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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롬 4:23-25)

은총과 믿음 (롬 4:16-22) +++ 환난 중에 소망을 (롬 5:1-5)

지난 주간에 저하고 제 아내는 정말 맛있는 외식을 한번 했습니다. 100만 년 만에 한번, 모처럼 나가서 외식을 한번 했는데, 오마카세라고 하는 일본어 단어가 있는데 혹시 아시나 모르겠어요. 맡긴다는 말이죠. 차려주는 대로 그냥 셰프가 만들어주는 대로 믿고 먹는 그런 스타일의 식당에 고급 식당에 가서, 저하고 제 아내가 음식을 먹으면서 아주 행복한 짧은 시간을 보내게 됐습니다. 전주에 이렇게 고급스러운 식당도 있구나 하면서 음식을 먹었는데요. 이런 식당을 가게 된 계기가 무엇이냐면 지난 제 생일을 맞이해서 미국에 있는 우리 두 딸아이가 저희 가정에 선물을 하나 보내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조그마한 종이에 적혀 있는 식사 상품권이었습니다. 종이에 얼마짜리 식사 교환권이 있어서 그걸 믿고 그 식당에 가서 먹었는데요. 그냥 돈도 아니고 그냥 종이 쪼가리에 어느 식당 얼마짜리 식사 교환권이라고 써있는 그것을 받게 되었을 때 이것을 그냥 무시해 버리고 믿지 않고 그냥 버린 것이 아니라, 우리 딸 아이들이 나를 생각해서 너무나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내줬구나! 우리 딸아이를 믿고 이것을 보고 예약을 해서 가서 먹게 되었는데, 그 짧은 시간에 참 행복한 그런 시간을 보내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을 먹으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냐면 우리 꼬마 우리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 제에게 주었던 조그마한 선물이 생각이 났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초등학교 1학년 2학년 정도 됐을 때 제 생일이 되었을 것 같았어요. 그때 우리 아이들이 우리 꼬마 아이가 제게 다가와서 아빠 생일 축하해 하면서 제게 뭘 내미는데 종이 쪼가리를 내밀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무슨 돈이 있겠어요? 뭐가 있겠어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우리 아이들이 저를 생일 축하해 준다고 하면서 내밀었던 종이 쪼가리에는 무엇이 적혀 있었냐면 심부름 교환권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가 거기에 심부름 교환권도 써놓고 아빠가 뽀뽀할 수 있는 권리도 준다고 하는 그런 것도 써놓고 여러 가지 교환권들을 많이 써가지고 그 서툰 글씨로 제게 줘서 그것을 바라봤을 때 얼마나 사랑스럽던지 얼마나 고맙던지 그걸 가지고 참 이걸 받아서 참 행복하게 지냈던 기억이 나게 되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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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 우리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무리 큰 선물이 있어도,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이 우리 앞에 놓여져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불신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의 것이 될 수가 없는 것이죠. 우리가 우리 아이들이 보내준 그 조그마한 종이 쪼가리를 바라보면서, 웬 종이 쪼가리야 하면서 내 버린 것이 아니라, 이것을 받아들이고 사용하게 될 때, 정말 그곳에서 사랑을 느끼고 행복을 느끼고 그래서 정말 행복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고, 그 시간에 정말 사랑의 따뜻한 손길을 느낄 수 있었던 것처럼, 내가 믿고 그것을 바라보고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엄청난 축복이오 행복이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하다고 할 텐데요. 믿음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믿음이라고 하는 것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있다고 하면 무엇일까요? 그것은 “믿음의 대상”이 중요합니다. 내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믿는가, 내가 얼마나 정말 철저하게 믿는가, 정말 뜨겁게 믿는가라고 하는 열정이 많고 적음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내가 믿는 그 대상이 무엇인가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열정적으로 믿는데, 그런데 그 믿음의 대상이 헛된 것이라고 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죠. 만일 우리가 믿는 그 대상이 허망한 것이면 아무것도 실체가 없는 것을 우리가 가짜를 믿는다고 한다면, 더 열정적으로 믿으면 믿을수록 피해를 당하게 될 것이고, 열정적으로 믿으면 믿을수록 더 절망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정치인들은 선거가 있으면 선거 전에는 엄청난 공약들을 다 쏟아냅니다. 그런데 그 공약들을 다 해보면 5년 내에 할 수 없는 것들을 다 쏟아내고, 예산으로 할 수 없는 공약들을 막 쏟아내는데요. 그런데 당선이 되고 나면 언제 그런 약속을 했느냐는 듯이 다 잊어버리고. 말을 바꾸어 버려서 그래서 늘 실망하게 되는 것을 우리가 경험해 왔습니다. 아마도 그렇게 정치인들이 말을 쉽게 바꾸어 버리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렇게 말을 바꾸어 버려도 열정적으로 지지하는 묻지마 지지자들이 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그런데 그렇게 열정적으로 지지하면 지지할수록, 실체가 없다고 한다면 믿음의 대상이 허망한 것이라고 하면 더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종종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당신이 예수님을 믿든 부처님을 믿든 알라신을 믿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고, 정말 얼마나 진실하게 믿는가, 그게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는 소리를 종종 들어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믿는 바를 진실하게 믿으십시오. 여러분들이 정말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정말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 믿음의 대상이 예수님이든 그 믿음의 대상이 부처님이든 그 믿음의 대상이 알라신이든 그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고, 여러분들의 마음이 정말 순수하고 정말 진실하다고 한다면, 결국에는 우리는 같은 곳에서 만날 거라고 하는 이야기들을 우리가 종종 듣습니다.

