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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치 초대의 비유 (눅 14:15-24)

천국이 무엇과 같은가? 우리가 볼 수 없는 그 천국, 우리가 경험해 보지 못한 그 천국을 설명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이 땅의 이야기로 천국을 비유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는, 이미 알고 있는 것에 빗대어서 설명할 때 이해하기 쉽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미 알고 있는 이 땅의 이야기, 누구나 다 공감할 수 있는 이 땅의 이야기를 예로 들어서, 저 천국의 이야기를 설명해 주고 계시는데요. 오늘은 그 가운데서 혼인 잔치의 비유를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혼인 잔치를 하게 됐습니다. 잔치할 때 제일 중요한 게 무엇이죠? 다 중요하죠. 먹을 것도 잘 준비해야 되겠고요. 여러 가지 것들이 다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잔치 자리에 손님이 오지 않는다고 하면, 잔치가 잔치가 되지 못하는 것이죠. 우리가 미국에 있을 때, 초등학교 학생들이 서로 생일잔치를 합니다. 생일잔치를 하면서, 오늘은 내 생일이니까, 며칠날은 내 생일이니까, 생일잔치에 오라고 친구들을 초대합니다. 초대하면 우리 아이들이 서로 가서 칭찬하고, 또 축하해 주고 하면서, 생일잔치를 벌이게 되는데, 그런데 만일 내 생일잔치에 아무도 오지 않는다고 한다면, 얼마나 기운이 빠지겠습니까? 종종 학교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왕따 당하고 하면, 그럴 경우에 그런 불상사가 일어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 가정은 늘 불안했습니다. 우리 아이가 동양 아이인데, 이 아이가 학교에서 생일잔치를 한다고 우리 아이들을 초대했을 때, “이 아이들이 오지 않으면 어떡하나?”라고 걱정을 했는데, 너무나도 감사하게도 많이들 와줘서,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그런데 만일 잔치 자리에 손님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처럼 참 안타까운 일이 없을 겁니다. 최근에 어떤 신진 작가가 소설을 하나 써가지고, 그 소설을 출간하면서, book signing ceremony를 했습니다. 저자가 사인해주는 그 사인회를 열겠다고, 그래서 선전을 하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와서 그 사인을 받아주기를 그렇게 기대하면서, book signinh 그런 자리에 가게 되었는데, 그날 온 사람은 딱 두 명이 왔어요. 두 명이. 두 명이 서명을 받고 가는 그 경험을 하는 그 사람이 sns에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솔직하게 올렸습니다. 내가 정말 첫 소설을 써서 신인 작가로서 출발하고 싶어서 이렇게 book signing 이런 회를 열었는데, 서명을 해주는 사인회를 열었는데, “안타깝게도 오늘 온 사람은 두 명밖에 없었다.”라고 하는 이야기를 써 놓았을 때, 그러자 수많은 유명인들이 거기에 댓글을 달면서, 그 사람을 위로해 주었다고 하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빠칭코의 작가 이민진 작가도 그 밑에 글을 쓰고, 또 다른 유명한 작가들도 그 밑에 댓글을 달면서, 당신에게는 두 명의 손님이 또 있었군요. 제가 책을 펴낼 때는 아무도 안 왔습니다. 잔치를 벌였는데, 아무도 오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처럼 쓸쓸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제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면서, 이 지역에 있는 동네 아이들을 초대했습니다. 우리 전도팀이 토요일마다 나가서, 초등학교 앞에서 초청장을 나눠주고, 그리고 크리스마스 파티가 있으니까, 꼭 부모님 허락을 받고 오라고, 그렇게 많은 초청장을 뿌린 다음에, 그리고 토요일 어제 10시부터 짝 준비를 해가지고, 막 하는데, 우리 준비 대원들, 전도팀들, 유초등부 교사님들 얼굴에 근심이 가득해요. 이렇게 준비했는데, 아무도 안 오면, 어떡하나? 아무도 안 오면, 어떡하나? 그랬는데 감사한 것은 많이 오게 돼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혼인 잔치를 열게 되어서 손님들을 초대했습니다. 초대할 때 우리는 어떻게 초대하죠? 여러분들은 이제 결혼하게 되면, 어떻게 초대를 하게 됩니까? 요즘은 모바일 청첩장을 보내서, 그래서 언제 한다고 그렇게 알려주게 되는 것이죠. 당시 유대인들은 초대장을 먼저 종을 통해서 보냅니다. 말로 구두로 초대하는 것이죠. 그러면 가겠다고, 가겠다고 다 약속을 다 잡고 난 다음에, 그리고 정작 그날이 되면, 다시 종들을 보내서 오늘이 바로 그날입니다. “오기로 한 그날이 바로 오늘입니다” 하면서, 이 종들이 가서 사람들을 데리고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잔치에 초대되었던 사람들 가기로 했던 사람들이 놀라운 반응을 보여주는 겁니다. 못 가겠다고 하는 것이죠. 그때 했던 손님들이 했던 대답들이 무엇입니까? 나는 밭을 사서 못 가보겠어요. 밭에 가서, 내가 그 밭이 얼마나 좋은 밭인 지, 내가 한번 밭에 나가봐야 되기 때문에 못 가겠습니다. 그랬습니다. 어떤 사람은 대답했어요. 내가 소를 다섯 마리를 샀습니다. 그런데 그 다섯 마리를 샀는데, 그 소들을 시험해 봐라 가야 되기 때문에 그 잔치에 못 가게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 장가를 갔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잔치에 못 가겠습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여러분 이런 대답이 일리 있는 대답일까요? 어떤 대답일까요? 할 수 있는 대답입니까? 말도 안 되는 대답입니까? 1번 할 수 있는 대답, 2번 말도 안 되는 대답, 1번이라고 생각되시는 분? 2번 말도 안 되는 대답이다? 그렇군요! 틀려도 괜찮습니다. 틀려주시는 게 더 좋습니다.

