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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명의 의로운 사람 (창 18:22-32)

오늘 우리는 롯이 사는 소돔과 고모라 땅을, 하나님께서 멸하실 거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 땅을 위해서 기도하는 이야기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너무나도 커서,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어서, 이제는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셨는데요. 그 이야기를 들은 아브라함은,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매어 달리기 시작한 것이죠. 하나님 앞에 중보 하면서, 기도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면서 이 소돔과 고모라성을 살려달라고, 심판하지 말아 달라고 간구한 이야기를 오늘 함께 읽었습니다.

창세기 18장 23절에서부터 25절의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아브라함이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 그 성 중에 의인 50명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것을 멸하시고 그 50 의인을 위하여 용서하지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까?” 이렇게 하나님 앞에 호소하였던 것이죠. 아무리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심각하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 의로운 사람이 있을 텐데, 그 안에 의인이 있을 텐데, 그 의인까지 멸망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정의에 합당하지 않다. 하나님의 공평하심에 합당하지 않다고 그렇게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는 공평하심이라고 하는 속성이 있는데요. 하나님의 공평하심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악한 자에게는 심판하시고, 의로운 자에게는 보상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평하신 속성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의인도, 그 의인들이 악인들 사이에 있다고 하는 이유로, 그 의인들마저도 함께 별한다고 한다면, 공평하지 않다 이 말이에요. 만일 이 의인들도 같이 악인들과 멸망하게 된다고 한다면, 그건 정의롭지 못하다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하나님 소돔과 고모라를 살려달라고 그렇게 간청하게 된 것입니다. 일리가 있나요? 없나요? 일리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정반대로 의인 50명 때문에, 악인을 살려두는 것은 괜찮은 거예요? 아니에요. 그것도 아니에요. 의인 때문에 악인을 살려두는 것도 옳지 않고, 악인 때문에 의인을 죽이는 것도 옳지 않고, 무엇을 해도 옳지 않은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것을 붙들고서 하나님 앞에 간청하는 겁니다. 하나님 이 의인들을 막 멸망시킨다고 한다면 안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하소연하면서, 하나님 앞에 이 소돔과 고모라성을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을 우리가 함께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러한 아브라함의 모습을 볼 때 아마 세상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아브라함이 조금 전에 어떤 일을 겪었었죠? 아브라함과 롯 사이에 갈등이 있어서, 그래서 롯에게 모든 것을 다 양보해 버린, 그 사건을 지난 시간에 우리가 살펴본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조카 롯이 얄밉게도 땅을 고르라고 했더니, 제일 좋은 땅, 소돔과 고모라 땅을 차지해서, 그 땅으로 가버린 그 롯을 보면서, 아마 마음속에 씁쓸함도 있었을 거예요. 얄밉다는 생각도 들었을 겁니다. 그래서 이 순간에 일반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반응일까요? “거 참 잘 됐다. 샘통이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성을 멸망시킨다고 하니까, 거참 잘 됐다고 하면서, 쾌재를 부르는 게, 어쩌면 우리 일반 사람들의 반응일 것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성을 멸하시겠다고 하는 하나님의 계획을 듣고, 아브라함은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어요. “하나님, 그 성을 멸하시면 안 됩니다” 하면서, 간청해주고 있는데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은 단 한 번도 롯을 미워하거나, 롯을 적으로 생각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 사이에 갈등이 있기는 있었지만, 그것 때문에 롯을 미워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했어요? 양보한 것이죠.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중요한 것이고, 아브라함에게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서 내가 얼마나 많이 가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가가 훨씬 더 중요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롯에게 양보한 것이죠. 아브라함이 롯을 미워하거나, 롯과 헤어질 결심을 했던 것이 결코 아니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 13장 9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었죠. 지난 시간에 우리가 살펴보았었는데요.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렇게 이야기를 했는데요. “나를 떠나가라”라고 이야기 한 이 말을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오해합니다. 그래서 “갈등이 있으면, 떠나는 게 상책이야. 헤어지는 게, 그게 해법이야.”라고 생각하기가 쉬운데요. 그게 이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에요. 이 아브라함이 했던 선택이 무엇이었다고 말씀을 드렸죠? 헤어지자고 하는 게, 아브라함의 선택이 아니라, 모든 것을 조카 롯에게 양보한 게 핵심인 것이죠. 둘이 서로 싸우고 있을 때, 목자들이 서로 싸우고 있을 때, 죽기 살기로 서로 다투면서, 그래서 내 것을 더 많이 얻기 위해서 노력한 게 아니라, 아브라함은 그 순간에 롯에게 모든 것을 다 양보해 버린 겁니다.