어떤 스님이 전도를 하는 어떤 학생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하죠. 예수님은 학생이나 잘 믿게. 나는 부처님을 잘 믿을 테니까. 나도 학생의 신앙을 존중해 줄 테니, 내가 믿는 신앙도 좀 존중해주게라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듣다 보면 참 멋있는 말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서로가 옳다고 아웅다웅거리면서 싸우는 이 시대에,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면서 다르다고 미워하거나 다르다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서로 인정하면서 자네도 인정하고 상대방도 인정하고 나도 인정하면서, 서로가 함께 어울리면서 배려하면서 살겠다고 하는 그 마음은 정말 멋있어 보이고 정말 괜찮은 말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아무거나 믿어도, 내가 믿고 싶은 것을 아무거나 믿어도 내가 진실하게만 믿을 수 있다고 한다면 내가 열정적으로 믿기만 한다고 한다면 괜찮은 것일까요? 그렇지 않죠. 우리가 어렸을 때 제일 먼저 들었던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면 아무나 따라가지 말라는 말이었습니다. 유괴범이 사탕을 준다고 해서, 그 사람이 좋아 보인다고 해서 따라갔다가는 큰일 나니까, 아무나 따라가지 마라 말하는 것이 그게 우리가 배워야 될 진리인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쉽게 아무나 믿어서는 안 되고, 내가 그냥 열정을 내서 믿으면 다 괜찮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그 열정은 기쁨이 될 수도 있고, 실망과 절망과 혹은 엄청난 피해를 당하는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종종 교회 안에서 사기를 치는 사람들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 교회 안에서는 아직 그런 일들이 발생하지 않아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마는, 제가 미국에서 목회할 때 우리 교회가 아니라 우리 교회 바로 옆에 있던 교회에서 한 사건이 크게 일어나서 당시 필라델피아 사회에서 크게 회자되었던 그런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던 어떤 권사님이 계셨는데, 그 권사님이 교인들한테 돈을 빌린 거예요. 돈을 빌리고 이 사람한테 돈을 빌리고 하는데, 돈을 빌린 다음에는 잘 갚아요. 어떻게 갚냐면 이자까지 두둑하게 쳐서 갚아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한테 돈을 빌려서 얼마간 쓰다가 다시 그 돈을 가지고 돌아와서, 그때 내가 정말 돈이 필요했는데, 나한테 빌려줘서 너무 고맙다고 너무 감사했다고 하면서, 이것은 원금이고 이자도 이거라고 하면서 이자까지 두둑하게 쳐서 딱 주니까, 좋아요? 안 좋아요. 좋잖아요? 그렇게 해서 신뢰를 얻었던 그분이 어느 날 많은 사람들에게 아주 엄청나게 큰 돈을 다 빌려가지고, 하루 저녁에 사라져버린 거에요. 그래서 그 교회가 엄청난 난리가 난 적이 있었는데요.

