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들은 무엇인가를 잃어버리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아마 살다 보면 이것저것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를 많이 경험하게 될 겁니다. 그렇게 잃어버린 경험 가운데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고 하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잃어버렸다가, 너무나도 당혹스럽고, 정말 황당하고, 당황스러웠던 기억들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저는 잘 안 잃어버리는 편에 속하기는 하지만, 그런데 잃어버려서 낭패를 당하고, 굉장히 곤란했던 경험들이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를 생각해 보면, 미국에 가기로, 사랑하는 딸들을 보기 위해서, 미국에 가기로 비행기 항공권도 다 예약해 놓고, 모든 일정 다 해놓고, 그리고 그다음 날이면, 미국에 갈 비행기를 타려고 했는데, 그 전날 여권을 잃어버린 경험은 아주 참 당혹스러운 경험이었습니다.
미국의 딸들을 보러 가겠다고 하는 그런 기대를 가지고, 시장에 가서 물건들을 좀 구입하려고 쇼핑을 갔어요. 서울 영등포의 한 지하상가에 가서,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바로 그곳에 가서, 이 가게에 저 가게를 다니면서 물건들을 구경하고, 그렇게 해서 한 30분이 지났을까요? 1시간이 지났을까요? 뭔가 물건을 사려고 가지고 있던 핸드 지갑을 열었는데, 그 안에 제가 넣어두었던 여권이 있어야 되는데, 여권 두 개가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만 있는 겁니다. 큰일 났습니다. 여권이 없으면 비행기를 탈 수가 없고, 여권을 잃어버리면, 그걸 다시 만들고 발급하려면, 시간이 걸려서 내일 비행기를 탈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당황한 아버지 그 영등포 지하상가를 훑고 다녔어요.
우리가 어느 가게를 돌아다녔던가를 생각하면서, 이 가게 저 가게 다녔던 그 가게를 돌아다니면서, 땅바닥에 혹시 떨어져 있나 싶어서, 그 땅바닥을 보고 다니고, 그러면서 가게 주인한테 묻습니다. 혹시 누가 주운 여건 맡기지는 않았나요? 야속하게도 없다고 대답을 해버리는 그 주인의 말을 듣고, 발길을 올려서 이 가게 저 가게 돌아다녔는데, 아무리 찾아도 안 나오는 거예요. 제가 그 여권을 찾기 위해서 밤새도록 그 상가를 뒤졌겠습니까? 포기했겠습니까? 포기했습니다. 내일 비행기를 타려고 하는 그 계획을 포기하고, 여권을 신청하고 여권이 다 만들어진 다음에, 다시 계획을 세워서 가야 되겠다고 마음속에 포기하고, 그 시장을 빠져나왔습니다. 경찰서에 가서 물어보기도 했지만, 경찰서에서도 분실된 여권 받아놓았다고 하는 그런 말은 없었고, 전화번호를 알려 놓았지만, 제가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시장에서 여권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거의 희박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리 뒤져도 나오지 않는 그 여권 찾을 수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뿐만 아니라 그것은 반드시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 내일 비행기를 못 한다 뿐이지, 여권은 다시 만들면 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포기한 것이죠. 다 포기하고 자동차를 탔습니다. 그리고 혹시나 하고, 운전석 옆에 그 조그마한 공간이 있잖아요? 거기를 봤는데, 거기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얼마나 기쁘고, 그래서 그다음 날 무사히 미국에 갔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게 몇 년 전 이야기인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도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팔레스타인에 사는 어떤 여인이 있는데, 그 여인이 가지고 있던 10개의 은전 드라크마라고 불리는 그런 은전이 있는데, 그 은전 가운데서 하나를 잃어버렸을 경우에 어떻게 하겠느냐? 제자들에게 물어보는 겁니다. 10개의 은전을 가지고 있던 이 여인이 그중에 하나를 방 안에서 잃어버렸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그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했을 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할 겁니다. 그 동전 하나를 찾기 은전 하나를 찾기 위해서, 방에 불을 켜고, 빗자락으로 쓸어가면서, 그 은전이 어느 구멍에 처박혀 있는지, 자꾸만 쓸어가면서 찾을 거라고 다들 대답할 수가 있을 겁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그런 입장이라고 한다면 찾겠습니까? 포기하겠습니까?