소돔과 고모라 지역이 그렇게 아주 좋은 땅이었기 때문에, 그 양들을 치기에 너무나도 좋은 그 땅을 조카로 하여금 차지하게 하고, 자기는 황량한 땅, 척박한 땅으로 물러가서, 거기서 양을 치기로, 손해를 선택했다고 하는 것이, 이 메시지, 이 창세기 13장 9절의 핵심이라고 하는 것을 잘 기억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을 사랑했기 때문에,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거라고 하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냥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엎드린 겁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겁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하나님 멸망시키지 말아 주세요. 기도하는데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50명을 제안한 거죠. 하나님 저 소돔과 고모라 땅에 50명의 의인이 있다고 한다면, 저 악인들 때문에 이 50명의 의인을 하나님 멸망시키겠습니까? 이 성을 무너뜨리겠습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말씀을 해주셔요. 무슨 말씀을 하시죠? 만일 이 성에 의인이 50명만이라도 있다고 한다면, 나는 이 성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그런데 아브라함이 생각해 보니까, 50명이 없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 50명 가운데서 5명 부족하면 어떡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또 말씀하세요. 괜찮아 45명이면 내가 용서해 줄게. 그런데 다시 또 얘기하는 겁니다. 40명 30명 20명 10명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시키지 않아야 될 이유보다도, 소돔과 고모라성을 멸망시킬 이유만 더 분명해진 대화가 되고 말았던 것이죠.

