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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소리 신문 기사 (12/10/2003)

http://www.deulsoritimes.co.kr/technote/read.cgi?board=tu&y_number=211&nnew=2

〈예수는 없다〉, 〈예수는 있다〉, 〈예수그리스도 바로보기〉 분석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동일하시다”
요즈음, 〈예수는 없다〉에 반응하여 〈예수는 있다〉로 응수하는 공방의 와중에 〈예수 그리스도 바로보기〉가 길라잡이 하겠다고 나섰다.

세 사람의 필자(저자)는 각기 분명한 자기 소신과 신학적인 자세로 예수를 만나고 있다. 그러나 한 시대에는 숨을 죽이고 있었던 `적 그리스도들’의 문서들이 자유세계화 분위기에 뛰어들어 교회를 혼란케 하여 큰 어려움이 예상된다.

예를 들어 ①예수는 로마 군인의 사생아가 아닌가? ②예수는 결혼했으며 창녀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아내가 아닌가? ③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가사 상태에서 소생한 것이 아닌가? ④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 살아나서 프랑스로 간 것이 아닌가? ⑤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빌라도의 사기극이며 다른 사람이 대신 처형된 것이 아닌가? ⑥12살 이후 예수는 인도로 가서 부처의 제자가 된 것이 아닌가?

이상의 요구들에 대한 기독교의 답변이 있어야 하겠다. 이에 대한 답변 모두는 아니지만 본문에 소개하는 3권의 책이면 어느 만큼의 답변이 될 수도 있다.

먼저, 〈예수는 없다〉(현암사 펴냄)를 보자. 저자 오강남(吳剛男) 교수는 동·서 사상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졌으며 장자, 붓다, 또는 불교와 기독교에 대한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다.

이 책에 대한 소개를 보면 먼저 전 건대·한신대 총장을 지낸 정대위 박사는 `우리의 신앙을 한 번 뒤흔들어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해 주는 책으로 일독만이 아니라 재독, 삼독을 권하고 싶다. 21세기에 들어선 오늘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진정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알아보려는 모든 `길벗들’에게 하나의 자극제나 각성제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쉬움도 있다. 오강남 교수의 〈예수는 없다〉 서두에 `과연 교회 안에 구원이 있을까?’라 했는데 이는 `교회’를 신자 그룹 또는 예배당에 수용되는 수준의 신자를 지목하면서 하는 표현으로 보여진다. 특히 1960년대 제 2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라는 선언에 기대를 한다는 것은 착오인 것 같다. 왜냐하면 바티칸의 교회 밖 구원론은 오 교수의 요구에 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 교수의 도전과 지적은 매우 지식에 충실하며, 교회의 구원이 자기들의 독점인양 우쭐대는 교회주의자들에게 큰 경종을 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오 교수의 채찍이 진리의 모든 것일 수 없음이 안타깝다.

〈예수는 있다〉(기독신문사 펴냄〉를 내어 놓고 오강남 교수의 `∼ 없다’에 받아치는 대응을 하고 있는 이국진 목사의 용기와 자신감에 기쁘게 격려를 보낸다.

그리고 재미있게 만나는 것은 오강남 교수의 책의 구조를 따라서 맞대응을 하고 있음이다. 1∼6장까지의 내용들인데 오강남 교수의 `I.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에 대해 이국진 목사는 `1장 나의 아버지는 한 분’으로 대응하고 있다. `성경대로 믿는다?’에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다?’, `잘못된 신관은 무신론만 못하다’에 `잘못된 신관 100′, `예수는 없다’에 `예수는 있다’로 받아치고 있다.

이는 편 가르기 선상에서 자기편을 옹호하는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급한 김에 수비형 공격 수준을 선택했음을 볼 수 있다. 또 이는 일반 기독교 안에서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기준을 제시했다고 본다.

이렇게 양자가 토론이나 대화, 또는 상대방을 긍정해 주지 않는 야박한 싸움을 하고 있을 때 허호익 교수가 〈예수 그리스도 바로 보기〉(한들출판사)를 내놓았다. 책의 분량부터가 중후하며 조심스럽게 양자를 바라보면서 그는 우선 책 머리말에서 앞서 제기했던 6가지 삐딱한 의문에 하나하나 반박을 해 주었다고 말한다.

허 교수가 반박하는 의문들은 이 글의 앞부분에 있는 6가지로, ①예수는 로마 군인의 사생아인가? 등을 말한다.

허 교수의 〈예수 그리스도 바로 보기〉는 제 1장 예수 연구의 역사적 자료, 제 2장 예수 시대의 역사적 배경, 제 3장 예수의 초기 생애, 제 4장 예수의 세례의 시험, 제 6장 하나님 아버지 나라에 대한 가르침, 제 7장 하나님 나라와 유대교 종교제도, 제 8장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통치, 제 9장 하나님의 나라와 가난한 사람들, 제 10장 예수의 선교의 삶의 형태, 제 11장 예수의 재판과 십자가 처형, 제 12장 예수의 부활, 제 13장 유대교의 4대 종파와 예수의 앞선 생각, 제 14장 예수 그리스도 바로 보기, 제 15장 부록으로 되어 있다.

이같은 자세는 최소한 책의 내용 이전에 기독교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본적 예의를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없다와 있다는 서로의 입장이고 허호익 교수의 〈∼ 바로보기〉는 그 책 제목처럼 고뇌하며, 공부하고, 또 믿음의 자세를 지켰다고 본다.

끝으로 지면 관계상 이만 줄여야 하면서도 두가지 당부는 꼭 하고 싶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그 구체적 잉태가 이삭의 모리아 희생에서 십자가의 예수까지의 신묘한 하나님의 섭리이며, 좀 더 극적으로는 바벨론 포로기에 잉태한 고난과 대속의 메시아는 바로 예수였기에 5백여 년 만에 태어난 생명으로의 예수를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둘째는 여기에 거론한 세권의 책을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은 반드시 읽고 스스로 답변과 비진리에 대한 적극적 대응법을 배워야 한다고 본다.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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