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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바라보자 (히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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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부터 도쿄 올림픽이 시작이 됐습니다. 혹시 보셨습니까? 전 지구촌의 축제로 늘 참 많은 사람들을 설레게 만들었던 올림픽이었는데, 금년에는 썰렁한 그런 올림픽 개막식을 보면서, 참 마음이 많이 안타까웠습니다. 저는 하이라이트로만 조금 보게 되었는데요. 여러분들은 어떤 장면이 가장 인상이 깊으셨습니까? 저는 픽토그램이라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더라고요. 사람 두 사람이 나와서 올림픽 종목에 나오는 한 50개던가요? 그 종목들을 온몸으로 표현하는데요. 이렇게 표현 이렇게 표현하면서 픽토그램을 하는 걸 보면서, 얼마나 재밌던지, 저와 제 아내가 그걸 보면서 깔깔 웃으면서, 그나마 좀 재밌는 시간을 보내게 됐습니다. 개콘이 요즘 없어졌다고 그러는데, 온 세상이 개콘이니까, 참 힘들 것 같다 생각이 듭니다.

세계 스포츠 스타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최고의 기량을 겨루는 것이 올림픽인데, 좀 안전한 때에 하기를 원했고, 좀 연기되거나 아니면 취소됐으면 좋았겠다 생각은 들었지만, 기왕 시작한 것이니까, 가능하면 안전하게 가능하면 무사하게 잘 마쳤다고 하는 그런 마음이 있고요. 또 우리나라 선수들도 이번에 좋은 결과를 좋은 성적들을 거두고 돌아오는, 그동안 흘린 땀방울과 눈물이 보상을 받게 되는, 그런 좋은 축제의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런 간절한 마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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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성경은 믿음의 길을 비유할 때 스포츠 경기에 비유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영적인 것을 이 세상의 것으로 견주어서 비유해서 설명하는 것이 성경의 방식인데요.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 삶, 우리들의 신앙의 길 신앙생활을 여러 이 세상의 것들에 비유할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는 지난 시간에 어떤 것을 살펴보았냐면, 우리의 믿음의 길이라고 하는 것이 씨앗이 땅에 떨어져, 그리고 그것이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는 것과 비슷하다고 하는 점에 대해서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씨앗이 말씀의 씨앗이 땅에 떨어졌을 때, 어떤 밭에 떨어지느냐에 따라서, 열매가 열리지 못할 수도 있고, 또 어떤 밭에 떨어지느냐에 따라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얻을 수도 있다고 하는 그 본문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렇게 믿음이라고 하는 것, 믿음의 길이라고 하는 것이 마치 식물을 심는 것과 같은 것에 비유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또 어디에 비유할 수 있냐면, 믿음의 길을 경주 하나의 스포츠 경기에 비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히브리서 12장 1절 말씀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우리가 가야 할 그 믿음의 길이 무엇인가? 경주와 같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경주를 하고 있는데, 경주하고 있는 그 선수들 주변으로 허다한 증인들이 꽉 들어찬 거예요. 이번에는 무관중으로 진행하니까, 관중석들에 관중석에 사람들이 텅텅 비었습니다마는 온라인으로 전 세계 시민들이 목격하고 있는 거죠. 바라보고 있는 것이죠. 선수들이 어떻게 하나? 잘하나? 그렇게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우리들의 믿음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경주와 같아서, 우리가 경주하는 그 길에 허다한 증인들이 바라보고 있는데, 그 허다한 증인들이 우리를 목격하고 쳐다보고 구경하고 있는데, 우리가 인내로서 그 경주를 잘해 나가야 한다고 오늘 성경 말씀 가운데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믿음의 길과 스포츠 경기 사이에 유사점이 있다고 한다면, 무엇이 유사점일까요? 왜 성경은 우리들의 믿음의 길을 경주하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고 있을까요? 여러 가지 비유점들, 여러 가지 유사점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첫 번째 유사점이 있다고 한다면 끝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시지푸스 신화에 보면 의미 없는 일을 무한 반복해야만 하는 저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실컷 그 돌을 굴리고 굴리고 해서 산 꼭대기까지 올라갔는데, 다시 굴러내려오는 것이죠. 그러면 다시 그 돌을 가지고 또 산으로 올라가는데, 또다시 내려오는 거죠. 의미 없는 무한 반복의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이 인생이다라고 하는 것이 시지푸스 신화에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내용인데요. 그런데 성경에서 우리의 믿음의 길을 뭐에 비유하고 있냐면, 마치 경주와 같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시지푸스 신화에 나오는 그런 무한 반복의, 그런 의미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끝이 있는 마지막이 있는 것이 우리들의 믿음의 길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마라톤이라고 한다면 끝까지 뛰기만 하는 게 아닙니다. 지구를 계속해서 도는 것이 마라톤이 아닙니다. 마라톤을 얼마만큼 뛰어야 됩니까? 42.195 킬로미터를 뛰는 거죠. 어렸을 때 배웠던, 그 숫자. 42.195km를 달려서 그 마지막 종점까지 가게 되면 경기가 끝나는 거예요. 축구라고 하면 언제 끝납니까? 전반 45분, 후반 45분. 정해진 시간에 경기를 뛰고, 그 시간이 지나면 종료의 휘슬이 울리는 것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그 믿음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런 끝도 없이 그냥 달려가야만 하는 그런 목적 없는 곳이 아니라, 끝을 향해서 달려가는 것이고, 결국 우리의 경주의 마지막이 있으면, 그 마지막 때에 면류관이 있는 메달이 기다리고 있는, 끝이 있는 경기라고 하는 점이 바로 경기와 신앙생활과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공통점을 찾아본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렇게 경주를 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하는 점에 있습니다. 경기를 하는 것이 쉬운가 하면, 쉽지 않아요. 만일 쉽다고 한다면 모두가 다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 경기를 하는 것은 정말 힘든 겁니다. 마라톤을 뛴다고 한다면, 그 마라톤을 하는 가운데 42.185를 달릴 수가 있겠는가? 너무나도 힘들어서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생각들이 들기 마련이죠. 여러분은 몇 킬로미터까지 뛰어 보셨습니까? 저는 제 기억에 아마도 5km를 뛰었던가, 아니면 10km를 뛰었던가 하는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인가 아니면, 중학생 시절이었던 걸로 기억이 되는데, 마라톤을 뛴 게 아니라, 하프 마라톤, 하프 마라톤이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42.195니까 한 20km는 뛰는데 그게 아니라, 아마 5km인지 한 10km인지 그 정도 뛰는데요. 막 뛰는데 못 뛰겠어요. 너무나도 힘들어요. 그 몇 km를 뛰는데도 힘들어서 중간에 포기하고 싶고, 그만두고 싶고, 정말 모든 것들을 다 때려치우고 싶은 그런 마음이 들었던 것이 마라톤이었습니다.