정말 내가 믿었던 사람인데, 그 사람이 그렇게 사기를 저지르게 됨에 따라서 결국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믿어야 될 게 있고, 믿지 말아야 할 게 있는 겁니다. 믿어야 할 것을 믿지 않는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이 기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없다고 하는 아쉬움이 있는 것이고요. 믿지 말아야 할 것을 믿게 되면, 엄청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고 재정적인 손해를 보게 될 것이고, 마음이 아프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고 하는 점을 기억하면서, 우리 믿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열정이나 어떤 진실함이나 그것보다도, 물론 그게 필요 없다는 얘기가 아니에요. 물론 그것도 필요하죠. 열정적으로 믿어야죠. 진실하게 믿어야죠. 그것도 다 필요하지만, 그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과연 믿음의 대상이 믿을 수 있는 것인가? 믿지 못할 것인가가? 그것을 구분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할지, 무엇을 믿지 말아야 할지 항상 혼란스럽다고 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너무나도 우매해서 잘못된 선택을 할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믿어야 될 대상인데도 믿지 못해서 그래서 모든 관계가 끊어져버리는 그런 결과가 나타날 때가 있고요. 믿지 말아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믿어서, 엄청난 손해를 당하게 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목사라고 해서 장로라고 해서 권사님이라고 해서 믿지 말아야 될 것까지 믿어버리게 된다고 한다면 엄청난 피해를 당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무엇보다도 제일 중요한 게 무엇이냐면 그 대상이 무엇인가가 훨씬 더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살펴보고 있는데요. 아브라함은 무엇을 믿었습니까? 바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무거나 믿은 게 아니에요. 그냥 믿음이 좋다고 해서, 이 사람도 믿고 저 사람도 믿고 아무나 믿은 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날 나타나셔서 내가 너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게 해주겠다고 말씀하시고, 아들을 주시겠다고 했을 때, 그 하나님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게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인정해 주셨다고 하는 것 이것이 정말 중요한데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도 믿을 때 인정해 주실 거라고 하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은 것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엄청난 것을 바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셨다고 한다면 절망스러울 겁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우리는 바칠 게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완벽한 인생을 살아서 흠도 없고 점도 없고 완벽하게 의롭게 살아서 아무런 죄가 없이 완벽한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아브라함을 인정하셨다고 한다면, 우리는 절망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늘 넘어지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도 믿게 되면 의롭게 되는 것인데요. 우리의 믿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나 믿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 중요한 것이죠. 로마서 4장 23절에서부터 24절에서는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4장 23절 24절입니다.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이 중요한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중요한데,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되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으나, 다시 살리셨다고 하는 그 사실을 믿어야 된다는 것이죠. 아무거나 믿어도 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고, 그리고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는 그 사실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는 저 유대 땅에서, 가나안 땅 유대 땅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그 죄목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본다고 하면 신성 모독죄입니다. 예수님께서 신성 모독적인 행위를 하셨기 때문에 성전을 파괴한다고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다고 하는 그런 오해를 받아서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신성 모독죄로 죄목을 가지게 되었고요. 로마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반역죄의 목을 얻게 되었습니다. 로마 정부를 정복하고, 가이사에 대항해서 새로운 나라를 일으키겠다고 하는 그런 반역죄로 인해서, 예수님께서 죄목을 가지고 처형을 당하게 되었는데,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 그렇게 돌아가신 예수님이 사실은 어쩌다 보니까 죽은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죄를 위해서 나 대신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고 하는 그 사실을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을 우리가 받아들이게 된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살아나신 것이 바로 나를 위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믿게 된다고 하면, 그 예수님의 놀라운 구원의 사건이 우리들의 것이 되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이루신 그 일이 우리들의 것이 되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이루신 그 속죄 죄사함을 가리켜서, 현대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사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즘에도 사면이 논란이 많이 되고 있는데요. 사면이라고 하는 것은 대통령이 행사하는 권한입니다. 그런데 이 대통령이 사면권을 행사할 때 손해 보는 게 있나요? 손해 보는 게 거의 없을 겁니다. 물론 정치적인 위험을 떠안을 수는 있겠지만, 형식적으로 본다면 그냥 서명만 하면 되는 거잖아요. 아주 간단한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사면을 이루신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 죄의 용서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53장 5절에서부터 6절 말씀에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심으로 말미암아, 그 죄 사함의 공로가 우리에게로 오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고요. 나 때문에 주님께서 죽으셨고 나 때문에 주님께서 고난당하셨다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로마서 4장 25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은 죄 용서를 위한 것이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은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한 것이라고 그렇게 해석하기가 쉬운데요. 도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것을 히브리 평행법적으로 이해를 하게 된다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들의 죄를 용서해서 의롭게 만드는 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그 일을 하셨다고 하는 그런 의미로 이해를 해야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나의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게 될 때, 그 예수님께서 이루신 그 사역이 우리의 것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게 뭘까요?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가장 쉬운 겁니다. 어려운 것이 아니고 가장 쉬운 것인데요. 그러면서도 쉽지 않은 것입니다. 믿음은 쉬우면서도 쉽지 않은 것인데요. 쉬운 것은 왜 쉽습니까? 가난해도 믿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돈이 없어도 믿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세상은 돈이 없으면 접근할 수 없는 곳이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세상은 돈이 없으면 얻을 수 없는 게 있습니다. 하지만 천국이라고 하는 것은,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돈이 없어도 아무것도 없어도 믿을 수가 있는 것이죠. 우리가 누구든지, 돈이 많든 적든 그 누구든지 땡전 한 푼 없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믿을 수 있기 때문에, 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가장 쉬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 55장 1절 말씀에서는 주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제공해 주시고자 하는 그 생명의 양식은 많은 돈을 내야만, 그래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믿음으로 아무 돈도 내지 않아도 믿음으로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이 구원이기 때문에, 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쉬운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배움이 적어도 믿을 수 있기 때문에 쉽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것들은 머리가 뛰어나야만, 뭔가 많은 학식이 있어야만, 고차원의 방정식을 풀어야만 수제들만 다다를 수 있는 그런 분야가 있습니다. 어떤 수학적인 것은 우리가 복잡해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어요. 하지만 구원의 진리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복음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무리 공부를 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일자 무식이라고 할지라도 심지어 어린아이라고라 할지라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이 복음인 것이죠. 찬송가 566장에 보면 이런 찬송가가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귀하신 이름은 내 나이 비록 적어도 잘 할 수 있어요.”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하나님이 사랑하신다고 하는 그 사실을 믿을 수 있는 것이, 이것이 믿음인 것이고, 그래서 쉬운 것이죠.

