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자녀들 (롬 4:13-15) +++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롬 4:23-25)
sbs 라디오에서 진행하고 있는 프로그램 가운데 <2시의 컬투쇼>라고 하는 게 있습니다.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아주 재미있는 유머들이 많이 소개되는, 그래서 듣다 보면 정말 폭소을 터뜨리게 되는 그런 프로그램인데요. 아주 오래전에 나왔던 그런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요즘에는 택배 기사들이 문 앞에 택배 물건을 놓고 가는데, 예전에는 직접 전달해 주고 가던 시대에 아마 나왔던 사연 같습니다.
어느 가정이 있었는데요. 그 가정은 장난기가 많아서 그래서 서로 엄마와 아들 사이에 장난을 잘 치는 그런 집안의 사연이었습니다. 그 아들이 외출한 상태에 택배 아저씨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엄마가 어머니께서 안에서 대답을 했어요. 누구세요? 그랬더니 “택배요.”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어머니는 아들이 장난치는 줄 알았답니다. 종종 아들이 집에 들어오면서 목소리를 쫙 깔고 어머니 성함을 부르면서 택배가 온 것처럼 장난친 적이 여러 번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택배 아저씨가 왔는데, 아들이 장난치는 줄 알았던 어머니는 속에서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웃기시네.” 그러자 그 택배 아저씨가 또 대답을 했습니다. “택배입니다.” 엄마는 대답을 합니다. “최홍만 키 크는 소리 하고 있네.” “아니, 택배라고요.” “나는 엄마라고요.” 당황한 아저씨는 다시 목소리를 다듬고 “아무개 씨, 택배 왔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안에서 또 이렇게 대답을 한 겁니다. “아이고 훌륭하십니다. 장난 그만쳐! 한 번만 그러면 너 문 아예 안 열어준다.” 어머니는 장난을 받아줄 그런 상황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택배 아저씨는 난감했습니다. “아니 진짜 택배입니다. 문 좀 열어주세요.” 엄마는 더 단호하게 얘기를 했습니다. “너 들어 올 생각하지 마! 너 거기서 반성하고, 엄마를 찾아. 알겠지?” 한동안 말이 없던 그 택배 아저씨는 어떻게 해야 되나, 물건을 전달해 주고 가야 하는데, 문을 안 열어주기 때문에 난감한 그 아저씨는 한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이 택배 아저씨가 말을 했습니다. “엄마 죄송해요. 문 좀 열어주세요.” 그러자 엄마가 물었어요. “네가 누군데?” “엄마 아들!” 그제서야 아들이 장난을 치다가 반성하는 줄 알고 문을 열어주었는데, 아들이 아니라 택배 아저씨가 있어서 정말 당황했다고 하는 사연입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좋은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문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믿음이 있어야 문을 열게 되고, “내 아들이다”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아니 택배가 왔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문을 열 수가 있는 것인데, 의심이 들면 문을 열 수가 없는 것이죠. 아무리 좋은 약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약을 불신하면, 그 약에 대한 효능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믿지 못하면, 그 약을 복용하고 병이 나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유익을 누리지 못하는 겁니다. 아무리 훌륭한 의사가 있어도, 그 의사를 불신하고 그 의사에게 가지 아니하면 의사에게서 받을 수 있는 혜택을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아무리 훌륭한 지도자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 지도자에 대한 가짜 뉴스로 인해서 사람들이 불신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지도자로 인하여서 얻을 수 있는 많은 유익들을 다 놓쳐버리게 되는 것이죠. 믿지 못하면 마음의 문을 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도 마찬가지인데요.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축복도 믿음이 있어야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것이고요. 기도할 때도, 우리가 의심해서는 아무런 응답을 받을 수가 없고, 하나님을 신실한 하나님으로 믿으며, 그 하나님 앞에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열어야 기도에 응답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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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야고보서 1장 6절에서부터 8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죠. 