뛰다 보면 다리가 아프기도 하고, 목이 마르기도 하고, 갈증이 나고 지치고, 쓰러질 것 같은 것이죠. 축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축구도 하다 보면 재밌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부상을 당하기도 하고, 햄스트링이 오기도 하고, 운동 경기가 쉬운 일이 아니듯, 믿음의 길도 쉬운 길이 아니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 유사점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 본문은 그 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데요. 먼저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를 응원하고 있는 응원부대들이 있다고 하는 것을 먼저 바라보아야 하는 겁니다. 우리가 가는 이 경주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처음 가는 길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는 이 길은 누가 누가 갔던 길이에요? 이미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걸어갔던 길이에요.

여러분 백신 맞으셨습니까? 아직 안 맞으셨습니까 아직 안 맞으셨어요? 연세 드신 분들은 많이 맞으셨죠? 그런데 백신 처음 맞을 때 두렵던가요? 맞을만하던가요? 온갖 가짜 뉴스들이 많이 들리기 때문에, 이거 맞았다가 혹시 잘못되는 거 아닐까? 만일 내가 제1차로 맞으라고 한다면, 맞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왜? 내가 이러다가 잘못 맞으면, 큰일 나지 않을까라고 하는 두려운 마음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벌써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맞았어요.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맞고 괜찮더라. 괜찮더라. 아무것도 아니네. 별거 아니네. 좋다. 이야기하니까, 이제는 사람들이 그럼 나도 맞아볼까 하고 나서는 거죠. 저도 예약을 마쳤습니다. 8월 16일 날 1차 맞기로 예약하고, 9월 14일 날 2차 맞는 걸로, 13일인가요 2차 맞는 걸로 예약을 했는데요. 다른 사람들이 맞는 것을 보니, 나도 맞아도 되겠구나라고 생각하듯, 우리 믿음의 길에는 누가 있는가? 수많은 믿음의 증인들이, 허다한 믿음의 증인들이 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의 증인들이 누군가? 마치 정말 뛰어난 믿음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히브리서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히브리서 12장의 말씀을 읽었는데요.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허다한 허다한 증인이 있다고 12장 1절에서 말하기 전에, 11장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믿음의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씩 하나씩 열거하면서, 그 사람들이 어떻게 믿음으로 살았는지, 어떻게 믿음으로 이겼는지, 어떻게 승리했는지, 어떻게 고난을 이겼는지에 대해서 히브리서 11장에서 쭉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가 살펴봤습니다. 아벨은 어떻게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으며, 에녹은 어떻게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했으며, 어떻게 믿음으로 노아는 이 홍수 가운데서 살아날 수 있으며, 아브라함은 어떻게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고, 어떻게 사라는 믿음으로 낳을 수 없는 아이를 낳을 수가 있었고, 어떻게 이 삭은 믿음으로 살아갔으며, 야곱 모세 라합 등 등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어떻게 믿음으로 승리해 왔는가에 대해서, 히브리서 11장에서 쭉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 대해서 평가하기를 뭐라고 말하냐면, 마치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영웅들을 모아놓은 명예의 전당과 같다고 그렇게 표현합니다. 명예의 전당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들어보셨을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Hall of Fame이죠. fame. 