뿐만 아니라 믿음이 왜 쉽습니까? 믿음이 쉬운 이유는 우리가 도를 닦고 경지를 닦아서 최고의 경지에 올라가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그냥 믿을 수 있어요. 우리가 40일 금식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믿음이 아니고, 100일 기도를 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믿음이 아니고, 공양미 3,000천 석을 갖다 바쳐야 얻을 수 있는 것이 믿음이 아니고, 치성을 들여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그냥 누구든지 믿을 수 있는 것이 믿음인 것이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완벽한 인생을 살고 먼지 하나 털어도 먼지들을 막 털어도 먼지 하나 나오지 않은 그런 완벽한 인생을 살아야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하셨고, 연약한 사람 그 누구도 다 주님 앞에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쉽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이렇게 쉬운데, 그런데 믿기가 어려워요. 이렇게 쉬운 것을 돈도 필요 없고 지식도 필요 없고 아무것도 필요 없고 그냥 믿기만 하면 되는 이 쉬운 것을 사람들이 믿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죠. 왜냐하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자꾸만 의심이 솟아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근데 사람들은 무엇을 믿는가? 쉬운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려워 보이는 것을 더 잘 믿습니다. 예를 들어서 공짜라고 하면 믿지를 못하는데, 돈을 내라고 하면 믿어요. 그래서 그냥 내가 기왓장에다가 이름 적어놓으면 된다 하면, 만 원 2만 원 내놓고 기왓장에다 이름 써서 내는 거예요. 까짓 거 1만 원 내버리지, 까짓 건 2만 원 내버리지 하면서 해버리는 거예요. 연등을 달아놓고 그래서 10만 원짜리 100만 원짜리 50만 원짜리 연등을 달아놓으라고 하면, 까짓껏 50만 원 지출해버리지, 까짓 거 100만 원 지출해 버리지 하면서 사람들이 그것을 믿어요. 108배를 잘하라고 하면 힘들기는 하지만 108번만 잘하면 되니까 그냥 엎드리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게 오히려 더 편하게 느껴지는 게 사람들의 마음인 것이죠. 그래서 어렵게 하면 오히려 사람들이 더 열정적으로 믿기도 하고 더 따르는 모습들을 많이 보게 되는데요.

심지어 이단이나 거짓 종교를 보면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가면서 신앙생활하는 것을 보게 되는데요. 그 이단에서 신앙생활하는 것이 쉽냐면 쉽지가 않아요? 시간 다 갖다 바쳐야 되고 돈 갖다 바쳐야 되고 또 시험도 봐야 되고 전도도 해야 되고 막 엄청난 요구들이 엄청나게 많은데 그 엄청난 것들을 해버리면 수치화시켜버리면 훨씬 더 달성하기가 쉬운 거죠. 그래서 어떤 이단에서는 시험까지 봅니다. 성경을 달달 암송하게 하고 그래서 그 시험을 봐서 어느 정도 합격이 돼야 144,000명이 들어간다고 이야기를 하면 열심히 해서 달성하는 겁니다.

그런데 가장 쉬운 방법 그런 거 다 필요 없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된다고 하는 거에 사람들은 외면해 버릴 때가 많이 있는 것이죠.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보면 믿음이 있었지만, 그 믿음이 늘 흔들리고, 의심이 자꾸만 솟아오르게 되었을 때, 그래서 흔들릴 수밖에 없었는데요.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도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될 텐데, 2천 년 전에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바로 그 예수님의 죽음이 바로 나를 위한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면서 담대하게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를 위해서 엄청난 것들을 다 마련해놨는데, 마치 우리들은 그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처럼, 나는 고아와 같다 생각하고 동굴 속에 들어가서, 그곳에서 나는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아. 내 자신의 동굴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은 나를 생각하지도 않아. 그렇게 자꾸만 떨쳐버리면서 혼자 외롭게 살아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영접하면서 믿음으로 담대하게 살아 나가는 그런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냥 우리들에게 종이 쪼가리 적어주고 그래서 우리에게 선물 정도만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사랑의 약속들을 해주셨는데 그 약속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누리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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