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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평하게 하는 자

저는 전후 세대라서 전쟁을 경험해 보지 않았지만, 아마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는 전쟁을 직접 겪어보신 분들이 계실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6.25 전쟁을 겪어보셨든지, 아니면 월남전에 참여해서 전쟁의 그 참혹한 상황을 경험해 보신 분이 있을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그 전쟁을 경험하신 분들은 전쟁이야말로 인간성을 말살해 버리는 아주 무서운 것이라고 하는 것을 생생하게 실감하셨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휴전 상태이기는 하지만, 직접적으로 전쟁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 비교적 안전한 나라에 우리가 살고 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미국이라고 하는 나라는 전 세계의 분쟁 지역에 군대를 파견하고 있어서, 실제로 전쟁이 끊이지 않는 나라가 미국입니다. 대부분들의 시민들이야 전쟁 본토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전쟁을 실감하지 못하지만 미군들이 전 세계 분쟁 지역에서 전투에 참여를 하고, 그리고 그 참여한 군인들이 퇴역한 군인들도 있고, 전쟁 가운데서 다쳐서 할 수 없이 이제는 더 이상 군인의 역할을 할 수 없는 그런 부상을 당한 상위 군인들이 많이 돌아오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요. 그 군인들은 그 전쟁의 트라우마 때문에 전쟁이 끝난 전쟁의 현장에서부터 나온 지금도 상위 군인들은 그 상처 때문에 엄청나게 힘든 삶을 살고 있지만, 그런 상처를 당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자기 옆에서 동료가 죽어가고 그 참혹한 상황을 보았던 그 트라우마 때문에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것이 정말 힘들고 어려울 정도로 그렇게 그 전쟁의 후유증이라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큰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종종 그런 퇴역 군인들 상위 군인들의 트라우마의 이야기들이 영화를 통해서 종종 표현되고 있기는 하는데요. 아무튼 이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본다고 하면, 승자도 있고 패자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리고 그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 몇몇 사람들은 그 승리의 기쁨에 동참할 수도 있겠지만, 이겨도 엄청난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고, 전쟁의 트라우마와 후유증과 공포가 너무나도 크다고 하는 것을 잘 알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전쟁과 평화 가운데 우리가 선택해야 된다고 하면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요? 평화를 선택해야 되는 것이죠.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이겨도 이긴 게 아닌 게 전쟁인 것일 수밖에 없거든요. 따라서 전쟁과 평화 가운데서 선택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당연히 평화일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할 수만 있다고 한다면 싸우지 않고 해결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이 될 것입니다.