사실 이건 말도 안 되는 대답입니다. 밭을 샀습니다. 사기 전에 밭을 평가하러 가나요? 사고 난 다음에 밭을 평가하러 가나요? 사기 전에 평가해야죠. 사기 전에 가서, 이 밭이 농사 지을 수 있는 밭인 지, 사기 전에 이 땅이 집을 지을 수 있는 땅인지, 미리 따져보고, 살펴보고, 그리고 많은 연구한 다음에, 그다음에 밭을 사는 것이 그게 맞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대답하는 사람이 뭐라고 대답을 하냐면, 내가 밭을 샀어요. 그러니까 밭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러 가야 돼서, 못 가요. 말이 돼요? 안 돼요? 안 된다 이 말이에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니, 시험해 봐야 돼서, 내가 못 갑니다. 말이 됩니까? 안 됩니까?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소를 살려고 하면, 사기 전에 시험해 봐야 돼요? 산 다음에 시험을 해봐야 돼요? 사기 전에 시험을 해봐야죠. 장가갔어요. 잔치에 못 갑니까? 전쟁에 못 나가겠다고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율법에 이제 막 시집가고 장가간 사람들은 전쟁에 면제되는 조항이 있기 때문에, 전쟁에 못 가겠다고 하면, 이해가 되는 것이죠. 하지만 잔치에 못 갈 이유는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사람들이 황당한 변명을 하면서 안 가는 겁니다. 황당한 변명을 대면서 못 가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이죠.

여러분은 못 가겠다고 말할 때, 무슨 변명을 하고, 못 갑니까? 안 갑니까? 뭐라고 변명을 하죠? 아르바이트하는 알바생이 주인에게 황당한 대답을 하고 못 가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대답을 할 수 있는 아주 좋은 핑계가 생겼습니다. 그게 뭡니까? 코로나 걸렸다. 그러면 만사 OK. 코로나 걸렸다. 코로나 걸려서 못 가요. 그러면 다 이해해줘요. 코로나 걸렸다. 걸리지 않았어도, 열이 나는데 코로나19 같아서 못 가요. 그러면 다 이해가 돼요. 우리 전주 사람들은 뭐라고 하고 안 갑니까? “제가 간다는 얘기는 안 했잖아요?”

