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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위기(삼하 21:15-22)

복수의 법(삼하 21:1-14) +++ 하나님은 나의 반석(삼하 22:1-7)

우리 꼬마 아이들에게 있어서 부모님들은 정말 위대한 존재처럼 보입니다. 우리 꼬마 아이들이 아버지를 보고 또 어머니를 보게 되면, 우리 아버지는 마치 슈퍼맨과 같고 우리 어머니는 마치 원더우먼과 같은 그런 존재로 느껴지게 됩니다. 그래서 텔레비전 프로그램 가운데 <슈퍼맨이 돌아왔다>라고 하는 제목의 프로그램이 있는데요. 혹시 보신 적 있으십니까? 마스크를 쓰니까 도대체 대답을 들을 수가 없어요. <슈퍼맨이 돌아왔다>를 혹시 보신 적 있습니까? 제목을 잘 잡은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 꼬마 아이들에게 아버지는 어떤 존재와 같은 존재냐? 마치 슈퍼맨과 같은 존재처럼 비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주고, 아이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희생해가면서, 그 자녀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그 모습을 보면 슈퍼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아이들은 키가 작고, 또 제대로 힘도 쓰지 못하고, 모든 것이 어설픈 상태에 있는데, 그때 자기가 뭘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어서 웁니다. 엉엉 울면, 그러면 아빠가 나타나서, 그리고 엄마가 나타나서 그 아이의 문제들을 해결해 줍니다. 그렇게 모든 문제들을 하나씩 둘씩 다 해결해 주는 엄마 아빠를 바라보면서, 우리 아이들의 마음 가운데 이 세상에서 제일 최고의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겠습니까? 바로 자신들의 아빠가 최고고 자신들의 엄마가 최고라고 생각하면서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영원히 오랫동안 가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이 되면, “우리 아빠가 슈퍼맨이 아니구나. 우리 아빠도 못하는 게 있구나.” 또 “우리 엄마가 원더우먼이 아니구나.” 우리 엄마는 뭐든지 잘해줄 줄 알았는데, 알고 보면 엄마가 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도 많다고 하는 것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우리 아이들이 그런 걸 언제 느끼냐면, 아빠나 엄마가 나를 혼낸다고 때렸는데, 옛날에는 그 때리는 손이 너무나도 아파서 펑펑 울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엄마가 때린 손이 하나도 안 아파요. 엄마가 뭔가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 아이가 크면서, “엄마도 나약한 한 인간이구나. 우리 아빠도 한 나약한 한 인간이구나.”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기 시작하게 되는 겁니다. 엄마도 아빠도 슈퍼맨도 아니었고, 원더우먼도 아니었다고 하는 것을 점점 깨닫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니까 다윗이 바로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여러분, 다윗 하면 무엇이 제일 먼저 떠오르십니까? 다윗이라고 하는 그 이름에 합당한 연관 검색어가 있다고 하면, 무엇이 가장 적합한 연관 검색어라고 생각하십니까? 다윗과 요나단, 다윗과 밧세바, 다윗과 사울, 다윗과 므비보셋, 다윗과 아둘람 동굴, 여러 가지 연관 검색어들이 생각날 수가 있겠지만, 그래도 다윗 하면 가장 딱 먼저 떠오르는 한 단어가 있는데, 한 이름이 있는데 그게 무엇일까요? 골리앗. 다윗 하면 골리앗, 다윗 하면 골리앗이라고 하는 이름이 항상 생각나게 되어 있고, 그것이 다윗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연관 검색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정말 어린 소년이었지만, 거구인, 그리고 한 나라의 장수였던 골리앗과 대결해서 맨손으로 쓰러뜨린, 이스라엘 민족의 최고의 능력자요, 전사가 되었던 사람이 바로 다윗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다윗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가?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블레셋과 전쟁을 하는 도중에 다윗이 피곤해졌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죠, 다윗이 피곤해졌다고 하는 이 이야기는 힘이 딸렸다는 겁니다. 기력이 다했다는 것이죠. 예전 같으면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칼을 휘둘리면서 혼자 저 블레의 진영에 들어가서, 저 블레셋 사람들의 그 군인들을 혼자서 다 무찔러 버리고 표피 200개를 잘라서 사울 왕에 갖다 바칠 만큼, 혼자 전쟁을 뛰어다니면서 엄청난 전과를 낼 수 있었던 그 다윗인데, 이제는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고 나서 전쟁을 하는 가운데 힘에 부쳐서 더 이상 싸울 수 있는 힘이 없어서, 그래서 아주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의 칼과 창에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그런 위험한 상황 가운데, 다 처하게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위태롭게 되었던 바로 그 순간에, 블레셋 거인족 가운데서 이스비브놉이라고 하는 한 거인이 있었는데, 그 거인에 의해서 다윗이 죽임을 당하려고 했는데, 다윗이 그 위기를 스스로 모면한 것이 아니라, 누가 건져주었습니까? 아비새라고 하는 다윗의 장수가 다윗을 건져내 주었다고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겪고 난 다음에 부하들이 다윗에게 간청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왕이시여. 