행복한, 그런 엄청나게 좋은 공동체가 있었다고 하는 것이 오늘 성경의 말씀입니다.

이런 초대교회의 모습 좋습니까? 나쁩니까? 좋아요? 나빠요? 좋아 보이죠! 너무나도 좋아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본문의 말씀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 질문들이 떠오르게 됩니다. “어떻게 예루살렘 교회는 이렇게 좋은 교회가 될 수 있었을까?”라고 하는 질문이고요. 더 나아가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렇게 좋은 교회가 될 수 있을까?”라고 하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서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도 있습니다. 좀 더 깊은 질문을 던질 수가 있겠는데요. “과연 이렇게 예루살렘 교회처럼 경제 공동체가 되고, 네 것 내 것 없이, 함께 그런 가족 공동체를 이루어서 교회를 세워 나가는 것이 그게 과연 오늘날 우리 교회가 추구해야 될 목표가 될 수 있을까?” “과연 그게 바람직한 모습이고, 성경에서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하기를 바라고 있는가?”라고 하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마치 원시 공산사회와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공유 사회죠. 내 것이 내 것이 아니고, 사유재산이 없고, 그저 모든 것을 함께 나누면서, 가족들처럼 같이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가족들은 어떻게 되죠? 네 것, 내 것이 있나요? 약간 있긴 있지만, 큰 문제없을 거예요. 엄마가 입던 옷 딸도 입고, 딸이 입는 옷, 엄마도 입고 하잖아요? 안 됩니까? 우리 집은 그렇게 해요. 그런데 과연 이렇게 교회가, 이렇게 예루살렘 교회처럼 네 것 내 것이 없이 함께 재정적으로 같이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게, “오늘날 우리 교회가 추구해야 될 방향일까?”하는 질문입니다. “과연 21세기에 이것이 가능하겠는가?” 더 나아가서 “바람직한 것인가?”라고 하는 여러 가지 질문들이 떠오르게 됩니다.

간단하게 대답을 드립니다. 사실 오늘날 오늘날 우리 교회가 추구해야 할 공동체가 예루살렘 교회처럼 서로 물건을 통용하면서, 네 것 내 것 없이 함께 나누고 쓰는, 그런 경제 공동체를 추구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사유재산이 없이 서로가 경제 공동체적인 그런 삶을 살았다고 하는 그 사실이 오늘날의 우리 21세기에 사는 우리 교회들도 똑같이 사유재산 없이 서로가 다 재산을 같이 공유하면서, 그래서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근거는 무엇인가? 첫 번째는 오늘 본문의 32절 말씀에서는 모든 성도들이 물건을 서로 통용하면서 자기 재산을 주장하지 않았다고 말을 하고 있지만, 그러니까 교회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재산을 꼭 포기해야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나중에 우리가 살펴보겠지만, 아나니아와 삽비라라고 하는 부부가 자신들의 재산을 팔아서, 토지를 팔아서, 사도들 앞에 내놓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일부는 숨기고, 일부만 내놓은 일이 벌어졌었는데요. 그때 베드로가 그 부부를 향해서 했던 말이 사도행전 5장 4절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 5장 4절 말씀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반드시 땅을 팔아가지고, 교회에 내놓아야만 했었던 것인가요? 안 내놓아도 괜찮았었다는 얘기입니까? 안 내놓아도 괜찮은 거예요. 자기가 사유 재산으로 땅을 가지고 있어도 괜찮은 것이었고, 그 땅을 팔아서, 다 바치지 않고, 일부는 바치지 않고, 일부만 드려도 괜찮은 거예요. 그렇게 해도 아무 문제가 없는 거예요. 그게 교회가, 교회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사유 재산을 포기해야 되는 시스템이 아니었던 것이죠. 어떤 상황이었는가? 예루살렘 교회 상황은 자발적인 헌금이 이루어졌던 상황인 겁니다. 자발적인 헌금을 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은 이만큼을 내놓고, 어떤 사람은 저만큼을 내놓는 가운데, 요셉 바나바라고 하는 사람은 자신의 전 재산을 교회에다 내놓았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모든 교인이 다 그렇게 재산을 포기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물에 관해서, 아주 극단적인 말씀을 하신 이야기들이 기록돼 있습니다. 네 모든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 버리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는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들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마치 낙타가 바늘귀 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까지 말씀했기 때문에, 이런 말씀들과 함께 생각해 보면,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돈 하나도 없어야 되는가 보다. 다 포기해 버리고 다 바쳐버리고, 그렇게 신앙생활을 해야 되는 것인가 보다.”라고 착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자발적으로 하는 거예요. 자발적으로.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보니까, 미국 성도님들은 자발적으로 헌금을 참 많이 하셔요. 특별히 자녀들에게 유산을 물려주지 않습니다. 자녀들이 대학을 졸업하면, 대학에 가면, 그때부터 경제적으로 자립해 버리고, 부모는 자녀들에 대한 의무를 거의 다 했다 생각하고, 집이 있으면 유언장을 써서, 이것으로 교회에 완전히 다 헌금하고, 교회에서는 나를 위해서 무덤만 써달라고 하는 그런 유언장을 써가지고, 교회에 전부 헌금하기도 하고, 학교에 장학금으로 다 바치기도 하고, 그래서 보면 미국 교회는 정말 엄청난 많은 헌금들 때문에, 세계 선교를 엄청나게 많이 감당하고 있고, 엄청난 능력들을 많이 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게 강제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다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거든요. 예루살렘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 자발적으로 한 것이지, 반드시 교회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 이것을 해야만 하는 그런 시스템이 아니었다고 하는 것이죠.