아주 뛰어난 업적을 이룬 사람들의 이름들을 헌액해놓은 장소가 명예의 전당입니다. 미국 메이저리그에 보면 메이저리그 베이스볼 야구 경기에서 수많은 위대한 스타들의 이름들을 다 헌액해서 전시해 놓은 전시 공간이 있는데요. 베이스볼 Hall of fame이 있습니다. 그게 어디에 있냐면, 뉴욕주 아주 시골 마을인 쿠퍼스타운에 가면 야구 명예의 전당이 있습니다. 미국은 이런 전당 전시관 이런 것들을 어디다 만드냐면, 대도시에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저 시골 한적한 마을에 하나둘씩 이렇게 만들어 놓거든요. 그래서 저 뉴욕주의 아주 시골 마을의 그런 곳이 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찾아와서, 그 사람들을 보고 사진을 찍고 가고 하는데요. 그런 야구의 명예의 전당이 있고요

최근에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현대차의 정몽구 회장이 미국 자동차 명예 전당에 헌액이 됐다고 뉴스를 들었습니다. 그건 어디에 있냐면,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근처에 있는 도시에 그렇게 있는데, 히브리서 11장은 뭐냐 하면 믿음의 영웅들의 이름들이 다 헌액돼 있는 거죠.

그 헌액된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씩 하나씩 불러서, 다 설명한 다음에 히브리서 기자는 무슨 얘기를 하냐면, 이와 같이 우리들에게 둘러싸인 구름같이 많은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우리도 믿음의 길을 경주하며 나아가자” 이야기하고 있는, 그런데 여기에 이름에 기록한 사람들만 그 길을 걸어간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길을 걸어갔다는 거예요. 우리가 걸어가는 이 길은 처음, 우리가 처음 걷는 그 길이 아니라, 이미 증명된 길이고,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이 길이 확실하고 하는 사실을 증명해 준, 그 길을 따라가는 것인데, 찬송가 3백36장 가사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환란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신앙을 생각할 때 기쁨이 충만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우리가 이전에 우리에 앞서 갔던 신앙의 선조들의 믿음을 본받으면서, 믿음의 길을 가야 한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묵상하는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우리가 성경을 묵상하는 이유는 두 가지 목적이 있는데요. 하나는 우리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가를 보면서, “아, 정말 예수님이 필요하구나” 정말 더러운 모습을 가진 인생의 그 더러운 모습들을 믿음의 영웅들에게서도 보면서, 저 위대한 사람들도 쓰러질 수밖에 없고, 저 믿음의 사람들도 넘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정말 예수님이 필요하다고 하는 사실을 생생하게 느껴야 되는 것이 하나의 목적이라고 한다면, 또 하나의 목적이 있는데, 그런데 그 믿음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보면서, 요셉은 어떻게 그런 위기를 넘겼으며, 욥은 어떻게 고난 가운데서 믿음으로 살아갔고, 다윗은 어떻게 넘어졌는가를 보면서, 믿음을 배우고 그들이 갔던 걸음을 걸어가면서 우리가 배울 그런 목적으로 성경을 읽는 것이죠. 원하기는 우리 모두가 다 이 믿음의 위인들의 이야기들을 읽고 깨달으면서 우리도 함께 믿음의 길을 열심히 달려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 됩니까? 오늘 12장 1절 말씀에서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려야 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무거운 것을 버리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도대체 무거운 것이 뭘까요? 마라톤 선수들을 보면 알 수가 있겠는데요. 마라톤 선수들은 무슨 옷을 입고 뛰어갑니까? 가능하면 가장 가벼운 옷을 입고 뛰어가는 겁니다. 만일 마라톤을 하는 사람이 갑옷을 입고 가면 됩니까? 안 되는 거죠. 갑옷을 입고서는 뛰어갈 수가 없는 거예요. 거추장스럽게 하고, 무거운 것이 있으면, 그 뜀박질을 막기 때문에 그것을 다 벗어버려야 해요. 그래야 뛰어갈 수가 있는 것이죠.

