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3 가만 두라는 농부의 권고

– 이국진

가라지를 지금 당장 뽑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라는 농부의 말은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교훈일까? 한 편으로 그렇다. 가라지를 뽑다가 알곡을 다칠 수 있다는 말은 우리가 새겨들어야 지혜이다. 빈대를 잡으려다가 초가삼간을 태우면 안 되는 것이고, 쇠뿔을 교정하려다가 소를 죽여서는 안 되는 것처럼, 자칫 가라지를 뽑으려다가 알곡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하더라도 누구든지 받아들여야 하는 일반적인 상식에 해당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교훈을 하려는 것이 이 비유의 근본 목적은 아니다. 종종 이 비유는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악한 사람들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에 관한 비유로 이해되었고, 따라서 이 비유는 어설프게 교회를 정화시키려는 노력은 오히려 교회에 해롭다는 주장으로 사용되었다. 크리소스톰은 비유를 해석하면서 교회 내에 숨어들어와 있는 이단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뽑아내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는데, 1 이런 류의 해석은 한국 교회 강단에서 자주 들리는 해석이고 특히 교회 내에서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할 때마다 문제를 덮기 위한 논리로 사용되곤 한다. 학자들은 예수님의 이 비유가 당대에 자신들만이 옳다고 생각하면서 배타적인 입장을 취했던 열심당파, 바리새파, 쿰란 공동체의 태도와 다른 예수님의 입장을 보여준다고 보았다. 2 사이먼 키스트메이커는 “이 비유를 징계의 불필요성과 법의 적용과 집행의 부인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이 비유는 우리가 ”자칭 재판관으로서 행세치 말도록 가르치고 있다“고 적용한다. 3 교회가 거룩해지려는 노력은 가상한 것이겠지만, 죄인이 하나도 없는 순수한 교회를 만들려는 시도는 무모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4

하지만 이러한 접근법은 이 비유의 유사점과 대조점이 무엇인지 혼동한데서부터 오는 결론들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는 종종 밭의 주인이 내린 이 명령을 오해하여, 비록 교회 내에서 잘못이 자행되고 불법이 성행하더라도 방관해도 좋다는 메시지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교회 내에서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려 했다가 오히려 교회가 분란에 휩싸이게 되고, 결과적으로 전도에 방해가 될 수 있으니, 그냥 지나가야 한다고 사람들은 종종 생각한다. 어차피 우리가 지금 심판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에 심판하실 것이니, 우리가 섣불리 하나님의 심판자 역할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목사님이 아무리 큰 죄를 짓는 것 같아도, 정말 죄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이니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도록 할 것이고, 우리가 괜히 나서서 함부로 기름부음 받은 종을 심판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본문의 비유는 그렇게 적용할 수 없다. 이 비유는 교회 내에 죄의 문제가 있어도 가만히 두라는 교훈이 아니다. 그렇게 보아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 악을 행하는 자들을 바로 잡으라고 가르치고 있고, 심한 경우 출교시키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 교우들에게 이렇게 편지했다.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이나 속여 빼앗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너희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욕을 부리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모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속여 빼앗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 밖에 있는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야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하지 아니하랴?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 (고전 5:9-13)

바울 사도는 고린도 전서라고 알려진 편지를 보내기 전에 이미 또 다른 편지를 고린도 교회에 보낸 적이 있었다. 앞에 인용한 구절은, 그 때 했던 말을 바울 사도는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설명하는 부분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전서보다 먼저 보낸 편지에서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고 썼다(고전 5:9). 이 말은 불신자들과는 전혀 교제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었다고 밝힌다(고전 5:10). 여기서 “사귀지 말라”는 말이나 “함께 먹는다”는 말은 교회라는 공동체에서 출교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용어이다(고전 5:11).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여전히 심각한 악을 행하고 있다면, 그 사람을 교회라는 공동체 밖으로 쫒아낼 것을 주문하는 것이다. 즉 교회에서 출교시켜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불신자들이 죄를 짓는 것이야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도록 내버려 두어야 하겠지만, 교인이라 불리는 사람이 죄악을 범한다면 그 사람은 교회라는 공동체에서 출교시켜야 한다고 한 것이다(고전 5:12-13).