더 나아가서 만일 교회가 경제공동체가 된다고 한다면, 좋은 모습만 있을까요? 부작용도 있을까요? 당장 부작용이 생기게 되는 겁니다. 성경에 나온 부작용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냐면, 사도행전 6장에 그 구제금을 누구에게 배분하는 문제가 당장 불거지기 시작했습니다. 헬라파 과부들은 제외되는 반면에, 유대파 과부들에게는 더 많이 주면서, 그래서 갈등이 일어났다고 하는 이야기가 사도행전 6장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고요.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교회에서 이런 재정적인 문제가 해결되게끔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어지게 만들어지면 좋은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바라보는 것이, 복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물질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겁니다. 복음이 좋아서, 예수님이 좋아서, 교회 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나누어주는 그 재물이 좋아서, 교회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이죠.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 안에 들어오면서, 교회에서 나에게 무엇인가 도움을 주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들어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실제로 초대교회에서도 그런 일들이 엄청나게 많이 발생했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이런 모습의 교회를 이루어 나가고 있을 때, 어떤 사람들이 생겼는가? 교회에 가면 먹을 게 해결된다더라. 우리나라 사람들은 “교회 가면 밥 주냐?”하면서 못 가게 했는데,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교회 가면 밥 준단다.” 교회 가면 먹을 것이 있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복음에는 관심이 없는 거예요. 뿐만 아니라 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하지 않고, 그저 얻어먹기만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편지를 쓰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너희 가운데 일하기 싫어하고, 교회에서 주는 구제금으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일하기 싫거든 먹지도 마라. 구제금 받지도 마라. 강한 어조로 성경 가운데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구성원들 가운데 자기 부모님들을 공양해야 되는데, 교회가 도와주기를 바라고, 자녀들의 의무를 등한시하면서, 자신의 부모를 돌보지 않을 때, 또 바울 사도는 편지글 가운데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가족들이 있다면, 그 가족이 자기 가족을 챙겨야지, 교회에 부담을 주지 마라. 교회에게 이런 일들을 맡기지 말라고 하면서, 이 경제 공동체가 되어 가는 과정 가운데, 여러 가지 부작용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먹을 것이 있으면, 그때부터 사람들은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복음이 아닌 다른 것들이 우상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돈이 우상이 되고, 명예가 우상이 되고, 그리고 이 세상에 다른 어떤 유익들이 우상이 될 때, 사람들은 그 우상을 얻기 위해서 교회 안에 들어오는 것인데, 믿음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정 하나님과의 정반대 된 우상을 얻기 위해서, 교회 안에 들어오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문제 때문에 유대인들의 곁을 떠나셨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였을 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열광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자,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몰려들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우리들의 왕으로 임금으로 세우려고 했습니다. “주님, 우리들의 임금님이 되어 주십시오.” 하면서, 예수님 주변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을 바라보면서 “너무나도 고맙다. 나와 함께 가자.”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그 몰려드는 사람들을 다 버리고, 한적한 곳으로 피하시고 말았어요. 따르는 그들 예수님을 찾아다니는 그들을 외면하시고, 예수님께서는 한적한 곳으로 피하시고 도망가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요한복음 6장 26절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습니다. 교회를 찾는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교회를 찾는 것이 아니라,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 속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 때문에 교회를 찾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귀기 위해서 찾는 사람도 있고요. 내가 이런 교회를 다니게 되면 장사하는 데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해서 교회를 찾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교회 안에 들어와서 훔쳐가기 위해서 찾는 사람도 있습니다. 흘려놓고 간 가방 같은 거, 슬쩍슬쩍 해가면서 훔치기 위해서, 교회를 찾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람들을 사귄 다음에, 돈을 빌리고, 그리고 그 돈을 가지고 잠적하려고 하는 사악한 마음을 가지고 교회를 찾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정치인들은 표를 얻기 위해서, 교회를 오는 것인데, 믿음이 있기 때문에, 교회에 오는 게 아니에요. 그냥 교인들이 주는 표를 얻기 위해서, 당선되는 것을 갈망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에 오는 것인데, 거기에 우리 성도들이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되는 것이죠. 교회에 와서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녔다고 말하고, 절에 가서는 법명이 있다고 말하고, 천주교회에 가서는 세례명이 있다고 말하는, 영세명이 있다고 말하는, 그런 그런 카멜레온과 같은 그런 정치인들이 결국 교회 내에서 단물만을 빼먹으려고 하는 그런 부작용들이 교회 가운데서 나타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러니까 우리 21세기를 사는 우리 교회도, 예루살렘 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다 자기 재산 포기해 버리고, 함께 같이 가난한 자가 없게 만들고, 함께 경제공동체를 만들어서, 그렇게 살라고 하는 의미에서 이 말씀이 기록된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 어떤 사람들이 있었는가?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수많은 어려움들을 성도들이 서로가 돕고 돕는 가운데, 경제적인 문제가 있어서, 경제적인 문제도 외면한 것이 아니라, 함께 돕고 돕는 가운데 같이 영적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이죠. 당시 1세기 성도들의 신앙생활은 오늘날처럼 우리들이 신앙생활하는 것처럼 자유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핍박의 대상이 되나요? 그게 아니에요. 장로님입니다. 그러면 장로님이세요? 권사님입니다. 그러면 권사님이세요? 목사님입니다. 그러면 목사님이세요? 모두가 다 인정해 주고, 자유가 보장되는 상황 가운데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1세기 예루살렘 교회는 우리들의 상황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그때에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순교의 각오를 가지고 믿는 거였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우리 가족에서부터 쫓아내 버렸어요. 우리 마을 공동체에서부터 쫓아내 버렸어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물건도 안 팔았어요. 재정적인 능력이 없었어요. 그렇게 엄청난 고난 가운데에서 살던 성도들이 모여 있을 때, 그때 서로가 영적으로 돕고 도움을 받는 그 상황 가운데서, 영적인 문제가 아닌, 다른 문제들을 외면한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으로 이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시절을 견뎌 나갔던 것입니다. 마치 콩 한 조각이라도 나누어 먹고 싶은 그런 사랑의 마음으로, 나누어 먹어서, 그래서 초대교회가 이런 모습을 보여주게 된 것이죠.