이제는 왕께서 전쟁터에 나가지 마십시오. 왕은 우리 이스라엘 민족의 등불과 같은 존재입니다. 왕은 우리 민족의 가장 빛난 곳에서 빛을 밝히고 있어야 될, 그런 등불과 같은 존재인데, 왕께서 섣불리 전쟁터에 나갔다가, 그래서 그 전쟁터에서 죽임을 당하게 되면 큰일 납니다.” 부하로서 이 다윗 왕에게 할 수 있는 그런 충언이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을 겁니다. 왕이 전사하게 된다고 하면, 정말 우리 민족이 흔들릴 수가 있으니까, 이제는 왕께서는 전쟁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전쟁터에 나오지 마십시오. 이제는 우리가 전쟁을, 우리가 알아서 해결하겠습니다. 우리가 해결할 테니 왕께서는 전쟁터에 나오지 말라고 부탁한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기록돼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계기로 다윗은 전쟁의 그 일선에서 물러나 다시는 전쟁터에 나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대신 누가 싸웠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여러 사람들의 이름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후사 사람 십브개라고 하는 사람이 블레셋 삽이라고 하는 사람을 물리쳤고, 베들레헴 사람 야레오르김의 아들 엘하난이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무찔렀고, 다윗의 형 삼마의 아들 요나단이 육손 그리고 6개 6개의 발가락을 가지고 있어서, 총 24개의 손 발가락이 있는 그런 거인을 무찔러서, 이런 다윗이 이제는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지만, 다윗 대신에 다른 장수들이 나타나서 그 전쟁에서 이기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말씀 가운데 기록돼 있습니다.

예전 같으면 다윗이 앞장서서 그 전쟁을 이겼지만, 이제는 다윗을 통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전쟁을 이기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읽으면서 던져야 될 질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다윗이 누군가?”라고 하는 질문입니다. 다윗이 누구냐면, 위대한 전사였었습니다. 골리앗을 못 찌른 위대한 장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다윗이 전쟁터에서 쓸모가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다윗이 이제 전쟁터에 가면,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추장스럽기만 할 뿐입니다. 다윗이 가면 이제는 우리가 이겼다가 아니라, 다윗이 나와봤자 더 이상 전쟁에서 아무런 힘도 능력도 쓸 수 없는 그런 신세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것을 이 다윗이 그것을 느꼈을 때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요? 예전에는 자기가 칼을 휘둘러서 수많은 사람들을 물리칠 수가 있었는데, 이제는 자기가 전쟁에 나가서 싸울 수 없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은 이 다윗은 너무나도 무척 당황스러웠을 것이고, 뒤로 물러서야 한다고 하는 사실 자체가 쉽게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다윗은 결코 신이 아니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주목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윗은 누구였는가? 다윗은 정말 뛰어난 장수였기는 했지만, 다윗이 하나님은 아니었던 거죠.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이에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 그 옛날 천지를 창조하셨던 그 하나님이 오늘날에도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미래에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은 영원히 변치 않는 그런 하나님이십니다.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짧아질 수가 없고, 여호와의 팔이 짧아질 수가 없고, 하나님은 하나님으로서 언제든지 동일하게 영원한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다윗은 어떤 사람인가? 다윗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다윗이 한때 골리앗을 무찌르고, 그리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그런 엄청난 그런 전과를 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이를 먹으면서, 더 이상 다윗은 전쟁터에서 쓸모가 없는 한 노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근데 그게 바로 인간의 모습입니다. 사람은 누군가? 사람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점점 자라기 시작해서, 강건해지고, 그리고 최상의 능력을 발휘할 때가 있지만, 그리고 명성을 날릴 때가 있지만, 그 명성이 영원히 끝까지 계속 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 점점점점 우리의 몸이 후패해지고, 우리의 몸이 연약해지고 기력이 딸리게 되고, 우리의 지식이, 판단력이 흐려지게 되고, 눈에 시력도 흐려지기 시작하고, 모든 것들이 기능들이 하나씩 둘씩 사라져 버리면서, 이제는 더 이상 쇠약해져서 제대로 역할을 감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인데, 다윗도 그러한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바로 이러한 사실에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사무엘서를 읽으면서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다윗이 정말 누구인가?”