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서 피난의 길을 떠나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들의 반란으로 인해서 피난길에 오른 다윗의 마음의 상태는 정말 처절했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정말 고통스럽고 너무나도 슬프고, 너무나도 원통하고 분한 그런 마음으로 이제 피난을 가게 되는데, 피난을 갈 때의 계절이 언제쯤이었겠습니까? 봄 여름 가을 겨울 중에서 어느 계절에 지금 이 다윗이 피난을 가고 있을까요? 마스크를 쓰니까, 하나도 안 들리네요. 아마도 여름이었을 것 같아요. 왜 여름일 것 같죠? 여름 과일을 가지고 온 걸로 봐서, 그 당시에 냉장고가 있었겠습니까? 뭐가 있었겠습니까? 아무튼 무슨 저장 시스템이 발달이 돼 있었겠습니까? 여름 과일을 가지고 왔다고 하는 이야기는 그때가 여름, 아주 더운 때였다고 하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죠.
요즘 덥습니까? 안 덥습니까? 덥잖아요? 너무 더운데, 이 더운 여름에 뭐 하나 하기도 너무 짜증이 나고, 정말 속에서부터 화가 날 수도 있는 이 더운 여름인데, 이때 도망을 가야 한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참 고통스러운 일이 되겠습니까? 그 힘든 고난의 길 고통의 길을 가는 가운데, 다윗은 두 명의 사람을 그 피난길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 가운데서 오늘 본문에서 기록하고 있는 사람은 시바라고 하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이 시바라고 하는 사람은 두 나귀를 이끌고 왔는데, 거기에 떡 200개를 가지고 왔고, 건포도 백송이를 가지고 왔고 여름 과일과 포도주 한 가족 부대를 싣고 와서 다윗에게 주는 겁니다.
도망갈 때, 수많은 무리들이 함께 행진할 때, 양식의 문제가 참 중요한 문제인데, 먹어야 뭘 하잖아요? 먹어야 도망갈 수 있고, 금강산도 먹어야 구경할 수 있고, 배가 채워져야 그다음 뭐 할 수 있는, 사실 먹는 거라고 하는 것이 별 아무런 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삶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문제인 것인데, 그때 이 시바라고 하는 사람이 나타나서, 도망가고 있는 다윗 일행에게 이런 음식을 가지고 와서, 제공하고 나귀를 제공하면서, 다윗이 편안하게 도망갈 수 있도록 제공해 주었다고 하는 것은 아주 놀라운 일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2절 말씀에 보면 다윗이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왕이 시바에게 이르되, 내가 무슨 뜻으로 이것을 가져왔느냐 하니, 시바가 이르되 나귀는 왕의 가족들이 타게 하고, 떡은 떡과 과일은 청년들이 먹게 하고, 포도주는 들에서 피곤한 자들에게 마시게 하려 함이니다.” 참 이것처럼 좋은 소식이 어디에 있습니까? 피난 가는 다윗을 맞이한 이 시바로 인해서, 아마 다윗은 너무나도 힘이 나고, 너무나도 그나마 위안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장면이었을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그 시바가 누구였냐면, 므비보셋이라고 하는 사람의 종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다윗은 왕이 된 후에 므비보셋이라고 하는, 그 사울 왕가의 후손을 마치 자기 자식인 것처럼, 왕의 테이블에 앉혀서 음식을 먹게 하고, 그리고 사울 왕의 재산을 그에게 주기도 하고 하면서, 정말 지극 정성으로, 요나단과의 언약을 생각해서, 므비보셋에게 정말 잘 대우해 주었는데 바로 그 므비보셋의 종이 었는데 주인은 오지 않고 므비보셋에서는 오지 않고 종만 나타난 것을 의아하게 생각한 다윗이 질문을 던집니다. 3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왕이 이르되 네 주인의 아들이 어디 있느냐?” 여기서 주인은 사울이고요. 주인의 아들은 바로 므비보셋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네 주인의 아들이 어디에 있느냐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예루살렘에 있는데, 그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버지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 하는지라.” 지금 다윗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바로 이때를 틈타서 므비보셋이 다시 반역을 일으켜서, 사울 왕조를 재건하고, 사울의 그 혈통을 잇는, 그런 나라를 세우겠다고 반역을 일으켰다고 하는 이 소식을 다윗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다윗이 얼마나 화가 났겠습니까? 배은망덕도 유분수죠. 