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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아이와 같이 (마 18:1-4)

어린이아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모든 어린이들은 다 천국에 가는 것일까?

우리 어른들은 어린아이들을 종종 무시하는 경향들이 있는데요. 사실은 어른들이 어린아이들에게서 배워야 할 것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종종 우리는 아이들을 보면서, 어른이 자녀들을 훈계하는 것이고, 또 어른이 자녀들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라 우리 어른들도 우리의 아이들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이번 어린 주일을 맞이해서 우리는 한 가정이 우리 교회의 한 어린 일을 품는 그런 영적으로 연결하는 일을 진행하게 되었는데요. 그래서 오늘 카드를 하나씩 다 나누어 드렸습니다. 우리 자녀들의 이름을 이름을 적은 그런 카드를 나누어 드렸는데, 이 카드를 받으신 가정께서는 이 아이를 위해서 1년 동안 좀 위해서 기도해 주고, 마음속에 품고 사랑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우리가 영적인 가족으로서 함께 연결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마음이 아주 간절합니다.

그런데 제 마음속에는 이 일을 진행하면서 걱정이 조금 있어요. 어떤 걱정이 있냐 하면, 모든 일이 다 마찬가지지만, 아무리 좋은 일도 우리가 잘못하게 되면 역효과를 나타내는 일들이 많이 있는데, 우리가 하는 이 선한 일 정말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이 되고 정말 좋은 일이라고 많은 분들이 생각하고 있는 바로 이 일을 함에 있어서도, 혹시라도 모를 그런 역효과가 나타나면 어떡하나 하는, 그런 조바심이 제 마음 가운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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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그런 역효과가 나타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마치 어른이 우리 어린아이들을 향해서 무엇인가 시혜를 베푸는 것처럼 생각하고, 우리 어린아이들을 대하게 된다면, 그러면 역효과가 나타날 수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에 보면, 사랑은 교만하지 않는 것이라고 가르쳐주고 있는데, 우리가 사랑을 베풀면서, 마음을 베풀면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자연스럽게 솟아오르는 생각들이 교만한 마음이고, 내가 너희들을 위해서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베푸는 것인 양, 내가 뭔가를 해준다고 생각하게 된다고 하면, 결국 역효과가 나타날 가능성이 정말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일을 진행하면서 단어를 선택할 때 아주 조심스러운 단어를 선택했는데요. 우리가 흔히 영적인 입양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일부러 입양이라고 하는 표현은 제가 사용을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입양이라고 하는 말 자체가 마치 무엇인가를 베푸는 것 같은, 그래서 무엇인가를 시혜를 베푸는 것 같은 그런 뉘앙스를 줄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 교회의 어른들과 우리 아이들이 영적인 가족이 되어서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가 서로를 마음에 품고 좀 돌보는 그런 사랑의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마음이 제 마음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죄성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나보다 조금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을 보거나, 나보다 좀 못나거나 약한 사람을 보게 되면, 이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교만한 마음이 솟아오르기 쉽고,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서 우쭐거리는 마음들이 생겨날 가능성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회복해야 될 아주 중요한 영적인 가치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겸손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늘 회복해야 되는, 그래서 늘 신경을 쓰면서 우리가 다시 한번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아야 하는 것이 과연 내가 겸손한가? 내가 교만한가에 대해서 늘 돌아보아야 하는 것이고, 겸손한 마음을 얻기 위해서 회복하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겸손한 마음을 누구에게서 배울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어린아이에게 겸손을 배우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린아이들처럼 자기를 낮추는 자,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어야 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는데요. 왜 우리는 겸손함을 배워야 합니까? 왜 우리는 어린아이로부터 겸손한 것에 대해서 배워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교만해지려고 하는 죄성이 늘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든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는 교만이라고 하는 것이 움트고 있고 도사리고 있어서, 조금만 방심하면, 조금만 신경을 쓰지 아니하면, 이내 교만한 마음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서 솟아오르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겸손에 대해서 일부러 배우지 않는다고 하면, 자동적으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서 교만한 마음이 솟아오르게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 자라야 천국에서 큰 자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계기가 무엇이냐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던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루는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예수님 선생님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라고 하는 그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제자들의 관심이 천국에서 누가 큰 사람인가에 대한 관심이 있었는데요. 그런데 제자들이 던진 이 질문은 조금 애매합니다. 왜냐하면 이 제자들이 던진 질문이 영적인 질문일까요? 세속적인 질문일까요? 지금 이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묻기를, 하늘나라에서 천국에서 큰 사람은 누가 큰 사람입니까? 우리는 천국에서 큰 사람이 되고 싶데, 천국에서 큰 자가 되고 싶은데, 도대체 천국에서 큰 자는 누구냐고 물어보는 이 질문은 영적인 욕구에서 나온 질문일까요? 세속적인 욕구에서부터 나온 질문일까요?