어쩌면 이 아브라함은 오늘날 우리가 자가용을 사러 가거나, 혹은 아파트 사러 갈 때 비슷한 전략을 쓴 것 같아요. 우리가 자가용 사러 갈 때, 소형차 사러 갔다가, 거기다가 한 200만 원만 더 붙이면,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할 수 있는데 그러냐고, 그걸 보고 있으면 거기에다가 또 한 300만 원만 붙이면, 더 좋은 걸 살 수 있는데, 그래서 나중에 막 더 좋은 차로 사게 만드는, 아마 아브라함이 지금 왔으면 장사 잘했을 것 같아요. 아무튼 이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설득하기 위해서, 자꾸만 이 어떻게 하면, 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지 않게 할 것인가? 하면서 자꾸만 매어 달렸는데, 그러나 그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소돔과 고모라성은 멸망을 시키지 않아야 될 성이 아니라, 결국 멸망할 정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의인 열 사람이 없어서, 깎고 깎고 깎아서 열 사람까지 내려왔지만, 10명이 없어서 결국 심판을 당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압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는 아브라함의 간구는 실패한 것일까요? 어쩌면 실패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기도를 외면하지는 않았어요.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어서, 그 롯과 그의 가정을 살려내는, 그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살려내는 선택을 하셔서, 그래서 롯의 가정을 구원해 주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아브라함과 같은 경험을 할 때가 많을 겁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데 하나님 이걸 해주세요. 하나님 저걸 해주세요, 하는데, 하나님께서 응답을 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 것이고, 때로는 내가 기도한 것이, 하나도 들어주지 않는 것과 같은 그런 상황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 가운데서 낙망할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간구를 듣지 않은 것 같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롯과 그 가정을 살리신 것처럼, 우리의 기도를 외면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더 좋은 길로,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더 크고 더 엄청난 일로, 우리가 조금 마음이 조급해서 그렇지, 조금만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어마어마한 큰 일을 보여주실 거라고 하는 것 믿으며,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 이야기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다고 하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이 세상은 어떻게 살아나는가입니다. 이 세상은 어떻게 살아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의로운 사람 10명이 살릴 수 있다는 겁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아무리 심각한 죄를 저지르고 있어도, 그 성에 완전히 악한 사람들이 들끓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이에요? 그 성에 의인 10명만 있으면 내가 심판하지 않겠다고 말씀해 주신 것이죠.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가 좀 깨달았으면 좋겠는데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주변에서 만나는 악한 일들을 보면서 우리는 분노하거나 절망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절망하거나 그런 사람들을 비난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 때문에 이 세상이 망하는 것이 아니라, 의인이 없어서 망하는 거거든요. 이 사회가 망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악인이 많아서 망하는 게 아니라, 의인이 없어서 망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결론은 무엇입니까? 내가 만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산다면,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시고 보호해 주실 거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거룩하게 살아가는 그런 결단들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참 소망이 없는 것처럼 보여요. 참 이 세상이 정의롭게 돌아가면 얼마나 좋을까요? 정말 정의가 살고 의로운 사람은 잘 되고, 악을 행하는 사람은 심판을 당하고 멸망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정의가 이 땅 가운데 제대로 잘 이루어질 수만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요? 이 세상은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입니다. 악한 사람은 그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전혀 제지당하지 아니하고, 심판당하지 아니하고, 떵떵거리면서 잘 살고 있는데, 착한 사람들은 의로운 사람들은 정말 고난을 당하고, 조그마한 하나 때문에 박살이 나고, 고통을 당하는 그런 모순적인 이 사회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어쩌면 절망감이 쏟아지게 될 때가 있을 겁니다. 우리 앞에 놓여져 있는 악의 카르텔 앞에서 무기력한 느낌을 받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 가운데서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이 무엇입니까? 이 사회는 악한 사람들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니라, 의인 열 사람이 없어서 망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의인 열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성을 용서하시고 세우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며, 거룩하게 살아가고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참된 믿음의 사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참된 예배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 모두가 결단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세상의 소망은 악인들을 없애는 데 소망이 있는 게 아니에요. 우리의 소망은 악한 사람들을 완전히 박멸해 버리는 게 우리들의 소망이 아니에요. 거기에 소망을 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믿음의 사람 한 사람이 일어서고, 자기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그 믿음의 행동들을 해 나갈 때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죠. 우리는 다른 사람을 바꿀 수가 없습니다. 악인을 변화시켜서 그 사람을 선한 사람으로 만들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런 불가능한 일들을 보면서, 절망할 것이 아니라, 바꿀 수 있는 게 있습니다. 나 자신은 바꿀 수 있거든요. 하나님 앞에 내가 헌신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면서, 믿음의 길을 걸어갈 때,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사는 그 의로운 사람들을 보시고, 이 세상을 인정해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가정은 어떻게 소망을 얻을 수 있을까요? 우리 가정은 어떻게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절망적으로 보이죠. 남편을 보면 절망적이에요. 우리 자식들을 보면 절망적이에요. 내 아내를 보면 절망적일 수가 있어요. 우리 부모님을 보면 절망적일 수가 있어요. 내 주변에 있는 우리 가정 구성원들을 보면 때로는 답답한 마음이 들 수가 있어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악한 사람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의로운 사람 한 사람을 보는 거, 모든 사람들이 다 소망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내가 살아갈 때, 그 가정이 살아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교회는 어떻게 삽니까? 우리 교회에 보면 별별 사람들이 다 있고, 마음에 안 드는 사람 많이 있고, 그것 때문에 혹시 마음이 아프십니까? 혹시 그렇다고 한다면, 마음을 고쳐먹으세요. 우리 교회에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내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에 나 혼자 순종하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내가 믿음으로 살아가게 된다고 한다면, 그 교회에는 소망이 있는 거예요.