그동안 사울의 아들이지만, 잘 대우해 줬고, 잘 보호해 줬고, 왕자처럼 대우해 줬기 때문에, 정말 최선을 다해서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었건만,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 반역을 일으키고, 사울 왕조를 다시 세우려고 한다고 하는 그 소식을 들을 때, 므비보셋을 향해서 분노함이 다윗의 마음 가운데 있었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4절 말씀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4절 말씀입니다. “왕이 시바에게 이르되, 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하니라. 시바가 이르되 내가 절하나이다. 내 주 왕이여, 내가 왕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니라.” 지금 이 순간에 시바라고 하는 사람이 와서 므비보셋의 이야기를 고자질하고, 결국 그래서 므비보셋이 가지고 있는 재산을 이 시바라고 하는 종에게 다윗이 다 주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시바가 한 말이 진실입니까? 거짓입니까? 거짓이죠. 성경을 읽어보신 분들은 오늘 이 시바가 한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 순 거짓말이고 모함을 했다고 하는 것을 잘 알 수가 있을 겁니다. 나중에 이 다윗이 피난을 갖다가, 다시 돌아오게 돼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는, 압살롬이 죽고 이제는 다윗이 자기 왕궁으로 돌아가게 되는 일이 있었는데, 그때 일이 사무엘하 19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무엘하 19장 24절부터 30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이 내려와 왕을 맞으니, 그는 왕이 떠난 날부터 평안히 돌아오는 날까지, 그의 발을 맵시 내지 아니하며, 그의 수염을 깎지 아니하며, 옷을 빨지 아니하였더라. 예루살렘에 와서 왕을 맞을 때, 왕이 그에게 물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네가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뭐라고 대답합니까? “대답하되 내주 왕이여, 왕의 종인 나는 다리를 절므로, 내 나귀에 안장을 지워, 그 위에 타고 왕과 함께 가려하였더니, 내 종이 나를 속이고, 종이 나를 내 주 왕께 모함하였나이다. 내주 왕께서는 하나님의 사자와 같으시니, 왕의 처분대로 하옵소서. 내 아버지의 온 집이 내 주 왕 앞에서는 다만 죽을 사람이 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나 종을 왕의 상에서 음식 먹는 자 가운데 두셨사오니, 내게 아직 무슨 공의가 있어서, 다시 왕께 부르짖을 수 있사오리까 하니라. 왕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어찌하여 또 네 일을 말하느냐? 내가 이르노니 너는 시바와 밭을 나누라 하니, 므비보셋이 왕께 이르되, 내주 왕께서 평안히 왕궁에 돌아오시게 되었으니, 그로 그 전부를 차지하게 하옵소서 하니라.”
므비보셋의 마음을 여러분들 읽을 수가 있겠습니까? 므비보셋은 다윗이 이렇게 피난길에 올랐을 때, 그것이 너무나도 괴로워서, 너무나도 슬퍼서, 그날 날부터 다윗이 돌아올 때까지 발을 맵시 내지 아니하며, 수염을 깎지 아니하며, 옷을 빨지 아니하면서, 그런 고통 가운데, 애통하는 가운데, 기다리고 있었다는 거예요. 므비보셋이. 다윗이 언제나 돌아오나 하면서, 그렇게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다가, 다윗이 돌아오게 되니까, 너무나도 기뻐서 나가서 맞이하는 그 상황 가운데서, 진실이 밝혀지게 되었고, 그리고 진실이 밝혀졌을 때, 다윗이 내가 시바에게 주었던 그 재산, 다시 너에게 줄 테니까 같이 나누어 가지라고 이야기할 때, 그 므비보셋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왕이시여, 나는 재산 필요 없습니다. 왕께서 돌아오신 것, 그것만으로도 기뻐하고, 그것만으로도 감사하고, 내 인생에 이 왕께서 돌아왔다고 하는 그 사실 때문에, 나는 더 이상의 원하는 것이 없다”라고 고백하는 그 마음이 너무나도 아름다운 마음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진실에 대해서 한번 깊이 생각해보는 이 저녁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말들을 하면서 삽니다. 말들을 하면서 사는데, 무슨 말을 하면서 사나요?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 저 사람에 대한 이야기, 말들을 다 전하면서 살 때가 많은데, 그런데 안타깝게도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 자신의 입장에서 나에게 유리한 대로 말들을 바꾸어 가면서, 그래서 때때로 다른 사람들을 모함하기도 하고, 억울한 말을 하기도 하면서, 그래서 모함하는 일들이 우리 가운데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몰라요. 그래서 그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고 고난을 당하는지 몰라요. 그래서 우리가 대화할 때에는, 무엇이 필요한가? 듣는 자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누군가 이야기를 하면, 그 이야기를 들을 때, 그냥 “아, 그런가 보다. 그 말이 맞는구나.” 하면서 무조건 말하는 사람의 그 말을 무조건 다 듣고, 그것을 그냥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 되는 거죠.