그렇다고 한다면 믿음의 경주를 함에 있어서 무거운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믿음의 길을 가도록 방해하는 거추장스럽게 하고 무겁게 하고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그 무거운 것이 무엇일까요? 수많은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그것은 재물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비워야만 산다. 우리가 이 세상의 것들을 많이 지고 가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할 수가 없고,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들을 다 버려야만 한다고, 그렇게 말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물론 성경에서는 우리가 탐심을 버려야 할 것에 대해서 말씀하기도 하고, 탐심이 죄라고 말씀하고는 있지만, 동시에 성경적인 가르침은 우리가 금욕주의로 살아야만 한다고 가르쳐주고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며, 그래서 우리가 믿음으로 받는다고 한다면 모든 것이 가한 것이고, 우리가 감사함으로 받으면 우리들에게 축복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 성경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가 벗어버려야 될 이 무거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른 게 아니라 바로 죄입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두 개의 다른 종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소위 헨디아디스(hendiadys), 두 개를 통해서 하나를 표현하는 방식으로써, 두 개의 표현으로서 하나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무거운 것, 얽매이기 쉬운 죄가 다른 두 개의 종류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이야기하는 거죠. 죄가 무엇인가? 죄가 바로 무거운 것이고, 죄가 바로 우리를 얽매게 만드는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이 무엇인가? 우리의 믿음의 길을 무너뜨리는 것이 무엇인가? 그게 바로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마라톤 선수들이 갑옷을 입고 뛰면 뛸 수 없듯이, 죄가 있으면 믿음의 길을 갈 수가 없다고 하는 겁니다. 신앙생활하는 가운데 있어서 우리들의 삶 가운데 죄가 있게 된다고 한다면, 그 믿음의 길을 제대로 걸어갈 수가 없기 때문에, 죄를 벗어 버려야 한다고 하는 것이죠.

그럼 죄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죄라고 하는 것은 기준이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많은 것들에 대해서 죄가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낙태를 해도 죄가 아니고, 간통죄를 지어도 죄가 아니고, 여러 가지 금하고 있는 것들을 성경에서 금하고 있는 것들을 이제는 더 이상 죄가 아니라고 하는 세상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에게 죄가 무엇인가를 가르쳐주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기준이시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죄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하거나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하려고 하는 그런 마음을 품는 것이 죄라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기억해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말해주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싫어하는 거면, 그러면 우리들의 마음이 불편해요. 우리들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미워하면, 행복한 게 아니라 영 내 마음이 불편한 거죠. 우리가 용서하지 않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고 상대방을 증오하면, 내가 행복한 것이 아니라 불편한 겁니다. 괴로운 겁니다. 왜?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인 것이고, 죄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세워놓으신 그 기준에서 미치지 못하는 것이 죄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모든 죄악들을 다 벗어버리고 믿음으로 인내하면서 경주에 나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인내로서 경주하라고 말씀하고 있는데요. 인내가 왜 필요합니까? 인내가 필요한 이유는 이 경주가 짧은 경주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긴 마라톤과 같습니다. 그래서 중단하고 싶은 마음들이 많이 있는데요. 특별히 오늘 이 히브리서를 받게 된 최초의 수신자들은 정말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신앙생활을 했었습니다. 로마 황제를 섬기지 않으면 핍박을 당하게 되었고, 그래서 내가 예수님을 믿고 살아간다고 하는 것이 죄가 되었고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고통을 당해야만 하는 그런 상황 가운데서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은 그렇게 신앙생활을 했던 것이죠.