우리들의 마음의 문 앞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은총의 택배를 가지고 서 계신데, 그 은총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불신하고 그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의심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한다면, 아무리 좋은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믿음이 필요한 것인데요.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우리들의 마음이라고 하는 게 우리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다고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내 마음은 내 마음인데,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게 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이죠. 두려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겠다고 하면 그때부터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이 아닌 겁니다. 나는 두려워하고 싶지 않은데도, 두려운 마음이 엄습해 오는 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이죠. “믿어야지” 하면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해야지, 의심하지 말아야지”라고 내 마음속에 결심하면, 그러면 하나님이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상을 바라보면서 자꾸만 불신이 꾸물꾸물 솟아 오르게 되어 있고, 자꾸만 의심이 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고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기만 하면 그때부터는 이제 전혀 두려움이 없고 전혀 슬픔도 없고, 그리고 확신 가운데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고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계속해서 솟아 올라오는 그런 두려움이 있는 것이고, 의심이 있는 것이고, 불안이 생기게 되고 초조한 마음이 생기는 것인데, 그러한 것을 없애보겠다고 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고소 공포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아무리 안전한 곳이라고 논리적으로 설명을 해도, 높은 곳에 서면 공포가 엄습해 오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걱정이 되는 것을 막을 수가 없는 것이죠. 논리적으로는 알아요. 모든 사람들이 저 높은 곳에서 풍경을 즐기고 있고, 저 높은 곳에서 저 밑을 보면서 정말 아름답게 구경하고 있고, 이곳이 안전해서 단 한 사람도 땅에 떨어진 적이 없는 안전한 시설물이라고 하는 것을 논리적으로는 다 아는 겁니다. 이것이 아주 철저하게 완벽하게 안전이 보장된 시설이라고 하는 것을 알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마음은 두려운 거예요. 그 높은 곳에 올라가면 두려워서 벌벌 떨고, 그래서 정말 두려운 마음에 그곳에 설 수 없는 그런 상황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고소 공포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역시 우리가 기도하면서도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알아요. 하나님께서는 계시고,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실 거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솟아오르는 의심과 불안과 두려움들, 그것을 없애고 싶지만 자꾸만 의심이 들 수밖에 없는 게 그게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생사의 고비를 넘기고 있는 환자가 있는데, 이제 자가 호흡도 하지 못하고 이 연명기에 의존해서 숨을 쉬고 있는 그런 환자 앞에서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하나님 좀 제발 살려주세요.” 기도하는데, 그리고 성경 말씀에 기록하기를 “기도하면서 절대로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두 마음을 품어 정함이 없는 것과 같다”고 말씀해 주고 있기 때문에 “내가 믿나이다. 주님 살려주세요. 하나님은 내 기도 들어주신다고 했잖아요? 살려주세요.” 하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기도하는데, 그런데 내 눈앞에 있는 그 환자를 보면, 살아날 가망성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러다가 돌아가실 수가 있겠구나.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라고 하는 그런 생각들이 솟아오르는 것을 막을 수가 없는 거에요. 이런 불길한 생각이 들면 안 되는 것인데, 의심하면 안 된다고 하했는데, 내가 믿어야만 된다고 했는데, 의심하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했는데, 내가 이 의심의 마음이 떠오르면 어떻게 하나? 그런 불안한 마음 가운데서 내 그 의심을 떨쳐버리고 싶어도, 의심이 떨쳐지지 않는다는데 우리들의 문제가 있어요. 성경은 우리들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일까요?