라고 하는 이 점입니다. 다윗이 누구냐 하면, 다윗은 참 골리앗을 무찔렀기 때문에, 그 다윗이 골리앗을 무찌르는 그런 이야기를 보면서, 참 다윗은 참 대단한 사람이구나 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열광하면서 우리도 다윗같이 되려면, 어떻게 하면 다윗 같이 될 수 있을까? 다윗이 어떻게 골리앗을 무찔렀을까? 다윗을 본받고 싶고, 우리가 다윗과 같은 그런 능력을 발휘하고 싶어서, 그 다윗을 주목해 보려고 하고, 다윗을 추앙하는 그런 모습들이 우리들에게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어떻게 묘사를 하냐면, 그러니까 그 다윗이 정말 완벽하고 더 이상의 아무런 흠이 없고 완벽한 존재로서 다윗이 있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은 그렇게 완벽하지 못한, 흠이 많고 부족한 사람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성경에서 기록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진짜 모습이 무엇인가? 첫 번째는 다윗은 파렴치범이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우리가 사무엘 앞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다윗은 밧세바라고 하는 여인을 취했을 뿐만 아니라, 그 남편을 죽이기 위해서 전쟁터 최전방에 내보내 교살시켜버린 파렴치범 중에서 가장 잔인무도한 파렴치범이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어떤 존재였는가? 오늘 본문에서 묘사해 주고 있는 것처럼, 다윗은 영원히 강건하고, 정말 그 누구도 당해낼 수 없는 그런 완벽한 힘과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다윗도 시간이 지나면서 나약해질 수밖에 없고, 더 이상 전쟁터에서 쓸모가 없는, 그러한 나약한 인생으로 변해버린 존재가 바로 다윗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이 우리의 영웅이 될 수도 있고, 우리의 구세주가 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다윗이 승리할 때, 사울에 대해서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그렇게 환호를 하면서 열광했지만, 그러나 그 모습이 끝까지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 다윗이 우리의 소망이고 우리가 정말 다윗을 영원히 따라가기만 하면, 그러면 우리에게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윗이 힘이 있을 때는 우리가 다윗을 따라다니면서 그래서 다윗의 보호 아래서 안전할 수 있었고, 다윗이 전쟁을 해서 그래서 그 원수들을 물리쳐주는 것에서 우리가 많은 혜택을 입을 수도 있었고, 다윗이 건장할 때는 다윗을 의지할 수 있었지만,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다윗이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 모습으로 변해버렸다는 거예요. 더 이상 우리들의 구세주가 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바로 이 점입니다. 사무엘서를 통해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될 점이 있다고 한다면, 이 다윗이라고 하는 존재를 성경에서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다윗이야말로 성인이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요. 완벽하고 정말 멋있는 정말 완벽한 사람이라고 그려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그 다윗의 좋은 면들도 있지만, 그러나 그는 파렴치범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고 이제는 쇠약해져 버려서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는 정말 나약한 한 인생이라고 하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사무엘서에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들이 이러한 성경의 메시지를 잘 받아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첫째는 몰라서 그 모습을 바라보지 않은 경우도 있는 경우도 있고, 더 나아가서는 의도적으로 다윗의 이러한 면모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은 채, 그저 다윗을 영웅으로 생각하고 다윗이야말로 참 대단한 사람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하고 성경을 읽을 때가 있는데 사실은 그렇게 읽는 것은 성경을 잘못 읽은 것입니다.

사무엘서에서 이 다윗의 이야기를 기록하면서 우리들에게 전해주는 메시지가 있다고 한다면, 과연 우리가 어디에 소망을 두어야 할 것인가를 물어보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다윗에게 소망을 둘 수가 있겠는가를 사무엘서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은 사무엘을 믿고 의지하고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사무엘과 사울 다윗과 같은 사람을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왕으로 모시고 살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의 구세주로 여러분의 소망을 이 다윗에게 둘 수가 있겠느냐고 질문을 던지는 것이 바로 이 사무엘서의 메시지입니다.

