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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의 법(삼하 21:1-14)

반란의 진압(삼하 20:14-26) +++ 다윗의 위기(삼하 21: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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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의 말씀은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이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기근이 3년 동안 연이어서 있을 때에, 다윗은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하나님, 왜 이스라엘 민족에 이런 기근이 있습니까? 무슨 일입니까?”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간구했더니,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시기를, 이렇게 이스라엘 땅에 기근이 일어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이라고 하는 그런 응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울이 잘못한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스라엘 민족에게 기근을 보내어서, 기근이 있게 해서, 지금 고통을 당하게 만들어주었다고 하는 그런 말씀이고요. 결국 다윗왕은 기브온 사람들을 불러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고, 그 기브온 사람들은 사울의 집에 속한 사람들 7명을 죽일 수 있도록 복수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간청했고, 다윗이 그 요청을 받아들여서 사울의 가족들 중에서, 사울의 자손들 중에서 7명을 기브온 사람들에게 넘겨주어 죽게 만들었는데, 다윗과 요나단 사이에 맺은 약조 때문에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은 그 죽는 일에 넘겨주지 아니하고, 다른 자손들만 내어주어 결국 죽이게 만들었는데, 결국 그 모든 과정이 다 마쳐진 후에는 기근이 그치게 되고, 하나님께서 다윗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이스라엘 땅 가운데 비가 내리도록 그렇게 해 주셨다고 하는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읽으면 오늘날에는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내용들이 한꺼번에 다 등장하고 있습니다. 죄는 사울이 지었는데, “왜 이스라엘 민족이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라고 하는 문제에서부터, 사울의 죄를 위해, 죄 때문에, “사울의 자손들을 이렇게 복수하면서 죽여야 했는가?”라고 하는 그런 문제 등등, 여러 가지 문제들은 21세기에서는 우리들이 생각할 때는 도무지 쉽게 납득할 수 없는 그런 내용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 시기의 관점으로 본다고 하면 이해가 어려울 텐데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에는 이 당시에 그때 사람들의 상황 가운데 우리가 들어가서,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그 당시의 문화와 그리고 그 당시에 있었던 모든 것들을 다 고려하면서 이해하게 된다고 하면, 어느 정도 이해를 할 수가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에 나오는 기브온 사람들이 누굽니까? 기브온 사람들은 원래 이스라엘 민족이 아닙니다. 기브온 민족은 어떤 민족이냐면, 원래 가나안 땅에 살고 있었던 그런 이방 민족이 바로 기브온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슨 말씀을 해주셨냐면, 너희가 애굽 땅에서부터 해방되어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들랑, 그 가나안 땅에 있는 민족들을 단 한 사람도 남기지 말고, 다 멸절해 버리고, 다 진멸해 버려서, 단 한 사람도 살려두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엄하게 말씀해 주신 바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그 땅을 정복해가는 가운데 여리고성을 무찌르기도 하고, 아이성을 무찌르기도 하고, 수많은 성들을 다 점령해가는 과정 가운데, 그래서 다 진멸하면서 그렇게 나갔지만, 거기에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다 죽이지는 못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있는 사람들을 다 죽이지 못하고 살려둘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 몇 부류가 있는데, 전쟁에서 이기지 못해서 살려둘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기브온 족속은 아주 특별한 케이스로 살려두게 되어야만 했었던 민족이었습니다.