이러한 고린도 전서 5장의 가르침은 우리 한국 성도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과는 정반대되는 생각이다. 한국 성도들은 종종 목회자는 하나님의 기름 부은 종으로 만일 죄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하실 것이니, 우리가 참견할 것이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정 반대이다. 불신자들의 잘못은 하나님이 직접 심판하실 것이니 우리가 참견할 것이 아닌 반면, 교회 멤버들 가운데 있는 잘못과 죄악들은 교회가 심판하여 출교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은 여론몰이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라는 말이 아니다. 적절한 과정을 통해서, 교회 내에서의 악을 제거하는 일이 계속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18장에는 형제가 범죄할 경우에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지를 기록하고 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마 18:15-17)

첫 번째 단계는 범죄를 저지른 당사자에게 찾아가 권고하는 것이다. 제3자에게 소문을 퍼트리고 비난하며 소문을 내는 것이 첫 번째 단계가 아니다. 빌립보서 2장의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당사자에게 직접 접근해야 한다. 상대방을 정죄하는 마음이 아니라, 정말 그 사람을 사랑으로 교정하고 온전하게 치유하기 위한 마음으로 다가가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빌 2:1-4)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교우에게 접근하는 목적은 예수님의 목적과 같아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하늘 보좌를 버리고 자신을 비우며 종의 형체를 가지고 우리와 같은 모양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셨다. 우리가 범죄한 형제에게 접근하는 이유는 그를 살리기 위함이지, 비난하고 밟아버리기 위함이 아니다.

하지만 회개하기를 완강하게 거부한다면, 증거를 통해서 회개를 유도해야 한다. 그래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교회에 말해야 한다. 장로교 시스템 속에서라면, 당회에 말해야 하고, 목사의 문제라면 노회를 통해서 회개를 도와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그냥 수수방관만 하고 있다면, 그것은 성경적인 가르침에서 위배되는 것이다.

교회 내에서 잘못된 일을 자행하는 자가 있을 때에도 참견하지 말고 가만히 놔두는 것이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가 전달하는 메시지가 아닌 두 번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밭이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 13:38). 놀랍게도 많은 학자들이 예수님의 이러한 직접적인 설명에도 불구하고, 밭이 세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해석해야한다고 주장한다. 5 이렇게 해석하는 이유는 교회 내에 여전히 의인과 악인이 섞여 있을 것이라는 것이 마태복음의 주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일 것이다(7:21-23; 13:49; 21:28-32; 22:11-13; 25:1-12), 하지만 예수님께서 밭이 세상이라고 해석해주셨고, 밭을 세상으로 간주하고 해석할 때 자연스럽게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밭을 교회로 해석해야 할 이유는 없다. 6 물론 이 비유를 폭넓게 적용해서 교회라는 공동체에 적용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악은 세상의 종말이 오기 전까지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성경적인 교훈이다. 가라지를 뽑지 말라고 주인이 종들에게 명령한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의 무리에 대한 심판을 심판 때까지 연기한다는 의미이지, “교회” 내에 존재하고 있는 악을 그냥 방치해도 좋다는 의미가 결코 아닌 것이다. 이 비유는 기본적으로 심판에 관한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에 관한 교훈이지,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악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에 관한 교훈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가라지를 뽑지 말고 가만 두라고 명령을 받은 것은 우리들에게 주신 명령이 아니라, 천사들에게 주신 명령이라는 사실이다. 비유에서 이 명령을 받은 종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실행하는 천사들을 가리킨다. 그 천사들에게 지금은 가라지로 비유되는 악한 자들을 지옥의 형벌에 넣지 말고, 그냥 놔두라고 하신 것이다.

그렇다고 교회 내에서 마녀사냥을 하듯이 교회 내에서 악한 자를 색출해내고 서로 비난하고 싸워도 좋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기 전까지는, 교회 내에도 여전히 좋은 물고기와 나쁜 물고기가 존재할 것이며,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 있을 것이다. 교회가 순결한 신앙의 공동체가 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은 필요하겠지만, 그것은 한 영혼을 소중하게 여기며 창기와 세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셨던 주님의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이 비유는 교회가 순결해지기 위한 노력들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으로 악용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세상의 농부는 알곡을 다치게 하지 않으면서 가라지를 뽑아낼 능력이 없지만, 하나님은 전혀 의인들을 다치지 않게 하시면서 악인들을 지금이라도 충분히 제거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니까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세상의 농부와 하나님은 비교되는(compared) 것이 아니라, 대조되고(contrasted) 있다. 이 점은 유사점이 아니라, 대조점이다. 하나님이 악인을 당장 심판하지 않는 이유는 농부의 이유와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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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 최갑종,『예수님의 비유: 본문, 해석 그리고 설교/ 적용』(이레서원, 2001), 101.[]
  2. Robert H. Gundry, Matthew: A Commentary on His Literary and Theological Art (Grand Rapids: Eerdmans, 1982), 265.[]
  3. 사이먼 J. 키스트메이커,『예수님의 비유』(기독교 문서 선교회, 2002), 71-73.[]
  4. 배용덕,『예수님의 비유』(서울신학교), 50.[]
  5. Arland J. Hultgren, The Parables of Jesus: A Commentary (Grand Rapids: Eerdmans, 2000), 299. D. C. Sim, Apocalyptic Eschatology in the Gospel of Matthew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6), 210-211.[]
  6. 도날드 해그너,『마태복음 1-13』(솔로몬, 1999), 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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