기도하면서 의심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이 하나님의 말씀은, 그러니까 우리들에게 전혀 불가능한 것을 주문하고 계시는 말씀인 것일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의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의 이야기가 쓰여져 있는데요. 이 아브라함은 놀랍게도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상황은 어떤 상황이었는가? 이미 나이가 많아요. 여기서 아브라함보다 나이가 더 많으신 분은 안 계셔요. 우리 가운데 있는 분들 가운데 최고령자보다도 더 나이가 많은 아브라함이 이제 자기가 아들을 낳을 수 있는 생물학적인 그런 가능성은 제로(0) 퍼센트입니다. 아들을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이미 경수가 끊어져 버렸고, 이제는 더 이상 아들을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이 완전히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이가 많아서 전혀 아들을 가질 수 없는 상황 가운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해주셨습니다. “네가 낳은 그 아들이 있을 텐데, 네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질 것이다.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많아질 것이고, 너는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셨는데, 그 약속을 누가 맨정신으로 믿을 수 있겠어요? 여러분이라고 하면 믿겠습니까? 어떻게 그 상황을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 약속을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믿을 수 없는 것이죠. 어떻게 이미 아들을 낳을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이 생물학적으로 완전히 가능성이 없어져버린 이 부부에게서 어떻게 아들이 태어날 수 있겠는가? 거의 불가능한, 아니 완벽하게 불가능한, 100% 불가능한 그 상황 가운데서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고요 그렇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로 여기셨다.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4장 18절에서부터 22절에 표현되어 있는 그 표현을 천천히 한번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정말 믿을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을 믿었다고 하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가 구약 성경을 읽어보면, 창세기에 기록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렇게 대단했는가? 하면서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살펴보면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굳건해가지고, 정말 엄청난 믿음이 있어서 한 번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완벽하게 신뢰한 사람이었는가? 라고 질문을 던지며. 창세기의 이야기를 읽어보면 사실 그렇지가 않아요.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땠는가? 항상 흔들렸습니다. 항상 불안하게 요동쳤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겠다고 하는 그 약속을 해 주셨을 때, 그 약속을 받아들이고 아멘으로 그렇게 고백했지만, 그러나 아브라함의 믿음은 언제나 흔들렸어요. 어떻게 흔들렸어요? 아들이 안 생기니까, 흔들리는 거죠. “이러다가 망하는 거 아니야? 이러다가 아기 없이 죽는 거 아니야? 이러다가 완전 내 인생 끝나는 거 아니야?”라고 하는 그런 불안한 마음이 아브라함의 마음 가운데 사람의 마음 가운데 있는 겁니다. 그리고 천사가 와서 약속하기를 내년 이맘때에 네 집에 아들이 있을 것이고 사라가 그 아들을 안게 될 것이라고 하는 예언의 말씀을 해주었을 때, 사라는 비웃어버렸어요. “나 같은 여인이 어떻게 아들을 안을 수 있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뒤에서 비웃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죠.
한 번은 이집트에 가서 아주 어려운 상황에 있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실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망각해 버리고, 자기 자신이 거짓말해서 그래서 자기 가정을 지키려고 하는 그런 불신의 사람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도 아기가 생기지 않자, 하나님 앞에 말하는 겁니다. “하나님, 그냥 우리 집에서 길렀던 내 종 엘리에셀을 내 입양자로 삼아서, 양자로 삼아서 이 엘리에셀을 나의 양아들로 삼고 싶습니다. 이 엘리에셀을 통해서, 내 유산을 물려주고 내 가업을 잇게 하고 싶습니다.”라고 하는 그런 불안한 마음이 하나님 앞에 표출이 되었던 것이고요.