여호수아서를 읽어보신다고 한다면 여호수아 9장에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아마 다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하루는 이 기브온 사람들이 여호수아를 찾아온 겁니다. 사신들을 보내서 기브온 민족들이 대표를 보내서 여호수아를 만나게 했는데, 이 대표들이 어떻게 여호수아를 찾아왔냐면, 아주 허름한 옷을 입고 그리고 딱딱한 빵을 가지고, 그리고 찾아와서 여호수아에게 이야기를 한 겁니다. 뭐라고 이야기를 했냐면, 우리는 이 가나안 땅에 사는 민족이 아니라, 저 멀리 아주 멀리 사는, 그런 곳에 있는 민족인데, 우리가 이스라엘 민족이 이곳에 온다고 하는 이야기를 듣고 여기까지 찾아왔습니다. 보십시오. 우리의 몰골을 보십시오. 우리가 우리 마을에서부터 떠날 때는 옷이 깨끗하고, 새 옷을 입고 있었는데, 길이 하도 멀어서 우리들의 옷이 다 낡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가져온 빵도 이미 다 딱딱하게 굳어져 버린, 정말 저 멀리에서 온, 이 가나안 땅에 있는 민족이 아니라, 멀리서 온 민족인데, 우리와 조약을 맺고 평화 조약을 맺어서, 우리가 서로가 서로를 보호해 주고, 서로가 서로를 죽이지 않는 그런 언약을 맺자고 하는 제안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수아가 그런 제안을 받게 되었을 때, 그거 괜찮은 제안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면 가나안 땅에 있는 민족들은 다 죽이라고 하셨지만, 가나안 땅에 살고 있지 않은 다른 민족은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신 바가 없기 때문에, 이 민족이 가나안 땅에 살지 않는 민족이라고 한다면, 화친을 맺고 평화 조약을 맺고 그래서 같이 같이 동맹국가가 된다고 하는 것, 별로 나쁜 생각이 아니어서, 앞뒤 사정 잘 보지 않고 그냥 그 자리에서 서로 약조를 해버렸습니다.

그런데 3일이 지난 뒤에 그 기브온 민족이 저 멀리 사는 민족이 아니라, 바로 그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민족이라고 하는 것이 밝혀지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기브온 민족이 거짓말로 약조를 맺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이렇게 속임수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 계약이 무효가 되는 것이 당연한 거겠지만, 구약 성경을 읽다 보면 무효화되는 것이 아니라, 잘못 맺어진 언약이라 할지라도, 이것이 나에게 해가 되는 언약이라고 할지라도, 그 언약을 반드시 지켜야만 한 그런 하나의 법칙이 있었던 것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야곱도 형을 속이고 장자권을 얻었지만, 그것이 무효화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축복을 받았지만, 그 아버지가 그 아들을 향해서 “네가 가짜로 축복을 받았으니까, 그거 무효다.”라고 선언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한 번 축복한 그 약속이 계속 진행되도록, 그냥 허용해 두고 있는 그 이야기를 보는 것처럼, 이렇게 여호수아와 기브온 민족 사이에 맺은 그 언약도 사실은 거짓말로 맺은 언약이었지만, 그 언약 자체는 하나님 앞에서 맺은 언약이었고, 그리고 주님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너희를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그 약속을 파괴하지 않고 그 기브온 민족들을 살려 두었을 뿐만 아니라, 그저 그 사람들을 물 긷는 자, 장작 베는 자, 그렇게 이스라엘 민족의 노예처럼 그렇게 사용하던 사람들이 누구냐면 바로 그 기브온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이방인이었지만, 가난한 민족이고 당연히 멸망받아야 될 민족이었던 그 기분은 민족이 여호수아와의 그 언약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민족에 편입하게 되었고, 이스라엘 나라 가운데서 함께 살아가게 된 그 민족이 바로 기브온 민족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 시대 때 그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일이 있었습니다. 사무엘상을 살펴보고 사무엘 하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사울이 그 기브온 민족을 죽였다고 하는 이야기는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는데, 아마도 그것은 굳이 기록할 필요가 없어서 기록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 아무튼 그 사울 왕 때 기브온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에, 결국 그 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심판하시고, 그리고 비를 내리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사울 왕은 왜 기브온 민족을 죽였을까요? 사울 왕이 그 기브온 민족을 죽인 이유에 대해서도 전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오늘 본문의 말씀에 보면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를 향해서 열심히 있어서 그들을 죽였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무슨 열정인지, 무슨 열심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겠지만, 사울 왕의 마음에 이스라엘을 위하여, 유다를 위하여, 이 기브온 민족을 죽였다고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죽였을까? 정설은 아니겠지만, 아마 추측해본다고 한다면 이렇게 추측해 볼 수가 있습니다. 기브온 민족은 당시 베냐민 지파와 같은 지역에서 살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이 되는데요. 베냐민 지파와 함께 거주하는 과정 가운데 아마도 서로 결혼도 할 수 있는 서로 통혼도 가능했었을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역대상 8장 29절과 9장 35절의 말씀에 보면 사울의 할아버지 여이엘이 기브온의 조상이라고 하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아마도 베냐민 지파였던 사울의 가문 혈통을 따져보면, 그 사울 왕의 혈통 가운데는 기브온 사람들의 피가 섞여 있었을 거라고 추측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제 정설이 아니라, 그냥 제가 추측하는 건데요.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에, 그 사울이 왕이 된 것을 보고서 사람들이 환영하고 그리고 좋아했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러나 일부 비류들이, 일부 참 불량배들이 사울을 멸시하면서 예물을 드리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들이 사울을 비난한 말 가운데 하나가 이 사울은 이스라엘 피보다도 기브온의 후손이라고 하는 그런 말로 비난했을 가능성이 있을 겁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우리나라 국적이 아닌, 다른 제3세계의 사람들과 있게 되면 그것 때문에 아이들이 놀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아마도 사울이 자라오면서 그리고 사울이 사는 가운데 사울에 대해서 이 사람은 기브온의 자손이다. 기브온의 피가 들어갔다고 하는 그런 조롱 섞인 말을 수없이 많이 들었을 것이고, 그래서 아마도 사울은 기브온 사람들을 죽이는 일에 더 앞장섰을 가능성이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해볼 수가 있습니다.