언뜻 보면 영적인 질문인 것처럼 보입니다. 영적인 욕구에서 나온 질문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물어본 것이 주님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내가 권력을 차지할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내가 연예인이 되어서 정말 많은 인기를 누릴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세속적인 질문을 던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신앙적인, 예수님께 신앙적인 질문을 던진 것 같아요.

예수님, 어떻게 하면 하나님 나라에서 클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 나라에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할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믿음이 제일 좋은 사람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질문을 던졌기 때문에, 이 질문은 영적인 욕구에서 나온 질문처럼 보입니다. 그때 던졌던 그 질문을 오늘날 21세기에 사는 우리들이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면, 아마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목사님, 어떻게 하면 내가 전도 왕이 될 수 있을까요? 목사님, 어떻게 하면 성경에 대해서 더 많이 알아가지고 성경 퀴즈 대회에 아주 우승을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내가 찬송 경연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가 가장 큰 교회가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가 믿음이 뛰어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라고 하는 그런 질문을 던진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니까 이 질문은 세속적인 질문과는 차원이 좀 다른 질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겠느냐? 어떻게 하면 권력을 줄 수가 있겠는가? 인기를 많이 누리겠는가의 질문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그런 위대한 인물이 되겠느냐라고 하는 질문이기 때문에, 그런대로 영적인 질문처럼 보이는 질문이 오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던진 질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렇게 던진 제자들의 질문이 괜찮은 것이라고 인정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크고자 하는 질문에 대해서, 그거 괜찮은 질문이라고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인생을 대충 살아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목표도 없이 그냥 “될 대로 돼라.” 하면서 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옳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경에 보면 달란트 비유에서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명을 땅속에 묻어버리고 방치해 두는 것은 옳지 않다고 성경에서는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에게 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데요. 우리가 수고하고 애쓴 다음에, 그래서 무엇인가를 성취하고 나면,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솟아오르는 교만한 마음이 문제입니다. 내가 이만큼 해냈구나. 내가 이만큼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이렇게 경건하게 살았구나. 그래도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하는 그런 교만한 마음들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솟아오르게 되어 있는데, 주님께서는 그것이 옳지 않다고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들이 교만함이 교만한 생각들이 별로 대수롭지 않은 것이고, 그냥 그럴 수 있는 것이라고 그냥 무시하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왜 무시할까요? 왜냐하면 우리는 늘 그러한 함정에 빠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지없이 그런 함정에 빠지고 있기 때문에, 늘 자연스럽게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자꾸만 발생하는 생각이기 때문에, 이런 정도의 생각이야 다 누구나 빠지는 함정이고, 이러한 생각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이 정도야, 교만한 마음이 드는 것 정도야, 성범죄를 저지르고 도둑질을 하는 것에 비하면, 이런 정도의 잘못은 그냥 봐줄 수 있는 잘못일 거라고, 그냥 애써 무시해 버리려고 하는 경향들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그러한 우리들의 생각을 완전히 뒤바꿔 놓을 말씀을 예수님께서 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8장 3절 말씀에,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느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어떻게 된다고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겸손하게 낮추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단호하게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어린아이들처럼 겸손해져야 자기를 낮추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지,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교만한 마음이 생각이 들고, 교만한 마음이 들면, 그런 사람은 천국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를 교만의 문제는 그렇게 대수롭지 않은 문제고, 그냥 누구나 다 그런 함정에 빠지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천국에 갈 수 있느냐? 못 가느냐라고 하는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 4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천국에서는 누가 큰 자인가? 어린아이처럼 자기 자신을 낮추는 자가 큰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만한 자가 아니라,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는 자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종종 오해하기가 쉬운데요. 어떻게 우리가 오해하냐면, 천국이라고 하는 곳에는 어린아이처럼 자기 자신을 낮추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 사람들은 천국에서 큰 자라고 하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게 될 것이지만, 그러나 교만했던 사람들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자기 자신을 낮추지 못한 사람들은 천국에서 있기는 있겠지만 작은 자리 낮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이라고 오해할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닙니다. 도표를 한번 봤으면 좋겠는데요. 천국에서 큰 자 천국에서 작은 자라고 하는 표현이 성경에 많이 등장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이해를 하냐면, 장소적인 이해를 하는 것이죠. 천국에서라고 했으니까, 천국이라고 하는 곳에는 큰 자도 있고, 작은 자도 있고, 그래서 겸손한 자는 큰 자로서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지만, 겸손하지 못한 사람은 천국에 있기는 있겠지만, 작은 위치를 낮은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라고 장소적으로 이해를 할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의미가 아니고, 천국에서라고 하는 말은 “관점”으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큰 자가 큰 자고, 작은 자가 작은 자겠지만, “천국에서” “천국의 관점으로 본다면” 천국에서 큰 자는 누가 큰 자인가? 어린아이처럼 자기 자신을 낮추는 자만이 큰 자이기 때문에. “천국의 관점으로 본다면” 그런 큰 자만이 천국에 갈 수가 있고, 그렇게 자기 자신을 낮추지 않은 작은 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8장 3절 말씀이 바로 그런 말씀이죠.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서 개털 모자나 쓰고 있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신 것이 아니라,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말씀을 우리가 아주 심각하게 생각을 해야 되는데요. 도대체 그렇다고 한다면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춘다고 하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춘다고 하는 그런 의미는 무슨 의미일까요?