그것은 상황에 따라 달라질 겁니다. 두 가지 상황에 따라서, 찾을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를 결정하게 될 텐데요. 첫 번째 기준이 있다고 한다면 그 잃어버린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에 따라서 찾을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가 결정될 겁니다. 만약 우리가 길을 가다가 길을 뛰어가다가 호주머니에서 500원짜리 동정이 땅에 떨어지거나, 100원짜리 동정이 땅에 떨어져서 굴러가 버려서 잃어버렸다고 한다면, 여러분 그 동전을 찾겠습니까?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겠습니까? 한 번은 보겠죠. 한 번은 보겠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냥 지나갈 겁니다. 왜냐하면 이 시대에 500원 100원짜리는 그렇게 가치가 있어 보이는 금액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만일 내가 잃어버린 것이 그런 것이 아니라, 수백만 원짜리 수천만 원짜리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는 결혼 예물이라고 한다면 찾을까요? 안 찾을까요? 찾는 거죠! 그것은 눈에 불을 켜고 찾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가치가 있는 것이고,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쉽게 포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두 번째 기준이 있다고 한다면, 과연 내가 이것을 찾을 수 있는 희망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찾을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가 결정될 것입니다. 만일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수천만 원의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잃어버린 장소가 배를 타고 가다가 바다에 바닷가에, 바다 한가운데서 그걸 구경하다가 떨어뜨려서, 바닷물 속에 빠져버렸다고 한다면 찾겠습니까? 포기하겠습니까? 포기하는 거죠! 저 깊은 바닷속에 빠져버린 그 물건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포기해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죠. 하지만 안방에서 잃어버렸다고 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가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찾고 또 찾아서 결국 그것을 손에 넣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해주신 이 비유에 등장하는 이 여인이 잃어버린 것은 10개의 드라크마라고 하는 은전 가운데, 하나를 잃어버린 것이라고 하는데요. 그 은전 하나의 가치가 얼마 정도였냐 하면, 하루치 일당 정도에 해당하는 가치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요즘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 정도의 가치로 환산하면 좋을까요? 한 대략 잡아서 한 10만 원 정도의 가치가 있는 그런 은전이었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찾을까요? 안 찾을까요? 찾겠죠! 그런데 어떤 학자에 의하면 그 드라크마의 가치가 그냥 하루치 일당 정도의 가치가 아니라, 보통 신랑이 신부에게 주는 예물 가운데 하나였다고 그렇게 설명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10개의 드라크마가 하나로 이렇게 잘 만들어져 있어서, 마치 머리에 쓰는 어떤 그런 그런 장식품 어떤 귀중품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 그 귀중품 가운데 하나의 드라크마가 떨어져 나간 것이라고, 그렇게 설명하는 학자도 있는데, 그렇다고 한다면 정말 찾아보겠죠. 남편이 나에게 준 것이고, 정말 사랑의 증표인데, 결혼의 약속인데, 그것을 잃어버리면 안 되겠다고 하는 마음에, 하나를 잃어버리면, 그 나머지 9개가 무의미하다고 하는 생각 때문에 아마 찾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어디서 잃어버렸는가? 집 안에서 잃어버렸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집 안은 찾는 것이 쉽죠. 반들반들한 나무 바닥에 있는 집이든지, 아니면 장판을 깔아놓은 집이든지, 찾는 것 쉬울 겁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당시의 집안은 어떤 집안들이냐면, 화강암 같은 것으로 바닥을 해서, 나무 같은 것으로 바닥을 해서, 그 안에 구멍들이 너무 많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은전 하나가 굴러서 그 어느 구멍 하나에 들어가 버리면, 찾기가 굉장히 어려운데, 더군다나 그 집 안에 창문이 별로 없어서, 오늘날에는 창문이 참 잘 뚫려 있어서 바깥에 햇빛이 잘 들어오지만, 팔레스타인 집안의 집들은 창문이 너무나도 작아서, 낮에도 캄캄한 그런 상황인데, 그렇다고 한다면 그 동전을 은전을 찾기 위해서 불을 켜고, 그리고 쓸어가면서 그 은전을 찾을 거라고 모두가 다 동의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찾다가 찾다가 결국 찾게 되면, 너무나도 기뻐서 동네 사람들에게 그 기쁨을 나누는 거죠. “세상에 이런 일이 있었어! 얼마나 기쁜지 몰라! 참 다행이야!” 하면서, 그 이 경험을 친구들한테 이야기하면서, 그 기쁨이 배가가 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해주신 것은 우리들에게 그러니까 여러분들도 무언가를 잃어버리면 “잘 찾아봐라. 열심히 잘 찾아봐라.”라고 하는 그런 교훈을 주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닙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무엇인가를 찾게 되면, “동네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라” 그런 의미의 말씀을 해주시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해 주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해 주신 것은, 이 세상의 이야기를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싶어서 이 말씀을 해주신 겁니다. 하나님도 이 여인과 같다는 겁니다. 이 여인이 무엇인가를 잃었다가 찾으면 기뻐하듯이, 하나님도 어떤 하나님인가 우리들을 잃어버렸다가 찾으면 기뻐하시는 하나님이다. 죄인 하나를, 회개하는 것이, 회개하며 돌아오는 죄인이 있다고 한다면, 그로 인하여 기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영적인 진리 하나님이 누군가에 대해서 말씀하시기 위해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해 주신 것이죠.