아무튼 사울이 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이유에 대해서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바가 무엇이냐면, 이스라엘과 유다를 위하여 “사울이 열심히 있어서 죽였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이 이스라엘 민족을 속이고, 언약을 맺었기 때문에 아마도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이것은 우리가 지킬 필요가 없다. “이것은 속임수였다. 무효다.”라고 생각할 수, 그런 생각을 했었을 가능성이 있고, 그래서 이스라엘 순수한 이스라엘 민족을 주장하는 그런 우파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는 기브온 사람들을 죽이는 일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아무튼 이 사울이 죽인 것은 그런 잘못을 저지른 근본적인 동기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냐면, 바로 사울의 열심이 사울로 하여금 사람들을 죽이는 결과를 낳았다고 하는 그 사실을 오늘 우리가 주목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열정이 없는 것도 가장 큰 문제일 수 있겠지만, 많은 경우에 열정이 더 문제가 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열정이 없으면 참 안 좋아 보이잖아요?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열정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좋아 보이는 것인데, 그런데 그런 열정이 솟아오를 때 우리가 질문을 한 번쯤은 던져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열정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만한 것인가? 우리가 바른 길을 가고 있는가? 그 질문을 한번 던져보지 아니하면, 바로 그 열정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일을 할 수도 있다고 하는 그 사실을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겁니다.