성경에 보면, 이런 황당한 말도 안 되는 변명거리를 통해서, 변명하는 이야기가 종종 등장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이 성경 말씀을 읽을 때는, 이 변명이 그럴듯한 변명이겠지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전에도 한 번 살펴본 비유 가운데, 밤중에 손님이 와서 이웃집에 가서 떡을 빌리러 간 사람의 이야기가 있었는데요. 밤중에 떡을 빌리러 갔을 때, 집 안에서 대답이 나옵니다. 무슨 대답이 나옵니까?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침실에 누워서 잠을 자고 있으니, “일어나 네게 떡을 줄 수가 없노라.”라고 하는 변명이 나오는데, 이 변명이 그럴듯한 변명입니까? 황당한 변명입니까? 황당한 변명이에요. 애들이 자고 있다는 게, 무슨 변명거리가 돼요? 말도 안 되는 변명이지, 일어나서 주면 되잖아요? 그게 무슨 변명거리가 된다고, 그런 변명을 하면서, 안 주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에 있어요? 만일 그런 변명을, 황당한 변명을 하고서 주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다음 날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그 떡을 주지 않은 사람을 향해서 비난하고야 말 겁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해 주시는 비유 가운데, 황당한 변명을 여기에 비유에 집어넣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공분을 일으키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느냐? 어떻게 저런 황당한 변명을 하면서, 못 간다고 대답할 수가 있느냐? 말도 안 되는 거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죠. 오늘날에는 우리가 잔치에 간다. 안 간다. 그게 간다고 했다가 못 간다고 하는 게, 그게 문제가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돼요. 오늘날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별로 (문제가) 안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당시에는 그게 심각한 문제인 겁니다. 예의를 차려야 하고, 명예를 중요시 생각하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 내가 그 잔치에 참여하겠다고 대답했으면, 그 잔치에 가서 축하해 주고 참여하는 것이 그게 명예스러운 일이지, 거기에 안 간다고 한다면, 정말 수치스러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못 가겠다고 한 핑계가 무엇이냐면, 내가 코로나 걸렸으니까 못 가겠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소를 샀으니까 밭을 샀으니까 못 가겠다고 하는 그런 황당한 변명을 하게 될 때, 그 이야기를 예수님에게서 듣는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냐면, “세상에 저런 나쁜 놈”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판소리처럼 생각하시면 돼요. 판소리를 할 때 어떻게 판소리를 합니까? 흥부가 있는데, 놀부가 하다가, 놀부의 아내가 흥부의 뺨을 때렸어. 그러면은 보고 있던 청중들이 뭐라고 반응을 해야 돼요? “세상에” 반응을 보여야 하죠. “세상에 이런 일이” 반응을 보여야 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해 줄 때, 듣고 있는 많은 사람이 “세상에 저런 나쁜 일이” “세상에 저런 이런 싸가지 없는 인간들이 있는가?”라고 반응을 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나단 선지자가 다윗 왕을 찾아가서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우리 마을에 어떤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부자고 양도 많고 소도 많고 많은 가축을 가지고 있던 어떤 한 부자가 있는데, 자기 집에 손님이 오니까, 자기 옆집에 있는 정말 가난한 사람, 그에게는 양 한 마리만 있어서, 애지중지 여기며, 마치 자식처럼 생각하는 그 양 한 마리가 있었는데, 그 부자가 그 양을 빼앗아서 손님을 대접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할 때, 다윗은 그 이야기를 듣고, “그런 일이 있었나요?”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뭐라고 반응합니까? “세상에 이런 나쁜 일이” “이런 그런 사람이 있다니, 그 사람은 바로 죽여야 된다. 이 나쁜 놈” 하면서, “당장 그놈을 끌어다가 이스라엘 땅에서 제거해 버려야 된다.”라고 분노하기 시작하는 거죠.

그 분노하고 있을 때, 나단 선지자가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당신이야.” 예수님께서 지금 이 이야기를 해 주시면서, 황당한 대답을 하는 이 사람들을 등장시킨 이유가 무엇이냐면,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분노하게 만드는, “세상에 이런 나쁜 사람들이 있는가?” “어떻게 약속을 지키지 않는가? 가겠다고 해놓고, 왜 안 가겠다고 하면서, 그렇게 말도 안 되는 대답을 내놓고 있는가? 저런 나쁜 놈들” 하고 소리를 지르려고 하는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 해주시는 말씀이 무엇이냐면, “그게 바로 당신이라”라고 말씀해 주시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해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그게 바로, 바로 너다. 너다.”라고 말씀해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도 애써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해 버립니다. 이거 정말 참 은혜스러운 말씀이네, 나와는 상관없이 “아, 세상에 이런 일도 있었구나.” 나와는 상관없이, 우리는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나와는 상관이 없는 말씀으로 비켜나가는 아주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큐티를 하고,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늘 그런 식으로 읽어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읽으면서도, 그리고 예수님의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이것은 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거참, 안 됐네. 저럴 수가 있는가”라고 생각하면서 성경을 읽을 수가 있는데요.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읽으면서 주님께서 “그게 바로 당신이야. 그게 바로 너야”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실 우리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주님의 초대를 거부한 사람들인 것이죠.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주인이 그 순간에, 특단의 조치를 내린 겁니다. 그러면서 잔치에 원래 초대했던 사람들이 오지 않게 되자, 잔치를 위해서 가난한 자, 몸 불편한 자, 맹인들, 저는 사람들 한마디로 말해서 동네 거지들을 다 불러 모아서, 잔치를 벌이게 된 것이고, 아직도 자리가 많이 있다고 하는 그 이야기를 들은 주인은 길과 산울타리 가로 가서, 가서 거기서 아무나 강권해서 그 자리를 채우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해주시는 말씀이 무엇이냐면, 천국은 누가 들어가는가? 천국은 누가 들어가요? 자격 없는 자가 들어가게 된 것이 천국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도 만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의 천국에 들어갔다고 한다면,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 천국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다고 하는 점을 다시 한번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어떤 생각을 하냐면, 나 같은 사람 정도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생각을 해요. 목사님들은 어떻게 생각해요? 내가 이래 뵈어도 주를 위해서 목회를 열심히 했으니까, 나 같은 사람은 주님께서 반겨주시겠지. 장로님들은 어떻게 생각해요? 나는 주를 위하여 헌신하고, 재산을 바치고 또한 충성을 다했으니, 나 같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받아주시겠지 생각하는 거죠. 교회에서 찬양 인도를 하고, 교회에서 여러 가지 교사로 사역을 하고 충성하고 봉사하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어떤 생각이 드냐 하면,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다고 한다면, 나 같은 사람을 구원해 주실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 비유를 통해서 들려주시는 주님의 음성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들이 천국에 가게 된 것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실은 아무런 자격이 없는 자들이 하나님의 그 축복의 자리에 가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번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겸손하게 엎드려야 하는 것이죠. 우리는 늘 우리 자신을 드러낼 것이 아니라, 나는 저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죄인이었으나, 예수님의 그 보혈의 피로 인해서 들어가게 되었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었다”라고 하는 그 믿음의 고백을 날마다 날마다 해야 할 것입니다.

