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국진
우리가 사랑을 하면서 교만할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용서 그리고 자비와 긍휼 때문에 살아간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비하면, 우리의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기에 우리는 교만해질 수 없다.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그 사랑에 비하면 우리의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들의 그 알량한 사랑을 가지고 자랑할 수도 교만할 수도 없다.
부부간의 갈들이 생기는 이유는 내가 한 조그마한 사랑을 크게 보기 때문이다. 내가 희생하고 헌신한 사랑의 분량에 비하여 배우자가 내게 해준 사랑의 분량은 작아 보이기 때문에 섭섭한 것이다. 하지만 패트릭 몰리가 쓴 [거울 속의 남자]에서는 90:10의 비율이 공평한 비율이라고 말한다. 내가 90의 희생과 사랑을 하고, 배우자가 나에게 10의 희생과 사랑을 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면, 아주 공평하게 사랑과 희생을 주고받는 셈이라는 것이다. 1 우리는 자신이 행한 것을 더 많이 기억하는 못된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을 행할 때, 비교할 대상은 내가 사랑을 실천한 대상이 아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사랑을 베풀면서, 자식이 부모의 사랑만큼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탓할 수 있는가? 아내가 남편에게 사랑을 베풀면서, 남편이 자신이 사랑한 만큼 사랑해 주지 않는다고 탓할 수 있는가? 내가 가난한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면서,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이 나에게 같은 분량으로 사랑을 되갚지 않는다고 탓할 수 있는가? 우리는 사랑을 베풀면서, 그 대상의 사랑과 비교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가 비교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다른 사람의 사랑과 내가 행한 사랑을 비교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푼 사랑에 비교해서 나의 사랑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를 보아야 한다. 그때 우리는 교만해질 수 없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일만 달란트를 빚졌으나 탕감 받은 종의 이야기가 있다(마태복음 18:23-35). 일만 달란트는 6천만 데나리온의 가치와 맞먹는다고 한다. 그런데 일만 달란트를 용서받은 그 종이 자신에게 100 데나리온을 빚진 자를 만나 돈을 빨리 갚으라고 윽박질렀다는 것이다. 그 금액의 차이는 60만 배이다. 자신은 100 데나리온의 60만 배에 달하는 일만 달란트를 용서받았으면서도, 겨우 60만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는 금액을 너그러이 봐줄 수 없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생각하면, 사랑을 베풀 때 겸손해 질 수 있다. 하나님은 그 외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다.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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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트릭 몰리, [거울속의 남자] (아가페, 2001), 153-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