그래서 누가복음 15장 10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기쁨이 되느니라.” 이 비유에서 등장하는 여인은 누구를 상징하냐면,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한번 도표를 보여주면 좋겠는데요. 여기에 등장하는 여인이 있고, 그 여인이 잃어버린 은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과 잃어버린 은전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을 말씀하시기 위해서냐면, 사람들을 잃어버린 그 하나님께서 그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으신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기 위해서 이 이야기를 말씀해 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잃어버렸던 은전을 찾고 찾고 또 찾다가, 결국 찾으면 기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우리들을 잃어버렸는데, 죄로 인하여 타락한 인생들 망가진 인생들, 완전히 정말 박살이 난 그 인생들이 있는데, 그 인생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 앞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면,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너무나도 기뻐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이제 저를 보여주세요. 여인이 은전을 잃어버린 것처럼, 우리 사람들은 하나님에게서부터 멀리 떠나 있다고 하는 점이 우리 사람들의 은전과 비슷한 점입니다. 그 비슷한 점이 있기 때문에 이 비유가 성립하는 것이죠. 그때 이 여인은 운전을 잃어버렸을 때, “그냥 포기하지 뭐. 에, 재수 없구나.” 하면서 포기해버린 것이 아니라, 이 여인은 은전을 찾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겁니다. 깜깜하니까 불을 밝히는 것이고, 바닥이 쉽게 찾기 어려우니까 빗질을 하는 것이고, 찾고 또 찾다가 결국 찾게 되면, 그것이 너무나도 기뻐서, 동네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즐거워하게 되는 그 여인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우리를 찾기를 원하시고, 우리를 찾으신다면,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온다고 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제일 기뻐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말씀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의 말씀을 해 주신 이유가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보면서 비난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선포하셨고, 하나님에 대해서 가르쳐주셨고, 하나님 나라를 소개하면서, 하나님 나라로 초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초대를 받고 온 사람들이 누구냐면, 세리와 창기들과 같은 그 당시에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당하는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나왔어요. 정말 어마어마한 죄인들이 주님 앞에 나온 겁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그 세리와 죄인들을 “너희들이 이 더러운 놈들” 하면서 물리쳐버린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는 그들을 받아주셨어요. 그 모습을 보고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욕하기 시작했어요. “어떻게 예수님이, 랍비라고 하는 사람이 죄인들과 어울릴 수 있는가? 저 세리는 아주 나쁜 놈들인데, 어떻게 나쁜 놈들과 어울리는가?” 하면서 예수님을 비난하기 시작한 겁니다.