손자병법에 나오는 말이라고 하는데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백전백승 비선지선야. 부전이굴인지병 선지선자야”(百戰百勝 非善之善者也 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 무슨 말이냐면 100번 싸워서 100번 이기는 게 선지선(善之善) 최선이 아니다. 무엇이 최선이냐? 싸우지 않고 굴복시키는 그런 군인이 선지선자(善之善者) “최선의 사람이다”라고, 그렇게 손자병법에서 말하고 있는데, 정말 맞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화평의 방법, 평화의 방법을 찾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나 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겠습니다. 하지만 그게 잘 안 되는 것이죠. 그게 잘 안 되는 것이죠. 우리는 평화를 원한다고 해서,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전쟁을 걸어오면 할 수 없이 전쟁을 해야 되는 거죠. 나 혼자 평화를 유지하고 싶다고 내가 평화를 지키고 싶다고 해서 평화가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전쟁을 걸어오게 된다고 한다면, 어쩔 수 없이 전쟁을 해야만 하는 것이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전쟁을 할 수밖에 없는 그런 불가피한 일들이 전 세계에서 지금도 여러 나라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국가 사이에서만 전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삶 가운데서도 전쟁이 늘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싸움과 다툼과 분쟁이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늘 존재하고 있는데요. 안타깝게도 가장 사랑해야 하고 가장 아껴주어야 할 사람과 싸우고 다투고 분쟁이 일어납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죠. 가장 사랑해야 될 남편과 아내가 서로 싸우는 일들이 많이 발생하는데, 그 싸움이 도가 지나치게 되면, 심한 경우에는 도무지 이제는 더 이상 같이 할 수 없고,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그런 결과가 빚어지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부모와 자녀 사이에도 싸움이 일어납니다. 그 싸움이 언제부터 시작이 되나요? 어렸을 때부터. 엄마는 먹이려고 하는데, 아이는 안 먹겠다고 버티고, 그래서 서로 싸우는 것에서부터 싸움이 시작되어서, 계속해서 부모와 자녀 사이의 갈등과 다툼과 분쟁이 일어나게 되고, 그것 때문에 너무나도 힘든 가정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심지어 사랑이 넘쳐나야 할 교회에서조차도, 분쟁이 너무나도 자주자주 발생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싸움이 왜 생기는 것일까요? 왜 우리 가운데 다툼이 분쟁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국가 간의 전쟁에 승자나 패자나 할 것 없이 엄청난 파괴를 가져오고 수많은 피해자들을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수많은 고통을 가져다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개인에게서 일어나는 싸움 가정에게서 일어나는 싸움, 그리고 교회와 사회에서 발생하는 그런 모든 싸움들도 알고 보면 결국은 승자가 없는 싸움이고, 모두가 다 패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인데, 결과가 뻔한 모두가 다 지는 것일 수밖에 없는 싸움일 수밖에 없는 것인데, 왜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는 싸움이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갈등이 일어나고, 아픔과 싸움들이 끊이지 않는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 가운데 싸움이 있는 이유는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탄의 속임수에 속아 넘어가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 너무나도 나약한 나약한 존재이고 사탄의 유혹에 쉽게 넘어질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기 때문에, 사탄의 영에 사로잡혀서 사탄의 자녀가 되어 그래서 우리는 서로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이라고 할지라도 적어도 싸우는 그 순간만큼은 우리는 사탄의 종노릇하고 있는 것이고, 사탄의 자녀처럼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팔복의 말씀을 하시면서, 일곱 번째 말씀으로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오라고 말씀하셨는데요.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분명하죠. 분쟁과 싸움을 일삼는 자는 누구겠습니까? 사탄의 자녀인 것입니다. 평화와 화평과 화목을 이루려고 하는 자, 추구하는 자는 누구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만일 내가 지금 평화를 추구하고 있고 화목을 얻으려고 하고 있고, 화목을 이루려고 하는 마음이 있다고 한다면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고, 만일 내가 싸움을 걸려고 하고, 다투려고 하고 분쟁하려고 하는 마음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가득 들어 있다고 한다면,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우리가 사탄의 자녀처럼 행동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는 싸움을 걸면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냐면, 내가 사탄의 종이 되어서, 내가 사탄에게 내 영혼이 사로잡혀서 내가 사탄의 자녀가 되어서 나는 이렇게 싸우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고 하는 것이죠. 우리는 싸우면서 어떻게 생각하냐 하면, 우리는 전쟁을 하면서 생각하기를, 우리는 내가 사탄의 종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정의를 위해서 싸운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싸우면서 죄책감에 휩싸이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지금 화를 내는 이유, 내가 지금 싸우는 이유는 정당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고, 의로운 분노를 하는 것이지, 나는 지금 나쁜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탄은 우리를 어떻게 속이냐면, 우리가 분노하는 것, 우리가 지금 싸우는 것이 정당한 것이다. 이것은 의로운 분노이다. 너는 분노해야 될 싸워야 할 정당한 이유가 있다고 우리들을 믿게 만드는 겁니다. 내가 지금 저 사람과 싸우고 있는데, 내가 지금 싸움을 일으키고 있는데, 내가 왜 싸움을 일으키고 있는가? 내가 지금 사탄의 종이 되어서 사탄에게 내 마음이 빼앗겨버려서 이렇게 싸우고 있다고 생각하게 하지 않고, 나는 지금 정의의 사도로 나는 정의를 위해서 나는 옳은 것을 위해서 싸우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심각하게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겁니다. 내가 지금 분노하고 있고 싸우려고 하고 있고 다투고 전쟁을 일으키고 있는데, 과연 이렇게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과연 정의로운 일인가? “과연 이것이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인가?”라고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하는데요.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내가 이렇게 싸우는 이유는 정의를 위해서 싸우는 것이고 내가 정의롭다고 생각이 되면, 그 순간부터는 그 어떤 폭력을 써도 그 어떤 전쟁을 해도, 어떠한 폭력을 쓴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정당한 것이라고 스스로를 정당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경우를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는데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을 때, 예수님을 체포하기 위해서 대세의 사장들과 장로들이 보낸 체포조가 출동했습니다. 아무런 죄가 없는 예수님을 체포하는 사람이 나쁜 사람입니까? 예수님이 나쁜 사람입니까? 아주 간단한 것이죠. 예수님은 죄가 없는 것인데, 그 죄가 없는 예수님을 체포하는 자들이 악한 사람들인 겁니다. 아무 죄가 없는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하는 저 군인들 저 체포조들은 악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순간에 베드로의 판단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칼을 휘둘러서 싸우려고 한 것이죠. 아무 죄가 없는 예수님을 보호하는 것이야말로 정의로운 것이고, 그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해서 칼을 휘두르면서 함께 왔던 제사장의 사환의 귀를 잘라버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마태복음 26장 52절의 말씀에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칼을 가지고 정의를 보호해야 그래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항거하지 않으면 정의를 포기하게 될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무장하고, 이겨내지 아니하면, 싸우지 아니하면, 여러분들은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칼을 쓰는 자는 다 칼로 망하게 될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칼을 쓰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전쟁을 하고 싸우고 다투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이 아닌 것입니다. 이 점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싸우는 것은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입니까? 우리는 싸우는 이유가 정의를 위해서 싸운다고 생각하고, 우리는 옳은 것을 위해서 싸운다고 생각을 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4장 1절 말씀에, 싸움이 어디에서부터 오는가? 정의감에서부터 오는 것인가? 야고보서 4장 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정의감에서부터 싸움이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있는 정욕에서부터, 싸움이 시작된다고 하는 겁니다.