요즘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크게 문제 되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카톡으로 나르는 여러 가지 소식들, 선거철만 되면 온갖 모함의 소식들이 자꾸만 날아옵니다. 평상시에도 이런 소식 저런 소식들 마치 우리를 공포감에 몰아넣기 위한 여러 가지 소식들을 막 전해오게 되는데, 우리가 들을 때, 무슨 이야기를 들을 때, 어떻게 들어야 되는가? 말하는 사람의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다 받아들이면서 듣게 된다고 하면, 아주 큰 문제가 일어난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다윗이 실수를 하죠. 다윗이 지금 시바라고 하는 므비보셋의 종의 이야기를 듣고서, 므비보셋에 대해서 화가 났습니다. 므비보셋에 대해서 화를 내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돼요. 왜냐하면 므비보셋은 정말 다윗을 사랑했고, 다윗에게 충성을 다했고, 정말 다윗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있었던 사람이 바로 므비보셋이에요. 그런데 므비보셋은 그런 사람이었는데, 제3자가 나타나서 그 므비보셋에 대해서 모함하면서, “다윗 왕이시여, 저 사람이 이번에 반역을 하려고 합니다. 이번에 다윗을 저주하면서, 이제는 사울 왕조를 이끌어내려고 합니다.” 하면서 그렇게 모함하고 있을 때, 사실 여부를 파악하지도 않고, 물론 파악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 되지는 않았습니다마는, 그런 이 말이 진짜인지 거짓말인지 파악하지도 않고, 그냥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서, 성급하게 므비보셋의 재산을 시바에게 줘버리는 그런 실수를 다윗이 해버렸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대화를 할 때는, 누군가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사실인지 아닌지, 과장된 것인지, 아니면 제대로 설명하고 있는 것인지, 차분히 앉아서 생각해보고, 만일 이 이야기가 정말 아주 충격적인 일이라고 생각이 든다고 한다면, 누구한테 확인을 해봐야 될까요? 누구한테 확인을 해야 됩니까? 당사자한테 확인해봐야죠. “정말 그렇습니까? 당신이 나에게 반역을 하려고 했다고 하는데, 정말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물어봐야 될 거 아녜요?
사람들은 말을 할 때, 자기 말이라고 말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말인 것처럼 말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특히 제가 사람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저한테 와서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이 계신데 저한테 이렇게 말을 합니다. “목사님, 이 말은 제 말이 아니고요. 저는 다 괜찮아요. 그런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거 안 좋다고 그래요.”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알고 보면 자기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거죠. 말을 할 때 과연 이 사람의 마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사실이 무엇인지, 진실이 무엇인지 우리가 분별해서 듣지 아니하면, 결국 다윗이 므비보셋의 재산을 빼앗아, 시바에게 주는 것처럼 잘못된 행동을 할 수가 있고 뿐만 아니라, 므비보셋과 같은 너무나도 좋은 사람이 있는데, 그 좋은 사람에게 변명할 기회도 없이, 순식간에 낙인이 찍혀서, 나쁜 사람이 되고, 반역자로 낙인이 찍히고, 그래서 결국 이 다윗과 므비보셋이 함께 힘을 합치고, 함께 같이 친구가 되어주고 같은 편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누구 한 사람의 말 때문에 원수가 돼 버렸습니까? 시바라고 하는 사람이 중간에 들어서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 거짓말 한 마디 한 거에 의해서 다윗과 므비보셋의 관계를 완전히 갈라놔버린 겁니다.