제가 설교를 처음 시작하면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야 되는 우리들이, 왜 신앙 공동체를 이루어서, 신앙생활을 하는가? 서로가 서로를 돕는 가운데, 돕고, 나도 도움을 받고, 돕는 것이 곧 내가 성장하는 길이고, 그래서 그래서 우리가 함께 성숙할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예루살렘 교회도 서로가 영적으로 돕고 돕는 가운데, 서로가 같이 성장해 나가는 과정 가운데, 그 가운데 경제적인 문제도 외면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 가운데 미성숙한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면, 교회 가운데 죄성으로 가득 찬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교회 안에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나쁜 사람들이 이 교회 안에 있다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가 그 사람들 때문에 교회를 떠나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을 보면서 도와주어야 되는 거예요. 영적으로 자랄 수 있도록 기도해 주어야 되는 것이고, 사랑의 손을 내밀어야 되는 것이고, 그 완악한 심령들이 바뀔 수 있도록, 영적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에게 도와주어야 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인 것이죠.

초대교회는 예루살렘 교회는 왜 아름다운 교회가 되었는가? 거기에는 사랑이 풍성한, 남에게 자신의 것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사랑이 풍성한 교회가 된 것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교회 구성원 가운데 자신의 것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됐을까요? 얼마 없었을 겁니다. 대부분이 다 가난했고, 대부분이 다 힘들었고, 고통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그 사람들을 보면서, 예루살렘 성도들이, 그 가난한 사람들을 보면서, 먹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이고, 이 교회는 순 거지들만 모였구나?” 하면서, 떠나지 않았어요. 가난한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그 예루살렘 교회를 보면서, “이 교회는 완전히 망할 교회로구나.” 하면서, “나는 이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겠다.” 하면서 떠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어려움에 자신의 것을 풀어서 도와주었던 것이죠.