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는 약속을 믿지 못해서, 하갈이라고 하는 사라의 몸종을 통해서 아들을 얻으려고 시도했던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언제 나왔냐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에 하나님께서 그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하는 그 말씀 이후에, 믿음을 의로 여겼다고 하는 이야기는 창세기 15장에 나오는데, 16장에 가면 그 믿음이 벌써 흔들려가지고 하가를 통해서 아들을 낳는 이야기가 기록돼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믿음이 견고했는가라고 질문을 던진 자면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믿으라 내가 너에게 아들을 주겠다라고 말씀해 주셨을 때, “예, 하나님 믿습니다”라고 이야기했고, 하나님을 믿으매 하나님께서 “그래, 그것이 너에게 의다”라고 인정해 주셨는데, 얼마 가지 않아 아브라함의 믿음은 흔들려 버렸고, 믿음 없는 행동을 보여 주었다고 하는 게 창세기의 기록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아브라함의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과 같아요.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 믿습니다.” 하나님 믿습니다를 우리가 고백을 합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 믿습니다”라고 말하고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나아가서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늘 흔들리게 되어 있는데요. 조그만 어려움을 만나게 되면 불안해 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들의 모습인 겁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어도, 우리들의 눈 앞에 홍해 바다가 놓여져 있으면 불안해 버릴 수밖에 없고, 광야의 길을 가다가 먹을 게 없거나 마실 게 없으면 그러면 원망하게 되어 있고, 적군이 우리들 앞에 놓여져 있으면 불안에 떨 수밖에 없고, 우리를 인도하던 지도자가 사라지고 보이지 않으면, 그러면 불안해할 수밖에 없었던 ,그런 이스라엘 민족처럼 우리들도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다가 조그만 어려운 일을 만나면, 조그만한 가정의 아픔이 생기면, 조그만 사업에 문제가 생기고, 여러 가지 질병이 생기면, 우리들의 마음은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게 우리들의 모습인 것이죠.
그래서 우리들의 기도는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기도해야 되는, 마가복음 9장 24절에 보면 간질을 앓고 있던, 간질병과 같은 그런 질병을 앓고 있던 그 아들을 고쳐달라고 애원했던 그 아버지가 예수님 앞에 나와서 했던 고백이 무엇이냐면, “주여 믿나이다. 주님께서 이 아이를 고칠 것을 내가 믿나이다. 그런데 내 믿음 없는 것을 좀 도와주십시오.” 왜냐하면 불안하기 때문에 그래요. 사랑하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고, 애정이 있기 때문에 슬픈 것이고, 고통스러운 것인데 그래서 늘 흔들릴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마음을 주님 붙잡아주시고,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달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의심하는 자는 주께 얻을 수 없다고 하는 야고보서의 말씀은, 그러니까 우리가 기도하다가 조금이라도 의심하는 마음이 들면, “땡! 탈락! 자격이 안 되니까, 기도 안 들어줘”라고 하는 식으로 반응하신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닙니다. 기도하다가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조금이라도 의심이 생기고, 기도하다가 조금이라도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불안이 생기면 땡 탈락이라고 선언해 버리시겠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감정도 없는 그냥 재판관이어서, 우리가 믿음이 없는가 있는가만 보시고, 그래서 합격 불합격을 외쳐버리고 끝내버리시는 그런 무자비한 하나님이 아니라, 이 말씀을 해 주시는 이유는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자꾸만 의심이 솟아오를 때, 다시 한 번 주님을 바라보고 다시 믿음을 회복시켜야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이 말씀을 해 주시는 겁니다.
불안하는 마음이 솟아오를 때 그때 나 자신을 향해서 말해야 하는 거죠. “내 영혼아, 어찌하여 불안해하며, 어찌하여 낙망하는고? 너는 너의 하나님을 바라보라. 너의 하나님을 바라보라.” 나 자신을 향해서 이야기해야 되는 것이, 슬픈 일이 있을 때, 아픈 일이 있을 때, 너무나도 고통스러워서 일어설 수 없을 때, 우리 자신을 향해서 노래해야 되는 겁니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슬퍼하느냐? 너의 하나님을 바라보라.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우리 자신에게 이야기하면서 다시 한 번 믿음을 가지고 “주님, 주님이 나의 아버지이심을 믿습니다. 믿기를 원합니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시옵소서. 나의 불안한 마음을 하나님께서 만져주옵소서.” 하면서 기도하며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것은 믿음이라고 하는 그런 문을 통해서 받아들이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믿어야,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께서 들고 오신 은총의 택배 상자를 우리가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이 우리들의 아버지가 되신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믿음으로,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열어야, 그래야 그 풍성한 은총의 선물들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겁니다.