다윗이라고 하는 인물의 어떤 한 일부 면을 보면 정말 그 다윗을 따라가고 싶어요. 다윗의 보호의 날개 아래에 있고 싶어요. 그가 골리앗을 무찔렀고 원수를 용서했을 뿐만 아니라, 왕이 되어서 최다 강대국을 만들어 놓은 그런 훌륭한 왕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 다윗의 날개 밑에서 살아간다면 괜찮을 것이라고 하는 그런 생각이 들게끔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 이야기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윗이 얼마나 나쁜 놈이었고, 얼마나 아무런 힘이 없는 나약한 존재인가에 대해서, 적나라하게 까발려 놓는 것이죠. 과연 이런 다윗과 같은 놈을 믿을 수 있겠는가? 과연 이런 다윗처럼 힘이 없고, 능력이 없는 이 사람을 당신의 구세주로, 당신의 소망으로 삼을 수 있겠느냐고 질문을 던지는 것이죠. 다윗을 믿고 따랐는데, 그 다윗이 우리를 보호해 준 것이 아니라, 믿고 따르던 그 다윗이 자신의 아내를 빼앗아가 버리고, 자신을 죽이는 그런 포악한 모습을 보여줬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힘이 다 빠져버린 그런 한 노인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 사무엘서에서 보여주고 있는 메시지가 무엇이냐면, 다윗은 우리들의 소망이 될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죠.

이스라엘 민족이 다윗을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고, 이 다윗을 믿고 따라가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 사무엘서의 메시지입니다. 사무엘서의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던지게 되는 것은 과연 우리들에게 우리가 정말 믿고 의지할 만한 진정한 구세주가 누구인가라고 하는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것이고, 그 질문에 대해서 이 사무엘서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해 주시냐 하면, 하나님께서 한 아들을 보내어 주실 텐데, 다윗의 아들을 보내어 주실 텐데, 그 다윗의 아들이 성전을 짓게 만들 것이고, 그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가 만나게 될 것이고, 영원한 나라가 이루어져서, 하나님의 그 영광스러운 나라에서 살게 할, 진짜 메시아가 올 거라고 하는 그 약속을 사무엘서에서 해주고, 그래서 구약의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겁니다. “주님, 정말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는 그 다윗의 아들이 언제 오는 겁니까?” 정말 우리를 구원할 그 기름 부음 받은 메시아가 언제 오는 겁니까? 하면서 구약의 성도들은 기도하면서, 그 메시아를 바라보게 된 것이고, 오늘 우리 신약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은 그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로 그 기름 부음 받은 자, 메시아, 그분이 누구시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한 구세주로 오셔서, 골리앗보다도 더 위협적으로 우리를 파멸시키려고 하고 있고, 우리를 종으로 삼으려고 있는 그 사탄의 권세를 물리쳐 주셨습니다. 다윗은 물맷돌로 골리앗을 쓰러뜨렸지만, 예수님께서는 빈 몸으로 십자가 위에 나아가서, 마치 죽는 것처럼 보였고, 그래서 완전히 끝장난 것 같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다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저와 여러분들을 죄악의 그 포로에서부터 건져내신 참된 구세주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탄과의 싸움에서 우리가 넘어지고 쓰러지려고 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새 힘과 능력을 주셔서, 그래서 결국에는 승리하도록 이끌어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시고, 성령께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함께하셔서 결국에 우리는 이렇게 신앙생활하다가 도중에 망가지고 파멸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결국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가 믿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이게 바로 우리들의 신앙 고백이고, 우리 초대교회 성도들은 바로 이러한 신앙 고백 때문에, 그 믿음을 지키다가 목숨을 걸기까지 했는데요. 초대교회 성도들은 어떻게 신앙 고백을 했습니까? 로마 황제가 우리의 주님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다라고 하는 그런 고백을 한 거죠. 바로 이 사무엘서의 메시지를 그대로 받은 겁니다.