오늘날 21세기를 사는 우리 교회는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까? 어쩌면 경제적인 문제가 있을 수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오늘날의 문제는 경제적인 문제보다도, 오히려 인성의 문제가 더 많을 것이고, 죄성의 문제가 더 많을 겁니다. 이기적인 사람, 탐욕적인 사람,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 싶어 하는 사람, 자랑하는 사람, 사람들에게서 받기를 갈망하는 사람, 화내기 좋아하는 사람, 또는 원수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 그런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부족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우리 공동체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밖에서 원숭이였던 사람은 교회 안에 들어와도 원숭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세상에 교회에 들어왔더니, 세상과 다를 줄 알았는데, “세상과 똑같은 사람들이 우글거리고 있구나.” 하면서, 침 뱉어버리고 그 공동체를 떠나야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줘야 되는 거예요. 초대교회는 재정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재정의 문제를 풀어서 그들을 도와줬다고 한다면, 오늘날 21세기의 교회 가운데는 여러 가지 영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때, 저런 수준 낮은 사람들하고는 내가 같이 못 있겠다. 저런 더러운 사람들하고는 내가 함께할 수 없다고 하면서 떠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어주는 것이 바로 교회의 역할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사랑을 많이 베푸는, 자신의 재산을 내놓은 사람들만 있었을까요? 아니요. 대부분의 90프로 이상은 도움을 받아야 될 사람들만 있었을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 우리 교회에 가면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들만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뭔가 모지라고, 뭔가 부족하고, 흠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는 가난하고 부족한 사람들이 우글거리고 있을 때, 예루살렘 교회는 어떻게 아름다운 교회가 되었는가? 그 사람들을 보면서 외면하지 않은 것이죠. 그 사람들을 보면서, 그 교회를 떠나버리지 않은 겁니다. 오히려 자신의 재산을 내려놓고, 그들을 도우며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 간 것이죠.

오늘날 우리 교회 가운데는 여러 가지 부족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 똑같은 그런 더러운 모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우글거리고 있을 때, 이런 더러운 집단, 세상과 다를 바 없고, 아니 세상보다 더 나쁜 공동체라고 하면서, 외면해 버리고, 이 교회를 박차고 떠나는 것이, 우리의 자세가 아니라, 오늘 우리는 그 옛날 초대교회 성도들이 사랑을 베풀었던 것처럼, 영적인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싸매어주고 손 잡아주고, 어깨를 두드려주면서, 영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왜 우리는 연약한 지체들을 돌보고 사랑해 주어야 합니까? 바로 그게 교회의 목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해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랑이 넘쳐나는 방법은, 우리가 많은 사랑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사랑을 베풀 때 우리는 사랑을 느끼게 되는 것이고, 영적으로 성숙해져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도움을 줄 때,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으니까, 우리가 도와주어야 하는 것이고요. 더 나아가서 우리가 외면하지 말고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야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게 바로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향해서 해주셨던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죄로 인해서 얼룩진 사람들이에요. 우리는 죄로 인해서 지옥의 형벌을 받아도, 아무런 항변할 수 없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 주님께서 “저 더러운 놈들” “저런 더러운 놈들”하고는 함께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외면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저 높고 높은 보좌 위에서 이 세상으로 오셨습니다. 마치 우리 부모님들처럼 말입니다. 우리 아이가 장난치면서 시궁창에 빠졌을 때, 심지어 변기통에 빠졌을 때, 옛날에 그 아이를 보고 냄새난다고, 더럽다고 “저리 가” 하고 외쳐버린 것이 아니라, 부모님은 그 시궁창을 다 뒤집어쓰는 거예요. 부모님은 그 아이의 모든 더러움을 다 씻기기 위해서, 내려가는 거예요. 그리고 씻겨주고 깨끗하게 해 주고, 그 아이를 바르게 만들어서, 성장시키는 그 일을 해온 것이 부모님의 모습인데, 바로 우리 예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그런 사랑으로 보시고, 이 땅까지 내려오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죄를 씻기시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려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런 놀라운 사랑을 받아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한다면,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에 더러움이 많고 부족함이 많고, 어쩌면 세상보다 더 이기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 공동체, 외면하고 지나갈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 따뜻한 사랑의 손길 영적으로 도움을 주며, 사랑을 베푸는 가운데 우리가 함께 성장해 나가는 귀하고 복된 교회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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