친일 행적이 있는 시인이면서 전두환 찬양시를 지었다고 해서 비판을 받고 있는 시인이지만, 그러나 그가 쓴 시는 너무나도 멋진 시여서 널리 회자되고 있는 시가 하나 있는데요. 김춘수라고 하는 시인이 쓴 <꽃>이라고 하는 시입니다. 그 시에서 김춘수 시인은 이렇게 노래를 했습니다. “내가 그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꽃인데도 내가 그 이름을 불러주지 않으면,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은총의 선물도 우리의 것이 되지 않는 것인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강제적으로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열어 제치고 쳐들어와 정복할 수가 있을 겁니다. 마치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에 쳐들어가서 정복할 수 있는 것처럼, 어설프게 정복을 못해서 지금 질질 끌고는 있지만, 하나님은 그런 정도의 능력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들의 마음을 포위하고 융단 폭격해서 우리들을 완전히 항복시키려면 단 1초도 걸리지 않을 것이지만, 하나님은 러시아 군처럼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에요. 오히려 마음 문 밖에 서서 우리들의 문을 두드리고, 우리가 믿음으로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열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죠. 마치 택배 아저씨가 문을 열어주어야, 그 택배 물건을 전달해 줄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마음의 문 앞에서, 믿음을 가지고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리고 계시는데요.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사랑의 청혼을 받아주기를 기다리는 연인처럼 우리 주님께서는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문을 연다고 하면,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들에 되는 것인데요. 마치 우리가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것이 내게로 다가와 꽃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주고, 하나님의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앞에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열게 될 때, 비로소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들의 삶 가운데 전능하신 우리 아버지로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총을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 때 우리들에게 살아 움직이는 은총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변의 상황을 돌아보면 하나님이 없는 것 같아요. 우리 주변에서 돌아가는 일들을 보면, 공의의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져요. 악인은 악을 저지르고 온갖 나쁜 짓을 해도 승승장구하는데, 선한 사람은 억울하게 고통을 당하고, 억울한 그 고통을 풀 수 있는 방법조차 없는 것 같아요. 세상이 왜 엉망 진창으로 돌아가는지 우리들은 이해할 수가 없어요. 우리들의 기도는 허공에 울려 퍼지는 메아리처럼 하나님이 도무지 내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하나님의 존재감은 드러나지 않는 것 같은데, 오히려 돈의 위력은 더 센 것 같고, 우상의 능력은 더 강력한 것 같고, 이 세상 권력들은 더 센 것 같고, 기득권의 카르텔은 너무나도 강력하게 느껴지는데, 하나님은 아무런 존재가 느껴지지 않는 것 같은 그런 세상 가운데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도대체 전능하시면서 동시에 선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가 정말 의심스러운 상황 가운데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데요. 그런데 이 상황 가운데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더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안 계신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손 놓고 이 세상을 방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의 문을 열고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봐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내가 아직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내가 아직 내 마음을 열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닌 것이죠. 내가 찾지 못했다고, 내가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은총의 상자를 들고 우리 앞에 와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믿어야 하는 것이죠.