보통 우리가 싸움을 할 때는 정의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라고 포장을 하면서 싸웁니다. 그렇게 포장해야만 내가 싸울 수 있는 정당성이 확보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분명하게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싸움이 정의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것이 정욕으로부터 이기심과 탐욕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정의감으로 우리들의 분노를 포장하고 정의로 우리들의 환하는 것을 포장한다고 할지라도, 사실은 그것이 정의감에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내 마음속에 있는 그 이기심 탐욕 정욕으로부터 우리의 분노가 나오는 것이고 싸움이 나오는 거라는 것을 분명하게 우리 자신이 스스로 인식해야 하는데요.

다른 사람들은 다 알아요. 저 사람이 지금 정의를 말하고 있고, 저 사람이 화를 내면서 싸움을 드는 그 이유가 저 사람의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저렇게 싸우고 있다고 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다 파악하고 있는데, 정작 자기 자신은 다른 사람들이 내가 정의를 위해서 싸우고 있다고 속고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분명하게 압니다. 저 사람이 지금 정의를 이야기 이야기하고 있고, 옳은 것을 이야기하고 명분을 좋은 것을 내세우고 있지만, 사실은 그것은 명분뿐이고 그 마음속 깊은 곳에 탐욕스러운 마음이 숨어져 있고, 악한 마음이 숨어져 있다고 하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동의해 주지 않는 것이죠.