세리들 가운데 대표적인 예는 어떤 예입니까? 바로 삭개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삭개오라고 하는 사람은 세리장이었습니다. 당시의 세리장이는 이스라엘 민족을 배반한 반역자들이요. 매국노들이요. 하나님을 거부한 사람들이고, 죄악을 저지른 사람, 도둑놈들이고, 아주 나쁜 짓을 한 사람들이 바로 세리들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삭개오가 그런 짓을 통해서 무엇을 얻었습니까? 돈을 얻었고, 권력을 얻었고, 많은 위치에, 높은 위치에 올라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삭개오라고 하는 사람이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예수님을 보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돈이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권력이 그 사람을 만족시켜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 세리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하는데,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는 거예요. 예수님한테 가까이 갈 수가 없는 거예요. 쳐다볼 수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삭개오가 어디로 올라갔습니까? 나무 위로 올라가서, 예수님을 바라보았는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그 나무 앞을 지나가시다가 멈춰 선 거예요. 그리고 삭개오를 향해서 말씀하는 거예요. “삭개오야,” 내가 오늘 너와 함께하겠다고 말씀해 주실 때 이, 삭개오는 너무나도 기뻐서, 예수님 앞에 고백하는 겁니다. “주님, 지금까지 내가 도둑질한 거 다 갚겠습니다. 주님 이제부터는 이런 더러운 짓 하지 않겠습니다.” 하면서, 주님 앞에 나왔을 때,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 삭개오를 향해서, 너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씀하시면서 영접해 주신 것이 바로 그런 모습을 보면서, 바리새인들과 이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비난하는 겁니다. 어떻게 죄인을, 저 나쁜 놈들을 영접해 줄 수가 있겠느냐고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때 그러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비난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5장에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비유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오늘은 그 가운데서 한 비유인데요. 너희들이 생각해봐라. 너희들이 살다가 잃어버린 은전도 잃어버리면, 그냥 잃어버렸으니까,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은전 찾겠다고 방에 불도 밝히고, 빗자루로 쓸어가면서, 찾다가 결국 찾으면, 기뻐하는 게 너희들의 마음 아니냐? 근데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마음은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시고, 그 죄인들이 오는 것을 영접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 주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십니까? 그것은 사람의 가치가 드라크마와는 비교할 수도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은전 하나는 없어도 돼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실 때,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은전 정도가 아니라, 내 모든 것을 다 바쳐도 전혀 아깝지 않을, 사랑하는 자녀라고 하시기 때문에, 너희가 나의 아들이요. 나의 딸이라고 하는 그런 관점으로 우리를 바라보시기 때문에, 우리를 잃어버렸을 때, 그냥 놔두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다시 찾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시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시고, 심지어 무엇까지 바쳤습니까?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해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 우리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바라보시는 관점입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소중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은전 좋아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한 번 두 번 찾아보고 “에이, 포기하자.” 포기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제가 옛날 여권을 잃어버렸을 때, 그냥 포기해 버린 것처럼, 그렇게 포기하는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기다리신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이해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심판하지 않아요. 수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던집니다. 도대체 이 세상이 왜 이렇게 엉망진창인가? 하나님이 계시다고 한다면,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계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 악을 행하는 사람들, 그렇게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을 왜 그냥 방치해 두고 있는가? 왜 저 사람들을 심판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는가? 사람들이 질문을 던집니다. 이 세상이 이렇게 썩어지고 문드러진 것은,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잘 나가는 것은 하나님이 없으니까, 잘 나가는 거 아니냐? 하나님이 있으면,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저런 악인들을 심판해 버리시고, 착한 사람들은 상을 주셔야 되는데, 이렇게 악한 사람들이 뻔뻔하게 잘 살고 있는 이유, 악을 행하면서도 아무런 문제 없이 살아가고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 아니냐?”라고 하는 그런 질문을 던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 성경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지 않는 그 이유, 하나님은 그들도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 베드로후서 3장 8절 9절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선 천 년이 며칠 같다고요? 하루 같다고? 무슨 말입니까?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얘기는 그러니까 “성경에 있는 하루를 천년으로 계산해라” 그런 말씀이 아니에요. 천년이 하루 같다고 하는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인류가 회개하는 것을 기다리시는데, 천 년을 기다렸어요. 천년을 기다리면서 회개하기를 기다렸는데, 회개를 안 해요. 아이고 천 년 기다렸으니까, “됐다. 이제 심판해 버리자.” 하는 것이 아니라, 천 년 기다려 놓고도 뭐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아니야, 아직 안 지났어. 하루밖에 안 지난 것 같아.” 또 하루 더 기다린 거예요.