지난주에는 제게 아주 참 큰 해프닝이 있었는데요. 5월 달에 제주도에서 세미나가 있어서, 제주도에 있는 세미나를 꼭 참석해야만 하는 상황이 됐습니다. 그래서 제가 찾은 것은 여권입니다. 저는 제주도는 외국인들이 비자 없이 방문할 수 있는 섬이기 때문에 제주도에서 다시 육지로 들어오려면, 외국인의 경우 여권을 확인하고 비자를 확인하기 때문에, 제가 여권이 있어야 제주도를 방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권을 찾는데요. 5월달을 앞에 두고 여권을 찾는데, 아무리 여권이 있을 만한 것을 뒤져도 여권이 없는 거예요. 교회 사무실을 뒤져도 안 나오고, 우리 집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뒤져도 여권이 안 나오고, 제가 원래 정리를 못하는 사람이라, 아마 옷 어디엔가 넣어놓고 그냥 방치했다가 못 찾는 것 같아서, 모든 옷을 꺼내서 주머니 다 뒤지고 하는데 안 나오는 겁니다. 할 수 없이 빨리 여권을 재발급 신청하기 위해서 컴퓨터에 앉아서 여권 발급 신청을 했습니다. 여권 발급 신청을 하고 그래서 수표를, 그것도 그냥 수표가 아니라 은행 가서 수표를 띠어와서, 그래서 대사관에 보내야 하는데, 발급 신청을 하고서, 딱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려고 하는데, 무슨 메시지가 뜨냐면, “여권 분실 신고 했습니까?” 라고 하는 질문이 나오는 거예요. 아직 안 했거든요. 여권 분실 신청을 하지 않으면 새로 발급할 수가 없으니, 여권 분실 신청을 먼저 하라는 거예요. 먼저 하려고 해서 딱 해서 여권 불신 신고를, 이렇게 딱 하는데 경고문이 딱 뜨는 겁니다. “일단 한 번 분실 신고하면, 그 여권을 다시 찾아도 다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찾았다고 신고해봤자, 다시 사용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는 문자가 뜨는 거예요. 그래도 어떻게 해요? 새로운 여권이라도 만들어야, 움직일 수 있으니까, 만의 하나 미국에 갈 일이 있다든가, 아무튼 하면 여권이 있어야 되니까, 필수적인 거니까 신청해야 되겠다고 분실 신고 딱 했더니, “이제 그 여권은 무효화됐습니다. 다시 살릴 수 없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떴어요. 그리고 이제 그것을, 새로운 여권을 만들기 위해서 이제 하는데, 의자 뒤에 걸려있는 옷이 있어요. 딱 만졌는데 여권이 있는 거예요. 거기에 얼마나 난감하던지. 돈 날리고, 시간 날리고, 에너지 날리고, 그래도 웃었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못 찾았다고 없는 게 아니에요. 내가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나님이 안 계신 게 아니에요. 하나님은 계시고, 우리들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계셔요. 나 한 사람, 한 사람 하나님께서 사랑의 눈으로 인자 눈으로 바라보고 계셔요. 하나님은 우리가 볼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눈을 감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들의 마음의 의심으로, 우리 집 문 앞에 은총의 택배 상자가 기다리고 있는데, 의심의 눈으로 이해하지 않으려고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은총은 도처에 널려져 있는 것인데, 마치 태양이 뜨면 온 세상이 그 태양의 열기에 의해서 모든 것이 꾸물꾸물거리면서 다 살아나듯이. 이제 봄이 되니까, 여러분, 산수유 꽃이 피어나고 있어요. 봄이 되니까, 매화가 폈더라고요. 나뭇가지에 싹들이 피어나고 있어요. 온 세상이 다 바뀌어 나가고 있어요. 겨우 내 죽은 것 같았는데, 완전히 망가져버려서 이제는 소망이 없는 것처럼 그 추운 겨울을 보냈는데, 그래서 이것이 완전히 다 죽은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은총의 태양이 뜬다고 한다면, 이제 죽었던 것 같은 사람들이 하나씩 하나씩 살아나고, 하나님의 놀라운 정이 일어나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의 믿음이 흔들릴 때마다, 다시 한 번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의 약속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시옵소서.” 담대한 믿음을 회복해 나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문이고, 우리를 사랑하사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선물이 우리들에게 들어오는 통로이기 때문에,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이 세상의 것들만을 바라보며 절망할 게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우리들의 시선을 주님 앞에 들어 바라볼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