하나님의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자녀라고 한다면,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전쟁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화평을 추구하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가 싸워서 이기는 것은 그래서 싸움을 통해서 승리를 쟁취하는 것은, 이긴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진 것입니다. 사탄에게 진 것입니다. 형식적으로 겉으로 보이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었고, 그리고 내가 그 싸움에서 승자가 되었기 때문에 승리한 것처럼 보이지만, 영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그 사람은 사탄에게 굴복해 버려서 결국 사탄의 노예가 되어 버린 사탄에게 져버린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로마서 12장 20절에서부터 21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하므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라.” 싸워서 악을 물리치는 것은 이긴 것이 아니라 악에게 치는 것이니까, 그렇게 악에게 지지 말고 악과 더불어 싸워가지고 그래서 이기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해서 그래서 이긴 것처럼 보이는 그런 지는 싸움을 하지 말고, 그런 자들에게도 선을 행함으로써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성경에서는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지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이 진 것이 아니라 이긴 것이고, 손해를 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손해를 본 것이 아니라 복된 것이라고 하는 영적인 관점을 우리 모두가 회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을 생생하게 보여준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하는 그 사람들과 싸우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받기 위해서 부당하게 예수님을 잡아가고, 그리고 재판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그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힘과 권능을 사용해서 그 사람들과 싸워서 이긴 것이 아니라, 마치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처럼 예수님께서는 입도 뻥끗하지 아니하시면서 그 고난의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게 복음이에요. 그게 다른 게 복음이 아니고, 그게 하나님의 십자가의 복음이에요.

오늘날 엉터리 종교인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입니다. 오늘날 엉터리 종교인들은 뭐라고 이야기를 합니까? 패거리 논리에 사로잡혀서, 진영 논리에 사로잡혀서, 우리의 권리를 보호하고 우리의 그 권리를 누리려고 한다면 여러분들이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지금 이 순간에 우리는 분열이 일어나서 싸워야 합니다. 싸우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앞으로는 설교도 하지 못하게 될 것이고, 앞으로 복음 전파하는 것도 어려워질 것이고, 그러니까 지금 투쟁해야 되는 것이고, 공무원들에게 가서 따지고 그들을 욕하고 짓눌러 버려서, 그래서 우리가 그들을 장악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결국 다 빼앗겨 버릴 거라고 우리들에게 전쟁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공무원들을 향해서 화염병을 던지면서, 그들의 공무집행을 방해하고, 우리들의 권리를 추구해야 그래야 우리의 권리를 빼앗기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어요. 십자가의 길이 망하는 길처럼 보이고, 손해 보는, 손해 보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이냐면, 화평하게 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가신 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달려들 때, 주님께서 바리새인들과 대결해서 싸우려고 하셨다고 한다면 충분히 싸워서 이길 수 있었을 겁니다.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분이시고, 아픈 질병을 고치실 수 있었던 우리 주님, 그리고 파도를 잠잠케 하실 수 있었던 주님께서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물리치는 것 정도야 식은 죽 먹기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마태복음 12장 14절에서부터 21절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예수께서 싸운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많은 사람이 따르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의 병을 다 고치시고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고하셨으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 방에 알게 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들렌다’라고 하는 말이 무슨 말인가요? 한 번도 안 쓰는, 한국말 단어인 데, 소리 지르지 않는다는 말을 그렇게 번역해 놨습니다. “다투지도 않고 소리를 내지도 않고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그래서 예수님께서 지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부활하셨고, 그래서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셔서 결국에는 승리하셨다고 하는 그 사실을 우리가 항상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악이 판치고 있는데도 그냥 잠잠해야 하고, 현실에 안주하기만 해도 괜찮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결단코 아닙니다. 변화를 위한 시도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결단코 아닙니다. 참된 화평, 참된 평화가 무엇인가? 그것은 참된 평화, 히브리어로 샬롬(shalom)이라고 이야기하는데요. 참된 샬롬이 무엇인가? 참된 평화, 참된 화평이 무엇이냐면, 그냥 잔잔한 것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샬롬은 그냥 잔잔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정의가 회복된 상태를 가리켜서 샬롬이라고 말합니다.