우리가 열정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닌 것이죠. 왜냐하면 열정이 있다고 한다면, 그 열정이 있는데 만일 그 열정이 잘못된 방향을 향해서 나아가게 된다고 하면, 더 큰 문제가 생기는 것이죠. 우리들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속도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니고, 열정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니고,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속도보다 열정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른 방향인가? 누가 만들어낸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가고 싶었던 그 사람이 지나가는 마차를 불러 세웠습니다. 그리고 내가 나를 좀 태워달라고 그렇게 요청을 해서 그 마차 주인이 그 사람을 태워주었습니다. 너무나도 고마워서, “감사합니다. 저를 태워줘서 너무 고맙습니다.”라고 이야기한 다음에 물어봤어요. “여기서부터 예루살렘까지 얼마 정도면 갑니까?” “마차로 간다고 하면 여기서 예루살렘까지 몇 시간 정도면 갈 수 있을까요?” 그랬더니 그 마부가 대답을 했습니다. “여기서부터 예루살렘까지요? 아마 한 마차로 가면 두 시간 정도 갈 겁니다.” 그렇게 대답을 해줬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이 사람은 2시간 뒤면 예루살렘에 도착할 수 있겠구나 생각하면서, 너무나도 행복한 생각으로 잠을, 잠에 잠깐 빠졌습니다. 한 시간 정도 잠을 자고 난 다음에, 딱 일어나가지고, 그 마부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아저씨, 여기서부터 예루살렘까지는 이제 얼마나 남았습니까? 이제는 한 30분 남았으려나? 1시간 남았으려나?” 생각하면서 물어봤을 그랬더니, 그 마부가 대답하는 말이 “여기서부터 예루살렘까지는 3시간 걸립니다.” 깜짝 놀라서 물어봤어요. 아니 아까 2시간 걸린다고 해놓고, 지금은 내가 1시간 정도 잔 것 같은데 왜 3시간씩이나 걸린다고 합니까? 이 마차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마차가 아니라, 예루살렘에서부터 여리고로 가는 마차입니다.

우리가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데, 그것이 바른 방향을 향해서 달려가지 아니하면, 오히려 더 큰 문제, 더 큰 난처한 일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죠. 문제는 우리가 열정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내가 바른 길로 가고 있는지를 모를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알 수 있죠? 옆에 있는 사람들이 알 수가 있습니다. 내가 잘못 가고 있다고 하는 것을 누가 모릅니까?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모를 수가 있어요. 그래서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바로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로 하여금 혼자 살도록 만들어 놓지 않고, 혼자 독처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씀하시고, 부부를 만들어서 함께 살게 만드시기도 하셨고, 그래서 가정은 가장 간단한 공동체이고, 교회는 믿음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가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인데, 이런 공동체를 통해서 우리가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어야 됩니다.

과연 우리가 바른 길로 가고 있는지, 바른 길로 가고 있지 않은지, 서로가 서로에게 조언을 해 주면서, 그래서 정말 우리가 바른 길로 가도록 서로가 서로를 도와주는 걸 통해서, 우리의 잘못들을 교정해 나갈 수가 있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는 방법으로서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 말씀을 주셨는데요. 그 성경 말씀뿐만이 아니라 또 하나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공동체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혼자의 열정으로, 다른 사람들과 전혀 상의 없이, 혼자 열정으로 열심히 나가다 보면, 잘못된 길로 갈 수가 많이 있는데, 그런 길로 빠지지 아니하도록, 서로가 서로에게 믿음으로 권면하고 바른 길로 가도록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서로가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서, 정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나아가는 그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우리가 서로를 도와주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성경 말씀에 보면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여 서로가 서로를 도와주어서 믿음의 길을 가라.”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원하기는 우리 모두가 서로가 돕는 가운데 바른 길로 가는 동역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울의 경우에는 열정이 너무 심한 나머지, 그 열정을 아무도 막지 못했고, 그가 기브온 사람들을 죽이는 그 나쁜 짓을 행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막을 사람들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죠. 다윗의 경우는 어떻게 됐습니까? 다윗의 경우 다윗의 경우는 나발이라고 하는 어리석은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자신이 그들을 많이 보호해 줬지만 다윗을 무시하는 발언을 하면서 욕을 하는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다윗은 화가 나서 그 나발을 죽이기 위해서 군인들을 이끌고 나발을 죽이기 위해서 갔어요. 그런데 그 길에 누가 나타났어요? 아비가일이 나타나서 다윗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저 어리석은 자를 괘념치 마십시오.” 당신이 그렇게 칼을 휘두를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게 권면하고 그런 사이에, 결국 이 다윗이 그 나발을 죽이지 않고 다시 돌아가게 되었는데, 그때 했던 다윗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다윗의 고백이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피 흘리는 것을 막게 하셨다.”

