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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와 질투는 영적인 진리를 가린다

– 이국진

시기와 질투로 가득 찬 사람은 진리를 보면서도 그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시기와 질투라는 안경이 그에게 씌워져 있기 때문이다. 시기와 질투라는 안경으로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굴절되어 다가온다. 이것이 시기와 질투가 가져오는 크나큰 해악이다. 사람들이 영적인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는 영적인 진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영적인 진리는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존재는 만물에 분명히 드러나 있다(로마서 1:20). 천지 만물이 하나님의 작품이니, 그 하나님의 작품 속에 하나님의 지문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을 보면서, 그 작품을 만드신 하나님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작품 속에 새겨져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김창완 가수가 부른 [어머니와 고등어]의 노래의 가사는 이렇다.

한밤중에 목이 말라, 냉장고를 열어보니, 한 귀퉁이에 고등어가 소금에 절여져 있네. 어머니 코고는 소리 조그맣게 들리네. 어머니는 고등어를 구워주려 하셨나보다. 소금에 절여놓고 편안하게 주무시는구나. 나는 내일 아침에는 고등어 구일 먹을 수 있네. 어머니는 고등어를 절여놓고 주무시는구나. 나는 내일 아침에는 고등어 구일 먹을 수 있네. 나는 참 바보다. 엄마만 봐도, 봐도 좋은걸.

냉장고에 고등어가 절여져 있는 모습만 보아도, 우리는 어머니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사랑의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면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과 하나님의 도우심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로다” (시편 121:1).

하지만 시기와 질투에 가득 찬 사람은 사랑을 발견할 수도 없고, 분명하게 보이는 영적인 진리 앞에서도 그 진리를 발견할 수 없다. 예수님이 부활하고 승천 하신 후에, 사도들에 의하여 많은 기사와 이적이 일어났다. 베드로와 요한은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신체 장애인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걷게 만들었다. 이러한 사실은 제사장들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말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사도행전 4:16).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자신들에 있다면, 그들이 가져야 할 정당한 반응은 회개일 것이다. 마음에 찔려,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면서(사도행전 2:37),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던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반응하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제사장들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앞에서 엉뚱한 결론을 내렸다. 사도들을 불러 경계하고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한 것이다(사도행전 4:18). 여기에는 시기와 질투가 있었다.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은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사도행전 5:17), 사도들을 잡아다가 감옥에 가두었다. 자신들의 눈앞에 여러 가지 기적과 표적들이 많이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영적인 진리를 발견하기는커녕 사도들을 가두기만 했던 것이다. 시기와 질투는 영적인 진리를 눈앞에 두고도 보지 못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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