비유하자면 웅덩이에 고인 물은 잔잔하지만, 그러나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썩어 있는 물입니다. 그 안에서는 아무것도 살 수가 없고 물고기가 살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시내를 흐르는 그 물은 막 요동치면서 흐르기 때문에 잔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거기에는 생명이 있고 거기에 물고기가 살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샬롬이 무엇이냐 하면, 그림을 그려서 설명하자고 한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샬롬은 웅덩이에 고여 있는 그런 잔잔한 물을 성경에서는 샬롬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샬롬은 무엇이냐 하면 물이 흐르는 그 시냇물처럼, 잔잔한 것 같지 않지만 그러나 요동쳐 흐르지만 거기에는 산소가 들어가 있고 생명이 살아 있고 거기에 물고기도 살 수 있는 그런 숨 쉬는 그런 물과 같은 것을 가리켜서 샬롬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오해하지 마십시오. 화평을 추구한다고 하는 것은 그러니까, 이 세상이 썩어 문드러지고 부리가 판을 치고 악한 사람들이 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순응하면서 그냥 아무런 그것을 바로잡으려고 하는 그런 시도를 하지 않고 그냥 지내는 것이 괜찮다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샬롬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죽어 있는 것을 살리고 그래서 평화가 되는 것이죠. 우리 가정에서도 그냥 말 안 하고 분쟁 소리가 안 지르고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상태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것은 바로잡고 사랑의 관계가 회복되고, 그래서 따뜻한 애정이 넘치는 그런 행복한 가정으로 변화되어야 그것이 참된 화평인 것이지, 불만이 자녀들도 불만이 있고 남편도 불만이 있고 아내도 불만이 있는데, 그저 말만 안 하고 싸우지만 않는 그 상태가 화평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추구함에 있어서, 우리는 균형을 잡아야 하는데요. 이게 쉽지가 않은 것이죠. 우리는 정의를 추구한다고 하는 것이 결국은 폭력적으로 되기가 쉽고, 우리는 평화를 추구한다고 하는 것이 불의 앞에서 무기력해지기가 쉽습니다. 양쪽 극단으로만 가는 것이죠. 성경에서 원하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정의로우면서도 평화를 추구하는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 실제적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 그건 숙제예요. 저도 몰라요.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어떻게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면서도 그리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그 방법이 무엇일까? 그게 너무너무 힘들어요. 우리는 정의를 위한다고 하면 금세 폭력적이 돼 버려서, 그래서 말 안 듣는 아이를 때리기도 하고 그래서 결국 죽이기도 하고 그런데, 평화의 방법을 쓰자고 한다면 아이들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속수무책으로 그냥 아이들이 가는 그것을 손도 대지 못하게 되는 양극단만 있을 뿐, 정말 바른 길로 가게 하면서도 화평의 방법, 샬롬(shalom)을 찾으려고 하는 그것이 쉽지 않은 것이고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인 것이죠.

그것이 답이 쉽지 않기 때문에 그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주님 앞에 나아갈 필요가 더더욱 있습니다. 우리는 화평을 추구하기보다는 자꾸만 싸움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고, 더 나아가서 우리는 죄성으로 가득한 사람들이어서 정말 참된 길을 가기보다는 양극단으로 인해 흘러버리는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에, 가장 흔하게는 정의를 추구한다고 하면서 옳은 것을 선택한다고 하면서 쉽게 분노해 버리고 싸움으로 들어가 버리는 연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늘 필요합니다.

우리가 실수하고 넘어질 때마다 내가 분노하고 화를 내고 싸우는 그런 사탄에 사로잡힌 모습을 보일 때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다시 나아가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이고, 뿐만 아니라 우리들에게 지혜를 주셔서 그런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또한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 모든 것들을 잘 감당해 나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라고,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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