우리나라 역사 사극을 보면 그런 케이스(case)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왕을 중심으로 해서, 이쪽 파하고 저쪽 파가 있는데, 서로가 서로 양쪽 파를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없는 이야기들을 자꾸 만들어내는 거죠. “아무개가 모반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막 잡아 가두고 아무런 증거도 없지만, 어떤 잘못된 것을 만들어내 가지고, 사람들을 정적을 제거하려고 하는 그런, 역사 사극의 이야기들을 많이 보게 되는데,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대화를 할 때, 듣는 자의 “지혜”가 필요하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가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기도의 제목이 무엇이 돼야 되겠습니까? “주님, 우리들의 귀에도 파수꾼을 세워 주옵소서. 들을 때, 분별하여 들을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기도해야 되는 거죠. 므비보셋의 경우 얼마나 충성스러운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다윗이 피난길에 올라갔을 때, 다윗이 돌아올 때까지 애통해했습니다. 그리고 돌아왔을 때, 자신의 재산을 찾는 것에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다윗이 안전하다고 하는 그 사실 때문에, 그것으로 족하다고 할 정도로 정말 좋은 사람이었는데, 말을 잘못 들음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을 잃을 뻔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면서, 듣는 자의 지혜를 가져야 될 줄로 믿습니다.
특별히 어떤 때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됩니까? 비방하는 말, 아무개 아무개에 대해서, 비방하는 말을 듣게 됐을 때, “어우, 세상에! 정말 그래?” 그러지 마시고, 지금 우리 교회에서 그런 상황은 아닙니다마는, 언제 언제가 되는지 모르지만, 아마 누군가는 이런 말을 할 날이 올 때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세상에, 이국진 목사님이 이런 나쁜 목사래.” 그런 말을 할 때가 올 겁니다. 그러면 저한테 와서 물어보세요. 물어보세요. “정말 나쁩니까?” “도대체 이건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된 겁니까?” 물어보세요. 변명할 기회도 없고, 해명할 기회조차도 주어지지 않는 그 상태에서, 그냥 우리가 원수지간이 되어 버리는 그런 비방하는 말, 성경에서는 그 비방을 가리켜서 죄악이라고 그랬어요. 수군수군거리고, 비방하고, 당을 짓고 하는 그 모든 것들이 다 악한 일이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우리들 사이에서 그냥 자기 자신의 알량한 이익을 위해서, 쉽게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비방해버리고 없는 말 만들어내고, 그렇게 하는 그 일들이 있을 때, 첫째는 우리 듣는 사람들이 어떻게 들어야 되는가? 믿음으로 기도하는 가운데 지혜를 가지고 들어야 될 텐데, 항상 사실인지 사실이 아닌지 당사자에게 물어봐야 되고, 확인해봐야 되고, 그러면서 괜히 내가 므비보셋처럼 정말 좋은 사람을 원수로 만들어 버리는 그런 우를 범치 않도록, 우리 모두가 조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말하는 자도 지혜롭게 말을 해야 합니다. 말하는 자는 어떻게 말을 해야 됩니까? 있는 사실을 말해야 되는 것이고,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어서 과장되게 말하지 아니하도록, 말하는 자도 조심해서 지혜를 가지고, 말할 수 있는 우리 모두 성도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의 기도 제목이 또 어떻게 돼야 됩니까? “주님, 우리의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 주옵소서. 내가 말하는 이 말이 상처가 있는 사람들은 아물게 만들어주시고, 갈라져 있는 사람들을 화평으로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그런 말을 하게 해 주시고, 원수가 되었던 사람들을 다시 친구로 만들어줄 수 있는 그런 사랑의 말을 할 수 있게 해 주옵소서.” 내가 들어가면 서로 원수가 되어 버리고, 헤어지고 갈라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들어가면 사람들이 서로 친구가 되어 주고, 서로 사랑하고 하나로 뭉칠 수 있는 그런 말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마태복음 12장 36절 37절의 말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우리가 하는 이 말들이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을 수밖에 없는 말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남들을 비방하고 정죄하고 저주하는 말이 아니라, 사랑의 말을 해야 될 텐데요. 베드로전서 4장 8절 말씀 뭐라고 기록합니까?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우리가 말을 하기 전에 내가 말을 입 밖으로 내기 전에, 우리는 한 번 더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과연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이 상대방의 허물을 감싸줄 수 있는 말인가? 내가 하는 이 말이 사람들로 하여금 용기를 얻게 만드는 말인가? 내가 하는 이 말이 사람들로 하여금 희망을 갖게 하는 말인가? 내가 하는 이 말이 그 사람으로 용기를 얻게 하는 말인가? 아니면 이 말로 하여금 사람들을 절망하게 만들고, 사람들로 하여금 우울감에 빠지게 만들고, 분노하게 만들고, 화를 내게 만드는 그런 말을 하는가? 우리가 말을 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보고 말해야 돼요.