만일 다윗에게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달려가서 그 나발을 죽이는 일에 전혀 개의치 않고, 그냥 가서 아무런 방해도 없이 다 죽이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아비가일을 보내셨고, 아비가일이 조언을 하고, 아비가일이 잘 그 마음을 누그려 뜨리게 하고, 바른 길로 가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결국 그 다윗이 죄를 짓지 아니하도록 피를 흘리지 아니하도록 도와주는 그 일이 있었는데,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삶 가운데서도 우리가 독단적으로 열정적으로 이것이 맞는지 틀리는지도 모르고 그냥 열정적으로 나아가다가 죄를 범하는 자들이 아니라, 날마다 날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서, “주님, 내가 이 길을 바른 길로 가고 있습니까?” 다시 한번 날마다 날마다 물어봐야 되는 것이고, 또한 우리 교우들끼리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해 주어서, 악을 행하지 아니하도록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그런 좋은 믿음의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울은 기브온을 죽인 그런 나쁜 짓을 행했고,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일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3년의 기근을 주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렇게 기근이 일어난 것은 사울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일어났던 일이었을 거라고 추측해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성경의 기록은 꼭 연대기 순서대로 기록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꼭 뒤에 나와 있다고 해서 나중에 있었던 일만을 기록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게 늘 성경의 기록이 늘 발생 순서대로 기록된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 대체로는 발생 순서대로 기록하지만, 때때로는 앞에 있었던 일을 뒤에 기록하기도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을 기억하면서, 성경을 읽어야 되는데요.

여기서 질문이 하나 떠오르게 됩니다. 사울이 잘못했으면 사울 왕 당시에 기근이 있을 일이지, 왜 다윗이 다스리고 있을 때 기근이 일어나게 됐을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사울의 죄를 다스리시기를 원하셨다고 한다면, 사울의 잘못을 책망하기를 원하셨다고 한다면 사울이 그런 죄를 저질렀을 때, 바로 기근을 주든지, 바로 천둥이 치든지, 바로 하나님께서 심판하셔서 그래서 사울의 죄를 깨닫게 만들어 주시지, 이미 사울은 죽어버리고 지금은 다윗이 왕인데, 다윗이 죄를 저지른 것이 아닌데, 왜 다윗 왕 때에 기근이 발생하게 만들었을까요?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마도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하나의 선택과 유기’(遺棄)라고 하는 것으로 대답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울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셔도 이미 그 마음이 완악해져서 회개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사울에게는 채찍을 때려봤자 회개하지 않을 것이 너무나도 분명한 그런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방법이 하나 있는데, 그걸 가리켜서 유기라고 하는 표현을 씁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버리셨다. 그냥 방치해 두셨다. 그냥 버려두었다고 하는 그런 표현을 가리켜서 한자어로 유기’(遺棄)라고 하는 말을 씁니다.