이 사회는 어디에 소망이 있습니까? 악한 사람들을 다 잡아넣어서 감옥에 처넣어야 소망이 있나요? 아니요. 그 악한 사람들이 아무리 많이 있다고 할지라도, 내가 내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하나님 앞에서 우리 사회가 소망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열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하기로 하셨는데요. 이 열이라고 하는 숫자는 최소한의 숫자일까요? 아니면 10명보다 좀 부족한 의인이 있으면 어떻게 되죠? 10명이 안 되니까, 낙제점일까요? 우리가 그렇게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10명의 의인이 있으면, 이 성을 살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10명이 미니멈(minimum)이야, 10명을 채워야 돼.”라고 생각하시면 큰 오해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문자적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되는데요. 하나님께서 10명이 있으면 이 성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아무리 적은 수의 사람이 있어도, 내가 그 사람들 때문에 이 성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하는 그런 의미이기 때문에, 꼭 10명 만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어떤 때는 100명이 될 수도 있고요. 어떤 때는 1명이 될 수도 있는 거예요. 1명이 될 수도 있는데, 어디에 그게 나타납니까? 예레미야서 5장 1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 것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몇 명이라도 찾으면?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예루살렘에서는 한 명만 찾아도 정의를 행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한 사람만 있으면 이 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고 계시는 거예요.

그래서 온 세상이 악한 길로 다 간다고 할지라도, 이 세상이 완전 절망적인 그런 모습을 보인다고 할지라도, 그 모습에 우리가 절망할 게 아니라, 맞아.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면, 하나님께서 의로운 사람 한 사람으로 인하여, 이 성을 살릴 것이라고 하는 그 말씀을 믿으며,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진실하게 설 수 있는 그런 믿음의 결단들이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가정 가운데서, 다른 가족 구성원들이 다 잘못된 길로 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맞아,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구원을 베풀어주시고 이 가정에 소망을 주실 거라고 하는 생각을 가지며, 내가 이 가정을 살린다고 하는 의미에서 바로 서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에 와서 보면서 교회에 아무도 협조해 주는 사람 없고, 아무도 전도하는 사람 없고, 아무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없고, 나 혼자밖에 없다고 절망할 게 아니라, 나 혼자라도 전도하고, 나 혼자라도 찬양하고, 나 혼자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바로 서면, 그 교회가 산다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늘 쓸쓸하고 외로운 느낌을 받을 때가 있을 겁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다 악한 길로 가버리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 순간에 외롭다 나 혼자만 남았다 할 게 아니라, 나 혼자 남아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구원해 주실 거라고 하는, 그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서는, 내가 어디에 서 있든지 간에, 하나님을 예배하는, 하나님을 참으로 공경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에 보면 그런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 땅에서 살고 있을 때, 애굽 왕 바로는 아주 무시무시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어떤 명령이죠? 아기가 태어날 때 그 아기가 남자아이거든 죽여버리라고 하는 명령을 내린 것이죠. 그때 그 명령을 들은 히브리 산파는 어떻게 해야 옳은 것일까요? 로마서 13장의 말씀처럼 위에 있는 권세는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이니까, 위에 있는 권세에게 복종하라고 말씀하신 로마서 13장의 말씀처럼, 바로 왕의 명령이니까, 나의, 나보다 위에 있는 권세가 나에게 명령한 명령이니까, 무조건 복종해서 남자 아기들을 다 죽이는 게 옳은 것인가요? 아니에요.

로마서 13장의 말씀은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고 말씀하신 그 말씀은 원론적인 차원에서 해주시는 말씀입니다. 국가가 무엇인가? 왕이 무엇인가? 질서를 유지하고 악을 행한 자에게는 심판하면서, 그래서 한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렇게 세워놓은, 하나님의,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세이니까, 그 앞에 복종하며 세금을 낼 것은 세금을 내고, 복종할 것은 복종하라고 그렇게 말씀해 주신 거예요. 원론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한다고 하는 의미에서 말씀해 준 겁니다.

하지만 만일 악한 명령을 내린다고 한다면 복종해야 되나요? 복종하지 말아야 되나요? 안 해야 돼요. 로마서 13장을 잘못 오해해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무조건 순종해야 된다.”라고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되는 거예요. 위에서 시킨 일을 내가 하니까 나는 죄 없다고 말할 수 있나요? 아니에요. 위에서 시켜서 해도 그 일이 악한 일이면, 내가 잘못하는 일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해서 못 박은 로마 병정은 아무 죄가 없는 건가요? 아니에요. 죄가 있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지 아니하는 것은 모두 악한 일이 되는 것이죠.