수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 그냥 쓸어버리세요. 다 심판해 버리세요. 포기합시다.” 할 때 우리 하나님이 해 주시는 말씀이 뭐예요? “아니, 아직 시간이 하루밖에 안 지난 것 같아.” 더 기다리고, 더 기다리시는, 한 영혼이 주님 앞에 돌아오기를 끝까지 기다리시고 계시는, 그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우리가 죄인들이 오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시는 이 말씀은, 그러니까 우리가 죄를 지어도 다 괜찮다고 하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죄인들을 받아주시고, 창기들을 받아주시고, 그런 세리들을 받아주셨다고 하는 이 말씀은, 그러니까 우리가 죄를 지으며 살아도 무방하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종종 수많은 우리 사람들이 죄에 대한 회개가 없이, 그저 교회에 다니기만 하면, 내가 교회를 다니니까 괜찮다고 생각하는 그런 경향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온갖 음란한 짓을 다 하고, 심지어 도둑질을 하고, 깡패 짓을 하고, 갑질을 하고, 사람들을 착취하면서, 나쁜 짓을 다 자행하고 다니면서도, 내가 교회를 다니기만 하면, 하나님은 죄인을 받아주시는 하나님이시니까, 나는 괜찮다”라고 그렇게 잘못된 확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회개와 뉘우침이 없이, 뻔뻔하게 “나는 예수님 믿어. 나는 교회 다녀. 그러니까 구원받았어.”라고 뻔뻔하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은 그래도 괜찮다고 하시는 말씀이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을 기뻐하신다고 하는 것이죠?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기뻐한다고 말씀하셔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게 뭐가 아니에요? 하나님이 죄인을 기뻐하신다는 말이 아니에요. 죄인을 그냥 그대로 좋아하신다고 하는 말씀이 아니에요. “세리로 계속 살아도 괜찮다. 악을 행하면서 계속 살아도 괜찮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드라크마가 잃어버린 그 상태에 있어도 기쁜 것이 아니라, 그 드라크마를 다시 찾았을 때, 이 여인에게 기쁨이 있는 것처럼, 죄인 하나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나올 때, 180도로 자신의 인생을 바꿀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하는 그런 말씀이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 전혀 뉘우침도 없고, 뻔뻔하게 악을 자행하면서, 나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라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라고 그렇게 오해하고 계시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죄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 한 사람 잡아보십시오. 그리고 검찰들 다 동원해가지고 한번 털어보십시오. 구속될까요? 안 될까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 사람도 붙잡아놓고, 먼지 털기 시작하면 먼지가 나게 돼 있어요. 그게 인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가 없는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며 손 높이 들고 회개하며 나오는 자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이 교회를 향해서 비난하고, 심지어 역겹게 생각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진정한 회개가 없이, 내가 죄를 지었어도 나는 구원받는다고 하는 뻔뻔한 자세로 살아가는 것들에 대해서 이 세상이 역겨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죄인인 것을 그대로 용납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를 깊이 뉘우치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인생을, 하나님께서는 그 회개하는 것을 보시고 기뻐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비유의 말씀에서, 동전은 우리들을 상징하는데, 그런데 이 동전은 우리들을 제대로 잘 나타내지를 않습니다. 이 드라크만은 잃어버리면 어떤 문제가 생기나요? 드라크마 자체로는 아무 문제가 안 생겨요. 그것을 잃어버리는 주인에게는 손해가 날지 모르겠지만, 잃어버려진 그 드라크마는 그냥 그냥 잃어버려지나, 안 잃어버려지나 똑같아요. 하지만 우리는 어떤 존재들입니까? 사람은 하나님의 품 안에 있는 것과, 하나님에게서부터 멀리 떠난 것과의 차이점이 무엇인가요? 어마어마한 차이점이죠. 우리가 하나님에게서부터 잃어진다고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에게서부터 떠난다면, 우리의 인생은 망하는 겁니다. 영원한 지옥불에 떨어지는 겁니다. 하나님, 행복의 근원이시고 축복의 근원이신 그 하나님에게서부터 떨어져 나가는 인생은 아무런 의미 없는 인생이 되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차이가 있는 것이고요.
뿐만 아니라, 이 여인과 하나님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이 여인은 이 드라크마를 찾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이 나에게 소중하고, 가치가 있기 때문에 찾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우리가 있어야만, 하나님이 무엇인가 더 할 수 있고, 우리가 유용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아무것도 필요한 분이 아니세요. 하나님은 스스로 자존하시고, 자족하신 하나님이고, 아무것도 필요 없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원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얻기 위한 그런 이득 때문에, 우리를 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못난 우리도, 망가진 우리도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들에게 손길을 내미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주님 앞에 온전히 회개하는 마음으로 나아가 주님과 동행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런 우리 인생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