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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와 질투의 순기능?

– 이국진

우리는 종종 시기와 질투도 잘 사용하면 순기능을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울 왕처럼 상대방을 죽이고 자신을 황폐하게 만드는 질투도 있지만, 사회적 통제의 기능 안에서 길들여진 질투는 장점으로 사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인디아나 대학교 심리학 교수인 로버트 브링글(Robert Bringle)은 “시기는 긍정적인 동기 부여자가 될 수 있다. 시기와 질투심을 가지고, 네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하는 동기를 얻으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시기와 질투심이 과도하여 상대방을 죽이기 위한 일탈의 모습으로 표현된다면 잘못이지만, 적절한 시기심와 질투심 때문에 건전한 선의의 경쟁을 위한 동력으로 삼는다면 어떨까?

나는 초등학교 5학년 시절에 같은 반에 있는 친구보다 더 공부를 잘 하기 위해서 그 친구보다 더 많이 공부하려고 마음먹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밤중에 친구의 방에 불이 꺼졌는가를 확인했고, 그 친구의 방에 불이 꺼진 것을 확인한 후에야 나는 공부를 중단하곤 했다. 만일 친구보다 더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서, 친구의 공부를 방해하거나, 시험을 보면서 컨닝을 한다거나 한다면, 시기와 질투가 잘못된 방향으로 표현된 것이지만, 내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단순히 친구보다 더 많이 공부하는 식으로 선의의 경쟁심을 불러일으켰다면, 그러한 시기와 질투는 정당한 것일까? 나를 위한 단련의 도구로 질투심을 사용한다면 이것은 질투의 순기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브링글 교수는 인간이 어쩔 수 없이 질투를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면, 그 질투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꾸라고 제시하는 것이다. 질투를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면, 그 질투를 올바른 방향으로 발산하게 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질투를 우리의 마음속에서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면, 그 질투를 반사회적으로 표출하지 않고, 건전하게 표출할 수 있도록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브링글 교수의 말이 맞을 것 같다.

하지만 신앙적인 차원에서 생각할 때, 그렇게 순기능을 발휘하는 질투 속에도 죄성이 도사리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도, 반사회적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은 질투와 시기심은 괜찮다고 하실까? 만일 그랬다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결코 비판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들의 행동은 완벽했고, 당시 사회적 기준의 척도로 보았을 때, 결코 잘못된 행동으로 그들의 행동이 표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겉으로 표현된 결과보다는 그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사무엘상 16:7). 시기와 질투가 동기가 되어 무엇인가를 성취했다고 할 때, 그로 인한 우월감이 문제가 될 것이고, 반면 열심히 노력했지만 성취할 수 없었다면, 그로 인한 열등감이 문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규범 안에서 발휘된 시기와 질투는 겉으로는 순기능을 가져올 수 있지만, 시기와 질투가 가지고 있는 영적인 문제에 민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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