그런데 히브리 산파는 이 순간에 어떻게 했는가? 왕의 명령을 지혜롭게 거부한 것이죠. 왕의 명령을 순종하는 척했지만, 우리가 이 아이를 죽일 수 없다 하면서 살려두고, 그래서 이 왕의 명령을 지혜롭게 거절하기 위한, 자신들만의 최대한의 방법을 사용해서, 이 왕의 명령을 거절하려고 하는 노력을 했던 것이죠. 만일 이 순간에 온 세상이 다 바로의 권세 하에 있고, 이 세상이 다 악한 세상이기 때문에, 나 혼자 의롭게 살아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면서, 바로의 명령에 따라 그렇게 순종하며 살았다고 한다면, 그 사회는 암울한 사회가 되고야 말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의 사람들은 그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이죠.

모세의 아버지 아버지와 어머니인 아므람, 아므람과 요게벳은 모세가 태어날 때, 모세, 바로 왕의 명령을 듣고서, 이 아이를 바로 죽인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살릴 수 있을 만큼 최대한 대로 살려서, 그래서 그 아이를 기르다가, 더 이상 이 아이가 발각될 수 있겠다 싶어서, 그 가운데서도 살릴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 무엇인가 생각해서, 갈대상자를 만들어 그 아이를 살리는, 이 온 세상이 악한 길로 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의롭게 살고 정의롭게 살겠다고 결단한, 아므람과 요게벳의 결단에 의해서, 모세라고 하는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가 탄생하게 되고 이스라엘 민족이 살아나게 된 줄로 믿습니다.

이 세상은 누가 살립니까? 악한 사람들이 다 사라져야 살아나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 내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이 세상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가정을 살린다고 하는 그 사실을 믿으며, 내가 서 있는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남 탓 할 게 없어요. 남편 탓하고, 아내 탓하고, 부모 탓하고, 이 사회가 썩었다고 탓할 게 아니고, 교회가 썩어 먹었다고 탓할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 의인 한 사람,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 의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로마서 12장 1절 2절 말씀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재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이 세대가 악을 행한다고 해서, 그 악에 동조하며 따라가지 말고, 이 세상이 온갖 죄악을 저지른다고, 그 죄악에 따라가지 말고, 이 세상이 완전히 바로의 세상이 되어버렸으니, 바로 왕의 명령에 따르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그 한 사람이 되기가 너무나도 힘들어요. 너무나도 어려워요. 그래서 우리는 주님 앞에 기도하면서, 우리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는 사람이 되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소망이 있는데 그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를 위해서 의로운 분 한 분이 계셨다는 거예요. 그분이 누구시죠? 예수님이시죠. 우리가 마땅히 죽을 수밖에 없을 때 온 세상을 심판해야 마땅한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의인 한 사람을 보시고 그 피로 인해서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면, 우리도 이 세상에 살아가는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한 삶을 살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의 소식을 듣고 아브라함이 그 땅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며 하나님 50명만 있어도 심판하지 말아주시지 않겠습니까? 40명, 30명, 10명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기도했던 그 아브라함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죄로 인하여 멸망당하게 되었을 때, 그냥 한가하게 계셨던 것이 아니라, 저 높고 높은 하늘에서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주신 그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탄생이고 성탄절의 의미인 줄로 믿습니다.

원하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를 낙망하게 하는 것이 많고, 우리로 하여금 힘 빠지게 하는 것 많고, 절망스럽게 만드는 것들이 온 세상에 널려 있는 그 가운데, 모든 세상이 악한 길로 다가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때, 절망하고 좌절할 게 아니라, 의인 한 사람 보시고 살리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나아가길 원합니다. 하나님 내가 서 있는 그 자리에 참된 예배자로 서길 원합니다. 참된 믿음의 사람으로 서길 원합니다. 고백하며 나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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