다윗이 왕처럼 보였지만, 그 다윗이 진정으로 우리를 구원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한 진정한 왕이시고, 진정한 메시아이기 때문에 주님만이 우리의 참된 메시아요. 참된 주님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고백하면서, 신앙생활하는 것이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우리 크리스천들은 참된 메시아가 아닌 것들에게 소망을 두다가 멸망하고 또 실망하기도 합니다. 참된 메시아가 아닌 것에 우리의 소망을 둔다고 한다면, 배신을 당하게 될 것이고 또 실망하게 될 겁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어떤 것에 소망을 둡니까? 그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이 뜨는 모습을 보고 다윗에게 소망을 걸었지만, 그 다윗이 완전히 다 연약해진 모습을 보여줄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 현대인들은 어디에 소망을 둡니까? 정치 지도자들을 마치 우리들의 구세주인 양 알고 따르기도 합니다. 돈이 우리들의 소망인 양 생각하고 돈을 따르다가 배신을 당합니다. 또는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다가 그래서 멸망하고 맙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다 다윗과 같은 것들이에요. 한때 힘이 있는 것처럼 보이고 우리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 같고, 대단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았지만,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배신해 버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나약해져 버렸던, 그 다윗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오늘날 하나님이 아닌 주님이 아닌 그 어떤 것에 우리의 소망을 둔다고 한다면, 결국 그것들은 우리를 배신하게 될 것이고, 결국 우리는 실망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읽으면서, 그 어떤 것에도 우리가 소망을 둘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이 나의 참 소망이시고, 주님만이 나의 참 주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가 다윗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너무 과도한 기대를 하지 않아야 될 것이고, 이들이 쓰러지는 모습을 볼 때에 그 쓰러지는 모습을 보고 너무 충격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많은 사람들이 정치인들에게 소망을 겁니다. 저 정치인은 나를 위해서 일해줄 거라고 생각하면서 소망을 거는데, 그런데 알고 보면 나중에 배신당하는 그런 경험들을 하게 됩니다. 또 우리 성도들은 누구에게 소망을 둘 때가 있습니까? 종종 목회자에게 소망을 두는 경우도 있는데요. 그것도 역시 헛된 소망입니다. 성도님들이 목회자를 바라보면서, 아 정말 목회자가 우리의 소망인 것처럼 생각하고, 사실은 목회자는 자신이 소망이 아니라, 우리 주님의 소망이라고 하는 것을 가리켜야만 하고, 주님을 말해야 되는데, 종종 성도님들은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목회자에게 소망을 걸거나, 또한 목회자가 또한 의도적이든 아니면 무의식적이든 주님이 아닌 자신이 소망인 것처럼 그렇게 이야기하다가, 결국 그 목회자가 무너져 버릴 때 도덕적으로 잘못되는 모습을 보여줄 때, 뒤로 호박씨를 까고 있다든지 성적인 문제를 일으킨다든지, 재정적인 문제를 일으키게 되면, 그때부터 충격을 받고 그러면서 때로는 믿음을 저버리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이 세상에 그 누구에게도 소망을 두어서도 안 될 것이고, 물질에 소망을 둘 것도 아니고, 그 어떤 것에 우리의 소망을 둘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소망은 영원히 변치 않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치 않는 우리 주님만이 우리의 참된 소망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으면서, 신앙생활을 해 나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에 있는 내가 정말 의지했던 목회자가 만일 죄악을 범한다고 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겠습니까? 다윗과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과 같은 위대한 사람도 타락하고 연약해질 수밖에 없는 그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그러한 만일 목회자가 그런 경우를 본다고 한다면, 우리가 목회자에게 소망을 두어서는 안 될 것이고, 더 나아가서 만일 그렇게 된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우리 성도들은 영적으로 회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다윗이 바세바와의 그런 잘못 가운데서 회개하고 다시 회복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던 것처럼, 믿음의 공동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냥 누가 죄를 지어버리면, 누가 잘못을 하면 비난해버리고 끝내버리는 것이 그것이 우리가 할 일이 아니에요.

성도의 공동체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잘못한 사람이 있으면 나도 똑같이 잘못할 수 있고, 서로가 똑같이 잘못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그 사람을 다시 회개하고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죄를 짓는 모습을 본다고 한다면, 나도 똑같은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나도 깨어 경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 나도 같은 죄를 저지를 수 있겠구나. 나도 저런 잘못을 할 수 있겠구나, 생각하면서, 내가 그런 똑같은 죄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우리의 참된 소망을 그 이 세상의 어떤 사람에게나 물질에게나 그 어떤 것에 두는 것이 아니라, 오직 참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우리의 소망을 두는 것이 참된 우리의 믿음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원하기는 우리들의 신앙생활 가운데 우리의 소망을 어디에 두면서 신앙생활을 해오셨습니까?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 마치 다윗과 같이 반짝반짝 빛나고 뭔가 큰 일을 이루면, 거기에 쉽게 우리의 소망을 두를 때가 많이 있는데, 거기에 보이는 것에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참된 소망은 우리 주님만이 우리의 소망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고 의지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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