이 말씀은 그러니까 어린아이들이라고 한다면, 다 자기를 낮추는 사람들이고, 따라서 어린아이는 다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어린아이들에게는 좋은 모습이 있을 수 있겠지만, 어린아이들도 태어나면서부터 악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무리 어린아이라고 할지라도 죄가 없이 순수한 영혼이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어린아이들이 다 나쁘다고 하는 얘기가 아니고요. 어린아이들은 비교적 선한 면이 있고요. 순수한 면이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을 보면 아름다운 게 있고, 그리고 때가 덜 묻어서 정말 예쁘고 사랑스러운 면들이 분명하게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런 어린아이들은 다 자동으로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안타깝게도 우리 어린아이들에게도 선한 면이 있을 뿐만 아니라, 사악한 면도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어린아이라고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필요한 것이고, 주님의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를 예로 드신 든 이유는, 그러니까 어린아이들이 다 겸손하다고 해서, 어린아이들이 다 괜찮아서 그런 예를 든 것이 아니라, 이 육적인 세상에서 이 땅에서 본다고 한다면, 어린아이들이 부모님을 보면서 철저하게 부모님을 신뢰하고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부모님을 의존하듯이, 자기가 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깨닫고 아이들은 부모님을 찾는 겁니다. 우리 꼬마 아이들이 부모님을 찾는 거죠. 무엇인가를 하다가 안 되면, “엄마” 하고 불러요. 무엇인가를 하다가 안 되면 “아빠” 하고 부르는 거예요.

왜? 내 힘으로 할 수 없는데, 아빠는 나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줄 수 있고, 엄마는 나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줄 수 있다고 하는 그 사실 때문에, 우리 아이들은 엄마를 찾고 아빠를 찾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어린아이들은 자기 자신의 약함을 아는 겁니다. 내가 불가능하구나. 내가 힘이 없구나라고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빠를 찾고 엄마를 찾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이냐면, 영적으로 볼 때 우리 모두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만한 능력이 없어서,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내가 부족하기 때문에 손 들고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나아갑니다.”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면서, 주님 앞에 나아가는 자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본다고 하면 안타깝게도 수많은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겸손하게 나아간 것이 아니라, 마치 내가 쌓아놓은 의와 공로가 나를 충분히 천국에 들여보내 줄 수 있을 것인 것처럼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간 적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한 다음에 내가 이 정도 신앙생활을 했으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축복 주셔야 되겠죠. 내가 이 정도 신앙생활을 했으면,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은 하나님이 받아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신앙의 공적을 가지고 나와서, 그래도 내가 이 세상에서 목사였는데, 그래도 내가 이 세상에서 장로요 권사였는데, 이 정도면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줘야 되지 않느냐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제가 종종 깜짝깜짝 놀라는 경우가 있습니다. 정말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신 분이고, 정말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셨던 분의 입에서 무슨 얘기가 나오냐면, 내가 주를 위해서 이만큼 헌신했는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왜 이런 고난을 주시는지 모르겠다고 한탄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 제가 너무나도 깜짝 놀라요. 수고를 했긴 했는데, 하나님 앞에 공로로 가지고 가려고 하는 생각이 밑바닥에 깔려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수고한 모든 수고와 헌신이 공적이 되고, 자랑거리가 되어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그 공적을 가지고 나아가려고 하는 그런 잘못된 마음들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들킬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생각들이 누구의 생각이었냐면, 바로 바리새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앞에 나가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는 다른 사람들, 즉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도 같지 않고, 세례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하나님, 저는 이래에 두 번씩 금식하는 거 아시죠? 하나님 제가 소득의 십일조를 완벽하게 드리는 거 아시죠?” 하나님 앞에 자신의 공로를 가지고 나아가는 겁니다.

근데 하나님께서 “잘했다”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의 그 기도를 외면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자가 누구냐면, 세례와 같이 겸손하게 나아가는 자입니다. 세리는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울었어요. “하나님, 저는 완전히 망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 저는 아무것도 내어놓을 게 없습니다. 불쌍히 여겨주세요.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에, 자신의 더러운 모습을 보고, 울부짖는 그 영혼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그 사람을 받아주셨다고 하는 것이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교훈입니다.