오늘날에는 종교의 자유가 있지 않습니까? 내가 무슨 종교를 믿든 다 용인되는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고, 요즘에 우리가 예배드리는 것도 하나의 권리라고 하는 그런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가운데 있는데, 이 히브리서를 받아 든 이 성도들은 어떤 상황에 있었냐면, 예수 믿는 것이 죄고,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당하고 무시당하고 아주 힘들게 어렵게 살아가는 그 상황 가운데서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들이 이 히브리서를 받았던 시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신앙생활하는 가운데 하룻밤 자고 났더니 옆에 신앙생활 같이 하던 사람들이 끌려가 죽었어요. 사형을 당했어요.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을 당해요. 그런 고난을 당하고 있는 그 성도들을 향해서 하는 말씀이 무엇이냐면, 인내로서 믿음의 경주를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어쩌면 우리나라도 이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쉽지 않은 시대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조롱당하고 손가락질당하고, 무시당하는 그런 시대로 우리의 삶이 들어갈 수도 있겠는데, 그런 상황 가운데서 우리가 넘어질 것이 아니라 인내로서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해나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2절 말씀 가운데서 무슨 말씀을 하고 있냐면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주요 여기서는 주라고 하는 말은 기초를 놓으신 자 founder라고 하는 의미인데요.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우리가 이 믿음의 경주를 해나가면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경주를 할 때 무엇을 보고 뛰어가죠? 목표를 보고 뛰어가는 거예요. 목표를 보고 뛰어갈 때 경주를 할 수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다른 것을 바라보면 믿음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어요. 그것을 아주 생생하게 드러내 주는 예가 바로 베드로가 바닷물 속에 빠진 이야기입니다. 한 번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고 있을 때였습니다. 풍랑이 일어나서 배가 흔들리고 빠져 죽게 되는 그 상황 가운데서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셨습니다. 그것을 보고 제자들이 너무나도 깜짝 놀랐습니다. 유령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죠. 그런데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안심시키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니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이야기했습니다. 만일 주님이시면 저도 걸어가게 해 주십시오. 바다 위로 오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그 베드로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와라. 걸어오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러자 베드로가 바다 위로 뛰어간 겁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요. 바다 위로 걸어가게 된 거예요. 베드로가. 그런 엄청난 기저귀를 체험했는데, 그것이 계속되었냐면 끝까지 계속된 것이 아니라, 무서워서 빠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았을 때는 걸어갈 수 있었는데, 자기 옆에 있는 그 바람에 의해서 파도가 치는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믿음이 식어져 버리고 두려운 마음이 들어서 바닷물에 빠지기 시작하게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손을 붙잡고 건져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왜 의심하였느냐? 믿음이 적은 자야. 왜 나를 보지 않고?

이 세상 것들을 바라보는 이번 올림픽에 참석한 사람들은 무엇을 바라보고 경기에 참석했을까요? 메달을 보고. 참석한 메달을 보면 참석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까? 안 생깁니까? 생겨요. 그런데 메달을 따려고 도쿄에 도착해서 호텔에 들어갔더니, 호텔이 영 엉망이에요. 텔레비전도 없고, 냉장고도 없고, 에어컨은 있겠죠. 설마. 침대는 골판지 침대가 있고, 만일 그것을 보고 “세상에 어떻게 선수들에게 이런 식의 대접을 하느냐?”라고 거기에 호텔의 상황에 화가 나서 돌아가 버리면 어떻게 되나요? 올림픽에 참여할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런데 거기에 참여한 선수들 가운데 호텔에 대해서 불만을 터뜨리는 사람들은 많이 보았지만, 호텔 때문에 기분 나빠서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한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은 메달만 바라본 거예요. 목표만 바라본 거예요.