하나님께서 종종 악인들을 대하는 방식이 뭐냐면 유기(遺棄)라고 하는 방식이에요. 그 유기(遺棄)라고 하는 방식이 뭐냐면, 악인들이 악을 행할 때 그 악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심판해가지고 채찍질하고 하나님께서 엄청난 고난을 그에게 주는 그런 반응을 해주셔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안 하시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악인이 있는데 그 악인이 돈을 많이 벌고 떵떵거리면서 권력을 잡고 온갖 모든 것을 다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전혀 심판을 안 내리는 종종 우리 성도들이 겪는 딜레마가 그게 아닙니까? 정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고 하면서 신실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눈을 들어서 옆에 사람을 보면 불신자가 훨씬 더 잘 살아요. 불신자는 떵떵거리면서 잘 나가는 것 같아요. 평상시 그냥 잘 살 뿐만 아니라, 죽을 때도 아무런 고통 없이 죽는 것 같아요. 아니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오히려 더 평안한 것 같아요. 그런 걸 볼 때 우리 성도들의 마음 가운데, 굉장히 혼란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성경 속에 나오는 해석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해서는 그냥 내버려 두셨다. “될 대로 돼라.” 방치해 두셨다고 하는 표현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채찍질을 가하실 때가 있는 겁니다. 죄악을 저지르면 그 죄악을 저지르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고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는 것이 사울 왕을 향해서는 하나님께서 이미 버리셨고 너는 더 이상 내 아들이 아니다. “너는 더 이상 나의 선택한 자가 아니다.”라고 하나님께서 이미 버리셨기 때문에, 그가 잘못한 것에 대해서 전혀 하나님께서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으셨지만, 그러나 다윗을 향해서는 다윗이 밧세바와의 범죄를 저지르면, 거기에 대해서 심판하시고, 아들을 죽이기도 하고, 칼이 떠나지도 않게 하고 온갖 고난을 주시면서, 하나님께서 다윗을 빚어가시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바꾸어 가시는 그 역사가 이 다윗의 삶 가운데는 나타나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히브리서 12장 5절에서부터 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우리가 죄를 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죄를 다루지 않는 것처럼 생각된다고 하면 안심할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돼요. 오히려 더 놀라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 저를 버리셨어요?” 하나님 앞에 “하나님, 나를 사랑하십니까?”라고 물어봐야 되는 거예요.

그러나 만일 우리들에게 내가 잘못했을 때 하나님께서 징계하신다고 한다면, 그것 때문에 절망할 것이 아니라, 고통스러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나가야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다고 하는 증거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끊이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윗은 기근이 들었을 때 하나님 앞에 물었습니다. “하나님, 왜 그렇습니까?” 다윗에게는 하나님께서 대답해 주십니다. 그 원인이 사울이 기브온에게 행했던 그 악한 일이 있었고, 그 악한 일에 대한 정의(justice)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는 겁니다. 지금 다윗이 왕이 되었다고 한다면, 자기 나라에서 벌어진 그 악한 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대리한 왕으로서의 그 정의(justice)를 이루어야 되는데, 그 정의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알게 되었고, 다윗은 그래서 그 사람들을 불러서 물어봅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기브온 민족들은 사울의 가족 중에서 7명을 달라 해서 죽입니다. 이 모습은 정말 우리가 보기에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반응이기는 합니다마는, 사실 이 당시에는 “복수의 법”이라고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라틴어로 lex talionis라고 하는 복수의 법인데요. 누군가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을 죽이면 그 죽임을 당한 사람의 가족들 중에 누구든지 제일 가까운 사람이 이 죽임을 당한 사람을 대신해서, 그 살인자를 찾아가 복수하는 것이 그 당시에 있었던 하나의 정의(justice)의 법입니다. 어떻게 죽여야 되는가? 이 사람이 죽였으면 이 사람을 죽이는 거예요. 만일 이 사람이 이를 부러뜨렸으면, 이를 부러뜨리는, 눈을 뺐으면 눈을 빼는 거, 좀 원시적인 방법인데, 사실은 이 법이 주어진 그 당시에 있었던 것은 어떤 의미에서의 법이었냐면, 그것은 그 복수를 하되 그 복수가 과도한 복수가 되지 않도록 하는 법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하는 복수의 법입니다. 생명에는 생명,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고 하는 그 복수의 법인데, 사람들의 죄성으로 인해서, 눈에는 눈으로 복수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는 생명으로 복수해버리고, 조금 다친 것을 완전히 죽이는 것으로 복수하는, 그런 사악한 심령을 가진 우리 인생들을 향해서, 그렇게 과도하게 복수할 것이 아니라 정당하게 정의의 차원에서 복수가 이루어지었던 것이 과거 시대에 공적인 재판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그 시대에 있었던 사적인 복수의 법칙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식으로 할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사적인 처벌이 아니라 공적인 처벌을 하게 되어 있고, 사적인 처벌을 하는 것은 그것은 또 다른 범죄라고 하는 것이 오늘날의 법칙인데, 성경 시대에 있었던 그 법칙을 우리가 그대로 사용할 것은 아닌데, 아무튼 이 당시의 문화적인 배경 속에서는 그 당시에 이스라엘과 그 지역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이 했던 방법이 무엇이냐면, 한 사람이 누군가에 의해서 살해를 당하면, 그 사람을 죽이는 것이 당시의 정의를 이루는 방법이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뭔가 좀 섬찟하고, 정말 정말 잔인하고 정말 원시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그 원칙만큼은 하나의 정의로운 원칙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데요. 뭐냐 하면 죄를 지으면, 그 죄에 대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 죄를 지었을 때 그 죗값을 치르는 게 맞습니까? 죄를 지어도 죗값을 안 치러야 하는 게 맞습니까? 안 치렀으면 좋겠죠. 내가 죄를 지었을 때는. 다른 사람이 죄를 졌을 때는 죗값을 치러야 된다고 생각을 하는데요. 그런데 정말 정의로운 사회는 죗값을 제대로 치르는 사회가 정말 정의로운 사회입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그래도 참 괜찮은 나라라고 생각을 해요. 왜냐하면 죄를 지으면, 그래도 처벌을 받는 나라이기 때문에, 그래도 우리가 안심하면서 사는 겁니다. 죄를 저질렀는데도 처벌받지 않고 전혀 손을 대지 못하는 나라는 그런 나라에서는 살 수가 없는 거죠. 어떤 나라가 그런 나라인가요? 제가 예전에 온두라스라고 하는 나라를 가봤습니다. 중미에 중앙아메리카에 있는 조그마한 나라인 온두라스라고 하는 곳에 갔는데, 거기 선교사님이 계셔서 거기 한번 방문할 기회가 있어서 갔는데요. 낮에는 그런 데로 살 만한데 밤에는 어딜 돌아다니지 못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온두라스에 있는 깡패 조직들이 밤을 완전히 장악해버린, 이 사람들은 사람들을 죽이기도 하고 총으로 쏘기도 하고 정말 무법천지로 그렇게 활동하고 있는데도, 정부의 공권력이 그 사람들을 전혀 터치할 수가 없는, 죄를 저질러도 전혀 그들이 심판받지 않는, 그런 나라 거기서 살고 싶으니까? 그런 데서 살고 싶지가 않은 것이지요.