생각 없이, 이 말을 들었을 때, 내가 말하고 있는 이 사람이 이 말로 인해서 엄청난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하지 않은 채, 그냥 무심결에 던져버린 나의 그 말,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 사람 참 성격이 더러워”라고 이야기해버린다거나, “저 사람 아주 독단적인 사람이야”라고 이야기해버린다든가, 함부로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함으로 말미암아, 상대방을 아주 힘들게 만드는 그런 말을 하는 모습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하는 이 말로 절망에 빠져 있던 사람이 다시 한번 일어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갖고, 믿음에서 주저앉았던 사람이 다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힘과 용기가 생기고, 신앙생활을 잘 못하려고 했던 사람들이 이제 다시 신앙생활을 해보겠다고 하는 그런 열정을 갖게 만드는, 사랑의 말을 하고 있는지, 오늘 하루 종일 했던 그 말들 가운데 내가 했던 이 말들이 어느 편에 서 있는 말이었는지, 매일 밤 정리해 보면서 “아, 내가 이 말은 안 했었으면 좋았을 뻔했다.” “이 말은 내가 그때 했었어야 되는데 못했구나.”라고 하는 것들을 늘 점검하면서, 우리들의 입술에서 거룩하고 사랑이 넘치는 은혜가 넘치는 말들이 많이 나올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야고보서 3장 1절부터 12절의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몸도 굴레를 씌우리라.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서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깃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오.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 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가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물이 단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안타깝게도 우리 성도들의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하면서, 우리들의 입에서는 거짓말을 할 때가 많고, 우리들의 입에서 비방하는 말이 많고, 우리들이 사람들의 그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을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원하기는 오늘 이 저녁 시간에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시바와 같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 사랑의 말을 하고 하나가 되게 하는 말을 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게 해 주옵소서 결단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그런데 다 시바 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은 다 시바처럼 이기적인 목적으로, 나 중심적인 생각으로 다른 사람들의 그런 것들을 모함하면서, 자신의 이득을 취득하려고 하는 식으로 말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이런 사람들만 우리들에게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이 세상이 각박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은 분이 한 분 계십니다. 누구시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당하고 있는 상황 가운데 다가와서, 그것을 짓밟아버리고, 자신의 이득을 취한 시바처럼 행동하시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고난을 보시고 우리를 위해서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베풀어주신 줄로 믿습니다.
비난만 하고 그리고 망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지시면서, 우리의 허물을 용서하시기 위한 그런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세상에 살 때는 다 시바와 같은 사람들만 만나게 될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을 본다고 하면 이내 실망해버리고 말 겁니다. 사탄은 시바와 같이 우리를 고소하기도 하고, 우리를 심판하게도 만들지만, 예수님께서 계시다고 하는 사실이 우리들에게 소망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고, 주님에게 소망을 두며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