우리 아이들도 하나님 앞에 어떻게 나아가야 되는가? 어른들만이 아니라 우리 아이들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하나님 앞에 자신이 부족하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나아가게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아이들을 example로, 예로 드신 이유는 아이들이 신앙적인 면에서는 “다 괜찮다” 아이들은 다 하나님께서 받아주실 수 있다고 하는 의미에서 말씀해 주신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자기 진짜 엄마 진짜 아빠를 보면서 자신의 공로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거 못하니까, 아빠 도와줘요.” “내가 이거 못하니까, 엄마 도와줘요.”라고 하는, 그렇게 자기를 낮추면서 아버지 어머니를 바라보는 것처럼, 우리 모든 사람들이 어른이든, 아이든, 그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내가 가진 어떤 공로를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겸손한 마음으로 나아가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부모님들이 자녀들을 가르치려고 한다고 하면, 자기 자신도 물론 가르쳐야 하겠지만, 우리 자녀들을 가르친다고 한다면,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도록 자신의 부족함을 보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 교육을 할 때,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인데, 안타깝게도 우리 한국 성도들이 하는 대부분의 신앙 교육은 율법주의적으로, 우리 아이들을 교육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적으로 우리 아이들을 가르치면, 자동적으로 영적으로 교만해지게 되어 있고, 자동적으로 영적인 바리새인으로 바뀌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을 눈에 보이고 측정할 수 있고 하는 그런 행위와 법칙들로 단순화시키는 것은 정말 위험한 일입니다.

예를 들어서, 신앙생활을 무엇이라고 규정하냐면, 주일을 성수하는 것, 기도하는 것, 성경을 읽는 것, 제대로 된 헌금을 드리는 것, 예배 시간에 떠들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 기도 시간에 눈 뜨지 않고 눈 감고 있는 것, 성경을 암송하고 전도하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단순화시키고 율법화 시키면, 그러면 신앙생활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 몰라요 그런 것들만 하면 되니까. 그런데 신앙생활을 그렇게 단순화시키고 측정할 수 있는 율법주의로 바꾸어 버리면, 결국 우리 아이들이 바리새인과 같은 신앙인으로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무엇이냐면 하나님께서 정말 중요하게 여기시는 것에 대해서는 단순화시킬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냐면 사랑하는 마음이에요. 정의로운 행동이고, 긍휼을 베푸는 마음이고,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고, 주님을 신뢰하는 것이고, 주님을 믿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인데, 그것은 수치화할 방법이 없어요.

율법으로 만들 방법이 없어서, 그러한 것들은 다 제쳐놓고, 예배 시간에 눈 떴나, 가만히 앉아 있었나, 장난을 쳤는지, 기도 시간에 눈을 감았는지, 떴는지, 이러한 것들로 단순화시키고 수치화시키면, 달성 가능한 목표로 바꾸어 버리게 되면, 우리 아이들은 정말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만 다 실천을 하고, 그것을 다 실천했기 때문에 나는 괜찮은 신앙인이라고 오해하는 영적인 바리새인들로 만들어 버리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정말로 원하시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채, 피상적으로 율법의 행위들만을 지켜버리고, 그리고 그것을 다 지킨 다음에는 자동적으로 영적인 교만함에 빠질 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경멸의 태도와 정주의 태도로 일관하는 겁니다. “저 나쁜 놈들은 토색 하는 사람들이야. 나는 토색 안 해도, 저 나쁜 사람들은 간음하는 사람들인데, 나는 간음하지 않았고, 저 사람들은 악한 일을 저지르고 있는데, 나는 주님 앞에 예배를 드렸고, 저 사람들은 동성애를 하고 있는데,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켰고”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가 이렇게 바리새인이 되어서,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고, 정죄하는 것이 제대로 된 신앙인 것처럼 잘못 가르치고 있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러한 바리새인적인 신앙을 칭찬하신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 앞에 나아오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되는 것은 내가 연약하기에 우리에게 예수님이 필요하다고 하는 사실을 알려주어야 하고, 그래서 인생의 힘들고 어려운 굴곡마다 내 힘과 능력으로 하다가 망할 것이 아니라, 그 앞에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주님, 도와주십시오.” 이 연약한 자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릴 수 있는 믿음으로 바뀔 수 있도록 가르쳐 주어야 하는 것이고, 우리의 신앙도 그렇게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저 높고 높은 보좌 위에서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셨고, 저와 여러분들의 모든 실패와 잘못과 죄악들을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우리가 죽어야 될 그 죽음을 예수님께서 대신 주셨습니다.

그 앞에 하나님 내가 이 정도로 신앙생활을 했으면 괜찮은 거 아니에요. 교만한 마음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겸손하게 주님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나아가야 할 것이고, 사랑하는 우리 자녀들에게 주님을 의지하는 법을 가르쳐 줄 수 있는 귀하고 복된 주님의 백성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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