믿음의 길을 걸어감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바라봐야 됩니까? 예수님을 바라봐야,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다른 것을 바라보는 그 순간 우리는 이내 실망해버리고 넘어지게 되는 것이죠.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가리키기 위해서 손가락을 해서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이야기합니다. “저기 달이 있으니 저 달을 보시오”라고 손가락질을 했어 손가락을 펴서 가리켰습니다. 사람들이 뭘 보죠? 달을 봅니까? 뭘 봅니까? 손가락만 보는 거예요. 손가락을 보면서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손가락이 왜 이렇게 못생겼어? 손가락이 왜 이렇게 더러워? 손가락이 왜 이렇게 저렇게 잘못돼 있지? 손가락이 아직 씻지도 않았네? 손가락이 깨끗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손가락을 달을 가리키는 그 손가락이 깨끗하고 멋지고 정말 좋으면 정말 좋을 수 있겠죠. 하지만 만일 손가락이 깨끗할 수 있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만일 이 세상에 그 어느 한 사람이라도 스스로 깨끗하고 스스로 완벽해서 완전한 삶을 살 수 있어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는 굳이 이 세상에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너희들이 깨끗해서 너희들이 알아서 구원받고 알아서 하나님에게로 와라 하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완벽한 사람이 없습니다. 다 위선자들이고 다 정의를 주장하는 것 같은데, 뒤로 다 호박씨 까고 다 더럽고 추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이기 때문에 우리의 힘과 노력으로는 하나님 앞에 갈 수 없는, 영원히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피를 흘려주셨고 그 피로 우리를 깨끗하게 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지 않고, 예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보기 때문에 실망하는 것이고요. 더 나가서 사람들이 무엇을 바라봅니까?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영광을 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느냐? 사람들이 나에게 박수 쳐주느냐? 사람들이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느냐가 우리들의 가장 큰 관심사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 예수님이 아닌 것들을 바라보게 된다고 하면, 결국 우리는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주님만을 바라봐야 되는 것이죠.

안타깝게도 수많은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하면서 교회에 다니면서 “나는 외롭다” “나에게는 아무런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 “마치 나는 광야 한가운데에 있는 것 같다”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근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는 예수님을 보지 않고 사람을 보았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께로부터 받는 그 사랑을 우리가 주변으로 흘려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우리가 주님께 받은 그 사랑을 우리 주변으로 흘려보내게 되면, 그러면 그 주변이 푸른 풀밭으로 변하게 되고 꽃이 피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랑의 물을 우리 주변에 뿌리지 않기 때문에 주변이 점점 메말라가는 것이고 사막화되는 것이고, 내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기 때문에 내 주변이 점점점점 메말라가 버려서 결국은 내가 광야 한가운데 나 혼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이죠. 그러면서 왜 많은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이지요. 만일 그렇게 외롭다고 느끼신다고 한다면 내가 광야 한가운데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하면, 그것은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내가 주님을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이고, 주님의 사랑을 받아서 이웃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가 먼저 내밀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사랑의 손길을 내밀기를 주저합니다. 왜 주저하죠? 사랑한다고 말했다가 사랑의 손길 내밀었다가 거절당하면 어떡하나라고 하는 그런 두려움 나는 사랑한다고 했는데 나를 무시할까 하는 그 그 두려움 때문에 손을 내밀지 못하는 것이죠.

그런데 다 그러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 순간에 손을 내밀면 그러면 사람들이 환영해 줄 겁니다. 우리의 문제의 그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아무런 가치도 없고 쓸모없는 것들을 갈망하고 있는 것에 있어요. 그것을 가리켜서 성경에서는 우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아무런 가치도 없고 썩어져 버릴 것이고 우리를 살릴 수 없는 헛된 것들을 우리가 바라보게 될 때, 결국 우리는 메말라 갈 수밖에 없는 것인데 우리의 기도 제목은 무엇이 돼야 됩니까? 주님 주님만 바라보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길은 경주와 같다고 했는데요. 이 세상의 경주와 다른 점이 딱 하나 있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이 세상의 경주는 상을 1등만 줘요. 잘해봤자 2등 3등까지 밖에 안 줘요. 실컷 연습하고 실컷 평생 노력하고 해서 나간 올림픽에서 메달 없이 빈손으로 와야 되는 경우가 생겨요. 이번에 뉴스를 들으니까 이번 올림픽에서는 여러 가지 참 힘든 상황들이 많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냐면 경기를 하는 도중에라도 코로나에 감염이 되면 탈락해 버린다는 거예요. 결승전에 나갈 선수인데 결승전에 나가보지도 못하고 코로나에 걸려서 그 결승전 앞에서 포기해야 되는 일이 생기는 거예요.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길은 실패가 없는 길이에요. 믿음의 길은 중간에 가다가 망하는 길이 아니라, 모든 믿는 자들에게 상이 예비되어 있고 면류관 이 예비되어 있는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환영해 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믿음의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누구를 무너뜨리고 밟아버리고 승리해야만 상을 주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끝까지 믿음의 길을 가는 자마다, 하나님의 은혜의 상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끝까지 인내하며 주님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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