결국 다윗 왕은 사울 왕가에서 일곱 명을 내어 죽임으로 말미암아 기브온 민족이 당했던 그러한 억울한 것을 갚고, 정의를 이루어주는 그런 일을 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해결하게 되었고, 이스라엘 민족에게서 기근이 해결되었다고 하는 말씀이 오늘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참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인데 그런데 사실 죄라고 하는 것이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는 죄는 그 죄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만 하게 되어 있는 것이 죄인 거죠.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보면서는 좀 너무한 거 아닌가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그런 사건의 이야기를 들으면, 당장 어떤 여론이 나오죠? 누군가 연쇄 살인범이라고 하는 사람이 등장하면 여론이 어떻게 돼요? 당장 그 사람 사형시키라고 하는 여론이 나옵니다. n번방 성추행 성 착취 폭력 저지른 그런 전과범이 재판을 받았는데, 겨우 솜방망이 처벌받으면 그걸 분노하면서 이럴 수가 없다고 분노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이에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죽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죄가 사실은 작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울이 저지른 죄 때문에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사울의 자손들이 죽임을 당해야 했었던 것처럼, 그래서 모든 것이 정리되는 것처럼, 우리가 죄를 지었지만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종 질문을 던지죠 그냥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면 안 되나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지 않고, 그냥 우리를 용서해 주시면 되는 것은 아닌가요? 그게 아니라 우리의 죄로 인해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지셔야만 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 믿습니다.

그래서 감사해야 되는 것이고, 또한 그 은혜가 너무나도 고맙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감사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그런 결단들이 우리에게 항상 넘쳐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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