이 비유를 하시는 목적이 무엇인가요? 이 비유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초대를 받았을 때, 그 초대를 거부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이죠. 우리는 왜 거부합니까? 하찮은 것 때문에 거부하는 것이죠. 이 세상에 썩어지는 것들 때문에 거부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이 세상의 것들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는 인생이 아니라, 이런 놀라운 은혜 하나님의 저 천국의 잔치에 우리가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반응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비유를 보면서 우리가 한 가지 살펴보아야 될 것이 있는데요. 비유를 볼 때 항상 우리가 조심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유사점이 무엇이고, 차이점이 무엇인가를 항상 분별해야 되는 것이고, 차이점을 유사점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한번 그림을 보면서 봤으면 좋겠는데요.) 주인이 잔치에 초대를 하는데, 그 초대하는 것을 거부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래서 자격 없는 사람들을 주인이 잔치에 초대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오늘 이 비유의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천국 잔치에 초대해 주신다는 것과 똑같은 이야기인데요. 그 천국 잔치에 초대를 거부한 사람이 있었고, 그리고 우리는 자격 없는 사람들인데, 하나님의 천국 잔치에 초대되었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 이 세상 잔치의 비유와 천국에 초대하는 것이 유사점이 있는 것이죠.

하지만 이 비유를 보면서, 우리가 그 주인은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겠는데, 그 주인의 모습과 하나님의 모습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주인의 초대 이유가 뭡니까? 주인은 왜 초대합니까? 초대하지 않으면 잔치가 초라해질까 봐. 초대하는 이 잔치 자리에 아무도 오지 아니하면, 그 잔치가 쓸쓸할까 봐, 사람들을 데려가는 거죠. 주인이 필요해서 그 사람들을 데려가는 겁니다. 그런데 이 주인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착각해요. 하나님도 이 주인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나님도 이 주인처럼 우리가 천국에 안 가면 심심할까 봐, 우리가 천국에 안 가면 하나님도 뭔가 부족할까 봐, 그래서 우리를 초대해 주시는 거라고 생각합니까? 그게 아니에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은 스스로 완전하신 하나님이고,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으신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만 그때서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않아도, 그 자체로 영광스럽고 그 자체로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으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 세상 주인과는 다른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봐야 되는 것이고, 이 비유를 보면서 이 하나님이 주인과 같이 뭔가 부족한 하나님이라고 그렇게 오해하지 않아야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오해하지 말아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정말로 처음 초청된 자는 아무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가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주인은 이야기를 합니다. 처음 초대했던 사람들은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게 될 거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도 그런 것일까요? 그것이 아닙니다. 이 표현은 거부한 자가 천국의 잔치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지, 결국에 회개하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 이 잔치의 이야기와 천국 잔치에 차이점이 있다고 하는 것도 보아야 되는 것이죠.

또한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천국은 잔치와 같은 것인가? 어떤 의미에서 잔치와 같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잔치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이에요. 잔치 가서 맛있는 거 먹어도 그만, 안 먹으면 조금 아쉬울 정도일 뿐입니다. 하지만 천국이라고 하는 것은 가도 되고 안 가도 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천국에 가지 않는 것은 영원한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고, 우리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결정이 천국에 가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천국을 사모하면서 사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마음을 강제해서 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마음의 문을 열 것을 초청하고 계시고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지요.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들에게 자유 의지를 주시고, 우리가 마음으로 주님을 영접해 주실 것을 기다리고 계시는데, 그 마음으로 문을 열면 그 주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시고, 우리가 주님과 함께 놀라운 천국의 잔치에 참여하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주님의 초대에 긍정적으로 응답하고, 아멘으로 대답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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